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피아여고는 역사가 깊은 학교다.
1908년 미국인 선교사 유진 벨(한국명 배유지)이 설립한 학교로, 오늘날 수피아여중고로 불리며 지난 2008년에 개교 100주년을 맞았다. 시작은 단출했다.
1907년 배유지 선교사의 집에서 선교부 직원의 자녀들을 가르쳤는데 다음해 남학생을 위한 숭일학교와 여학생을 위한 수피아여학교를 설립한 것이라고 한다.
수피아여고에는 오래된 근대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어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일부러 찾아와 둘러보는 공간이다.

수피아 여고를 들어가서 맨 처음 만나는 것은 광주 3․1만세운동 기념탑이다.
이 기념탑은 1919년 3월 10일 광주 3․1만세운동에 앞장서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경찰에 끌려가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른 2명의 교사와 21명의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의 애국정신을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1995년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이 기념동상을 바라보다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커티스메모리얼홀이 보인다.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159호인 이곳은 미국 테네시주 잭슨의 커티스씨가 코닐리어 커티스를 기념하여 선교사들의 기부금으로 1924년에 지어졌다.
1955년에 광주전남선교의 아버지인 배유지 목사를 기려 배유지기념예배당이라고 명명하였고, 현재는 예수피아교회로 예배가 진행되는 곳이기도 하다.
‘규모는 작지만 변화가 풍부하고 건축수법이 우수한’ 이 회색벽돌건물의 위층은 예배실, 아래층은 선교부 아동들의 학교로 쓰였다고 한다. 언뜻 보기에는 건물이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창문의 구조가 오랜 서양식 건물의 구조를 띄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피아 옛 강당
학교 안으로 좀 더 들어가 보면, 수피아 옛 강당이 자리하고 있다.
적벽돌건물로 추정되며 광주 근현대사, 건축사, 여성교육사에도 의미가 있다.
광주의전의 모급에 힘입어 개교했으나 광복 직후 미 군정청이 점유하거나, 6.25전란의 어려움을 겪은 건물이기도 하다. 현재는 무용실 등의 간결하고 실용적인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수피아홀
조금 더 들어가면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158호로 지정된 수피아홀이 있다.
수피아홀은 미국 스턴스 여사(Mrs. M.L.Sterns)가 세상을 떠난 친정 동생(Jennie Speer)을 추모하기 위하여 기증한 5,000불로 세운 건물이다.
당시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붉은 벽돌이 아니라 회색 벽돌로 지은 것이 특징이다.
광주 지역 개신교 선교의 근거지이자 여성 교육의 요람으로 꼽히는 수피아여학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윈스보로우홀
수피아여고에서는 마지막으로 윈스보로우홀이 있다
. 이곳은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370호로 지정된 곳으로 윈스브로우(Winsborough) 여사가 받은 생일 헌금으로, 건축을 전공한 남장로회 서로득(Swinehart) 선교사가 건축하였다.
수피아여고를 나와 지도를 따라 걸어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 호남신학대학교를 만날 수 있다.
호남신학대학교 역시 수피아여고만큼이나 근대역사문화의 자취가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호남신학대학교 안에는 우일선 선교사 사택과 선교사 묘원이 있는 곳이다.
▲선교사 묘원
▲고난의 길 돌다리
*선교사묘원
호남신학대학 운동장에서 양림산으로 연결되는 길이 있는데, 그 길을 따라 한 50m를 이동하면 선교사 묘원이 나온다. 선묘사 묘원이 연결되는 샛길마다 선교사들의 이름을 따서 길이름을 짓고 나무 팻말을 세워두웠다. 특히 고난의 길은 돌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불편하게 놓은 65개의 디딤돌엔 한국에서 선교하는 동안 아내와 자녀를 잃고 이곳에 묻힌 45명의 선교사들과 850여명의 호남지방 순교자들의 아픔을 느끼며 고마움을 전하는 길이라고 한다. 이 기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새, 선교사 묘역에 도착하게 되는데 잔디위에 비석을 세워 그들의 공을 기리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선교사들은 광주, 전남에서 한센병치유공동체, 결핵치유공동체, 빈민구제공동체 등을 통한 희생, 나눔의 삶의 실천했다고 한다.
*우일선 선교사 사택
학교에는 선교사 묘역과 함께 선교사들의 흔적을 많이 찾을 수 있다. 우일선, 원요한, 유수만, 피터슨 선교사 사택이 있는데 우일선 선교사 사택이 대표적이다. 우일선 선교사 사택은 1920년대에 지어졌다고 전해지며 광주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서양식 주택이다. 우일선 선교사는 1908년 제중원(현 기독병원)의 원장이 되어 의사로 선교활동을 하였다. 우일선 선교사 사택의 또 다른 볼거리가 있다. 바로 은단풍 나무인데, 1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이 단풍은 선교사 윌슨(우일선)이 고향에서 종자를 가져와 심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000년 어느 여름 낙뢰로 고사되었으나, 양림숲의 자원을 보존하고자 고사목의 시설을 보완하고 산에서 채취한 후계목을 심었다고 한다.
*양림미술관
호남신학교대학교를 나와 내리막길을 걷다보면 좀 전에 봤던 서양식 건물과는 달리 기와지붕으로 된 두 채의 건물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양림 미술관’이다. 양림미술관은 무료관람에 사진촬영도 가능하다고 하니, 나들이 하기에도 참 좋은 장소인 듯 하다. 다만, 양림미술관은 오후 1시 이후부터 운영하므로 오후에 방문할 것을 권한다.
지도를 따라 사직공원을 향해 걸으면, 팔각정으로 향하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팔각정 쪽이 아닌 충현어린이집 방향으로 가면 충현원을 찾을 수 있다. 사실, 충현원이 있다는 팻말이 따로 있지 않아 찾는데 좀 애를 먹었다. 충현원 입구에는 블레이즈델 동상이 있으니 동상이 보이는 곳으로 들어 갔다면 충현원을 찾은 것이다. 러셀 블레이즈델 대령이 가운데 서서 한복을 입은 여자 아이를 안고 남자아이에겐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동상은 그가 마치 아이들을 지켜주는 듯 보였다. 블레이즈델 대령은 1950년 가을과 겨울에 서울 길거리에 버려진 1,059명의 한국 전쟁 고아들을 구출했다. 1950년 12월 20일, 그들의 목숨과 경력을 잃을 수 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어린이 비행기 수송 작전'이란 이름으로 그 어린이들과 그들을 돌보는 사람들을 김포에서 제주도로 무사히 구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충현원은 박순이 선생이 1949년 우일순 선교사 댁에서 한국 전쟁 전후에 발생한 전쟁고아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설립한 후 1952년 늘어나는 고아들을 위해 양림동 210번지로 옮겨진 선교 사회복지기관이다. 충현원은 고아들의 건강을 위하여 채광과 통풍 등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던 흔적의 건물들이 복원되어 해외입양인들이 방문할 때 잃어버린 뿌리를 알게 하며 입양 당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공간으로서 자리하고 있다. 충현원 근처에는 한국전쟁으로 희생된 500,000명의 어린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비운의 왕좌’라는 조각과 해외로 입양된 한인입양인들을 위한 ‘평화의 대사’라는 조각이 함께 충현원을 빛내고 있다.
사직공원과 통기타 거리를 지나 광주천을 향해 내리막길을 걸으면, 양림파출소가 나온다.
양림파출소 바로 옆에는 ‘뒹굴동굴’이라는 동굴이 있다.
장난기 넘치는 동굴 이름과는 달리 이곳은 일제가 만든 방공호이다.
일제는 광주 사직공원 일대 네 곳에 방공호를 팠다. 하지만 한 곳은 규모가 매우 작아 지금은 흔적 찾기가 힘들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일제가 판 방공호 세 곳의 규모는 폭 약 2m에 길이가 약 30m에 이른다.
일제는 대피시설인 이 방공호를 무기고와 화약고로 이용하기도 했다.
현재 이 세 곳의 방공호는 각기 다른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
34도를 웃도는 폭염 속에서 돌아다니다가 동굴을 들어가니 천국이 따로 없다.
현재는 양림동을 소개하는 다양한 글귀들을 전시해놓은 공간으로서 위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