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태왕,모용선비나라들인 연.토욕을 정벌하고 신라를 복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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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왕족 무덤에서 출토된 광개토태왕 제사용 청동솥
김씨로 창씨개명한 모용선비 신라는 100여년간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흉노.선비(연.토욕.신라)
모용 선비 나라들=연나라(중원)=토욕(감숙성)=신라(한반도)!
지나국과 러시아에 있던 북방의 흉노는 동으로 이동하면서 선비세력과 충돌하여 선비세력을 대흥안령 산맥으로 밀어 낸다.
선비세력을 평정한 흉노는 권력투쟁과정에서 북흉노와 남흉노로 세력이 갈리게 된다.그러다가 한나라와 연합한 선비족이 흉노를 정벌,복속하면서 2세기 이후 초원의 주인이 되었다. 이 때 서쪽으로 이주한 흉노가 로마국경지역을 침범하며 로마와 싸우다가 아틸라 사후 분열되어 마자르족과 함께 헝가리를 세웠다.
남흉노는 내몽골 동남으로 내려 와 지나족으로 흡수된다. 남흉노는 잘 알려져 있듯이 전한에 귀의하여 왕망과 함께 신나라를 세우는 김일제 (투후국)는 멸망후 배를타고 김해와 경주에 들어 오게 된다. 신라 문무왕비문에 새긴 성한왕 투후는 모두 한나라에 투항하여 한무제에게 충성하여 한나라 시중에 까지 오른 김일제을 두고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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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고구려에 쫓긴 모용선비 기마세력은 경주까지
들어 와서 김씨로 창씨개명하고 신라왕조를 세우다.
기원후 342년 모용선비족이 세운 전연의 모용황은 고구려(고국원왕 331~371)를 침공한다. (부친 :모용외, 형 :모용한, 동생 모용태)
5만 5천의 군사로 계략을 꾸며 북로군과 남로군으로 나눠 들판이 있는 북로군은 기마 1만 5천을,협곡이있는 곳으로는 남로군 기마 4만을 보내 현도를 점령한다.2차례의 침공으로 연나라 왕 모용 황은 고구려의 태왕후 주씨와 왕후등 5만의 백성을 빼앗아 가며, 미천왕의 묘를 파헤쳐 시신을 가져 갔다.
고구려 고국원왕은 왕자 고무에게 5만의 병사로 북부전선으로 올거라는 전략으로 전연의 기마군단을 기다렸으나, 전연의 1만 5천의 군사는 미끼였던것이다. 자신들을 미끼로 쓴 것에 대한 불만과 싸울 의지가 없었던, 전연의 군대는 삽시간에 무너지고 동으로 쫓기게 되었다. 살아 남은 군사들은 동쪽 해안을따라, 반도 경주에 들어 오게 된다.
전진왕 (3대왕 357~385)부견이 381년에 신라사신을 맞으면서 나눈 대화가 있다.부견이 신라사신 위두에게 묻기를 계림을 어찌하여 신라라고 하는가? 라고 물었다.답하기를 닭의 상서로움이 있어 그런 연유를 계림이라 합니다. 울타리를 새롭게 한다는 뜻이 있어,신라라고 합니다.
울타리를 새롭게 했다는 말은 새롭게 나라를 세웠다는 의미이다.박씨 석씨왕조를 무너 뜨리고 나라를 사로에서 신라로 울타리를 새롭게 열었다는 의미다.
또 신라본기 내물 마립간(356~ 402) 26년 (381) = 석씨 이사금에서 기마병의 상징 마립간으로 바뀜).
381년 봄과 여름에 가물어 흉년이 들었다. 백성이 굶주렸다.위두를 부견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부견이 위두에게 물었다. 그대가 해동의 사정을 이야기함에있어,사용하는 언어가 옛날과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가?
위두가 대답했다. 이는 또한 중국과 동일한 현상입니다. 시대가 변하면 명칭과 호칭도 바뀌는 법이니,오늘날의 언어가 어찌 예전과 같겠습니까? 라고 답했다. 위의 기록에서 보았듯이 석씨왕조를 점령한 전연의 패잔병들은 고구려 군사들에게 쫓기며, 들어와 사로를 점령하고 왕통을 빼앗아 이사금을 마립간으로 고치고 신라를 세운 것이다.
내물마립간부터 경주김씨로 바뀐 기록을 찾아가 보자.
법흥왕(514~540)의 한국식 이름은 원종이다. 선비식이름은 모용태라고도하며, 또 모용진 이라고 불렀다. 후에 한국식 성을 사용하여 모태/모진 이라고 불렀다.이는 524년 봉평 신라비에 그대로 드러나있다. 봉평 신라비를 세울때는 신하들이 牟奉(모진)으로 새겼다.
후에 모용진(모진)은 법흥왕 김원종으로 개명하여 박씨,석씨와같은 성을 따르게 되었다.17대 내물마립간(356~402)은 고구려를 침략했던 전연의 북흉노- 선비계가 정권을 빼앗았다가,18대 실성마립간(402~417)은 중국 신나라에서 망명해온 김알지 후손 남흉노 -선비계로 넘어 갔다.
그러다가 19대 눌지마립간(417~458), 20대 자비마립간(458~479),21대 소지마립간(479~500 )은 전연계가 이어 간다.
그러다 22대 지증왕(500~514)때에 이르러 완전히 한국식 법제와 토대를 구축하게 된다.이때에 완전히 외부계 일반 백성들이 선비어를 졸업하고 한국어를 사용하게 된 듯 보인다.
사서 기록으로 법흥왕이 모용씨>모씨>김씨로 성을 바꾼 기록이 존재한다.법흥왕 때에 이르러 완전히 법제와 율령을 한국식으로 반포하고 낙랑 유민계인 이사부 등에게 명하여,봉평신라비를 세웠는데, 신하들은 그들의 과거를 잘 몰라 (언어소통 부재) 모씨(綦容)를 牟씨로 써서 봉평신라비에 새긴 것이다.
첫댓글 김일제 후손 김알지세력은 김씨로 개명한 모용씨 신라의 기반세력이 된다.
골품제에서 왕족은 모용씨(성골)이 되고, 귀족(진골)은 김알지세력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