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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Neckless of Time-
13.DElightful
"......"
번쩍
...다시 맞은 아침...오늘도 변함없는 갈색 지붕...? 아, 참. 아직 영국을 떠나지 않았지.
갑작스레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떨떠름한 시선으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나무벽과 햇살, 서서히 활기를 띄워 가는 바깥 풍경. 그리고 침대 옆 탁자에 흐트러져 있는 목걸이와 반지...
반짝
“......?”
...순간 두 악세사리에 박힌 보석에서 빛이 난 듯 했지만 이내 그 빛은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사이에 벌써 사라져 버렸다.
“...내가 잘못 봤나?”
데르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입고 있던 하얀 잠옷(장로가 건네준 잠옷)을 내던지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목걸이와 반지를 착용하며 혼잣말을 내뱉은 데르나는 곧바로 가방을 챙기곤 해왕을 불러 내었다. 해왕은 이미 준비가 다 끝난 상태였고, 아래에서도 장로가 이들을 배웅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장로에게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신세 많이 졌어요, 장로님.”
“뭘. 우리야말로 왕궁을 다시 찾을 수 있게 되었으니 오히려 더 신세를 졌지. 그나저나...그 반지 그냥 돌려주면 안되겠나?”
“...제 어머니가 주신 거니 일단은 가지고 있겠습니다. 언젠가는 드리게 되겠죠.”
“...그렇겠지. 하아...”
장로는 아직도 링에 미련을 못 버린 모양이었다. 데르나에게 이렇게 졸라댈 정도면... 데르나는 왠지 주변 분위기가 이상하게 바뀌어 가는 것 같아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저기, 저기...이제 왕궁은 어쩌실 건가요?”
“참하고 힘있는 장정을 여럿 뽑아서 비밀리에 발굴을 해 볼 예정이라네. 물론 그것을 지켜내는 게 우리 엔센스터지만, 지켜야 할 대상이 어떤 건지는 알아야 제대로 지킬 수 있을 테니까 말일세.”
데르나는 옮은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엔센스터...아마 아틀란티스가 무척 부정적이고 반세계적이라 할지라도 이들은 끝까지 아틀란티스를 지킬 거라는 생각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인 것이었다. 그러다 데르나 뒤에 있던 해왕은 문득 디폴트 생각이 나 장로에게 물었다.
“아, 디폴트는...어떻게 되었나요?”
“디폴트는 지금 치료중이지. 세라프의 회복 마법과 네라의 신성력으로 매일매일 치료를 받고 있지만, 오론쪽 팔뚝 근육은 빠르게는...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열되었다네. 근섬유가 다시 붙을 때까지는 출정도 못하고 외잡이 사수가 되야 할 것 같구만.”
외잡이 사수라...그럴 듯 하군. 그렇게 여관 안에서 대화를 나누던 중 한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텔레포트 준비가 끝났습니다, 장로님.”
“그래? 알겠네. 자, 이제 날 따라오게.”
“...어제 갔던 그 분수대로 가는 건가요?”
“이 동네에 텔레포트 플레이스가 거기밖에 더 있나?”
장로는 한 사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일행 앞에 나서서 직접 텔레포트 플레이스로 일행을 인도했다. 어제 갔던 그 분수대... 후에 안 사실이지만 그것도 고대 유물이었고, 때마침 정말 물도 나오고 하기에 이 곳에 마을을 세운 것이라고 했다.
그러는 동안 일행 사이에서는 간간히 말이 오갔지만 정작 장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 이상한 건....
‘...왜 이리 사람이 없지?’
보통 때면 활발하게 밖으로 나다니고 있을 사람들이었다. 몇몇 꼬마애들은 텔레포트 플레이스를 구경하러 올 것 같았는데, 아니, 적어도 거리에서 일행을 힐끗 바라보고 있을 사람이 있어야 정상이었는데 아무도 거리에 보이지 않는다. 이게 왜 그런 거지?
“저기요, 장로님.”
“응? 왜 그러냐.”
“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죠? 마을 분위기가 이렇게 침울해질 정도로.....”
왠지 걱정하는 듯한 데르나의 말투에 장로는 데르나에게 조용히 대답해 주었다.
“데르나 네가 네클리스와 링을 얻음으로써 유나이트를 만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지. 아마 사람들은 죄다 널 고귀한 하나의 신관으로 생각하고 있을 거야.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너 가는 길엔 아무도 나타나려고 하지 않는 거지.”
으음...뭐 절대적으로 누군가를 섬기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 자신은 너무 더러운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 그 사람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소리는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걸 실제로 보게 되니 막상 그 이유를 떠올리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때 해왕이 장로를 향해 물었다.
“저기요, 전부터 ‘유나이트’그러는데, 그게 뭐예요?”
“나도 자세한 건 모른다네. 고대 전설에 따르면 네클리스와 링이 합쳐진 것으로, 팔지 형태에 뭔가 대단한 힘이 숨겨져 있다고는 하는데...과거의 사람들도 미래에 있을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록을 보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닐 것 같다면서 그 이상은 기록하지 않았더구만. 그만큼 위험하거나 아니면 너무 대단한 것인가 보지.”
고로 어떻게 만드는지는 모른다는 말이군...좋다 말았다는 느낌에 해왕은 한숨을 쉬었고, 그러는 동안 그들은 마침내 분수대에 도착했다.
“...어라?”
“세라프! 거기에...디폴트까지?”
의외였다. 분수대까지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하고 그냥 가나...했었는데, 때마침 분수대 끝에서 엔센스터들이 일행을 배웅나온 것이었다. 세라프부터 시작해서, 팔에 두꺼운 깁스를 한 디폴트까지...
“여어~~거기 둘, 그림 좋아, 응?”
“...이 늙은 나부랭이 영감 말은 듣지 마.”
“여기까지 어쩐 일이예요?”
“두말할 게 있니? 배웅하러 왔지.”
발랄한(?)할레어의 목소리에 펠레어가 들을 것 없다는 듯 그렇게 말했고, 데르나의 질문에 레이아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엔센스터들의 축사가 이어졌다.
“아틀란티스를 찾는 모든 이들에게 시간의 은총을, 해왕아, 잘 해 봐~!”
“에? 제가 뭘요~!”
“공간과 시간을 넘나드는 차원의 문을 향해서. 유나이트 만들면 꼭 연락해! 데르나!”
“아, 예. 꼭 연락할께요!”
네라와 레이아, 펠레어, 할레어 형제, 디폴트에게 인사를 받고, 마지막으로 세라프 차례가 되었지만 그녀는 정작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데르나를 노려보았다. 어제부터 계속 그랬다. 그 여인을 어머니라 불렀을 때부터.
“...너는....”
“...응?”
마악 데르나가 그녀를 지나쳐 분수에 오르려 했으나, 그것보다 세라프가 먼저 말을 걸어 왔지만...그녀는 곧 별거 아니라는 듯 말을 돌려 버렸고, 데르나는 이상하다면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의미심장한 미소만 띄우고 있을 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일행은 기쁘지만 조금 어벙벙한 기분을 느끼며 텔레포트 플레이스에 올라섰다. 그러자 텔레포트 플레이스 주변의 마나가 조금씩 요동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올라섰다는 것에 반응하는 건지 대기의 마나가 텔레포트 플레이스에 모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윽고 마나가 완전히 모이자 장로는 마법을 시전하기 전에 한 마디 당부를 했다.
“잘 듣게나. ‘적’이 네가 이 곳에 왔다는 것을 알았다는 건, 벌써 적이 네 근처에 스파이를 심어놓았다는 뜻일 수도 있다네. 되도록 중요한 건 둘이 있을 때만 말하도록 하고, 평소에 몸가짐을 잘 하도록 하게.”
“네. 명심하겠습니다.”
데르나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장로는 조용히 시동어를 외웠다.
“베스 카인 리안, 사피넨(텔) 넨리(레) 로나(포) 사례(트). 아틀란티스 차원의 영광이 언제나 함께 하기를.”
“안녕.”
“안녕. 3일만이네. 가출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가출은 무슨...그냥 여행이야.”
월요일. 데르나를 보자마자 화린이 반갑게 인사하며 물어오자 데르나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여행이라고 둘러대긴 했지만 어디부터 대답해 줘야 할지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세계여행을 갔다고 할까? 그러면 이제 어디 갔냐고 물어올 것이고, 답은 당연히 영국. 그리고 이야기가 진전되면 어떻게 거기까지 갔느냐고, 또 무슨 용무로 갔느냐고 물어올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화린은 데르나의 암담하단 눈길을 알아차리고 재빠르게 화제를 돌려 주었다.
“저, 저기...숙제 했어?”
“응? 무슨 숙제?”
“생물. 눈에 관련된 속담 조사하기.”
“...아니, 전혀.”
사실 인터넷에 들어가 ‘눈’이라고만 치면 찾을 수 있는 것을, 아니 데르나가 컴퓨터를 모른다면 해왕을 시키든가 해왕 숙제를 배끼면 될 것을...그런 걸 하지 못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갑작스레 돌아온 일행과 그들을 맞는 부모님 때문에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어제 일행이 텔레포트한 뒤였다. 그들은 시차로 인해 붉게 타오르는 저녁놀을 바라보며 느릿느릿 집에 돌아왔는데, 집을 와 보니 집안에는 경찰도 오고 동네 주민들도 몰려 있었고, 그들은 데르나와 해왕을 보더니 환호성을 지르며 둘을 맞이했던 것이다. 그 갑작스런 환영인사에 어리둥절하던 그들은, 때 아닌 만찬을 즐기고 밤이 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그 이유란...
‘....가출이 아니라 외출이라고 아무리 우겨도 안 믿으니 원...’
....그러니까, 아이들이 가출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난리를 피워 댄 데다가 시차 때문에 잠도 오지 않았고, 자연 데르나는 덜 깬 상태로 학교에 와야 했고, 해왕은 오자마자 엎어져 있기에 바쁘니 자연 숙제를 체크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화린이 이야기해 주지 않았으면 미술 다음으로 깐깐하다는 생물 선생님의 때 아닌 지옥 훈련을 맛볼수도 있었을 것이다.
“화린아, 넌 했어?”
“아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그녀를 보며 데르나는 한숨을 쉬었다. 숙제를 배끼려 했는데 안했다니 그게 무척 안타깝다는...그런 한숨이었다. 그러나 데르나는 다른 누군가는 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큰 소리로 교실을 향해 소리질렀다.
“야! 생물숙제 한 사람~!”
“생물숙제? 그게 뭔데?”
“아, 맞다. 왜 속담 조사하는 거 있잖아.”
...그러나 반 분위기도 별반 다른 것 같지 않았다. 그들도 서로를 바라보며 그제야 알아차렸다는 눈빛이었고, 심지에 숙제가 무엇이었는지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해왕과 진석은 물론이고..박태연도 몰랐을 정도니...그때 어디선가 천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나, 해 왔는데.”
그 말에 죄다 고개를 그 쪽으로 돌렸고, 곧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차리고는 기분좋은 비명성을 질렀다. 숙제를 했다고 하는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성진...이었다.
“저, 저기...나좀 보여주면 안돼?”
“나도 나도!”
“나도 좀 보여줘!”
“...좋아, 보여줄게. 그 대신!”
보여준다는 말에 마악 달려나가려던 그들은 갑작스런 ‘그 대신’이라는 말에 우뚝 멈추어 서며 그의 입을 긴장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설마 돈을 요구하는 건 아니겠....지?
“...데르나가 내 질문에 답하냐 안하냐에 따라 내가 이걸 너희들에게 보여줄 거야. 어때? 데르나.”
성진의 말에 이번엔 시선이 죄다 데르나에게로 쏠렸고, 왠지 모르게 의심스럽다는 기분이 드는 데르나였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자신이 싫다는 말을 하며 성진은 결코 숙제를 보여주려 하지 않을 테고, 그렇게 되면 반 아이들은 동시에 생물선생님의 히스테리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질문이 뭔데?”
왠지 딱딱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성진은 예의 그 순수한 미소를 띄워 보였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별거 아냐. 3일동안 뭘 했는지 알려 주기만 하면 돼.”
“...그게 다야?”
“으응.”
‘그게 다야’라며 자신있게 말했지만 데르나는 그에게 자신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렇다고 안 알려 줄 수도 없고,...결국 데르나는 침착하게 3일동안 영국에 갔으며, 아틀란티스가 있었다는 곳에도 가 보았다는 이야기도 했다. 물론 링 오브 스페이스에 대한 내용과, 아틀란티스가 아직도 있다는 이야기는 빼고.
“...거기서 뭐 얻지 않았니?”
그때 성진은 갑자기 데르나의 말을 툭 끊고 날카로운 한 마디를 던져 넣었다. 그러나 그것에 대답해 줄 데르나는 아니었으니....
“...아니. 아무것도.”
“...그럼 그 반지는 뭐야?”
“이, 이거? 그냥 영국 간 기념으로 산..거야.”
약간 당황해 버린 데르나...그러나 성진은 별다른 낌새는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는지 미소를 지으며 반 아이들에게 자신의 공책을 던져 주었고, 아이들은 순식간에 그 곳에 몰려들어 공책을 배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데르나는 왠지 기분나쁘다는 표정으로 묵묵히 숙제를 배꼈고, 그 자리를 벗어나려던 성진의 눈엔 데르나의 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가 비춰지고 있었다.
“너는 왜 숙제를 안 했니?”
“몰라서요....”
“인터넷 뒤지면 나오는 것을?”
“언제 찾아요, 그걸....”
“이 녀석, 다른 애들은 다 해 왔는데 너만 안 할려고? 네가 그렇게 잘났니? 네가 세상의 왕이니, 아니면 지구의 중심에 네가 서 있는 거니?”
“....풋.”
“크큭...”
그 희안한 유머에 반 아이들은 반 넘어가는 웃음으로 그 개그에 답례를 했다. 세상의 왕, 지구의 중심에 서 있다...이 얼마나 위대한 업적을 한번에 부정시켜 버리는 언어란 말인가. 그러나 데르나는 아직도 바깥을 보며 뭔가 골똘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건....바로 장로가 말했던 스파이에 대해서였다.
‘스파이...같은 편인 척 숨어 있으면서 정보를 빼 가거나 목표를 조용히 암살하는 사람. 그럼 내 곁에 그렇게 위험한 사람이 있다는 것인가?’
개념을 파악한 그녀는 주욱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 곁에 있는, 뭔가 적의가 있으면서도 위험한 사람이라...일단 가장 가능성이 많은 건 요사이 전학와서 자신을 쫄래쫄래 쫓아다니고, 오늘은 뭐 했냐고 사사건건 물어보는 성진이 가장 유력했지만 같이 다니는 진석과 화린도 무시할 수 없었다. 어쩌면 해왕도 자신을 구해준 척 하면서...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생각을 하면 할수록 모든 인간관계와 주변 사람들이 다 두렵고 무서운 사람들 같아 데르나는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러자 다른 주제가 서서히 머리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유나이트를 어떻게 만드는 거지?”
입 밖으로 중얼거렸건만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해 줄 수 없는 질문이었다. 데르나 개인의 일일 뿐만 아니라 그만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아무래도 혼자 풀 수밖에 없다는 건데...
‘...팔지 모양이라고 했지?’
팔지라면 목걸이와 반지의 중간 크기를 이야기하는 것일 테지..그것을 만들려면...일단 이것을 얻은 모든 과정에 흑마법이 쓰였으니, 흑마법을 사용하면 될라나? 그러나 그렇게 간단한 거라면 최후의 봉인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은가. 그럼 일정한 의식이 필요한가? 그 의식이란 무엇일까...일단 이것은 제쳐 두고.... 아니, 다른 것은 생각해 보야 그게 그거였다. 결국 의식을 사용해야 한다는 소린데? 그렇다면 그 의식이란 것은?
“...데르나, 뭐 하니? 창 밖으로 던져 줄까?”
“네? 아, 아뇨! 됐습니다.”
극구 사양하는 데르나를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선생님은 곧 몸을 돌려 칠판에 하얀 글씨들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 아니다. 계속 쓰고 있었던 거군.
문득 데르나는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을 계산했다. 유나이트가 없어도 집에 돌아갈 수 있다. 링은 공간 관련 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니 여행할 때 재미있겠고...스파이는...
‘고향으로 돌아가면 다 해결되는 일이지 뭐.’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돌아갈 때가 되면 이곳 사람들과 인연을 끊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해왕에게조차도.
와글와글
“...젠장, 좀 일찍 올걸 그랬나?”
“아니, 좀 늦게 올 걸 괜히 서두른 것 같아.”
데르나와 해왕은 서로를 향해 중얼거렸다. 그리고 앞에 꽉 막힌 사람들을 보며 피식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데르나까지 끌어들여서 괜히 일찍 먹자고 한 것 같았다. 게다가 여자들이 줄 서는 쪽은 또 공사중이라니 그 혼잡함이 더 심했다.
“쳇. 저쪽은 무슨 공사한대?”
“수도 공사. 녹물이 나온다나 뭐라나.”
“으윽, 그럼 밥에 녹물이 들어갔다는 이야기야? 밥 먹어도 되는지 모르겠다.”
“왜? 녹물이란 게 그렇게 위험한 거야?”
‘녹물’에 대한 이론만 잡혀 있을 뿐 그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지 못하는 데르나가 해왕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해왕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를 흘려 듣던 다른 사람들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데르나를 바라보았고, 데르나는 이유는 모르지만 자기가 이상한 걸 물어보았다고 깨닫고 멋쩍은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아, 하하, 녹물이 위험하긴 하지......”
왠지 자조적인 모습이었지만 그 위험을 이제야라도 깨달은 것 같은 그 모습에 대부분 고개를 돌리고 자기들끼리 잡담을 계속했다. 그러나 해왕만은 그녀가 아직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따는 것을 느끼고 한숨을 쉬었다.
“감사합니다.”
“잘먹겠습니다.”
급식을 나눠주는 아주머니에게 밝게 인사한 그들은 이윽고 근처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오늘 식단은 계란말이랑 비앤나소시지 볶음, 그리고 열무김치에 흑미밥과 김치콩나물국...
언제부턴가 데르나는 김치만 보면 반가우면서도 이유모를 두려움을 느꼈다. 두려워지는 이유는 여기에 처음 식사했을 떄 먹은 그 매운 김치의 맛 때문이었고, 반가워지는 이유는..이유는...
“...그러고 보니까 내가 왜 김치를 반가워 하지?”
“뭐?”
“아, 아무것도 아냐.”
혼잣말을 우연히 들은 해왕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두 손을 흔든 데르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비앤나소시지를 입에 가져대었다. 물컹 퍼지는 느낌과 함께 달콤한 육즙이 입 안을 감돌았다.
‘...이 동글동글한 소세지는 씹는 맛은 없는데 말야.’
사실 날치알이나 메추리알처럼 톡톡 터지는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거침없이 이 소세지를 먹을 테지만, 데르나와 같이 부드러운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 적어도 데르나 자신은 이런 음식이 무척 징그러워했다. 생물을 그냥 씹어 버리는 듯한, 그런 느낌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 소세지를 미워할 수 없는 이유는 소세지 특유의 즙과 맛 때문이었다.
“...장로의 말에 대해 많이 생각해 봤어?”
먹다 말고 난데없이 내뱉은 해왕의 말에 데르나는 잠시 골몰히 생각하다가 곧 무슨 말인지 깨달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침울하게 말했다.
“...아니.”
은근한 불만이 끼어 있는 말투였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걸 떠오르게 했다는 불만. 그러나 해왕은 눈치도 없이 자기 할 말을 계속 이어서 했다.
“도대체 누구를 경계해야 하는 거고, 어떻게 그걸 만든다는 거야. 그걸 알려 줘야 뭘 하든지 말든지 하지.”
“그들이 알 리가 있니. 그냥 우리가 찾아 봐야지.”
희망적인 말이었지만 자포자기적인 투도 조금 섞여 있었고, 왠지 모르게 첩첩산속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디부터 손을 봐야 할지 모르는 상태..
“...해왕아.”
“응?”
“..네가 생각하기에 누가 스파이인 것 같아?”
“으음...못 미더운 진석, 아니면 성진. 둘 중에 하나인 것 같아.
해왕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은, 진석이 하나 들어갔다는 걸 빼면 나머지는 거의 같았다. 역시 성진이 마음에 걸리는군. 해왕도 성진이 걸린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우둔한 해왕에게도 이름모를 경계심을 느낄 정도로 이상한 일을 많이 한다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해왕이 그러는 이유는 전혀 달랐다. 성진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그에게서 이상한 게 느껴졌고, 그 이상한 것은 매번마다 해왕의 목을 조여 왔다. 뭔지는 모르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가 이상하다고 단정한 거지, 그가 진짜 스파이 같아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때 그들을 향해 일단의 무리가 몰려들었다. 자세히 보니 화린과 진석, 그리고 태연이었다.
“안녕. 언제 왔어?”
“아, 우리도 이제 왔어/”
“그래? 잘 됐네.”
털썩
일행이 모두 자리에 앉자, 이야기하느라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한 데르나와 해왕도 그제야 제대로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잘만 먹던 데르나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가 자칫하면 입 안의 혼합물(!)을 바닥에 쏟아(!)낼 뻔함을 느꼈다. 진석이 수저를 들짇도 않고 자신을 빠안~~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간신히 혼합물을 뱉어내는 건 면할 수 있었지만...데르나는 목에 음식이 턱, 하고 걸려 버렸고, 결국 그녀는 심하게 기침을 해야 했다
“콜록, 콜록, 흠, 험..콜록, 진, 진석! 왜 그렇게 날..콜록, 바라보는 거야?”
“응? 아, 미안, 미안. 괜찮아?”
얼굴은 가관이었다. 마침 입 안에서 씹고 있던 김치콩나물국과 쌀밥이 사례에 걸리면서 목에는 김치콩나물 덕분에 매캐한 연기가 들어간 것 같이 쓰린 기분을 느껴야만 했고, 쌀알은 사례 덕분에 도로 역류(!)해서 콧구멍으로 나올 지경(....!!!!)이었으며, 눈물과 콧물이 질질 흐르는 게 더없이 더러워 보였지만 어찌 보면 오히려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내 잠잠해졌고, 데르나가 눈물과 콧물을 닦고 진석의 사과를 받는 것으로 소동은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일행은 다시 식사를 계속했다. 아까와 좀 달라진 게 있다면, 데르나가 계속 훌쩍거린다는 것과, 진석이 자기의 자기의 식사에 열중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때 태연이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참, 우리반에 누구 전학 올 거라는데.”
“엥? 또?”
“응. 선생님 뵈러 가니까 누가 전학온다고 그러던데.”
“누구? 남자야, 여자야?”
“여자. 아참, 데르나처럼 외국인이랬어. 국적은 영국.”
“꺄~~! 외국인?”
외국인이란 말에 화린이 되려 좋아하는 모양이다. 데르나는 그녀를 살짝 흘겨보다가 곧 다른 사람들에게로 눈을 돌렸다. 좋아하는 건 화린뿐만이 아니었고, 여자가 온다는 말에 진석과 해왕도 덩달아 좋아하고 있었다. 오직 태연만 담담히 식사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때였다.
툭 툭
“...야.”
“...응?”
누군가 데르나 뒤에서 그녀를 툭툭 건드렸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으음...어디서 많이 본 녀석인데?
“...누구시더라?”
“그새 까먹었냐? 모의고사 쉬는 시간에 너에게 돈을 받으러 왔던 그 남자지.”
그제야 그녀도 아아, 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고, 역시 이번에도 진석이 나서기 시작했다. 해왕은 그의 노력이 눈물나 보였지만 데르나는 그에게 어떠한 감정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한숨을 쉬었다.
“...내가 덤비지 말라고 했을 텐데?”
“네 일 아니니까 저리 가셔.”
“싫다면?”
“...너 이 여자애 좋아하냐?”
“응.”
...순간적인 고백에 일행은 순간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당사자인 진석은 자신의 실수에 당황하기는커녕 오히려 결연한 표정을 지었지만, 피해자인 데르나는 당황스러움을 넘어 황당하고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채 일행의 당황스러움이 가시기도 전에 그는 진석을 무시하고 데르나에게만 말을 걸었다.
“이쯤 하면 빌려간 돈 돌려줘야 하지 않나?”
“빌려간 돈?”
“내 똘마니에게 가져간 돈 3만원.”
“아, 그 팔씨름?”
손뼉을 치며 미소를 그리는 그녀를 보자 남자는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꼈다. 그러나 엄연히 하나의 적. 곧 그는 그 느낌을 잠재우기 위해 큰 소리로 위협을 가했지만 얼굴은 이미 흥분으로 붉어질 때까지 붉어진 상태였다.
“이제 내놔!”
“싫어.”
“...싫어?”
“응.”
“아우, 정말 안 내놓을 거냐!”
“당연하지.”
“으윽, 이게 진짜!”
후우웅
“쉴드!”
파아앙
남자가 주먹을 내리치는 순간, 데르나는 조용히 쉴드를 시전했다. 다행히 손은 쉴드가 생성되고 나서야 겨우 데르나에게 닿았고, 그 위력이 상당히 강했는지 쉴드에서 맑은 소리가 울려퍼졌다.
‘..아프겠다.’
...그 남자의 주먹 위력보다 그 손의 안위를 먼저 걱정하는 데르나였다. 그리고 예상대로 남자는 자기의 손을 거머쥐었다. 아파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아니, 얼굴이 엄청나게 일그러지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전자인 듯 했다.
“이익, 마법 쓰지 말고 정당하게...”
“어머? 너는 남자고 나는 여자인데 당연히 이 정도는 배려해 줘야지. 정 싫다면 뭐 쉴드만 쓰고 붙을 수 있고. 어때?”
“으윽........두고보자.”
또 다시 두고 보자는 말만 남기고 사라지는 사내를 바라보던 데르나는, 곧 ‘이제 내가 할 일이 없구나’라며 허탈한 표정을 짓는 진석에게 윙크를 해 보였다. 주변에서 징그럽다는 표현이 오갔지만 진석에겐 얼마나 고마원 행동인지 몰랐다.
클럽활동시간.
학교에서는 매달 두 시간씩 특별활동시간을 운영했는데, 2주 간격으로 학급회의와 기타 행사 시간, 그리고 클럽활동이 번갈아 들어있는 게 대부분이었다. 간혹 행사 때문에 빠지는 클럽활동을 제외하면 거의 한달에 1번 꼴로...하나? 아, 유난히 행사가 많고 노는 날이 많은 5월달이라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아, 다음주에 체육대회를 하나?”
“응? 아, 응.”
간단한 대화를 나눈 그들은 데르나, 해왕과 함께 같은 클럽활동 교실로 이동하던 화린이 그들을 향해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체육대회,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남자는 구기종목, 여자는 각종 인내심측정 운동을 하며, 우리는 그들을 뒤에서 응원하고, 그렇게 따로 놀다 난 뒤엔 남녀가 공동으로 하는 운동이 이 체육대회의 하이라이트라는데. 왜, 우리 학교 체육대회가 오죽하면 ‘미팅 대회’로 불리기도 하잖아.”
...그러나 해왕은 체육대회라 해도 별게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저 대표 몇 명 나가고 우리는 뒤에서 응원해 주다가 먹고 마시고 자리를 치우면 끝나는 게 체육대회니까. 체육대회 때는 교실에서 푸욱 자 두는 것이 좋다는 게 선배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내려오는 지론이었다. 데르나와 해왕도 그 말이 나도는 바람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화린은 상당한 기대를 하는 모양이었다.
뭐 확실히 남녀가 같이 벌이는 포크댄스나 이인삼각, 그리고 우리 학교만의 최대 명물인 ‘사랑의 장애물 넘기’-여자를 반대편에, 남자를 맞은편에 세워 두고, 두 사람 사이에 각종 장애물을 설치한 뒤 두 사람이 장애물을 넘어서서 가운데 있는 장애물을 터뜨리는 시간으로 승부를 가리는 시합.-는 그나마 체육대회에서 가장 기대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해왕도 데르나와 비슷한 생각인 모양이었다.
“문제는 오전엔 뭐 하며 지내냐는 거야.”
“오전에도 할 건 많겠지. 응원도 하고 경기도 하고.”
“...난 전혀 재미없을 것 같은데?”
“그래? 난 재미있을 것 같은데.”
“...사람 차이지 뭐.”
그렇게 간단히 넘겨 버린 그들은 곧 어느 반에 들어갔다. 일행이 속한 클럽활동은 독서부였는데, 화린은 그나마 제대로 된 목적을 가지고 독서부에 들어왔지만, 해왕은 판타지 소설을 들고 와 읽는 게 고작이었으며, 데르나도 명상하기에 이만한 때가 없다고 해서 선택한 곳이 이 부서였다. 그리고 역시 예정대로 그들은 책을 읽으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서로 다른 행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책을 읽는 둥 마는 둥 하는 데르나와, 이따금씩 하품을 하는 화린, 그리고 킥킥 웃어가며 책을 읽는 해왕....
“.........”
사아악
“...!....너무 생각했나.”
책을 읽고 있던 데르나는 갑자기 눈앞을 스쳐가는 팔지 모양의 어떤 것에 잠시 당황하다 양손으로 부비부비 눈을 매만졌다. 너무 생각해서 그런가...팔지 환영이 보이는구만. 쩝.
생각을 안 하려 하면 할수록 계속 떠오르는 생각. 데르나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으면서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생각하는 자신이 희안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 만큼 생각할 수 있는 시간도 없을 것 같다는 기분을 느낀 데르나였고, 그녀는 곧 오후 햇살이 나른하게 비치는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운동장에는 야외 클럽활동 때문에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로 어수선했다. 중앙을 종횡하며 뻥뻥 공을 차 대는 축구부의 모습은 좀 나은 모양이었지만 다른 부서(배구부, 배드민턴부, 농구부...)는 축구부에 밀려 이리저리 구석으로 내몰리는 게 특히 눈에 띄었던 것이다. 데르나는 운동장을 빤히 바라보며 손가락을 들었지만 이내 곧 그만두었다. 이제는 텔레키네시스로 공을 가지고 노는 것도 지루한 모양이었다.
데르나는 문덕 목걸이가 생각나 자신의 네클리스 오브 타임을 매만졌다. 마나량은...이제 겨우 절반. 절반을 모으는 데 두세달 남짓 걸렸지만 그나마 절반을 채웠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랐다. 이제 먹지도, 자지도, 화장실도 가지 않고 자신의 마나를 축낸다면 2주면 순식간에 나머지 절반을 모을 수 있겠지만...그러다가는 집에 갈 땐 자신은 이미 엄청난 폐인이 되어 버릴 것 같은 마음에 데르나는 그런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때였다.
반짝
“....?!”
네클리스와 링이 서로 빛을 발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데르나는 은은하게 내비치던 보석의 불빛을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빛?’
이 두 개가 만날 때마다 생기는 빛....잠깐, 이걸 또 어디서 보았더라?
‘...아, 영국에소 한 번 더 보았었지!’
그러고 보니 다시 돌아오기 전 영국에서, 그...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네클리스와 링이 순간적으로 빛이 났었다. 그렇다는 것은?
‘이 두 개가 서로 만나게 해 놓으면 반응을 보인다라...유나이트를 만드는 단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그렇다면 왜 영국에선 하루종일 책상 위에 두었는데도 유나이트가 만들어지지 않았지? 다른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나?“
그때 데르나는 무언가를 떠올렸다. 아틀란티스를 제외하고, 시간의 균열이 일어나는 곳..버뮤다 삼각지대.
“...후우...언젠가 가 봐야겠군.”
데르나는 그렇게 한숨을 쉬며 자기가 들고 온 책에 눈을 돌렸다.
그러나 누군가가 자기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그녀는 알아채지 못했다.
야자도 치루고, 그 다음날.
“...데르나.”
“........”
“...데르나!!”
“응? 어? 왜? 왜?”
“...너 얼굴이 왜 그러냐?”
“.......”
“....흐으읍!! 야~~~!!!!”
“우와앗! 왜, 왜.”
“정신 좀 차려~!”
“.....”
...또 다시 입을 다물어 버리는 그녀....해왕의 말대로 그녀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눈 밑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며, 벌겋게 충혈된 눈 하며...완벽하게 한숨도 자지 못한 불면증 환자의 얼굴에 가까웠다. 교실에 들어섰을 때도 아이들의 반응은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히액!”
“데르나, 너 괜찮아?”
“응? 아, 난 뭐...”
“누가 괴롭혔던 거야? 그런 거야?”
스으윽
“....왜 날 보고 그래??”
역시 가장 먼저 반응한 건 같은 반 친구인 진석과 화린이었고, 둘은 데르나를 괴롭힌 게 해왕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해왕이 그럴 리는 없지...한편 데르나는 멋쩍게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자신은 괜찮으니 신경쓰지 말라는 손짓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렇게 믿지 않을 만큼 그녀의 얼굴은 어두웠다. 저녁 내내 고민한 흔적이 역력했고, 어제부터 계속 무언가를 그녀가 무언가를 생각한다는 걸 알고 있는 반 아이들의 걱정스런 말이 오갔지만 본인은 그리 큰 일이 아니라며 손사례를 치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무슨 일인지 몰라 무척이나 걱정했지만 해왕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보나마나 스파이와 유나이트 때문이리라....
‘...장로도 말야, 적당한 걸 들고 와서 그러지 꼭 이런 걸....’
엉뚱한 걸 말해서 사람을 망쳐놓고 말이야, 하고 생각하려던 해왕은, 곧 담임선생님이 들엇는 걸 보며 자리에 앉았다.
“차렷, 경례.”
“안녕하세요!”
“그래. 근데 데르나 넌 밤샘 공부했냐?”
“아뇨.”
“내가 보기엔 상태가 영 안 좋은 것 같은데?”
“........”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힘들면 선생님께 와라. 조퇴시켜 줄 테니까.”
세상에. 저 무식한 독불장군이 그런 말을 하다니. 그 정도로 데르나의 상태가 심각하단 이야기였지만 그보다 더한 것은 바로 저 인간이 조퇴시켜준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아, 반장. 애들한테 말했나?”
“네? 뭘요?”
“그 전학생 이야기 말야.”
“...전학생? 아아, 그 이야기요. 해왕과 데르나, 그리고 진석이랑 화린에게만 식당에서 몰래 말해 주었습니다만....”
...아이들은 하나같이 무슨 말인지 몰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남이 모르는 걸 알고 있다는 쾌감이 이런 것일까? 진석과 화린은 얼굴에 뜻모를 미소를 새겼고, 데르나도 그 와중에서 슬몃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선생님은 약간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완벽하진 않지만 비밀을 지킨 셈이 되었군. 이제 말해 주지. 우리반에 전학생이 또 온다.”
“네에?!”
“선생님, 저희 반에 전학생이 그렇게 많이 와요?”
“딴반은 33, 34명이나 되는데 우리는 30명밖에 안 되잖냐. 학기 초에 워낙 많이 전학갔으니까. 그리고 너는 그렇게 안 따져도 될 것 같은데? 여자니까.”
“여자요~~?”
“와아아~~!”
여자라는 말에 발악(?)하는 아이들. 그러나 여자애들의 시선은 떨떠름하기만 했다. 가뜩이나 데르나도 신경쓰이는데 다른 여자까지...제발 폭탄이나 오길 바라는 심정에 그들은 선생님에게 대략적인 외모를 물었다.
“어떻게 생겼어요?”
“으음...귀엽다고나 할까? 너희들이 딱 좋아할 타입이다. 너무 성숙한 거 좋아하는 사람 빼면.”
그 말에 남자들은 다시 한 번 환호성을 질렀고, 여자애들의 시선은 왠지 긴장된 시선으로 바뀌어 갔다. 그렇게 선생님은 아이들의 희비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다가 바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 들어와라.”
드르륵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다른 생각을 하던 데르나도 그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경악했다. 그것은 해왕도 마찬가지였다.
금발을 길게 기른, 그러면서도 끝이 꼬불꼬불한 머리에, 곱상함을 넘어서 천사같아 보이는 그 미소와 얼굴. 가련해 보이면서도 귀엽고 앙증맞은 몸매와, 그러면서도 적당한 키. 그리고 그녀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하기 시작하자, 교실 가득 낭랑하면서도 요염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안녕하세요! 세라프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아, 참고로 나이는 너희보다 두 살 아래. 그리고 영국 국적의 외국인이지만 한국어는 잘 하니까 대화하는 데 무리는 없을 거다.”
선생님의 설명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러 대었다. 심지어 여자애들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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