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명치료 중단을 告함
나는 죽음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다
목숨을 담보로
삶의 고통을 덜어내고자 함도 아니다
그저 마지막 길을 당당하게 걷고자 함이다
이제 모니터로는 남은 생을 기록할 수 없으니
내 몸에 부착된 고통의 계기판을 제거하고
가장 편안한 단추의 상복을 부탁한다
덩굴식물처럼 팔을 친친 감고 있는 링거줄
산소처럼 고요한 인공호흡기
울음 섞인 미음을 받아 삼키던 레빈튜브
충전이 바닥 난 심장을 감시하느라
한시도 모눈종이의 눈금을 벗어나지 못한
심전도 모니터링을 모두 제거해 주기 바란다
일체의 심폐소생술 또한 거부한다
사유의 파동이 사라진 육신의 신호음은
한낱 기계적 박동일 뿐이니
에피네피린과 도파민의 사용을 원치 않는다
기계의 호흡과 심박동은 이미 어긋났으니
심장마사지는 사양한다
썩은 육신을 인수해 갈 가족과
상한 영혼을 거두어 갈 神과 조우의 시간,
내 죄 값을 흥정하는 비굴한 모습을 원치 않으니
침대 주변을 말끔히 정리해 주기 부탁한다
이제 종언을 告하노니,
여태껏 밀린 치료비와 남은 죄값은
저당 잡힌 내 생의 이력서에 함께 청구해주기 바란다
존엄사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소위 웰다잉법이 곧 시행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죽음이란 무엇인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별을 아름답게 마무리 한다는 게 가능한 말인가. 애도와 슬픔으로 극복해야할 감정을 이성적인 법으로 판단하는 게 온당한 처사인가. 잘 사는 것도 어려운데 잘 죽어야 한다는 이 형용모순을 우리는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웰다잉이란 지금까지 살아온 날을 정리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일련의 행위를 일컫는다. 이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버킷 리스트 작성하기, 유서 남기기, 자신의 묘비명 지어보기, 사전의료의향서 작성하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까지 등장하고 있다.
나는 직업 특성상 많은 죽음을 지켜보았다. 임종의 순간을 지키며 직접 사망선고를 한 것도 부지기수다. 그 때마다 똑같은 죽음은 없었다. 각자 저마다의 아픔을 간직한 채 각자의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미처 죽음을 생각하지 못한 채 죽음으로 향한 경우도 있었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도 있었다.
평화로운 죽음엔 그들만의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나이나 질병의 문제가 아니었다. 종교적 이념이나 내세에 대한 신념과도 상관없었다. 그것은 죽음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자세에 달려 있었다. 그런 사람일수록 미리 유언장을 작성하고 주위에 감사함을 표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웰다잉법은 회생 가능성이 없고, 치료해도 회복되지 않으며,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되어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를 대상으로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등 네 가지 의료행위를 중지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이 경우에도 통증 완화를 위한 의료행위와 최소한의 물과 영양분, 산소의 단순 공급은 중단할 수 없다.
이 법의 정식 명칭은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인데 법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반드시 필요하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표1>는 평온한 죽음에 이르기 위해 꼭 받아야 할 치료와 받지 말아야 할 치료를 스스로 밝히는 서식이다. 인생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스스로 결정하고자 하는 것인데 오로지 환자 본인의 의사만 존중된다. 갑작스런 죽음 등으로 본인의 의사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 2인 이상 가족의 일치하는 진술과 의사 2인의 확인을 필요로 한다.
나도 詩의 형식을 빌어 나만의 사전의향서(연명치료 중단을 告함)를 작성해 본 것이다.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노모가 말기 암인데 몸이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데다 고령이라서 병원에서도 더는 치료를 권유하지 않는다고 했다. 운명 직전의 어머님을 어떻게 모셔야 할지 난감하다는 게 통화의 요지였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호스피스 병동이나 요양병원에 모시라고 대답했다. 치료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도 있겠지만 존엄하게 죽을 권리도 중요하다고 조언을 했다.
여러 차례 가족회의를 통해 이미 결정된 사항이지만 나의 의중을 확인하고 싶은 눈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치료를 포기한 죄의식을 조금이라도 줄여 보겠다는 의도가 숨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진즉 결정을 하고서도 그것이 잘못된 결론은 아닌지 자꾸 되묻는걸 보면.
가족 중 일부는 안락사를 주장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존엄사와의 개념에 대한 혼용으로 야기된 오해였을 것이다.
안락사는 죽음의 고통을 덜기 위해 약물주입이나 강제적 식이중단 등 적극적으로 죽음에 개입하는 행위이다. 서두에서 밝힌 대로 최소한의 물과 영양분, 산소의 단순 공급 등을 중단하는 행위도 소극적 안락사라 할 수 있는데 이것 역시 엄격하게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나는 안락사와 존엄사의 차이점을 비교적 소상히 설명해 주었다. 용어 선택에 대한 오해가 풀렸는지 자신도 존엄사를 택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듯 최근 들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제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도 예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내가 병실 주치의(전공의 1년차) 때인 1990년대 초만 해도 병원에서 운명하는 것조차 객사라 규정해 용납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그래서 임종이 가까워지면 미리 알려달라는 보호자가 많았다.
운명이 임박했다고 하면 모든 가족이 임종의 순간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상황이 되고, 어쩌다 그 시각을 잘못 예측해 갑작스런 임종을 맞이한 경우에는 사망선고를 유예한 채 집까지 동행해야 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이야말로 진짜 운명인데 그 운명의 시각을 어떻게 정확하게 예측한단 말인가.
병원 복도 사람들 사이로 한 간호사가
노 환자가 누운 침상 하나를 끌고 바쁘게 가는데
주르르 가족들이 따라갑니다.
침상 걸이에는 무슨 약인지
링거 네댓 개를 주렁주렁 매달고
그 뒤로 목줄한 강아지 따라가듯
작은 산소통도 따라갑니다.
끌려가는 침상에 바짝 붙어서
따라가는 중년이 자식 같고
그 뒤를 따라가는 며느리와 다 큰 손녀 둘
무슨 생각이 힘들게 지나갔는지
모두가 정신이 나간 사람 같습니다.
- 박태진, 「어느 일상」부분,『문학청춘』2017 겨울호
어느 병원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요양병원이나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더더욱 익숙한 풍경이리라. 혹시 임종을 놓칠까 산소통만큼이나 가족들도 따라 붙는다. 긴 복도 저편의 모습이 결코 남의 일 같지 않다.
인간 수명 100세 시대, 이것은 과연 우리에게 축복일까 재앙일까? 대한노인병학회에서 밝힌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82.4세 이다. 하지만 건강수명은 65.4에 불과하다. 근 20년의 세월은 건강하지 못한 세월을 살아야한다. 우리는 유병장수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독거노인 빈곤율과 노인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앞으로 10년 안에 노인 인구가 20%를 넘는 초고령 사회로 접어들 예정이다. 외롭고 아프고 가난한 노인들이 맞닥뜨릴 냉엄한 현실과 언젠가 다가올 죽음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세브란스 김할머니를 기억할 것이다. 연명치료를 받던 김할머니의 인공호흡기를 떼어달라는 보호자의 소송이 있었고 법원이 이를 허락한 사건이다. 보편적 의학상식으로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는 것은 두 가지 경우뿐이다. 환자가 회복하여 자발적 호흡이 가능하거나 심장 박동이 멈춰서 인공호흡기가 더 이상 필요치 않은 경우이다. 그런데 보호자가 원하고 법원이 판단하여 의사가 그 명령을 따르는 경우는 몹시 생소했다. 하지만 그보다 내가 더 관심을 가진 것은 인공호흡기를 제거했을 때의 환자의 반응이었다. 인공호흡기를 제거하자마자 그대로 숨이 멈출 것인지 아니면 자발적인 호흡을 유지할 것인지. 결국 김할머니는 인공호흡기를 제거하고 나서도 이백일 이상을 더 살았다. 그것도 아주 편안한 호흡을 유지하면서.
다음은 당시 환자인 김할머니의 심정을 독백 형식으로, 의사의 입장을 반성 형식으로 그려본 졸시이다.
독백
- 도대체 숨이 멈추질 않네요
- 호흡중추가 기억을 되찾았나 봐요
- 그러기에 진즉 호흡기를 뗐어야죠
- 그 동안 갑갑해서 죽을 뻔 했잖아요
- 오늘 아침, 드디어 죽음의 예배가 시작되었어요
- 목사님은 무엇을 위해 기도할까요?
- 하느님도 죽을 때를 모르시나 봐요?
-그러니 예배를 마치고도 이렇게 숨이 멎질 안잖아요
- 호흡기를 떼고 나니 무척 홀가분한데 세상은 온통 난리가 났더군요
-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첫 번째 행운을 내가 거머쥐었다고 야단법석이데요
- 내 눈물을 두고 모두 다 호들갑을 떠는 모양인데 언제 부터 내 눈물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많았죠
- 눈물샘이 막혔다가 숨통이 트여 조금 흘러내린 것뿐인데 꼭 내가 죽기 싫어 발버둥친 것처럼 대서특필 했대요
- 당신들 이야기 다 들었어요
- 이 한 몸 빨리 거두어 가야 현명한 판결에도 영이 서고 그 동안 치료에 대한 노고도 인정받고 무엇보다도 눈물을 글썽이며 기도하던 가족들의 체면도 살려줄 텐데 말이죠
- 아, 글쎄 죽기가 쉽지 않네요
- 아무래도 죽음은 타협이 아니라 숙명인가 봐요
- 의사들은 지독한 숙명론자라 들었는데, 이젠 정말 아무도 못 믿겠어요
- 운명에 기대는 수밖에요
- 한 숨 자고 나면 세상이 조용해질 텐데 도무지 잠이 오지 않네요
- 링거액에 수면제나 좀 섞어 주세요
- 인터뷰는 사절이예요
반성
-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는지 그리고 무엇이 문제인지
- 당신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섣부른 판결에만 의존한 것이 잘못이겠죠
- 영혼의 무게는 단지 21그램 이라는 말만 믿고 오직 첨단기기에 의존하여 그 무게로 바벨탑을 쌓으려 했던 게 문제겠죠
- 사람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또 얼마나 큰 죄악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 호흡기를 떼려는 순간 나도 무척 떨렸어요
- 산소처럼 끓어오르는 마지막 숨을 단번에 거두어 가는 것도 두려웠구요
- 거추장스러운 기기들을 비웃으며 편안하게 숨을 고르는 것도 두려웠어요
- 오늘도 당신의 모습을 똑바로 쳐다 볼 수가 없어요
- 더욱 평온해진 얼굴과 차분해진 숨소리를 보면서 그 동안 내가 바랐던 게 무엇이었는지 생각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아요
- 변명만 잔뜩 늘어놓으며 언론에 읍소한 모습은 너무 초라하구요
- 곤히 잠든 당신 곁에서 아무 조치도 할 수 없는 내 자신을 생각하면 더욱 곤혹스러워요
- 진정으로 당신을 안락하고 존엄하게 하는 게 무엇인지 꼭 한 번 묻고 싶어요
- 당신은 이미 속마음을 밝혔지만 그래도 한 마디만 귀띔해주면 안될까요?
- 이제 당신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 아니, 미안해요
- 잠깐 또 내가 딴 생각을 품었어요
- 정말 죄송해요
- 안녕히 주무세요.
전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산소 호흡기에 의지한 채 목숨을 부지한다는 것은 환자에겐 고통만 남길 뿐이다. 정작 본인은 자연스럽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을지도 모르는데.
당시 법원의 판결문에서도 "회복 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 이른 환자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에 기초하여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에는 연명치료 중단을 허용할 수 있다." 고 명시한 바 있다. 아직 우리사회에 연명치료란 말이 생소한 시절 법원의 판결은 존엄사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환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죽음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다. 죽음이란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이다. 다시는 만날 수 없고, 다시는 마주 보며 이야기할 수 없고, 다시는 그의 빛나는 눈동자를 볼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게 된다. 우리는 그 상실감을 추억을 우려내면서 붙잡으려 한다. 손을 잡았던 기억, 마주 보며 웃었던 기억, 사랑하고 미워했던 기억들조차 희미해지면 나 또한 이 세상과 작별하는 날이 다가오는 것이리라. 이별에 대한 슬픔의 무게나 깊이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함부로 말할 성격은 아니다. 그것을 극복하는 지혜와 방법 역시 각자의 몫이다.
프로이트는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에 대처하는 자세를 두 가지로 나누었다. '애도와 멜랑콜리'가 그것이다. 애도는 부재의 상처를 인정하고 사랑의 리비도를 다른 객체로 이동하는 것이고, 멜랑콜리는 사랑의 대상을 다른 사랑으로 이동하지 못하고 자기 안에 집착하는 것이다. 병적인 나르시시즘이라 할 수 있는 멜랑콜리는 우울증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반해 정상적인 애도는 상실에서 오는 슬픔을 새로운 사랑으로 건너가는 건강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이별연습이라고 칭하는 애도의 시간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 존엄사란 말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이란 표현으로 대체되고 있다. 연명치료를 지속한다는 것은 삶을 연장하는 게 아니라 죽음을 연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들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아름답게 보내고 싶어 하지 않겠는가. 모든 생명이 자연에서 잉태되었듯 모든 죽음은 자연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운명을 결정하는 시간뿐 아니라 운명에 이르는 길도 마찬가지다. 이제 모든 죽음은 존엄사가 아니라 자연사로 대체 되어야 한다. 어쩌면 이 모든 게 神의 영역일지도 모르지만.
첫댓글 안락의자가 생각나고 안락한 생활이 생각나고 안락사가... 선생님, 대단대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