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옹 선사 《오도송》
만남도 헤어짐도 부지불식간이다. 이승도 저승도 의도대로 오갈 수 없다. 산은 나더러 오라 가라 하지 않아 좋다. 어느 날 하산 길에 통도사 뒤 극락암에 들렸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암자가 아담하고 예뻐서였다. 그날 만난 스님의 법명은 기억에서 사라지고 건네 받은 《오도송悟道頌》만 애송시로 지니고 있다.
작가는 나옹선사懶翁禪師.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 가라하네 라고 쓰인 시의 끝 구절에 눈이 박혔다. 어떻게 사는 것이 물처럼 바람처럼 사는 것인가 궁금했다. 이런 시를 탁자에 펼쳐놓고 사는 스님은 물처럼 바람처럼 사는가 싶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다른 이들도 이 오도송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려 말 선사가 한글로 시를 썼을 턱은 없었기에 원문을 구하고자 애를 썼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우연히 부산역 앞 간이식당에서 주전부리로 파전을 먹다가 원문을 만났다. 벽면 아랫단에 조그맣게 해설문과 함께 있었기에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선사는 1320년 경북 영해에서 출생하여 1376년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고려를 자주국가로 회복시키고자 진력하였다. 왕사王師로서 학문적 기반을 견고히 하는 데 남다른 고행을 마다하지 않았다. 속성俗姓은 아牙. 초명은 원혜元慧. 시호(諡號;死後追贈)는 선각禪覺이다. 20세에 출가하여 평산처림平山處林과 천암원장千巖元長에게서 달마達磨로부터 내려오는 중국선中國禪을 전수 받았다. 중국에서 선법을 떨치고 1371년(52세) 왕사王師가 되어 문수회文殊會를 여니 사람들이 대혼란을 이루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가 어지러우면 법회가 소란해진다. 선사의 깨달음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靑山兮要 我以無語 청산혜요 아이무어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44 조로 지어진 한시漢詩를 34 조 한글로 푼 것은 어디까지나 역자의 요량이다. 선사께서 만난 청산은 참으로 말을 잘했던가 보다. 산은 침묵으로서도 많은 말을 한다. 공부가 익을수록 침묵으로써 심오함을 드러내는 법임을 산어山語를 빌어 ‘말없이 살아라’ 설법하였다. ‘말을 해야 알지’, ‘꼭 말을 해야 아느냐’,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말은 때로 긴요하다. 그러나 자칫 헛되기 쉽다. 말이란 인간이 인간과 소통하는 마지막 수단 아니던가. 열 가지 악업 중 입으로 짓는 죄가 4가지다. 『슈리슈리 마하슈리 슈슈리스와하』는 성스러운 경을 읽을 때 입을 깨끗이 하라는 경구다. 그동안 입으로 지은 죄를 청소하라는 권유다.
상형문자에서 사짜四字는 입술을 열어 앞니를 드러낸 모양이다. 거짓말, 아첨하는 말, 이간질하는 말, 악담으로 퍼붓는 말들을 네四 가지 아닌 것非이라 하여 입으로 짓는 중죄로 여겼다. 나옹인들 스러지는 국운을 어쩌지 못했던가 보다. <나>라도 입을 닫자 하고 청산 핑계를 댔다. 청산이 말없이 살라 한 것을 나옹 께서 도력으로 알아들은 셈이다.
蒼空兮要 我以無垢 창공혜요 아이무구
창공은 나를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여기 쓰인 구垢는 ‘몸 또는 물건에 묻은 때’다. ‘티’라고 풀기에는 주저되는 바 없지 않으나, 사념(邪念;올바르지 못한 생각)이라는 뜻도 있고 보면 마음의 ‘티’라고 풀어도 무리는 없겠다. 나는 창공이라는 단어에서 구름무리를 연상한다. 구름은 창공에서 티로 존재한다. 그 티는 사바娑婆를 딛고 선 내 눈에는 티일망정 하늘에게는 티가 아니다. 그런 모든 티를 다 쓸어안고 덮어 나가는 창공이 진정한 창공이다.
그 창공이 이르기를 티가 있어도 괘념치 마라. 티끌이란 왔다가도 가고 갔다가도 오는 것이니 내버려 두어라. 그러면 너는 항상 청정하리라. 네 마음에 낀 티끌도 시간이 되면 제 갈 길 찾아갈 것이니 없는 양 살아라. 티를 티로 보는 그 마음이 티가 되지 않게 하라. 나옹이 창공 더러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나. 창공을 닮고 싶은 마음 그림자를 내비쳤나.
聊無愛而 無憎兮 료무애이 무증혜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4,4조에서 4,3조로 바꾸어지었어도 운율을 위해 역군譯君은 여전히 3,4조를 유지한다. 벗어버릴 사랑이 따로 있지 않다. 마찬가지 이유로 미움 또한 벗어버려야 할 까닭은 없다. 사랑이 한 때이듯 미움 또한 한 때다. 사랑하는 이는 만나지 못해 아쉽고 미운 놈은 만나서 괴롭다. 덜 갖고 더 많이 존재하라. 최소한의 것들만 소유한 채 생활하는 것에 익숙해 져라. 그렇게 살다 보면 사랑도 사치요 미움도 사치다. 사랑도 나를 떠나거늘 미움을 굳이 데리고 살 이유가 없다. 벗어라. 사랑을 벗은 자리에 자아를 내려놓고 미움을 벗은 자리에 자비를 얹어놓아라. 너희가 사랑하여도 꽃은 질 것이요 너희가 사랑하지 아니하여도 잡초는 자랄 것이니라.
如水如風 而終我 여수여풍 이종아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 가라하네
원문은 4,3조 지만 나는 역시 3,4조를 유지하여 풀었다. 여기서 ‘여如’를 ‘같이’로 푸느냐 ‘처럼’으로 푸느냐. ‘여如’는 ‘동同’과 달라서 ‘같이’로 풀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여는 Almost same 이지만 동은 Just same 이다. 하여 여는 ‘처럼’ 으로 푸는 것이 선사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 싶었다. 선사의 물과 바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간 것인지 찾을 길 없다. 가라고는 하였으나 목적지가 없다. 목적지 없는 갈 곳 거기를 알려거든 산천과 창공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라.
산을 넘고 강을 건넌 바람이 대숲을 스쳐 차나무에 앉았다. 찻잎을 덖어 바람에 향을 더한다. ‘나처럼 살아 보렴’ 나옹 에게 일러준 바람이 손끝에 걸려 솥뚜껑에 내려앉았다. 폭포로 떨어진 물이 내를 이루어 흐른다. 다동茶童은 물을 떠다 숯불에 얹는다. 물은 이렇게 윤회를 거듭하고, 바람은 향이 되어 찻잔에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