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마을, 유천 내호리
내가 청도(淸道)에 집 지을 때 일이다.
우리 집을 짓고 있는 시공자(施工者)로부터 전화가 왔다. 새로 지을 집터에 대추나무와 감나무 여남은 그루가 있는데 감나무 세 그루만 남기고 모두 베어야겠다는 것이다. 나는 한창 열매가 영글고 있는 유실수(有實樹)가 너무 아까워서 담벼락 부근으로 옮겨 심자고 고집을 부렸으나 이식하기에는 나무가 너무 크고 지금은 한여름이라 생존율도 낮으므로 벨 수밖에 없다는 말에 달리 반박할 거리도 없어 허락해놓고는 시골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나무며 숲인데 좁은 내 집 마당에 나무 몇 그루 더 가두어 놓은 꼴이 될 뿐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못내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내가 청도에 집을 짓기로 작정하고 청도군 매전면 호방(好方)마을에 집터를 구한 후 당시는 건강 문제로 내가 직접 현장을 확인할 수 없는 처지어서 모든 공정(工程)을 건축업자에게 일임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청매로(靑梅路)를 따라 돌아오는 길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이 길을 지날 때마다 정운 이영도(丁芸 李永道, 1916~1976) 시인이 생각난다. 시인이 그리던 고향 '二水 三山을 안고 그림 같은 그 마을' '물소리 고운 山川'이 여기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수차례 청도를 오가면서도 길목에 있는 시인의 마을 내호리(內湖里)를 간단간단하게 둘러보았으나 이번에는 작정하고 시조시인 '이호우·이영도 생가'를 살펴보기로 했다.
부산에서 오면 승용차로 신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 나들목에서 내려 청도 방향 25번 국도를 따라오다 상동역(上東驛)을 지나고 상동교(上東橋)를 건너 옥산(玉山) 삼거리에서 58번 국도인 청매로로 들어서면 다리 하나가 더 있는데 이 다리가 경상남.북도를 경계하는 유천교(楡川橋)이다. 다시 다리를 건너 조금만 가면 오른편에 '오누이공원'이 있는데 동창천(東倉川)을 사이에 두고 밀양시(密陽市)와 청도군(淸道郡)이 나누어지는 여기는 청도군에 속한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산서(山西)지역에서 내려오는 청도천과 산동(山東)지역에서 내려오는 동창천이 만나 밀양천을 이루어 밀양시 상동면으로 흘러내리는 이 일대를 유천(楡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호우(李鎬雨, 1912~1970), 이영도 오누이의 생가는 마을 안쪽에 있는 청도읍 내호리 257번지에 있고 직선거리로 100여 미터 떨어진 청매로에 오누이공원이 있다.
나는 먼저 내호리 마을 단위농협 옆 식당에서 아내와 함께 늦은 점심을 시켜먹고 마치 영화 세트장 같이 70년대 풍경을 간직한 마을길을 따라 내호리 쪽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다 보니 아직도 가동 중인 정미소가 있고 그 앞 골목 안에 작은 기와집 하나가 보였는데 철 대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여기에서 시인 오누이가 나고 자랐다고 한다.
시조시인 이호우·이영도의 생가는 1910년경에 건축된 근대기 단층 한옥 기와집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ㄱ'자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문화재청에서 지정한 대한민국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93호로 등록되어 있다.
지금은 두 분 모두 고인이 되셨지만 내가 이호우 시인은 직접 뵌 적은 없으나 정운 이영도 시인은 먼발치에서나마 생전에 뵌 적이 있다. 1967년 부산 수정동에 살 때 앞집에 존경하는 청마 유치환(靑馬 柳致環) 선생이 살고 계시어 길에서 자주 그분을 뵐 수 있었고 어쩌다 마주치면 인사드리는 기쁨이 있었는데 그 해 2월에 청마 선생은 집 앞 버스정류소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중 인도로 돌진한 직행버스에 치여 돌아가셨다.
장례식은 선생께서 학교장으로 계시던 영도(影島)의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 교정에서 있었다. 이때 문상객 가운데 목이 길고 청초한 정운(丁芸) 시인을 보았다. 서로 인사를 나눌 처지는 아니었지만, 검정 치마 저고리를 입고 깊은 사념(思念)에 잠긴 듯 얼굴은 창백하고 매우 허탈한 표정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영도 시인은 시조시인 이호우 님의 누이동생으로 문예동인지 '죽순(竹筍)'에 작품 활동을 했고 통영여자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실 때 청마 선생을 만났다고 한다. 시조시집 '청저집(靑苧集)' '석류' 외 여러 권의 시집을 냈고, 만년에는 부산어린이회관장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일찍이 부군과 사별하고 혼자 딸을 키우며 살다가 중년에 자기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의 전도로 부산 장전동에 있는 소정교회에 출석하며 신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의 유고시조집인 '언약(言約)'은 기독교적인 구원의식과 진한 모성적인 회귀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갈원(渴願)' '종(鍾)I' '기도' '은총' '추청을 간(磨)다' 등은 그의 기독교 신앙이 짖게 나타나는 시조들로 만년을 독실한 신앙인으로 살다 갔음을 엿볼 수 있다.
"여기는 슬기의 이방 / 당신마져 외면하고 // 목마른 소망들이 / 지향(志向) 잃은 벌판인데 // 먼 궁창 / 대기권 밖에선 / 달빛보다 곱다든가. // 주! 이젠 그 못자국 / 만지게 하옵소서 // 우러르던 첨탑(尖塔)들로 / 허울로만 남아 선 자리 // 기댈 곳 / 없는 내 의지 / 홀로 추청(秋晴)을 간(磨) 다" <'추청(秋晴)을 간(磨)다' 전문>
시인의 생가에서 동창천 쪽으로 잠시 걸어 나오면 청매로에 오누이공원이 있다. 이곳 출신 이호우, 이영도 남매가 우리나라 현대시조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긴 것을 기리기 위해 근래에 조성된 기념공원이다.
생가 마을 어귀에 소박하게 조성된 소공원이기는 하나 두 시인의 시비와 각종 조형물이 앞뒤 산 사이로 흐르는 냇물 소리가 들리듯 주변의 환경과 잘 어울려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반나절이나 서가(書架)를 뒤져 정운 시인의 처녀시조집 '靑苧集' (1954년)을 찾아냈다. 누렇게 바랜 세로 쓰기 석판인쇄본 책장이 바스러질라 염려하며 조심스레 넘기다 시인의 시 '향수(鄕愁)'를 찾아 선생께서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여기에 그대로 옮긴다.
鄕愁
못잊을 人情이매 아껴 떨쳐 나온 고향
二水 三山을 안고 그림 같은 그 마을은
눈이나 내리는 밤엔 이리 삼삼 그립소
모두가 정답고도 황홀ㅎ던 꿈이어라
하늘에 별이라도 따고 싶던 그 시절을
오부시 버려둔 고향 무덤 같이 그립소
婦女 三從의 道를 眞理냥 당부하여
알지도 못할 곳에 신행길 날 보내신
靑기와 소슬大門도 꿈길 같이 그립소
젊음도 슬픈 꿈도 속절없던 내 고향은
손 잡고 반겨줄 벗 하나 없건마는
물소리 고운 山川이 杜鵑 같이 그립소
http://blog.naver.com/kjyoun24/221192990560
첫댓글 마치 보지않아도 가본 듯 착각이 들 만큼 이리 세세히 기록해주셔서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