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항복의 장인이 된다.[24]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평가가 높았던 이항복에
비해서 권율은 그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권율에 대해서 '사위 덕 본다'라는 평도
존재했다. 조선 역사상 코믹한 에피소드를 많이 남긴 인물 중 하나인 이항복의 장인이다
보니 야사에도 그 일화가 많이 남았는데, 이들 사이에 있었던 일화를 하나로 묶으면
한 편의 훌륭한 조선 시대판 시트콤이 나온다. 권율은 나이를 초월해서 이항복에게만은
엄청난 개구쟁이였으며 이항복 역시 권율에게는 엄청난 개구쟁이였다.
참고로 아래에 나오는 이야기는 정사와 야사, 민간 설화들이 많이 섞여 있으므로
모두 사실이라고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단지 이러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올 정도로
권율과 이항복의 관계가 재미있었다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된다.
더운 여름날 이항복의 장난에 넘어가서 장인 권율이 선조 앞에서 혼자 웃통 다
벗고 있었다는 일화도 있다. 하지만 저 일화를 정확히 말하면, 당시 신하들은
관복 안에 속옷 비슷한걸 입고 있었는데, 이항복이 날이 더우니 그거 입지 말고
가는게 어떠냐고 했고, 권율은 이를 따라했다.
그런데 어전 회의 도중 이항복이 선조에게 "날씨가 너무 더우니 관복 좀 벗고
회의하죠?"라고 말해 다른 대신들은 관복을 벗은 차림으로 있었는데 권율은 혼자
웃통 벗은 꼴이 된 것. 왜 혼자 그 옷을 안입었냐는 왕의 질문에 당황하던 권율에게
끼어든 이항복은 백성들이 헐벗고 있는데 그런 두꺼운 옷을 입어서는 안된다며
그렇게 입고 온 것이라 말했다.
한마디로 이항복은 장인을 제물로 각종 옷으로 사치를 부리는 권신들을 비꼬려
했던 것. 물론 권율 입장에서는 사위가 임금 앞에서 장인을 엿먹여 놓고
천연덕스럽게 입바른 소리까지 하는 상황이다(...).
권율이 오줌을 눌 때마다 이항복이 장난삼아 장인이 소변을 보는 것을
훔쳐봤다고 한다. 권율은 자신의 그곳을 가리키며 "이보게 사위. 이건 자네
장인일세. 그런데 어찌 업신여기시는가?"라고 묻자 이항복은 잠자코 있었다.
며칠 후 권율이 소변을 다 보자 대뜸 이항복이 권율의 뺨을 후려쳤다! 어안이
벙벙해진 권율에게 이항복은 "어르신께서 오줌을 눈 후에 감히 제 장인 어른의
목을 잡고 흔드시니[25] 사위인 제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권율은 "니놈은 X의 사위라고 해도 성내지 않을
놈이구나!"라며 크게 웃었다고. 이 이야기의 출처는 17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야기책(利野耆冊)이라는 패설집이다.
이항복이 아직 어린 시절, 권율이 사위감을 찾으면서 이항복의 품행이 어떠한지
알아보기 위해 이항복이 공부하던 서당을 방문했다. 그러자 이항복은 옷차림을 가다
듬기는 커녕 편한 차림으로 글을 건성으로 읽고 있었다.
권율이 이항복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평생의 소원이 뭐냐고 묻자 이항복은
"다른 소원은 없고, 쇠짚신이나 하나 있었으면 합니다."라고 답하였다. 이유를
묻자 "그걸 대감 입에 집어 넣어서 입좀 다물게 하려구요.".남의 소원을 안다는게
무슨 의미가 있으며, 안다고 한들 소원을 채워줄 리도 없으니 아무짝 에도 쓸모없는
짓이라는 뜻. 출처는 이희승의 수필 '별을 그리던 시절'이다.
여담으로 조선 정조
대의 관리이자 이항복 못지 않은 장난꾸러기였던 이문원[26]에게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여기에선 더 막나가서(?) 친척 어른인 이천보가 양자를 삼기 위해
이문원 형제에게 저 질문을 하자 이문원은 변소에서 뒷처리할 때 쓰는 밑씻개를
달라고 했다.
어느 날 권율의 가족들이 모두 외출을 가고 혼자 남게 된 권율은 집안의 여종 중
예쁜 여종 하나와 검열삭제를 했다. 그런데 한창 일을 치르던 중 마침 돌아온 권율의
아내가 남편이 하는 짓을 알아내고 권율을 집안 창고 안으로 불러낸 후
그대로 창고에 가둬 놓고 문을 잠가 버렸다.[27] 이 이야기를 들은 이항복은
권율이 갇힌 창고 문 밖에서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무엇보다 색을 경계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라고 외쳤다.
문 밖에 사위가 있다는 것을 안 권율은 이항복에게 제발 좀 꺼내달라고 사정을
했는데 이항복은 듣지 않았다. 권율이 "여기는 제아무리 제갈량이라도 못 빠져
나갈 곳일세. 제발 꺼내 주게"라고 사정을 하자 이항복은 "제갈량이라면 거기
들어가지도 않았을 겁니다."라고 면박을 줬다.
그러나 권율도 당하지만은 않았다. 한 번은 이항복이 권율에게 "조용히 공부할 수
있는 공부방 하나 만들어 주십시오"라고 청하자 권율은 이를 들어주었다. 그런데
이항복은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권율 집에서 일하는 여종과 정을 통했다.
이 낌새를 눈치챈 권율은 손님들을 잔뜩 초대해서 사위 자랑 한답시고 이항복의
방을 급습했다. 이항복은 당황해서 그 여종을 이불로 싸고 숨겨두었는데 권율은
이불을 보더니 "방이 좁으니까 이 이불을 좀 치워야겠네"라고 말하며 이불을 들어올
리자 이불 속에 있던 여종이 떨어졌다. 이항복은 멋적게 웃으면서 "벌거벗은
여종을 숨기기란 어렵도다!"(赤身他婢 果難匿也 : 적신타비 과난닉야)라고
너스레를 떨었고 좌중은 웃음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덧붙이자면 이 여종이
이전에 권율과 정을 통한 그 여종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정사가 아니라 패설집에 전해지는 이야기라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권율과 이항복 사이에 이런 일화가 유난히 많이 남은 것을 보면 두 사람이
장인과 사위 관계를 떠나서 뭔가 남다르게 지내긴 했었던 모양이다. 특히 권율은
아들이 없었고, 이항복도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유달리 친밀하게
지냈던 것은 이런 요인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어찌 보면 권율과 이항복은
서로에게 아버지와 아들 노릇도 해 준 셈이다. 국조인물고에 의하면 권율은 평소에
"내가 죽으면 이 의정(이항복)이 내 묘지명을 써 줄 것이니 이것으로 족하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