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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기쁨을 나누는 임마누엘 원문보기 글쓴이: ♬ 글로리아
5. 찾으시는 예수님
행9:1-9
■ 이야기 속으로
그리스 오이디푸스 신화의 오이디푸스 왕은 테베의 왕 라이오스를 죽이고 그의 왕비 이오카스테를 자신의 아내로 삼고 그는 테베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자신이 죽인 라이오스왕이 자신의 친부이고 지금의 아내인 왕비가 자신의 어머니임을 알았습니다. 수치를 이기지 못한 어머니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친 부모를 알아보지 못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두 눈을 뽑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의식을 찾은 오이디푸스가 한 첫 말은 “오, 이 빛이여!” 라고 하였습니다. 더 이상 눈이 없는 사람에게 빛이라니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신하들은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그 때 오이디푸스는 “세상의 눈을 가진 그대들은 이 빛을 보지 못하리 세상의 눈을 가진 그대들은 이 빛을 알지 못하리” 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잠언 29장 18절을 보면 “묵시가 없으면 백성은 방자히 행한다” 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즉 여기서의 ‘묵시’는 히브리어로 ‘비전’ 이란 말이고, ‘방자히 행한다’는 히브리어로 ‘신중함이나 자제력을 상실한 경거망동’ 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전이 없으면 인간은 경거망동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전이란 무엇입니까? 비전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통찰력입니다. 그러므로 비전의 사람이란 위대한 통찰력을 지닌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따라서 비전을 지닌 사람의 시선은 언제나 오늘을 뛰어넘어 보다 먼 곳을 향해 있는 것이며, 동시에 자신의 시선이 맞닿아 있는 그곳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무단히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전이 없는 사람은 항상 그의 시선이 목전에만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당연히 눈에 보이는 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감정대로, 자신의 욕구대로만 살아가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 결과는 그의 삶 속에 나타나는데 방자히 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비전이 없는 사람은 목사든, 장로든, 교인이든 그 누구도 방자해 지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크리스천은 누구든 반드시 비전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전을 혼돈해서 이해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 먼저 확인 해볼 질문
1. 당신은 어떤 비전을 가지고 살아갑니까?
■ 주제 속으로 “비전은 꿈이나 야망이 아니다”
1) 비전은 꿈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비전’ 과 ‘꿈’을 혼동하느냐 하면 마틴 루터킹 목사님의 말을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링컨 기념관 앞에서 운집한 흑인들에게 이렇게 자신의 말을 했습니다. “I have a dream" 즉 ‘나는 꿈을 가지고 있다’ 고 말입니다. 이 때 쓴 ‘꿈’은 비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흑인과 백인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새로운 미래를 향한 비전의 설교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교는 미국인들에게는 황당무계한 소리로 들렸습니다. 그래서 백인들은 ‘꿈깨라’ 고 하였습니다. 이 경우의 ‘꿈’은 공허함과 망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비전이란 미래에 대한 통찰력이기에 비전을 지닌 사람은 자신이 바라보고 나가는 미래에 대하여 부단히 자신을 맞추어 나가려고 힘쓰고 애쓰기에 어떤 형태로든 가시적인 결과가 수반되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나 꿈은 다만 머릿속에서만 즐기는 것으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꿈은 거기에 상응하는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어떤 책임도 뒤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단지 즐기는 것만으로 족하기에 꿈이란 현실도피요 망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2) 비전은 야망이 아닙니다.
야망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을 수반한다는 면에서 망상과 구별이 됩니다. 또한 야망을 지닌 자는 오늘에 안주하지 않고 무엇인가 새로운 목표를 향해 계속 나아간다는 면에서 야망과 비전이 동일해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전은 오늘을 뛰어넘어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자기 계발과 자기 꿈이기에, 비전은 이루어지면 이루어질수록 모두에게 유익함을 주는 것입니다. 그 누구에도 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망은 욕망의 산물이기에 아무리 큰 야망이 있고 높은 야망이 있다고 해도 그 근본은 욕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망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은 참 되거나 바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야망은 성취되면 될수록 자기 자신과 타인에게 동시에 해가 되는 것입니다.
■ 주제에 대한 확인
꿈과 비전은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 말씀 속으로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요절 행9: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1) 예수님을 만난 청년 사울의 변화와 비전
사도행전 7장에서부터 사울이라는 청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열렬한 유대교의 신봉자였습니다. 당시의 유대교는 타락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지도자들은 물론 믿음의 사람들도 타락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은 자신들의 잇속을 위한 장터로 변화되었고, 종파간의 기득권을 위하여 다툼은 계속되었으며, 사회의 정의나 진리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습니다. 그러나 외부에서 공격을 하거나 그들을 비난을 하면 그들은 똘똘 뭉쳐서 일사분란하게 대응을 하였습니다. 자신들에게 조금이라도 해롭게 하거나 해롭다고 판단하면 개인이든 집단이든 가차 없이 제거해 버렸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예수님마저도 자신들의 이해에 따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릴 정도로 무섭고도 거대한 이해집단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시대의 상황 속에서 사울은 성장을 하였습니다. 그는 로마의 시민으로 태어났고, 높은 학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 타락하고 변질된 유대교에 대하여는 무지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경험했거나 공부하고 연구한 것 이외에는 모두 부정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지 못했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을 인정하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사울은 자신이 믿는 신앙의 열심을 가지고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예루살렘에서 200㎞나 떨어진 지금의 다마스쿠스(다메섹)에 사는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려고 가는 길이었습니다. 사울은 이같은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을 향한 섬김과 봉사임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같은 행동은 성경에서의 섬김이 아니라 같은 이해집단에 속한 이해 당사자들끼리의 섬김이었습니다. 그런 봉사는 그릇된 자기 신념, 즉 자기 자신에 대한 봉사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2) 사울이 비전의 사람이 된 이유
사울의 섬김과 봉사는 누구보다도 열심이었지만 그것은 자신들만을 위한 섬김과 봉사였고, 자신들만의 천국생활이었습니다. 이같은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다마스쿠스를 항하여 살기등등하여 가는 사울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고 물아셨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사울 자신이 신념을 쫓아 열심을 다해 산 결과가 고작 예수님을 대적하는 일뿐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울에게 새로운 미래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비전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역사학자 토인비가 말했듯이 이 사울에 의해 유럽의 운명이 바뀌어졌다. 어떻게 그렇게 된 것입니까?
① 사울이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사로잡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사울은 그만 땅에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일어나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을 쫓아 일어나기는 하였지만 그는 이제 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주님은 비전을 알려주십니다. 6절을 보면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즉 앞으로 행하여야 할 비전을 말할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비전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이 땅에 보내주신 목적을 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습니다. 목적이 없이 창조 된 사람, 우연히 창조 된 사람, 실수로 창조 된 사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를 기도하십시오. 축복뿐 아니라 진정한 나의 비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② 사울의 눈에 비늘이 덮였습니다.
본문 8-9절을 보면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고 하였습니다. 다시 일어나긴 했지만 더 이상 세상을 볼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손에 끌려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더욱 마실 수도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성도여! 주님의 빛 속으로 들어가니 세상의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열심을 내어서 살아온 사울의 삶은 차마 쳐다 볼 가치도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삶을 위해서라면 더 이상 먹을 이유도 마실 이유도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그릇 된 사고, 어긋난 인식의 틀을 과감하게 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사울은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섬김과 봉사의 주님을 본받아 전혀 새로운 삶을 주님 안에서 살아갔습니다. 주님 안에서 사울은 진정한 비전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이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어떠한 힘을 빌려서 자신의 꿈을 이룰 필요도 없습니다.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하여 남을 아프게 하거나 남을 괴롭게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제 사울은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제 그의 눈은 덮어졌던 비늘이 벗겨지면서 새로운 빛 가운데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사울은 스스로 큰 자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작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진정 예수 안에 작은 자 바울이 된 사울은 이제야 비로서 새로운 비전을 알고 먼 미래의 자신이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지를 스스로는 알지 못해도 자신의 비전이 아닌 주님이 주시는 비전으로 무장하고 그 주님의 비전을 이루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하여 이같이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하고 헌금을 하고 기도를 하면서 믿음의 삶을 살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왜 주님의 빛을 쫓아서 살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그릇된 지난날의 삶에 대해서 눈을 멀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의 토대위에서 목표로 삼은 것, 꿈꾸고 있는 것, 지향하고 있는 그 모든 것에 대하여 철저하게 눈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눈이 멀어져야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따라 진정한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나 자신뿐 아니라 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진정한 주님이 원하시는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3) 모든 성도는 비전의 사람
모든 성도들이 다 비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정말 지금은 당장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신 비전을 가지고 있으며, 그 비전을 이루도록 우리들에게 놀라운 은혜로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교회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주시었음에 감사하며 늘 살아가고 있습니다.
① 우리에게 주신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교회의 공동체의 신실한 구성원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되새기면서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서로 경험하고 체험한 바를 나누면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확신을 가지게 하는 것이 바로 소그룹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성장시켜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생각나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가 그렇게 살아가도록 도와주고 격려해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② 모든 성도가 전심으로 기도하는데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서 일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기도하면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베푸시는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결국 바울은 아나니아를 통해서 기도함으로 그의 세상의 어두움이 살라지고 새로운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③ 모든 성도가 전도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전도는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지금까지 열심히 전도하고 있습니다. 전도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을 다시 일꾼으로 만들어서 교회와 세상의 필요한 사람들을 길러내면서 부흥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 모든 교회의 비전인 것입니다.
■ 정리와 확신
모든 성도는 교회공동체에 소속 되어서 리더를 중심으로 함께 모여서 세상의 이야기가 아닌 주님이 주시고 성령님이 함께하여 베풀어 주신 은혜와 축복을 함께 나누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나의 믿음을 성장시키고 하나님께 받은바 은혜와 축복의 말씀을 선포하고 믿음으로 하나 되어 나가는 가정이 되어서 행복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가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교회를 만들어 나가야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성도가 하나가 되어서 열정을 가지고 믿음을 정진하고 열정을 가지고 기도하며 희생하고 봉사하며 물질을 드려서 그 맡겨준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주어진 비전을 이루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비전의 사람이 되고 비전너리가 되어서 우리 성도들을 만나면 비전을 나누면서 그도 비전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비전의 전염자, 비전너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비전이 없는 사람은 방자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비전이 아닌 망상을 쫓아가면 패가망신하는 것입니다. 야망의 노예가 되면 백해무익한 흉기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세상의 눈이 멀어야 주님의 빛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비전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세상의 물든 눈을 버리게 될 때 참 된 빛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울이 참 빛이신 주님을 만나고 그 빛으로 말미암은 비늘이 덮여짐으로 바울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이러한 사람, 세상의 빛을 받았던 나의 눈에 비늘이 씌여지고 어두움에서도 참 빛을 볼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시고 부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 확신의 질문과 결단
1. 바울이 비전의 사람으로 바뀌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사울이 바울로 바뀐 뒤 어떤 비전이 생겼나요?
3. 우리 모두가 비전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먼저 어떤 결단과 자세가 필요할까요?
■ 다함께 드리는 기도
주님, 저희가 그동안 가졌던 꿈이 세상의 사람들과 다름없는 자신과 자기가족만을 위한 욕망이 아니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주님 우리의 꿈이 이기적인 소망이거나, 누구 위에 군림하거나 과시하는 출세욕이 아니길 원합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꿈인 구원의 사역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참 비전의 사람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