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원문보기 글쓴이: 왕서방
선교한국의 종결자 '중국선교'의 뜻을 이루려면
중국선교는 21세기 한국교회가 감당해야 할 선교한국의 종결자(終結者)다. 중국선교를 소외하거나 제외시키면서 선교한국을 논할 수 없다. 하나님의 창조적 질서를 거역(拒逆)하고, 역사의 분명한 흐름을 외면(外面)하면 안 된다. 21세기 한국교회의 선교한국은 중국선교를 통해 꽃을 피워야 한다. 이 일은 지금까지 서방교회들이 시행했던 선교와 다른 관점(觀點)에서 이해해야 한다.
지금까지 서방교회는 대체적으로 복음의 불모지에 선교했다. '불모지'란 사전적인 의미로 두 가지가 있다. 그 첫째는 '식물이 자라지 않는 메마른 땅'이라는 의미요, 다음은 '전혀 발전이나 개발이 되지 않은 상태'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복음의 불모지'라 함은 '복음을 듣지 못하여 영적으로 발전이나 개발이 되지 않은 상태로 있는 곳'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 지금까지 서방교회는 복음의 불모지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그리고 저들에 의해 복음의 불모지에 복음이 증거되었고, 현지인들의 교회가 세워졌다. 이렇게 세워진 교회들을 통해 복음의 불모지에 복음의 꽃이 피었고, 이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었다. 이런 일은 지금도 계속되어야 한다. 아직도 지구촌에는 복음의 불모지가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도 지금까지 서방교회가 했던 것처럼 복음의 불모지에 선교사를 파송해야 한다. 그곳에 교회를 세워 복음의 꽃이 피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지상명령인 선교의 대명령이 지켜져야 한다. 따라서 세상의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한국교회도 힘차게 나서야 한다. 이 일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국교회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진정한 뜻의 본질을 발견해야 했다. 막연하게 복음의 불모지를 찾아 지구촌 방방곡곡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이 능사(能事)가 아니기 때문이다. 복음의 증거도 우선순위(優先順位)가 있음을 깨달아야 했다. 하나님의 뜻은 창세 이래로 시종일관(始終一貫) '서쪽을 향하여' 진행된 역사적 사실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에덴동산에서 마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께 불순종의 죄를 범하고 쫓겨난 아담시대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방향은 언제나 서쪽이었다고 증거한다. 서쪽은 항상 하나님의 축복을 추구하는 방향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향이다. 이것은 신약시대에 복음이 증거되는 핵심적 방향은 언제나 서쪽이었다. 이런 일은 성경 요소요소에서 드러난다. 또한 인류의 역사도 이를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선교의 대전제는 항상 '서쪽을 향하여'라는 서진선교(西進宣敎)다. 이것은 오늘날도 유효(有效)하다. 과거 우리나라의 선교도 태평양을 건너 온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서쪽을 향하여 우리나라에 온 것이다. 저들의 이런 수고와 헌신이 오늘의 한국교회를 일으켰다. 이제 한국교회는 저들로부터 물려받은 선교의 유산(遺産)을 지켜야 했다. 그것이 우리가 받은 복음을 서쪽을 향하여 증거하는 일을 계승(繼承)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한국교회의 중국은 한국교회가 반드시 감당해야 할 최우선 선교대상국이다. 물론 복음의 증거를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치랴. 복음의 증거는 전방위적(全方位的)이어야 한다. 복음이 증거되어야 할 곳이라면 지구촌 어느 곳이든지 선교사를 파송해야 한다. 아직도 지구촌에는 선교사의 파송이 필요한 복음의 불모지가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선순위를 혼돈(混沌)하지 말아야 한다. 그 우선순위에서 한국교회의 서진선교는 중국이어야 할 것을 지적(指摘)하고 싶을 뿐이다.
중국은 한국교회에 어떤 나라인가? 거듭 말하거니와 중국은 한국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선교대상국이다.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선교한국을 위한 종결자다. 중국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까운 서쪽에 있는 나라로, 서쪽을 향하여 일관되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뜻을 간과할 수 없는 나라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한국교회가 중국선교를 어떻게 시행하고 있는지 항상 주목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선교한국을 위한 옷의 첫 단추를 끼는 것과 같다. 옷을 입을 때 첫 단추를 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 옷입은 매무새를 단정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국교회의 선교한국도 첫 시작이 매우 중요하다. 선교한국은 지구촌 모든 나라를 대상으로 한 전방위적일 수 있으나, 옷의 첫 단추를 끼는 것과 같이 선교한국의 첫 시작은 중국선교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왜 선교한국의 중국선교가 옷의 첫 단추와 같이 소중한 것일까? 아직도 중국이 복음의 불모지이기 때문인가? 중국은 아직도 철저하게 외국인들이 자국민(自國民)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있는 나라다. 따라서 외국인들의 어떤 선교활동도 허락하지 않고 통제한다. 그러기에 한국교회의 저돌적(猪突的)이고 공격적인 선교방법이 적중(的中)해서일까? 아니다. 그렇다면 왜 중국선교를 선교한국의 종결자라고 하는가?
중국선교의 역사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오래 전에 두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 첫 번째는 당나라 태종 9년(635)에 페르시아 인에 의하여 중국에 전래된 경교(景敎)였다. 경교는 로마 카토릭의 한 분파인 네스토리우스파의 동방선교에서 비롯된 결과로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당나라 무종시대 회창(會昌) 5년(845년)에 회창멸법(會昌滅法)이 제정되면서 경교는 탄압을 받아 소멸하게 되었고, 그 후로 400여년 동안 중국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중국선교의 두 번째는 몽고족의 징키스칸이 1234년에 중국의 송나라를 무너뜨리고 원나라를 세우면서였다. 이 때 당나라의 박해를 피해 원방으로 은둔해 있던 경교의 신도들이 몽고족의 대륙진출과 함께 중국으로 다시 들어와 제2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 때는 경교라 하지 않고 '복음을 섬기는 자' 또는 '복음을 받들어 섬기는 자'라는 뜻을 지닌 '야리가온'으로 불렀다. 야리가온은 지배계층 중심의 종교로 발전했다.
야리가온의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족이 다시 발흥하여 원나라를 무너뜨리고 1366년에 명나라가 세워지면서 원나라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발저했던 야리가온은 외래종교로 배척을 당하기 시작하여 급격하게 쇠퇴(衰退)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는 민중속을 파고드는 토착화에 실패한 결과였다. 따라서 야리가온은 원나라의 멸망과 함께 중국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 후로 중국을 향한 선교는 오랜 침묵기를 지냈다. 그러다가 1807년, 영국의 런던선교회가 로버트 모리슨을 중국선교사로 파송하면서 중국선교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이것은 철저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었다. 지나간 역사의 중국선교는 페르시아에서 동진(東進)된 선교였다. 중국의 동진선교는 중국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좌절의 맛 보게 된 것은 결국 서진(西進)선교를 위한 필연적인 결과였다.
아무튼 1807년을 근대 중국선교의 원년이라 할 수 있다. 근대 중국선교의 첫 선교사였던 로버트 모리슨은 런던선교회로부터 중국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중국에 들어오는 길을 유럽대륙과 연결되는 역사적인 옛 실크로드 육로(陸路)를 택하지 않았다. 상선(商船)을 타고 해상(海上)을 따라 대서양과 인도양을 거쳐 중국의 동쪽 연안(沿岸)으로 들어오는 해로(海路)를 택했다.
모리슨이 처음 중국으로 들어온 루트는 대부분의 중국선교사들이 이용한 중국입국의 길이었다. 이 루트는 중국선교에 아주 중요한 의미를 시사(示唆)하여 근대 중국선교의 역사는 동진(東進)이 아니라 서진(西進)이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를 운행하시는 방향이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서쪽을 향하여 진행하시는 질서가 유지된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우리나라의 선교도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복음을 들고 태평양을 건너온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또한 복음의 동진이 아니라 서진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증거다. 이렇게 서쪽을 향하여 태평양을 건너온 선교사들에 의해 초기 한국교회는 세워졌고, 한국교회는 교회역사상 가장 찬란한 부흥과 성장을 경험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뜻과 역사적 전통을 따라 서쪽을 향하여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환상중에 마게도니아 사람 하나가 나타나 '우리에게로 오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 사실을 안디옥에 있는 교회들이 알고 바울을 선교사로 저들에게 파송했다. 오늘날은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지구촌의 사람들이 한국교회를 향하여 '우리에게로 오라'고 요청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저들이 요청하는 부름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선교사를 파송해야 한다. 저들에게 빨리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
선교한국은 한국교회에 부여하신 하나님의 과업(課業)이다. 과업을 이루려면 한국교회의 전방위적 선교는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만 결코 간과(看過)하지 않고 선결(先決)해야 할 일이 있다. 모든 일의 우선순위가 있듯이 선교한국의 과업도 우선순위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순위가 바뀌면 혼돈(混沌)을 일으킬 수 있다. 그 우선순위의 꼭지점이 바로 중국선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선교는 선교한국의 종결자인 것이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온지도 어언 130여년이다. 일찍부터 한국교회는 중국선교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따라서 많은 선교사들을 중국선교사로 파송했다. 그들 중에 지금도 100수를 넘겨 생존하신 방지일 목사와 같은 분도 계신다. 저들은 중국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여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추방되었고, 그로부터 오랫동안 한국교회는 중국선교를 잊은 듯이 지내야 했다.
1992년은 아주 역사적인 해다. 오랫동안 적성국가로 대치되던 우리나라와 중국이 서로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국교를 정상화시킨 해이기 때문이다. 양국의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한국교회의 중국선교에 대한 열기는 다시 뜨겁게 타 올랐다. 따라서 마치 경쟁이라도 하는 듯이 많은 선교사를 앞다투어 중국에 파송했다. 우리와 같은 민족인 중국의 소수민족 조선족이 집거하고 있는 중국 동북지방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로부터 약 20여년이 지났다. 한국교회는 언제부터인지 중국선교에 대한 뜨거웠던 열기가 식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지금은 차갑게 냉각(冷却)되고 말았다. 한국교회는 이제 더 이상 중국선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는 듯이 여겨진다. 한국교회의 모 교단은 불과 수년내에 중국에 파송된 모든 선교사를 철수시킬 계획이라고 한다. 그만큼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찬밥 신세로 전락(轉落)되고 말았다.
이대로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끝이 나고 말 것인가? 더 이상 중국은 한국교회의 선교가 필요하지 않은 나라라도 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진정한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이제부터 시작해야 할 중요한 때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시행되던 복음의 불모지에 복음을 증거하던 방법으로는 안 된다. 중국은 더 이상 복음의 불모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교회가 세워졌고, 문화혁명이라는 어려운 시련을 통과하면서 독자적으로 성장해 온 교회가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더 이상 중국교회를 경시(輕視)하지 말아야 한다. 현재 중국교회의 교인들 숫자는 약 1억명 이상이라고 추측한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곱절이 넘는 숫자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중국에는 아직도 복음이 필요한 약 12억 명이 남아 있다. 이 숫자는 전 지구촌 인구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엄청난 숫자다. 이런 점에서 중국은 여전히 선교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나라가 분명하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아직 중국선교를 포기하거나 단념해서는 안 된다. 여전히 중국은 한국교회의 적극적인 선교가 필요한 나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한국교회가 중국선교를 어떻게 할까? 과거와 같이 선교사를 파송하여 저들로 하여금 독자적으로 교회를 세우게 해야 할까? 절대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심사숙고(深思熟考)하여 재고(再考)할 필요는 있다. 이런 일은 자칫 엄존(儼存)하고 있는 중국교회를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게 될 우려가 있고, 현재의 중국교회를 무시하고 중국선교를 감행한다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철저하게 중국교회와 더불어 이루어야 한다. 비록 중국교회가 한국교회에 비해 더 연약한 교회로 여겨질 수 있지만, 한국교회는 중국교회를 존중하여 중국선교의 진정한 파트너로 받아 들여야 한다. 중국교회와 동역하는 중국선교, 그것이 21세기에 한국교회가 해야 할 선교한국으로서의 중국선교의 방향이어야 한다.
이제는 중국을 한국교회가 임의대로 독자적인 방법을 따라 선교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중국에 있는 중국교회를 폄하(貶下)하여 독자적인 방법을 고수(固守)해야 한다는 아집(我執)을 내려 놓아야 한다. 지극히 작은 것 하나까지 중국교회와 협력을 도출(導出)하는 방식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이것이 현대에 맞는 선교한국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중국선교가 될 수 있다.
중국교회와의 파트너쉽. 하나님은 21세기에 한국교회로 하여금 당신이 세우신 서쪽을 향한 질서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지구촌 최대의 선교지를 준비하셨다. 그곳이 바로 중국이다. 왜냐하면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중국인들의 선교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서진선교의 더 넓은 일터가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중국과 변경(邊境)을 이루고 있는 16개국에 연속적으로 선교할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21세기에 이루어야 할 선교한국의 화두(話頭)는 중국선교가 되어야 한다. 또한 중국선교를 위해 한국교회는 중국교회를 더욱 정성으로 섬기는 겸손함과 저들의 귀감이 되는 신실함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 선교한국의 중국선교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유념(留念)해야 한다. 이로써 진정한 세계선교를 위해 전진을 계속할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지금이야 말로 선교한국의 중국선교를 위해 매우 소중한 기회가 되는 것이다.
진심으로 한국교회가 선교한국을 이루려면, 중국선교를 위해 다시 한 번 힘을 쏟아야 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독자적으로 일하는 것보다는 상호 협력하여 일하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중국교회를 세우셨고, 한국교회로 하여금 중국교회와 협력하기를 원하신다. 결코 중국교회를 경솔하게 대하지 않고, 한국교회가 중국교회와 동반(同伴)하여 상부상조(相扶相助)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한국교회는 중국교회에 신뢰받는 교회가 되어 신의(信義)를 지키는 두터운 파트너쉽을 이루어야 한다. 중국교회와 눈 높이를 맞추어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겸손함으로 중국교회를 섬기고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서쪽을 향하여 땅 끝에 이르기까지 복음이 증거되는 일을 위해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쓰임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선교의 목적이요, 이것을 이루기 위해 중국교회가 선교한국을 이룰 한국교회의 매우 중요한 파터너라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진실로 한국교회는 중국선교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일으켜야 한다. 이것이 선교한국을 통한 지구촌 복음화를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대의(大意)가 이루어져야 한다. 더 이상은 중국교회를 외면하거나 기피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중국교회와 협력하여 하나님의 대의를 더 빨리 성취할 것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다시 오시마고 약속하신 예수님의 재림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 한국교회는 중국교회와 더불어 파트너쉽을 이룰 것인가? 더 많은 고찰(考察)이 필요하다. 진정한 파트너쉽은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이어야 하며, 서로가 균형을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를 위해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 이들을 만날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한다. 한국교회가 결코 소홀히 여겨서도, 여길 수도 없는 중국선교를 위해 좋은 아이디어를 더 많은 이들과 의견을 나누어 공유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누가 내게 한국교회와 중국교회가 아름다운 파트너쉽을 가질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 줄 것인가? 이 글을 읽게 될 독자들이었으면 싶다. 독자들의 작은 생각이나 깨달음은, 다른 이들의 생각이나 깨달음과 합하여 아주 좋은 아이디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난 독자들의 작은 생각과 깨달음을 수렴(收斂)하여 이것을 취합(聚合)하고여 더 많은 이들과 공유(共有)하기 위한 글을 쓰고 싶다.
이제 오늘의 글을 여기에서 마치려 한다. 내게 여러분의 좋은 생각과 깨달음을 전해주지 않으려는가? 이메일(bulggok7@hanmail.net)로 보내주면 좋겠다. 진심으로 바라기는 많은 이들이 자신의 생각이나 깨달음을 내게 전달해 주었으면 싶다. 더 많은 이들과 공유할 수 있는 넉넉함이 있었으면 좋겠다. 또한 이 일이 이루어지길 간절한 마음으로 기대해 본다.
2011. 6. 26 (주일)
글/ 불꽃 石一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