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호 지음 _ 시와 음악을 만나는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갈림길에서의 사유
—「가지 않은 길」 다시 읽기
이성호
시인이 태어난 미국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시가 있다.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Lee Frost, 1874~1963)의 시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애송되는 시가 오역되기도 하고, 또 자주 오독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시를 학교 다닐 때 처음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 후 이를 고등학교 영어 교과서에 실어 소개하기도 했고, 또 번역을 해서 수필집에 넣기도 했다. 그 후 오역의 가능성 때문에 나는 가끔 마음이 무거웠던 것이 사실이다.
어떤 시나 그 시어의 다의성과 어법의 압축성 때문에 다양한 읽기가 폭넓게 수용되고 있다. 그러나 오역 또는 오해는 다르다. 텍스트를 다르게 읽는 것이 아니라 틀리게 읽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평론가 데이비드 오어(David Orr)는 몇 해 전에 프로스트 시의 오해 가능성을 지적했다. 그는 이 시 제목을 그대로 따서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라는 책을 냈다. 그리고 “모두가 사랑하면서도 거의 모두가 오해하는 이 시에서 미국 발견하기(Finding America in the Poem Everyone Loves and Almost Everyone Gets Wrong)" 라는 부제를 달았다. 가령, 학교 졸업식에서 “나는 사람들이 덜 다닌 길을 택했다” 라는 시구를 인용하면서 젊은이들을 격려하는 메시지로 오해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리고 시 속 화자의 발화 시점을 잘못 잡아 오해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시는 모두 네 개의 스탠자로 구성되어 있다. 이 시 속 화자는 단풍 든 가을 숲에서 만난 한 갈림길에 서서 처음부터 끝까지 선택적 사색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 화자는 아마도 프로스트 자신인 듯싶다. 시의 배경이 그가 자란 뉴잉글랜드 근처 숲일 수 있고, 특히 시 속의 선택적 사색이 그의 자연관의 표출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시인 프로스트의 모습이 더욱 뚜렷하게 다가온다.
이 시는 평범한 일상어로 되어 있다. 그러나 간단히 읽어낼 수 있는 그런 시는 물론 아니다. 사실 이 시는 여러 가지 시적 장치, 가령 특유의 상상이 이어지고, 게다가 자연스럽게 리듬을 타면서도 행 끝 소리맞춤을 하는 각운까지 있어서 우리의 적절한 호흡이 필요한 듯싶다.
시속 화자가 인생행로에 비유할 만한 길을 걷고 있다. 그러다가 단풍 든 가을 숲에서 갈림길을 만난다. 이 시의 첫 번째 스탠자다.
노란 숲 속에서 길이 갈라졌습니다.
안타깝게도 나는 두 길을 다 갈 수 없었습니다.
이렇듯 한길 길손인 나는 한참 서서
한쪽 길을 멀리멀리 바라보았습니다.
길이 덤불에서 꺾인 저곳까지. ;
Two roads diverged in a yellow wood,
And sorry I could not travel both
And be one traveler, long I stood
And looked down one as far as I could
To where it bent in the undergrowth
시적 상상이 돋보이는 둘째 스탠자이다.
그러다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훤히 트였긴 마찬가지였지만
어쩌면 더 낫다고 내세울 만한 것이 있었습니다.
이 길은 풀이 무성했고 덜 밟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
하기야 생각해보면, 전엔 사람이 지나다녀
두 길이 정말 비슷하게 밟혀 있었겠지요.
Then took the other, as just as fair,
And having perhaps the better claim,
Because it was grassy and wanted wear :
Though as for that, the passing there
Had worn them really about the same,
화자는 먼저 바라보던 길은 뒤로 물려놓고 다른 길을 택했다. 두 길 모두 앞이 훤히 트여 있어 아름답긴 마찬가지였으나, 이 길은 어쩌면 보다 낫다고 주장할 만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풀이 무성히 자라 있고 사람이 다닌 흔적이 적었기 때문이다. 이 스탠자는 “어쩌면” 이라는 말을 단초 삼아 ‘풀길’이라는 시적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이를 확장하여 자연과 어울리는 페어웨이(fairway)를 시 그림으로 내놓은 듯 보인다.
이어서 화자는 덧말을 붙인다. 지금은 풀이 무성히 자랐지만, 실은 이 길도 먼저 길과 마찬가지로 이미 길이 나 있음을 미루어보면, 그 전에는 사람들이 지나다녀 두 길이 똑같이 밟혀 있었을 것이라는 짐작이다. 이는 시인의 자유스러운, 그러나 이유 있는 추정이다. 이런 자유분방한 설법은 사실적이고 일관된 이야기를 기대하는 독자에겐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다. 많은 오역 또는 오독도 여기에서도 기인된 듯 보인다. 그러나 시는 ‘시대로 따라 읽어야 한다’는 전래의 말이 어쩌면 여기에 적합한지 모른다.
상상에서 돌아와 가지 않기로 한 첫 번째 길과 가기로 한 두 번째 길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가는 셋째 스탠자이다.
그날 아침 두 길에는
발길이 닿지 않은 낙엽이 골고루 깔려 있었습니다.
아아, 먼저 본 길은 훗날로 미루어놓았습니다!
그러나 길이 길로 이어져 있음을 알고 있기에
내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진 않았습니다.
And both that morning equally lay
In leaves no step had trodden black
Oh, I kept the first for another day!
Yet knowing how way leads on to way,
I doubted if I should ever come back,
화자는 여전히 갈림길 앞에 서서 두 길을 살핀다. 그날 두 길에는 사람 발길이 닿지 않은 낙엽이 쌓여 있었다. 이슬이 내린 아침이었을 게다. 삶의 길은 되돌릴 수 없는 한 길임을 화자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훗날로 미루어놓았다는 말이 실은 허사에 불과하다는 자각을 잊지 않는다.
갈림길에서 먼 훗날을 미리 짚어보는 마지막 스탠자다.
나는 한숨지으며 이런 말을 하게 될 겁니다.
어디선가, 지금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훗날에 :
길이 숲 속에서 갈라졌는데, 나는―
나는 사람들이 덜 다닌 길을 택했다고,
그래서 모든 것이 다르게 되었다고.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Somewhere ages and ages hence :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화자는 지금도 갈림길에 서서 먼먼 훗날을 머릿속으로 짚어보고 있다. 그는 한숨을 내쉰다. 이 부분이 발화 시점에 관한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 마치 선택한 길을 걸어보고, 말하자면 실패를 겪은 후 내뱉는 한탄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이 한숨은 후회가 아니라 아쉬움의 숨소리다. 선택한 길도 또 선택하지 않은 길도 사실 어떤 길일지 전혀 모른다. 다만 가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아쉬움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런 기법은 일종의 시적 이중 장치이다. 선택의 양면성을 보여 준다고나 할 만하다.
재미있는 것은, 화자 자신이 결정한 자기 여정을 먼 훗날에도 계속 우겨댈 기미가 보인다는 점이다. 개성적 선택의 일관성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프로스트에겐, 자연은 낭만주의에서처럼 감성적인 의미 부여의 대상만은 아니다. 그렇다고 자연주의에서처럼 버거운 존재로 남아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함께 걸어가는 일종의 동반자일 듯싶다. 언젠가 프로스트가 한 말이 있다. “사랑과 필요는 다른 것이 아니다 (Love and need is one).” 자연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실생활을 함께 아우르려는 사색의 말일 것이다.
나는 화자가 앞이 탁 트이고 숲이 아름다운 산속 길을 따라 걸음을 내딛는 모습을 미리 그려본다. 자연과 사람이 함께 걸어가는 편안한 그림이다. 그러나 가지 않은 길은 어디까지나 아쉬움으로 남겨놓은 채 걸어가는 잔걸음이다.
첫댓글 “사랑과 필요는 다른 것이 아니다 (Love and need is one).” 자연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실생활을 함께 아우르려는 사색의 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