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 선생 옥중에서의 투쟁
김상현
〔1〕 3월 1일 독립 선언을 마치고 체포된 한용운은 3년 간의 옥중 생활을 했다. 옥중생활이라기보다는 투쟁이라는 표현이 보다 적당할 정도로 그의 옥중 활동 또한 독립운동의 연장이었다. 옥중에서 흔들리는 동지들을 부여잡기도 했고, 조선 독립의 정당한 이유를 천명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를 짓기도 했으며, 법정에 서서 독립의 정당성을 두루 알리기도 했었다. 그는 먼저 동지들에게 옥중 투쟁의 세 가지 원칙을 주장했는데,
1. 변호사를 대지 말 것.
2. 사식(私食)을 취하지 말 것.
3. 보석(保釋)을 요구하지 말 것.
등이 그것이다.
한용운은 1919년 7월 10일 서대문 감옥에서 지방법원 검사의 촉탁에 의하여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라는 장편의 논설을 썼다. 이 글의 전문을 작은 글씨로 휴지에 접고 또 접어서 종이 노끈을 만들어 형무소로부터 차출하는 의복 갈피에 감추어 간수의 감시를 피해 밖으로 유출시켰다. 당시 뒷바라지를 맡고 있던 상좌 이춘성(李春城)이 몰래 받아서 전했던 것이다 . 이 논설은 1919년 11월 4일 상해에서 발간되던 《독립신문》에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 '自由는 萬有의 생명이요 平和는 人生의 最幸福이라'로 시작되는 이 논설이 상해에서 독립 투사들에게 많은 힘이 되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된다.
'조리가 명백하고 기세가 웅건한 명문' 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이 논설이 3 1운동 당시에 발표된 여러 선언문들 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2〕 한용운은 옥중에서도 시를 썼는데, 한시 13수와 시조 1수가 전한다. 이들 시 중에는 서정적인 것도 있고, 자유를 표현한 것도 있지만, 독립의지를 강하게 담아 동지들을 격려하고 고무한 것도 있었다 . 특히 〈승고우선화 贈古友禪話〉 〈증별 贈別〉 〈기학생 寄學生〉 등의 시는 옥중의 동지들을 격려 고무한 내용으로 주목할 만하다.
하늘 아래 만나기도 쉽지 않은데 天下逢未易
옥중의 이별 또한 별다르구나 獄中別亦奇
옛 맹세 아직도 식지 않았거니 舊盟猶未冷
국화철의 기약일랑 저버리지 말게나 莫負黃花期
옥중에 있던 동지가 석방될 때 써 준 〈증별 贈別〉이라는 제목의 시다. 식지 않는 옛 맹세, 국화철의 기약 등의 표현에는 독립 투사의 기개가 넘쳐나고 있다. 다음은 고우 최린에게 준시 〈증고우선화 贈古友禪話〉다.
어여쁜 꽃을 모두 다 보고 看盡百花正可愛
안개속 향기로운 풀 이리저리 다 누볐다 縱橫芳草踏烟霞
한 나무 매화꽃은 아직 못 가졌는데 一樹寒梅將不得
천지에 가득 찬 눈바람 그 어찌할꼬 其如滿地風雲何
찾아 헤맨 한매(寒梅) 한 그루, 그러나 아직 얻지 못했는데, 천지에는 가득 눈보라 휘몰아치니 어쩌면 좋으냐고 한탄한다. 제일 먼저 봄소식을 알리는 것이 한매다. 따라서 매화는 해방된 조국의 봄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 시는 최린에게 준 선적(禪的)인 다짐이다. 그러기에 단순히 풍운의 시절을 탓하기보다는 매화나무 한 그루에 대한 다짐의 뜻이 엿보인다. 다음은 어느 학생에게 준 〈기학생 寄學生〉이란 제목의 시다.
기와로 완전하면 사는 것이 치욕이요 瓦全生爲恥
옥으로 부서지면 죽음도 아름답다 玉碎死亦佳
천지에 가득 찬 가시나무를 베면 滿天斬荊棘
긴 휘파람에 달빛 더욱 많으리 長嘯月明多
이 시를 본 옥중의 모든 사람들이 그 기개에 감동했다고 한다. 당시 서대문 감옥에 같이 있던 김은호(金殷鎬) 화백은 오랜 훗날에도 '천지에 가득 찬 가시나무를 베면, 긴 휘파람에 달빛 더욱 많으리'라는 구절을 기억할 정도였다 . 천지에 가득 찬 가시나무를 베어버리려는 의지는 투사의 다짐 바로 그것이 아닐 수 없다.
어느날 한용운은 이웃방과 이야기를 하다가 간수에게 들켜 두 손을 2분 동안 가볍게 묶이었다. 이에 그는 즉석에서 다음의 시를 읊었다.
농산의 앵무새는 말을 곧잘 한다는데 농山鸚鵡能言語
그 새보다 훨씬 못한 이 몸이 부끄럽다. 愧我不及彼鳥多
웅변은 은이요 침묵이 금이라면 雄辯銀與沈默金
그 금으로 자유의 꽃 모두 사리라 此金買盡自由花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라고 했던 한용운이 이 시에서는 자유의 꽃을 사기 위해서는 침묵이라는 금을 모두 다 팔아버리겠다고 항변했다. 그의 옥중 시에는 자유와 독립의 두 개념이 일관하고 있다는 지적 은 옳다.
〔3〕 1919년 3월 11일, 일인 검사는 심문을 끝내면서 "피고는 금후에도 조선의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고 물었다. 이에 대하여 "그렇다. 계속해서 어디까지든지 할 것이다. 반드시 독립은 성취될 것이다" 고 명쾌하게 대답했다. 한용운의 이 같은 의지는 흔들린 적이 없었다. 5월 8일, 경성 지방법원의 판사 또한 같은 질문을 했다. "피고는 금후도 조선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고. 한용운은 "그렇다. 언제든지 그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몸이 없어진다면 정신만이라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다" 고 대답하였다.
그야말로 이 대답은 사자후다. 그는 법정에 설 때면 "자존심이 있는 민족은 남의 나라의 간섭을 절대로 받지 아니하오", "우리들의 행동은 너희들의 치안 유지법에 비추어 보면 하나의 죄가 성립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라고 독립의 정당성을 갈파하곤 했다. 이와 같은 한용운의 법정 투쟁 소식은 지상에 보도되어 두루 알려짐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고무하는 효과를 얻고 있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