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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박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는 토마스 네이글이라는 철학자가 작성한 의식에 대한 지금은 유명해진, 하나의 사고실험이 들어가있는 논문입니다. 그다지 길지 않은 글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논문은 꽤나 많은 곳에서 화제가 되었고, 지금도 심리 철학이나 물리주의를 다룰때 한번씩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영향력이 있는 이 논문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에서도 등장하며 비판을 받게 됩니다. 우선, 박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코스텔로의 비판을 알아보기에 앞서, 토마스 네이글은 이 짧은 논문에서 어떤 주장을 했는지 먼저 알아야 할것 같습니다. 최소한 양쪽의 주장을 전부 알아야지 우리가 어떤 입장을 택할 것인지, 어느 입장의 근거와 논지가 약한지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네이글은 상당히 도발적이게도, 논문의 첫 문단부터 물리주의를 비판하고 나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주장을 알기 이전에, 물리주의라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아야합니다. 물리주의는 흔히 유물론이 지니고 있는 약점과 용어들을 조금더 세련되게 바꾼 주의라고 생각하시면 편할거 같습니다. 여기에서는 엄밀한 구분은 시도하지 않을 예정이니만큼, 유물론과 동일시하셔도 될거 같습니다. 물리주의는 기본적으로 유물론이 그러했던 것처럼, 정신적인 것을 거부합니다. 우리가 심신문제라고 부르는 문제를 다룰때 물리주의는 정신과 육체를 동일한 것으로서 파악합니다. 그가 논문에서 '즉 물리주의의 의미는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정신의 상태는 몸의 상태라는 것을, 그리고 심적 사건은 육체적 사건이라는 것이라고.' 일원론의 성격을 지닌 물리주의를 그는 비판하고 있기에, 그의 논문의 방향성은 이런 일원론에 맞서서 이원론, 즉 몸과 마음, 정신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주장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주장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X의 경험을 알기 위해서는 X의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위의 논문에서 박쥐의 예시를 들며, 우리가 박쥐가 된다고 상상하는 것은 '박쥐가 박쥐로서 박쥐가 된다고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박쥐 인간으로서 박쥐가 된다고 상상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박쥐라는 생명체의 행동방식과 지각방식, 그리고 속성을 인간에게 있어 일반적인 형태로서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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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글 씨에 따르면 그저 박쥐가 사는 식으로 산다는 건 어떤 것인가 상상해보는 것, 우리가 밤에는 시각 대신 청각에 의존해 길을 찾아 날아다니면서 곤충을 잡아먹고 지내고 낮에는 거꾸로 메달려 지낸다고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데, 왜냐하면 우리가 그렇게 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박쥐처럼 행동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알고자 하는 것은 박쥐가 박쥐이듯이, 박쥐로 존재한다는 건 어떤 것인가 하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는 결코 그런 앎에 도달할 수 없는데, 우리의 마음이 그 일에 부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박쥐의 마음이 아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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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책에서 코스텔로의 입을 빌려 네이글의 주장을 간략히 요약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박쥐가 된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 근본적인 실패를 맞이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우리가 박쥐의 마음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입니다. 우리는 박쥐가 되는 것을 '상상'하여 시도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우리의 눈이 매우 나빠지고, 거꾸로 매달려 있는채로 잠을 자고, 벌레를 먹는 등의 그런 행위를 하는 박쥐를요. 그러나,그 상상은 결국 철저하게 인간의 관점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그의 상상력에 대한 개념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경험한 것을 기반해서 가능합니다. 현실과 동ㅁ덜어져있어 보이는 상상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부분에서 현실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전혀 경험하지 않은 것을 상상하지 못합니다. 상상의 한계라고 부를 수 있는 그것으로 인해서 박쥐의 입장을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에는 우리의 입장에서 바라본 박쥐가 되어버립니다. 과학자는 박쥐의 신경생리학적인 구조를 알아낼 수 있겠지만, 그것이 박쥐의 사고방식의 모든 이해로는 이어지지 않습니다. 박쥐가 먹이를 볼때 먹고 싶다는 욕구를 먼저 느끼는지, 익숙함을 느끼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관측된 박쥐는 행동방식이 모두 다 밝혀진 것이 아니라 평면적이며 일반적인 형태입니다. 그것은 우리와는 굉장히 이질적인 것입니다.
왜 박쥐인가에 대한 대답으로 그는 우리는 박쥐가 경험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은 그의 사고실험, 박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전제로서 작용합니다. 우선, 우리는 박쥐가 경험한다고 믿어야 합니다. 물론 그는 강아지나 고래와 같은 다른 포유류를 선택할 수도 있었고 - 그들은 우리가 알아낸바까지에 따른다면 박쥐만큼이나 독특한 지각 체계를 지니고 있기에 - 또는 포유류도 아닌 동물을 고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왜 박쥐냐고 하면, 박쥐는 발생학적인 계통에서 우리와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면서 동시에 우리와는 매우 이질적인 삶의 방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우리와 너무나도 이질적인 존재에 대해서 그것이 경험을 지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개미와 원숭이를 비교해 보았을때 어느 것이 경험을 지닐 확률이 높을까요? 우리의 관점에서는 당연하게도 원숭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인간이 경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기에 인간과 유사한 원숭이가 경험을 지니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이에 반해 개미 같은 경우는 우리와 계통적으로 너무나도 멀어져 있고 닮은점보다 다른점이 훨씬 더 많은 것으로 드러나기에 경험에 대한 답으로는 의문이 들기 십상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박쥐라는 포유류이며 동시에 지각방식이 판이하게 다른 존재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과는 너무나 다른 존재에 대한 것을 넘어서, 아예 이질적이고 우리가 지니고 있는 지식 수준에서 공통점이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언어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지적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외계적인 생명체에 대해서는 어떨까요?
우리의 경험으로 다른 존재에 대해 기술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근거로 네이글은 화성인의 예시를 듭니다. 화성인이 등장하는 예시에서는 화성인은 우리와는 철저하게 다른 시각적인 지각을 지니고 있는 외계적인 존재로서 가정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네이글은 화성인이 우리에게 있어서 나타나는 물리적 현상들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불가능 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화성인이 시각을 활용해서 지각하는 것이 불가능한 생명체로서 등장하였으니, 시각만을 활용해서 지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여러 감각들로 지각 가능한 물리적 현상으로서의 번개를 화성인과 우리가 같이 보고 있다고 해봅시다. 이런 경우, 화성인들은 우리가 느끼고 보는 번개라는 물리적 현상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번개는 단지 보이는 것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더 많은 것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의 소리, 발생하는 열, 공기와 분자들의 진동, 발생되는 빛 - 섬광과도 같은 -, 수반되는 또다른 물리적인 현상들 (화재, 땅의 파임 등) 은 우리가 볼 수 없다고 해서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네이글은 화성인이 현상으로서의 번개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번개라는 것을 이해하지는 못한다고 합니다. 단순히 우리가 번개를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우리는 화성인이 번개에 부여하는 의미와는 다른 의미를 번개에 부여합니다. 화성인이 바라본 번개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바라본 번개에 대해서 외재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화성인이 애초에 인간과는 다른 시지각적인 작용을 한다고 가정하였기 때문에 인간의 관점과 화성인의 관점은 다를 것이며, 이는 동시에 화성인과 인간이 일대일 대응하는 동일한 지각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지니고 있는 이해는 천지차이일 것을 의미합니다. 화성인들은 번개에 대해서 우리가 번개를 보고 지각하며 얻는 이해의 영역보다 더 많은 이해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인간이 번개에 대해 지니는 이해에는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화성인이 우리가 번개에 대해서 부여하고 있는 수많은 신화적인 상징들과 의미들을 바라본다면, 화성인은 인간의 입장에서 이를 해석할 것이 아니라 화성인 자신의 입장에서 어째서 이러한 의미부여가 되었을까를 생각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각의 방식은 결국 문화에 대한 차이로도 이어지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 다가갈수는 있겠지만 온전하게 받아들일수 없습니다.
이것은 나아가 물리적 현상 또는 그 어떠한 현상 대한 전이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네이글의 실재론은 그가 말하는 것과 같이 인간 개념을 넘어서는 사실들의 실존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의 논문이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간은 인간이 생각하고 바라보고 느낄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을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칸토어가 초한수를 발견하기 이전에 모든 사람이 흑사병으로 죽어나갔더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존재했을 것이다.' 이 문장이 그의 실재론적 전제를 표현해주는 문장입니다. 이 문장처럼,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 전인류가 죽었다고 생각해봅시다. 흑사병이 퍼진 뒤 한참 뒤에 태어날 칸토어라는 인물은 당연히 태어나지 못했을 뿐더러, 모든 미래의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초한수가 칸토어에 의해서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초한수라는 개념은 칸토어와 엮여서 쌍생성하거나 쌍소멸하는 관계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칸토어가 초한수라는 개념을 발견한 것은 우연적인 것이며, 만일 그가 발견하지 못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인간에게 초한수라는 개념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트라팔마도어인들에게, 화성인들에게 초한수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관점을 우주적인 것으로 돌린 이상 우리는 잠재적인 우주적 존재들의 개념들을 무시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 내에서 칸토어가 발견하지 못하더라도 화성인 A가 그것을 발견해낼 수도 있는 것처럼, 인간 개념을 넘어서는 사실은 그에게 있어 실존합니다.
박쥐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없는 이유도, 인간이 알 수 없는 박쥐의 입장이라는 것이 적어도 아직까지는 부재하기에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물리적 현상으로 들어간다면, '그 누구도 어느 것을 완벽히 이해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번개를 보았을 때 인간으로서 우리는 번개를 보고 느끼는 인간의 입장은 알 수 있겠으나, 화성인의 입장에 대해서 알 수 없습니다. 그 역인 화성인도 인간의 입장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입장을 인간이 화성인의 입장을 생각하는 것으로서의 명제가 아니라 참으로서의 명제입니다. 위에서 그가 주장한 인간 개념을 넘어서는 사실들의 실존에서, 우리는 이걸 인간에게만 한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확장시켜 X 종의 개념을 넘어서는 사실들의 실존이라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 또는 화성인 - 가 번개에 대해 무수히 많은 이해의 영역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지식체계에는 빈틈이 있기 마련입니다. 최소한 우리는 화성인이 번개를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이 비록 화성인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만나본 적도 없고 상상한 적이 없는 지각이 가능할 정도로 지적인 생명체의 입장 - 가령, 박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라는 논문의 존재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의 존재에 대해서, 그는 박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라는 논문을 읽고 이해한 사람의 이해를 알지 못할 것이며, 이것은 그에게 무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설령 그가 논문을 읽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얻은 이해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동일한 경험을 지닌다는 것과 관점을 지닌다는 것은 결코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 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이해는, 지각가능한 전존재의 이해라는 거시적인 수준에 있어서의 이해에 있어서, 그런 입장에서는 결코 온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또 다른 결론으로는, 우리는 상대의 이해에 대한 척도를 가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화성인이 우리와는 다른 감각을 지녔기에 번개에 대해서 우리보다 더 많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절대적인 사실은 아니겠지만) 동시에 화성인의 입장에서 (인간이 생각한 화성인이 된 입장) 는 인간이 번개에 대해서 자신들보다 더 많은 이해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삼체인들이 보여준 것처럼 광속의 n%이상 속도를 내는 것이 가능한 전함을 보여줌으로서 어떤 수-과학적인 더 많은 이해를 보여주는 것과는 다르게, 마치 현상학에서 말하는 에포케 (판단중지) 를 발휘함으로서 비로소 들어나는 객관적인 물리적 현상에 대한 이해의 영역으로 다가온다면, 삼체인과 인간 가운데 누가 더 우위에 있느냐라는 질문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능한 것은 인간과 다른 종에 대하여 그들이 이러이러한 이해에 도달해있을 것이다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지, 그 어떠한 것을 전적으로 옳다라고 확언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그들의 지각방식의 작동원리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것 만으로 지식의 절대 우위가 생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우리와 비교해 어느 수준의 지식에 머무르는지 알 수 없기에 선뜻 어느 종이 더 많은 이해를 이뤄냈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화성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는 또다른 예시로, 즉 주관적인 인간의 언어로 기술 불가능한 경험으로 일반적인 사람과 태어날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의 예시도 듭니다. 우리에게 일반적인 경험의 용어들은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기술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지닌 주관적인 경험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경험과는 판이하게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은 시야를 사용하는 우리보다는 방향정위를 사용하는 박쥐와 닮았음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카버가 대성당에서 보였던 것과 같이,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대성당은 어떻게 생겼는지 직접 손을 잡아 그려 그들이 생각하는 대성당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반대로 우리는 그들에게 기둥의 모습과 질감, 파여있는 정도와 깊이감을 하나하나 묘사하며 그들에게 대성당을 상상해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서로의 경험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근본적으로 합치될 수는 없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그리는 대성당은 우리가 눈을 뜨고 바라본다면 그저 선들의 무질서한 집합에 불과할 것이고, 우리는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우리의 설명을 듣고 상상한 대성당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합니다. 만약 그가 자신이 이해한 방식대로 설명한다면, 우리는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한 대성당'이 아니라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한 대성당의 모습을 우리의 입장에서 상상한 입장'이 되어버려 되려 그것은 우리의 관점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시도를 통해서 '빨간색을 보고 트럼펫을 들은' 사람과도 같이 두개의 관점을 지니는 존재로의 도약을 시도할 수 있지만, 온전한 성공은 아직 요원한 일로서 보입니다.
지적해 두어야 할 점은 화성인과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 사이의 공통점은 이들 모두 시각적인 방식으로 지각하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생각해본다면 이들이 보편적인 인간이 지각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이 같은 '것'을 느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둘이 동일한 경험을 지닌다는 것은 아닌데, 후자의 경우에는 화성인과는 다른 정신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보편적인 인간이 공유하는 감각이나 정신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 그 하나로 인해서 그는 화성인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며, 화성인의 경험을 얻을 수 없습니다. 심신문제는 그저 지각방식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도 연관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인간인 우리가 경험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어떤 대상이나 사건을 감각함에서 기인합니다. 경험은 단순히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최초의 사건 - 물건을 바라보거나 밥을 먹는것 - 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후의 과정까지 포함한 하나의 과정으로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나는 물건을 바라보고 이것이 이것이구나라고 생각하거나 밥을 먹으면서 맛이 어떤지 느끼는 것까지 내 경험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앞을 볼 수 없는 사람과 화성인의 관점이 다른 이유는 그런 경험을 받아들이는 육체가 동일하지 않다는 문제 또한 존재합니다. 화성인의 장기와 인간의 장기가 같지 않기 때문에 설령 이들의 지각 방식이 동일하다고 가정하더라도 경험을 받아들이는 방식에서 차이나기 때문에 이들이 같은 관점을 지녔다라고 말하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이전까지 물리주의와 환원주의에서 시도된 것들은 인간적인 것입니다. 물리주의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사물의 객관성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인간의 관점에서 멀리나갈 수 있는 한 멀리 나갈수록 정당할 것입니다. 그것이 객관적인 기술이라고 그들은 부를것이기 때문이고, 우리가 인간중심적인 관점에서 멀어질수록,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경험을 기술할 가능성이 적어지기에, 그것은 덜-인간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는 물리주의에 대해서 확실한 부정을 시고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마지막에 논문을 마치며 이야기했던 새로운 현상학의 개발, 인간만의 관점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 전생명적인 관점을 포괄할 수 있는 현상학을 만들어내는 것, 이것이 네이글이 생각하기에 있어 심신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리고 기존에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도구들은 이러한 기준들을 만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다른 종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으로서.
이를 조금더 쉽게 풀어서 쓴다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기술이라는 행위를 하는 주체가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 사람을 후설이라고 부릅시다. 그렇다면 후설이 기술할 내용은 그 자신의 경험에서 기인한 것일 겁니다. 그것이 현상학적 방법이 되었던 실증주의적 방법이 되었던 간에 말이죠. 그리고 그가 기술할 대상이 있다고 한다면, 마치 의자와 같이, 후설은 의자에 대해서 기술할 것입니다. 여기서 네이글은 일반적인 상황에서의 기술은 후설이라는 기술자가 개입된다고 말합니다. 그 물질로서의 의자를 경험하는 주체가 된다는 것은 그것의 기술에 들어있는 어떤 것이 기술자로서의 후설임을 가정해야한다고. 모든 행위는 결국 그것을 행하는 주체자인 후설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그 의자는 후설이 바라보고, 느끼고, 감각하기 때문에 그 의자인 것이고, 후설의 관점에 있어서 고정적인 것이기 때문에 타인은 그 의자에 대한 기술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고전적인 기술방법에 반대해서, 그가 원하는 것은 특정한 관점에 구애받지 않는 기술입니다. 의자에 대한 '후설'의 기술이 아니라, 그저 의자에 대한 기술이라는 것을요. 그가 요구하는 발전적인 기술이란, 특정한 주인공적인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 기술입니다. 후설이 보고 있는 의자를 동시에 보고 있는 기술자인 하이데거가 갑자기 나타난다고 해봅시다. 이때 네이글이 원하는 기술은, '후설이 본 의자'와 '하이데거가 본 의자'가 아니라 '의자에 대한 기술 두개'입니다. 철저하게 기술의 영역에서 그는 주관성을 배재하려고 노력합니다. 우리가 만약 '후설이 본 의자'에 대한 기술을 계속해서 사용한다면 우리가 마주하게될 기술의 끝은 후설이라는 인식의 주체가 중심이 된 기술일 것입니다. 하이데거 또한 마찬가지고요. 그 중심을 없애고 최대한 객관성의 영역으로 나아가자는 것이 그가 원하는 방향성입니다.
코스텔로의 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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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다는 것은 살아 있는 영혼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동물은 -- 우리는 모두 동물이지요. -- 체화된 영혼입니다.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가 보았던 것, 그리고 그 나름의 이유에서 부인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동물은 기계에 배터리가 있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즉 그것을 돌아가게 만드는 불꽃을 일으키기 위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동물은 체화된 영혼이 아니고, 그 존재의 성질은 기쁨이 아니다, 이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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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결국 박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서 가져온 내용을 실질적인 심신문제 또는 경험과 지각이 대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미온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네이글이 시도하고자 하는 엄밀한 정의에서의 물리주의와 심신문제에서의 논지가 아니라 감성적인 측면, 즉 우리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부분은 어디에서 시작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이것은 그녀가 이전부터 다루었던 문학의 연장선으로 등장한 동물이 대한 내용입니다. 동물은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문학 이후에 등장함으로서 표현이 불가능힌 잔인함과 인간적임과 동물적임 그 사이를 드러내는 독특한 성격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것의 확장으로 나타나는 것은 박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입니다. 동물이라는 구분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라는 책에서는 하나의 타자성으로서 드러나고, 부서야할 하나의 지향점으로 설정됩니다. 동물이라는 존재와 인간이라는 존재 사이에는 분명한 육체적인 차이가 드러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인간에게 부여된 우월성이 합리화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처럼 말이죠. 과거에는 타자로서의 동물을 어떻게 이용하고 활용할지에 대해 주안점을 두었다면 지금에 와서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고 공생하려는 방법을 찾으려고 합니다. 코스텔로는 이해라는 측면에서 이 논문에 접근합니다. 기존에 다루어졌던 도구들, 즉 물리주의나 현상학과도 같은 방법론에 대해서 그것들은 관찰자의 주관만을 담기에 타자를 이해하는데 활용될 수 없다는 주장을 구녀는 엉성한 방법으로, 그렇지만 자신만의 방법인 채로 반박하려고 시도합니다. 동물의 침묵은 거대해져만 가며, 그 침묵의 메아리는 우리에게 계속해서 들려옵니다. 고양이가 그르렁 거리는 소리, 새들의 지져귐, 돌고래의 귀를 긁는 듯한 소음까지. 수많은 시간을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을 타자로서 규정한 이상 그들과의 언어적 장벽은 허물어지기는 커녕 더더욱 쌓여만가고 입니다. 그것을 연구하는 과정 또한 발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우리로서는 아직까지 그것이 진정 옳은 것을 지시하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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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박쥐로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로 충만한 것입니다. 충만하게 박쥐로 존재함은 충만하게 인간으로 존재함과 유사한데, 후자 역시 존재로 충만합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박쥐 존재, 후자의 경우에는 인간 존재이겠지요. 하지만 그런 고려는 부차적인 것입니다. 존재로 충만한 것은 신체-영혼으로 사는 것입니다. 충만한 존재의 경험을 가리키는 한가지 명칭은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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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네이글이 다룬 문제 자체에 대한 하나의 전환을 시도합니다. 우리가 동물의 관점을, 가령 박쥐의 관점에 대해서 알려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모든 시도들은 단순히 그것의 감각이 무엇일까 생각한다거나 특정한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요. 그녀는 네이글이 논문에서 밝힌 그들의 경험을 이해하고 박쥐의 감각을 지니며 그들의 행동을 '인간의 관점이 아닌 그들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존재에 대해서 더더욱 가까이 다가가려는 시도에 그녀는 부차적이라고 말하며 그것이 아닌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존재의 충만함에 대한 앎을 키워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박쥐와 인간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아도, 분명하게 알수 있는 것은 박쥐는 인간이 아니며 인간은 박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살아 행동하는 방식부터 세상을 인식하고 지각하는 방식, 그리고 사고하며 경험하는 방식까지,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더 많아 보이지만, 그래도 박쥐와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존재합니다. 바로 그것은 지금 당장, 살아있다는 것. 거기서부터 코스텔로의 주장이 시작됩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그것을 살아있음에 충만하다는 것, 다르게 말하자면 온전하게 그것으로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박쥐는 매순간 박쥐의 사고를 하고 박쥐의 인식을 하고 박쥐의 행동을 합니다. 살아있는 인간은 매순간 살아가며 인간의 사고와 인식과 행동을 하는 것은 매한가지고요. 그것을 태어나 그것으로 살아가고 그것으로 죽어간다는 것, 그 존재의 충만함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서로가 서로를 공감할 수 있는 길입니다. 비록 우리가 네이글이 말한 것과 같이 박쥐는 인간의 생각을 알지 못하기에 우리가 그것에 공감을 할 수 있더라도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발휘하는 공감이 무의미 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그녀는 모순적이지만 우리의 공감 자체가 타자에 귀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발휘하는 주체에 관계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그 반박을 회피합니다.
그런 공감적 상상력을 끼워들이면서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그녀에게 공감이란 타자의 인정을 받지 못하기에 우리가 아무리 존재의 충만함이라는 요소로 박쥐와 가까워지려고 시도하더라도, 우리는 동물 그 자체의 인식에 도달할 수 없으며, 인간을 탈출해나가서 인간 고유의 관점을 저버리지도 못한다는 지점을 보입니다. 그녀의 네이글에 대한 비판은 코스텔로가 시도하고자 했던 동물과 인간 사이의 경계의 벽을 저무르려는 시도를 무산시킵니다. 우리가 존재의충만함을 느끼려고 공감이라는 것을 발휘하는 것, 그 자체는 서로에게 이해될 수가 없기에 인간이 발휘하는 공감은 인간에게만 통용되고 동물에게 적용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다른 주장으로 그녀는 인지와 생각에 대립시키는 것을 충만함, 체화됨, 존재의 감각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인간을 데카르트가 보았단 그저 생각만 하는 사고의 기계로서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녀가 강조하는 것은 존재의 감각입니다. 데카르트가 감각을 배재했던 것과 정확히 반대로 그녀는 감각이라고 부르는 것을 중요시합니다. 그것의 예시로서 그녀는 죽음이라는 것을 가져옵니다. 우리가 지금 당장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것은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사실일 겁니다. 거기서 출발해서, 그녀는 우리는 당장 우리가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모든 인간은 죽게 되어 있다, 나는 인간이다, 따라서 나는 죽게 되어 있다' 라고 이야기하며 이것이 우리에게 체화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 물론 경험할 수도 없지만 -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으며, 나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타자를 포함한 모든 인간에 대해서 그것이 가능합니다. 내가 언젠가 죽게 될 것이라는 절대적인 명제 앞에서, 나는 그것을 앎으로서 받아들이며 나에게 다가올 두려움인 죽음을 넘어서 살고 계속해서 그것을 뒤돌아봅니다. 이것이 네이글의 주장에 대해서 비판이 되는 지점은 '앎으로서 받아들임'에 있습니다. 코스텔로는 내가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네이글은 '내가 시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시체가 시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는 것일까' 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합니다. 당연하게도 코스텔로에게는 이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지점이고요. 우리가 시체가 어떤 존재인지 완벽하게 알 수는 없어도 시체가 사고를 하거나 자신의 관점에서 생각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코스텔로가 말하고 있는 죽음에 대한 생각들은 시체를 넘어서는 것이기에 우리는 최소한 시체 이상의 관점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때 시체로 존재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면, 이것이 박쥐에 적용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코스텔로에게 존재의 충만함이란, 시공간 내에서 자신의 신체를 지니고 존재한다는 감각을 지님과 동시에 살아있음을 느끼는 감각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카프카를 마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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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카프카가 코를 후비는 사람들에 대해 쓰진 않았지. 하지만 카프카는 교양을 쌓은 자기의 불쌍한 원숭이가 어디서 어떻게 짝을 찾을지 시간을 갖고 자문해봤지. 그리고 사육사들이 마침내 그의 짝으로 만들어낸 반쯤 길들여진, 어리둥절해하는 암컷과 그 원숭이가 어둠 속에 함께 있을 때 과연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도. 카프카의 원숭이는 삶 속에 박혀 있어. 중요한 건 그 박혀 있음이지, 삶 자체가 아니야. 카프카의 원숭이는 우리가 박혀 있듯이, 네가 나에게, 내가 너에게 박혀 있듯이 박혀 있지. 페이지에 흔적이 남아 있든 그렇지 않든 그 원숭이는 끝까지, 괴롭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끝까지 추적당하는 거야. 카프카는 우리가 잠들어 있는 틈에도 계속 깨어 있어. 카프카가 연결되는 지점이 바로 거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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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국 온전한 동물로 되기는 불가능 하지만 그 존재로서 살아가는 것은 어떨 것인가에 대한 시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코스텔로의 주장으로 알 수 있게되었습니다. 그것의 끝에가서 제기되는 문제는 이제, 동물되기가 아니라 인간되기입니다. 코스텔로는 인간이 인간으로 되는 것을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원숭이 빨간 피터 또는 어느 학술원의 보고'에서 찾아냅니다. 그녀에게 일관성을 볼 수 있는 부분이, 비록 인간과 동물이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인간성을 동물으로 보이는 빨간 피터에게서 찾아내기 때문입니다. 빨간 피터라는 등장인물은, 우리가 원숭이 인지 인간인지 확실하게 말하기 어려운 상태에 놓여있는 존재입니다. 분명히 원숭이인 것처럼 보이는데, 그가 주장하는 것은 자신이 인간으로서 생활한 것을 보고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인간 생활에서는 옳지 못한 것들이 피터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고 옳은 것입니다. 빨간 피터가 두러내는 것은 프루스트가 보인것과 비슷합니다. 그가 당대의 귀족사회에 만연한 스노비즘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빨간 피터는 그것을 어린아이의 시선이 아니라 원숭이의 입장, 즉 동물의 입장에서 보여줍니다. 빨간 피터는 인간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그 자신이 지니고 있는 동물성을 일부 포기했습니다. 그 덕분에 피터는 동물의 입장에서 약간 벗어난 동시에 인간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었으며 인간을 평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물이 지니고 있던 동물성을 포기한 것, 그것으로 인해서 동물의 존재의 충만함은 약간 사라져 갔고, 이는 그의 순수함의 상실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을 행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일부를 포기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래서 코스텔로는 피터가 되어야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속에 박혀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내면의 동물적인 것, 즉 빨간 피터를 내면에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프로이트의 초자아는 결과적으로 인간 사회에 대한 것입니다. 초자아가 발휘하는 것은 인간의 관념에 대한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하면 안되는 것에 대한 반발로서 초자아가 작동하는 것이라면, 그녀가 요구하는 것은 그 초자아가 동물의 것이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 박혀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박쥐를 이해하고 그것을 되려는 것임을 코스텔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은 책에서 인용한 부분으로 끝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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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모든 것은 종말을 고했습니다. 말-거울은 고쳐볼 도리 없이 깨져버린 것 같습니다. 그 강연장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관해서 저나 여러분이나 잘 모르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사람들과 사람들 이야기인지, 사람들과 원숭이들 이야기인지, 원숭이들과 사람들 이야기인지, 원숭이들과 원숭이들 이야기인지 잘 모르는 거죠. 강연장 자체도 동물원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이제 페이지에 적힌 말이 자기 의도를 확실히 밝히고 각각의 단어가 '내 말뜻은 자명하다!'라고 천명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로마의 독실한 가정에서는 벽난로에 집의 수호신을 모셔놓았었죠. 그런 벽난로 위에 성경, 세익스피어의 작품들과 나란히 서 있던 사전은 이제 그저 여러 암호책 중의 하나가 되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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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글을 쓰다보면 문뜩 이전에는 내가 어떻게 글을 썼는지 하며 찾아보곤 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 글들을 참고하기도 하고 비교하기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부터는 큰 변화가 느껴지더라고요. 글의 분량도 분량이지만, 스타일이라고 해야하는 것들, 그러니까 문체적인 스타일 말고, 내가 글을 다루는 방식으로의 스타일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것들에서 느껴지는 향기가 많이 변해가는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책에서 사용된 논문을 번역하지 않나, 글을 쪼개서 쓰지 않나, 글을 뒤집어서 쓰지 않나. 정말이지 슬슬 실험적인 태도를 더욱 갖추게 되고 있는 거 같습니다. 박정균이라는 하나의 세계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걸 직접 볼 수 있으니, 때로는 그런 지나간 변화들이 그립기도 하지만, 앞으로 일어날 변화들이 기다려지기도 하네요.
글을 많이 써보며 느껴지는 것은 글에서 드러나는, 뭐라고 말하죠? 기름기라는 단어가 그나마 맞을거 같은데, 그것을 조절할 수 있게 된것 같습니다. 그것을 조절해나가며 글을 쓰는 것은, 강약조절로 느껴집니다. 감정적인 것을 쫙 뺴고 글을 썼을때의 느낌이나 감정적인 것을 담아 넣었을 때의 글을 읽었는데 보이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것을 보니 재미있네요. 이번에는 논문을 번역한다 라는 새로운 시도를 해보았는데 번역가의 고충이 상당히 느껴지더라고요. 읽는 입장과 번역하는 입장, 이 두가지를 모두 고려해야만 하다보니, 책을 읽을 때의 또하나의 관점이 넓어진 것일까요? 이번 기회에 번역을 직접 해보았더니 꽤나 재미지더라고요? 그래서 혹시 이런거 번역해 주세요 한다거나 또는 같이 번역 해보실분이 계시다면 언제든지 편하게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