마르지 않는 샘물
재직 시 공무원연금공단으로부터 재해부조금을 받은 일이 있다. 재해부조금은 공무원의 주택이 수재, 화재, 그 밖의 자연적 인위적 재해 손실이나, 유실, 파괴될 때 그 정도에 따라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부조 차원에서 지급하는 급여다. 1995년 가을 집에 불이 났다. 이 층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불로 모두 탔다. 그때 이미 공무원 생활 이십 년 이상 했으나 재해부조금이 있는지를 몰랐다. 안타깝지만 집에 모아 둔 돈과 빚으로 집수리를 마쳤다.
연도가 바뀌고 전근이 되었다. 직무와 관련된 일 처리로 새로 부임한 학교 행정실에 들렀다. 볼일을 보고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불 이야기가 나왔다. 지난해 집에 불이나 수리비가 만만찮게 들었다. 며칠이 지났다. 행정실 여직원이 작은 잡지(공무원연금공단에서 나온 책이라 생각됨) 한 권을 보여주면서 뒤표지 속장에 있는 도표를 보란다. 재해부조금에 대한 개요와 지급 대상, 지급액, 갖추어 제출해야 할 서류 등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주택이 1/3 이상 소실, 유실, 또는 파괴되는 경우 기준 소득월액의 1.3배’의 재해부조금을 지급한다는 항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재해부조금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곧 서류를 갖춰 신청했다.
한 달 정도 지나자 부조금이 나왔다. 정말 예상하지 않은 곳에서 예상하지 못한 많은 돈이다. 마치 횡재한 듯했다. 그때 불 이야기는 그 여직원과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했었다. 그런데 그녀가 곁에서 듣고서 기억하고 있다가 책자를 보는 순간 내 생각이 나 알려 줬다. 정말 잊지 못할 짜릿함을 느낀 사건이다.
지금은 퇴직연금 수급자로 매월 연금 혜택을 받고 있다. 연금은 마르지 않는 샘물이다. 너무 많아 넘치지도 않고, 적어 모자라지도 않을 만큼 솟아오르는 샘물이다. 미리 나오는 양을 예측할 수 있으니 쓸 양도 사전 조절할 수 있다. 목돈이 들어갈 일이 생기면 몇 달 전부터 절약해 모으고, 좀 여유라도 생기면 손자 손녀의 용돈을 듬뿍 주기도 한다.
정년퇴직 후 정기적으로 친구를 만나는 곳이 셋 있다. 신체 단련을 위한 테니스, 정신 건강을 위한 바둑, 봉사 단체인 문화재 지킴이다. 모임마다 만나는 목적이 다르고 친구가 다르다. 공통점이 있다면 멤버 모두 정년퇴직해 생산적인 사회 활동에서 비켜있다는 점이다. 육십 대 후반의 나이에 취미 생활도 하고, 봉사활동도 할 수 있는 것은 퇴직 후 매달 받는 연금의 힘이다. 액수가 적어 가정에나 사회적으로 활동하기에 충분하지는 않으나 체면 유지를 위한 방편은 된다.
소문에 의하면 정년퇴직을 할 때 연금으로 하지 않고 일시금을 받아 은행에 예금을 한 사람이 돈은 쓴 곳도 없는데 살금살금 없어져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단다. 설마 하는 의구심에 증명이라도 하듯 실명을 거명하고 나선다. 나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아들의 사업 확장에 기대를 걸고 조금씩 밑천을 대어 주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아 애를 먹고 있다. 여생이 일이 년 안에 끝나는 것도 아니고, 생각만 해도 답답하다.
퇴직금을 일시금으로 받지 않고 연금으로 받기를 잘했다. 나보다 아내가 더 좋은가 보다. 둘째 아이 상견례 하던 날이다. 아내는 며느리 될 아이에게 “시어른 부양할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연금이 있으니 너희나 돈 부지런히 벌어 잘 살도록 해라.” 하지 않는가. 연금의 힘이 참으로 크다고 생각하며 아내의 얼굴을 쳐다봤다.
현직에 있을 때는 직장 내 상사께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도 많이 했고, 동료들보다 높은 지위를 먼저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도 마다치 않았다. 거기에 자식들 교육비 걱정, 가정의 생활비까지 양어깨에 진 짐의 무게에 다리는 언제나 휘청거렸다. 퇴직 후, 아이들이 자라 제 살길을 찾아가고, 경쟁이 사라진 생활에 시간의 여유마저 생기니 삶이 즐겁고 행복하다.
옛사람들의 노후 생활은 자식에게 달려 있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자식들의 경제적 능력 여하에 따라 노후 생활의 여유와 행복과 불행이 좌우되었다. 어떤 사람은 자식이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도 그들의 낮은 의식 수준으로 노년을 어렵게 보내는 사람도 있다. 연금은 아들에게 경제적인 부담감을 덜어주고, 내게는 생활의 여유와 즐거움을 주는 버팀목이다.
연금이 주는 생활의 여유와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길은 건강이다. 통계청에 의하면 2009년 우리나라 사람의 평균 수명은 남자가 77세 여자가 83.8세다. 나는 평균 수명까지 십 년도 더 살아야 한다. 그런데 요즈음은 산술적인 평균 수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건강수명 증가다.
전문가들의 연구 발표에 의하면 건강수명을 증가시키는 방법은 첫째 정신 건강이다.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은 삶에 만족하고 행복을 느낄 수 있음을 뜻한다. 다음이 적절한 음식 섭취다. 음식은 몸의 영양 상태를 유지해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는다. 셋째는 운동이다. 운동은 몸의 여러 기능을 잘 수행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운동을 할 때는 철저한 계획을 세워 체계적으로 해야 한다.
정년퇴직 후 친구들과 함께하는 일이 건강수명을 증대시킬 수 있는 쪽이다. 육체적·정신적 건강을 위해 테니스와 바둑, 봉사활동을 하고 있고, 이런 건강 활동 영향인지는 모르나 식사 또한 달게 하고 있으니 다행이다.
꽃은 지고 신록이 산천을 덮고 있다. 신록이 꽃보다 예쁘다는 말이 실감 난다. 함께 산을 오르고 있는 친구도 연금 수혜자다. 그는 요즈음 자신의 생활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다 한다. 이 나이에 돈을 벌면 얼마나 더 벌고, 명예나 권력을 탐하면 얼마나 더 이름을 떨치겠나, 때때로 맑은 공기 마시며 산도 오르고 친구와 약주도 한잔하는 시간이 제일 행복하다며 웃는다.
며칠 전에 생일 지나갔단다. 서울에서 생활하는 아들 내외가 모 식당에서 생일상을 차렸다. 그때 퇴직금을 연금으로 한 것은 참 잘했다. 아버지를 모시는 데 연금이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이 된다. 아들의 직장 동료는 부모님 부양 관계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로 인해 부인과 사이도 나빠지고 있다며 하소연하더란다.
사실은 나도 그렇다. 자식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받지 않고 생활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삶에 활력소가 된다. 연금 생활이 공장이나 장사를 하는 친구보다 경제적 여유가 더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정신적으로 편안하다. 큰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먹고 사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다. ‘먹고 사는 일’ 말은 쉽게 할 수 있으나 결코 쉬운 일 아니다.
이웃집 이 층에 안노인 한 분이 혼자 세를 살고 있다. 나이는 자세히 모르나 나보다 한두 살 더 먹은 것은 확실하다. 건강이 좋지 못해 늘 얼굴색이 파리하다. 그녀는 새벽마다 손수레를 끌고 패지를 모으러 간다. 비가 심하게 오지 않는 이상 추우나 더우나 매일 간다. 싣고 온 패지를 오전 내 손질해 오후에는 고물상에 갔다 판다.
멀리 자식이 있어 기초생활보장 대상자도 안 된단다. 먹고 살기 위해 그녀는 새벽부터 폐지를 줍고 있다. 패지를 손수레에 가득 싣고 오르막길이라도 갈 때는 숨이 턱에 닿는다. 아내는 가끔 그녀에게 먹을거리를 준다. 그때마다 고맙다며 인사를 수도 없이 한다. 혼자 사는 그녀가 패지를 모아 돈을 만드는 것은 ‘먹고 살기’ 위해서다.
나는 그녀를 만나면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기초생활보장 대상자라도 돼 매월 연금이라도 얼마간씩 받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모도 돌보지 않는 자식이 국가에서 베푸는 극빈자 혜택까지 가로막고 있다는 생각이다. 어떻게 보면 사회제도의 모순이다. 모순도 지키지 않으면 안 될 약속이라면 할 말은 없다.
37년이란 긴 세월 교육공무원으로 일해 왔다. 같이 출발한 많은 동료가 더 좋은 직장을 찾아 교직을 떠났지만 나는 그런 용기도 능력도 없어 머물러 있었다. 교사로서보다 스승이 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나와 인연 맺은 모든 제자가 바람이 벌을 대신하여 꽃가루를 운반해 주고, 지렁이가 땅속에서 꿈틀대며 굳은 땅을 보드랍게 해 주듯이 급변하는 사회의 메마른 정서를 촉촉하게 적시어 주는 가랑비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되어 있기를 바랄 뿐이다.
덕분에 지금 연금 수급자가 되어 노후를 평안하게 보낼 수 있어 행복하다.♡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