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의전(崇義殿)
연천은 별세계처럼 고구려와 고려 유적이 많다. 남쪽에서 조선과 백제와 신라의 유물을 주로 만나던 사람에게는 다른 세상에 온 느낌을 준다. 숭의전이 이곳에 소재하는 것을 보면 북쪽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던 지역인가보다. 고려 태조 왕건을 비롯한 4대손의 사당인 숭의전, 조선조에 세워진 고려왕조의 흔적이다.
조선이 만든 고려의 흔적, 다른 나라같으면 지워버렸을 전조의 흔적들을 애써 보존하고 모셔온 조선, 조선의그 포용성에서 오늘날 우리의 한민족의 일체감을 본다. 경순왕릉에서 신라를 계승하는 고려를, 이곳에서 고려를 계승하는 조선의 모습을 보면서 면면히 이어오는 한민족 공동체 정신의 맥을 발견한다.
아쉬운 것은 6.25때 불탄 것을 후손이 복구하게 두지 말고 국가에서 할 수는 없었는가 하는 점, 1973년 복구라는데, 그때는 어느 정도 여력을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조선조가 했던 일을 대한민국도 했다면, 그 유구한 일체감과 포용력에 적극적인 참여가 가능할 수 있었을 거 같아서다. 복구 시작은 후손이 했어도 국가에서 이후 복원을 하는 것으로 보여 다행이다.
숭의전 대제가 봄 가을 2회에 걸쳐 진행되는데 개성왕씨 종친회가 주관하고 연천군청 후원으로 이루어진다.
방문일 : 2021.9.13.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국가사적 233호
1. 숭의전 둘러보기
1) 소개
고려 태조를 비롯한 7왕의 신위(神位)를 봉안하여 제사지내던 곳이다. 1399년(정종 1)에 창건된 뒤, 1452년(문종 2)에 숭의전이라고 이름 붙였으며, 고려 왕족의 후손들이 관리하도록 하였다. 종3품인 사(使)를 비롯하여 종4품의 수(守), 종6품 감(監), 종9품 여릉참봉(麗陵參奉) 등의 관리를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역대 왕조의 시조를 모신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평양의 숭령전(崇靈殿)은 단군과 고구려 시조 동명왕을 모셨고, 평양의 숭인전(崇仁殿)은 기자(箕子)를 모셨다. 경주의 숭덕전(崇德殿)은 신라의 시조를 모셨고, 충청남도 직산의 숭렬전(崇烈殿)은 백제의 온조왕을 모셨으며, 숭의전에는 고려 태조 및 혜종·정종·광종·경종·목종·현종을 제사지냈다.
임진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정전(正殿)·후신청(後臣廳)·전사청(典祀廳)·남문(南門)·협문(夾門)·곳간(庫間)·수복사(守僕舍) 등이 남쪽을 바라보며 배치되었다. 하지만 6·25전쟁 때 모두 불에 타 없어졌고, 최근에 정전과 함께 위패를 모신 이안청(移安廳), 공신의 위패를 모신 배신청(陪臣廳), 삼문만을 원래의 위치에 복원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2)
1397년(태조 6)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에게 이 지역의 봉토를 주고 머물면서 고려 태조의 묘를 세우도록 했다. 1399년(정종 1) 숭의전 건물을 짓고 고려 태조와 8왕(혜종·현종·원종·충렬왕·성종·경종·문종·공민왕)의 제사를 봄·가을로 2번 받들도록 했다. 그러나 1425년(세종 7) 예법에 제후는 5묘를 세워야 하는데 고려의 8위는 부당하다 하여 태조·현종·문종·원종 4위만을 받들도록 했다.
1451년(문종 1) 문종은 고려 현종의 후손이 이름을 바꾸어 공주에 사는 것을 찾아내 그에게 순례(循禮)란 이름을 지어주고 3품관직과 토지·노비를 지급하여 숭의전에서 대대로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이때 숭의전이라 이름했으며 배향공신도 선정하여 함께 받들도록 했다. 처음에는 사당의 관리를 위해 숭의전사(종3품)·수(守 : 종4품)·영(令 : 종5품)·감(監 : 종6품) 1명씩 두었다.
조선 후기에는 사와 수를 없애고 능참봉(종9품)을 신설했으며, 수·감·능참봉은 왕씨만 세습하도록 했다. 건물은 정전(正殿)·후신청(後臣廳)·전사청(典祀廳)·남문·협문(夾門)·곳간·수복사(守僕司) 등이 있었으나 6·25전쟁 때 모두 소실되었다. 1973년 왕씨 후손이 정전을 복구했고, 1975~76년에 이안청·배신청·삼문을 원래의 위치에 복원했다. (다음백과 전재)
홍살문과 하마비. 이곳을 지나면 숭의전 권역에 들어선다.
어수정. 왕건이 마시던 물이라 한다. 남쪽 곳곳에서 이성계의 흔적을 만나는 것처럼 이곳에 오니 곳곳에서 왕건의 흔적과 마주한다. 역사는 기억하는 사람의 것이다. 왕건을 기억하는 사람들 마음에 왕건은 이렇게 살아 있으면서 그로 인해 마음 또한 풍성해진다. 어수정 안내문이 잘 안 보이는 것은 아쉽다.
"...왕건이 궁예의 신하로 있을 때 개성(송악)과 철원(태봉)을 왕래하면서 중간지점이었던 이곳에서 쉬어가며 물을 마셨다고 한다. .. 이곳 숭의전 자리에 왕건의 옛집 또는 왕건이 세운 앙암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숭의전. 숭의전이라고 해도 충분하지만 그 시대의 유물이 아닌 후대의 복원에는 지를 붙이게 되어 있어 모두 복원했어도 지를 떼지 못한다. 서울의 세검정이 복원했어도 세검정지라고 불리듯이.
앞에는 역사적 자료들이 색바랜 채로 죽 펼쳐져 있다
앙암재. 첫번째 문을 들어서면 만난다. 제례를 준비하는 곳이다.
왕건 동상의 사진이 모셔져 있다.
전사청. 제수를 준비하는 곳이다.
숭의전. 4왕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본전이다. 전체 권역이 바로 이곳을 보존하기 위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왕건의 위패
숭의전 내부. 문종과 원종, 오른쪽은 현종의 위패다.
배신청. 고려조 16공신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배신청 내부. 정몽주 등 고려조 16신하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공신들의 후손이 숭의전대제에 참석하기도 한다.
이안청. 숭의전 보수공사 시 숭의전의 위패를 잠시 모셨던 곳이다.
이안청 벽면. 절벽에 씌어진 마전군수 한문홍의 잠두절애 시를 전사해 놓았다. 정조13년 작이다.
숭의전 앞. 숭의전을 지키는 오랜 고목 아래로 임진강이 흐른다.
인근에서 바라본 임진강
2. 관람 후
1) 조선왕조실록 영조조 기록
영조 3년 정미(1727) 12월 26일(정미) 맑음
이정필이 아뢰기를,
“신이 항상 가지고 있는 소회를 감히 아룁니다. 우리 국가에서 숭의전(崇義殿)을 설치한 것은 의미가 매우 큰데, 적장 자손(嫡長子孫)으로 하여금 제사를 대대로 잇게 한 것은 주(周) 왕실에서 옛 왕조의 후손을 제후로 봉한 일에서 뜻이 전해진 것입니다. 처음에 붙여 준 관직은 숭의전 감(崇義殿監)인데 감(監)에서 영(令)이 되고 영에서 수(守)가 되면서 10년에 한 번씩 옮기는 것이 고례(古例)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숭의전 영(崇義殿令) 왕성원(王聖元)은 숭의전 영이 된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숭의전 수(守)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전조(前朝)의 후손을 예우하는 도리에서 옛 법을 무너뜨려서는 안 되니 해당 조(曹)로 하여금 규례대로 승진시켜서 부직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이정필이 아뢰기를,
“신이 예부터 전해오는 말을 들으니, 조정에서 전조의 후손을 빈객(賓客)의 예로 대우하여 자리를 대신의 위에 두고 조알(朝謁)하지 않도록 하며 작위(爵位)를 세습하는 것만 허락하고 경창(京倉)에서 녹을 주며 또 죽은 뒤에는 관원을 보내서 치제(致祭)한다고 합니다. 고례를 완전히 따를 필요는 없지만 대우하는 예에서 옛 왕조의 후손을 제후로 봉했던 뜻을 본받은 것은 지극하다고 하겠습니다. 신이 또한 삼가 들으니, 고려 태조의 위판(位版) 앞에 있는 비단 휘장이 완전히 해져서 설치할 수 없는 지경이므로 보기에 쓸쓸하여 지나가는 객들이 탄식하지 않음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다시 만들도록 한다면 좋을 듯하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국조(國朝)와 고려조(高麗朝)의 관계는 송(宋)과 후주(後周)의 관계와 같아서 전조의 능침(陵寢)을 각별히 수호하고 있으니, 이번에 고려 태조의 위판 앞에 있는 비단 장막을 유수(留守)에게 분부하여 다시 만들도록 하라.”
하자, 이정필이 아뢰기를,
“숭의전은 마전(麻田)에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송도(松都)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호조에 분부하여 속히 다시 만들게 하라.”
2) 조선왕조실록 정조조 기록
정조 4년 경자(1780) 2월 4일(계축)
부사직 김효대(金孝大)가 상소하여 동천묘(東泉廟)에 비석을 세워 주기를 청한 데 대해, 비답을 내렸다.
○ 상소의 대략에,
“옛적 송(宋) 나라 인종(仁宗)은, 천명(天命)이 덕(德) 있는 이에게 돌아간 것을 알았던 오월왕(吳越王)이 송조(宋朝)에 귀의한 것을 가상히 여겨 이미 수신(守臣)에게 그의 분묘(墳墓)를 수리하라고 명하였고, 또 사신(詞臣)에게 표충관(表忠觀)의 비문을 지으라고 명하였으니, 숭보(崇報)하고 표장(表奬)한 은전이 지극하였습니다. 우리 성조(聖朝)에서는 더욱 이 의리를 중시하였기 때문에 고려에 대해서는 숭의전(崇義殿)을 세워 주고, 기도(箕都 평양)에 숭인전(崇仁殿)을 세워 주고, 신라에 대해서는 숭덕전(崇德殿)을 세워 주고 관원을 두어 수호하고 비문을 지어서 공적을 기록하였습니다. 숭덕전에서 동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또 동천묘가 있으니 곧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사당입니다. 경주의 숭덕전에는 애초에 비석이 없었는데, 일찍이 선왕조(先王朝)에 그 자손들의 호소로 인해서 윤허를 받고 특별히 기실비(記實碑)의 비문을 하사하셨기 때문에 그 자손들이 비로소 감히 돌을 다듬어 비를 세워서 무궁히 후세에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동천묘는 사체가 자별하여 자손들이 사사로이 마음대로 세울 수 없기 때문에 감히 이렇게 성상을 번독스럽게 합니다. 한결같이 숭인전과 숭덕전의 전례대로 특별히 사신으로 하여금 비문을 지어 올리게 하여 그 자손들이 돌에 새겨 세우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이곳에 비석을 세우는 일을 아직까지 빠뜨린 것은 흠이 되는 일이라 하겠다. 더구나 선조(先朝)의 고사(故事)가 있는 데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청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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