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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시감상
영현암 몽자당 / 남효온
靈顯庵 夢慈堂 南孝溫
遠客辭親四浹旬(원객사친사협순) 먼 나그네 어머님 떠나온 지 사십 일이 되니
破衫蚤蝨長兒孫(파삼조슬장아손) 찢어진 적삼엔 벼룩과 이들 새끼까지 자랐네
裁書付僕重重語(재서부복중중어) 편지 적어 종에게 보내며 거듭거듭 이르노니
魂先歸書到蓽門(혼선귀서도필문) 꿈속 영혼이 편지에 앞서 사립문에 닿았도다
〈감상〉
이 시는 그의 나이 29세 되던 해인 1482년에 지은 것으로, 영현암에서 어머니를 꿈꾸며 지은 것이다.
남효온은 소릉(昭陵) 추복이 좌절된 후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어머니의 걱정을 듣고 부근의 영현암에 들어가 친구와 함께 과거(科擧) 공부를 다시 시작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영현암을 나온다.
〈주석〉
〖浹〗 일주 협, 〖衫〗 적삼 삼, 〖蚤〗 벼룩 조, 〖蝨〗 이 슬, 〖裁書(재서)〗 편지를 씀. 〖付〗 주다 부, 〖蓽〗 사립짝 필
유압도 / 남효온
遊鴨島 南孝溫
芳洲十里露潮痕(방주십리로조흔) 꽃 핀 모래섬 십 리에 조수 흔적 드러나는데
手自持鋤採艸根(수자지서채초근) 손수 호미 잡고서 풀뿌리를 캐어 본다
野水汲來澆麥飯(야수급래요맥반) 들 물 길어 와서 보리쌀 씻으니
擬將身世付江村(의장신세부강촌) 이 한 몸 강촌에다 부쳐 볼 만하겠네
〈감상〉
이 시는 압도에서 노닐며 지은 시이다.
압도는 한강 하류에 있던 섬으로, 남효온은 생원시인 과업(科業)을 끝내고 맨 먼저 찾아간 곳이 압도다. 이 시는 썰물이 일자 십 리 꽃 핀 모래섬이 드러나니, 손수 호미를 잡고 농사를 짓고, 들에 있는 물을 길어 와 보리밥을 지어 먹으니, 압도에 몸을 의탁할 만하다고 노래하고 있다.
〈주석〉
〖鴨島(압도)〗 한강 하류 마포 가에 있던 섬. 〖芳洲(방주)〗 방초(芳草)가 무리 지어 피어 있는 작은 모래섬.
〖痕〗 흔적 흔, 〖鋤〗 호미 서, 〖澆〗 물을 주다 요, 〖擬〗 헤아리다 의, 〖身世(신세)〗 =일생(一生), 〖付〗 붙이다 부
제성거산원통암창벽 / 남효온
題聖居山元通庵囱壁 南孝溫
東日出杲杲(동일출고고) 동쪽 해가 눈부시게 떠오르고
木落神靈雨(목락신령우) 신령한 비처럼 낙엽이 떨어지네
開囱萬慮淸(개창만려청) 창문 열자 온갖 생각 맑아져서
病骨欲生羽(병골욕생우) 병든 몸에 날개가 돋으려 하네
〈감상〉
이 시는 성거산에 있는 원통암 창 벽에 쓴 시이다.
서늘한 가을 아침, 동쪽으로 맑은 해가 눈부시게 솟아오르고 있고, 신령스러운 비처럼 낙엽이 아침에 떨어지고 있다(힘없이 저녁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을 아침인데도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창문을 열자 온갖 근심들이 맑아져 병든 몸인데도 날개가 돋아 하늘을 날아갈 것만 같다.
〈주석〉
〖聖居山(성거산)〗 직산현(稷山縣) 동쪽 20리 지점에 있음. 고려 태조가 일찍이 고을 서쪽 수헐원(愁歇院)에 주필(駐蹕)하여 동으로 산 위를 바라보니 오색의 구름이 있어 신이 있다고 여기고 제사를 지냈으므로 붙여진 이름.
〖囱〗 창 창, 〖杲〗 밝다 고
술회이절 상지지당 / 김굉필
述懷二絶 上止止堂 金宏弼
日邊揮翰玉堂春(일변휘한옥당춘) 임금 곁에서 붓 휘두르던 옥당의 봄
靄靄靑雲鬧後塵(애애청운료후진) 자욱한 푸른 구름, 후진이 떠들썩하였지
嶺外枕書茅屋夜(영외침서모옥야) 고개 넘어 띳집에서 책 베고 누운 밤
娟娟孤月屬斯人(연연고월속사인) 곱고 외로운 저 달 이 사람 차지로세
〈감상〉
이 시는 지지당에 올라 소회를 읊은 시로, 중앙관료로서의 삶과 지방 처사로서의 삶이 여실히 반영되어 있다.
서울에서 벼슬할 때, 임금 곁에서 학문으로 보좌하던 영화로운 시절에는 후진들이 구름처럼 따랐다. 하지만 벼슬을 그만두고 영남으로 내려와 작은 서재를 열고 책을 베고 누운 밤, 곱디고우면서 외로운 저 달은 내 차지이다.
『해동역사』에 김굉필에 대한 간략한 생평(生平)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이며, 호는 한훤당(寒喧堂)이다.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일찍이 점필재를 따라 『소학』을 배웠는데 평생을 『소학』으로써 몸을 단속하였다. 성리학에 정통하여 사문(斯文)을 일으키고 후생을 가르쳐 인도하는 일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갑인년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었고, 다시 형조 좌랑으로 발탁되었다. 연산조에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점필재의 문인이라 하여 희천(熙川)에 유배되고, 다시 순천(順天)으로 옮겼으며, 갑자년에 죄를 더하였다. 중종 초에 도승지를 예증(例贈)하고, 13년에 특별히 우의정을 더 추증(追贈)하였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선생이 희천에 귀양 갔을 때 조광조(趙光祖)가 따라가서 노닐면서 학문하는 큰 법칙을 배웠다.
오래 있다 돌아올 때 멀리 갈 때까지 바라보면서 말하기를, ‘우리 도가 동쪽으로 간다.’ 하였다
(瑞興人(서흥인) 字大猷(자대유) 號寒暄堂(호한훤당) 中生員試(중생원시) 嘗從佔界齋受業(상종점계재수업) 授以小學(수이소학) 平生以小學律己(평생이소학률기) 精於性理之學(정어성리지학) 以興起斯文訓迪後生爲己任(이흥기사문훈적후생위기임) 甲寅以遺逸薦授參奉(갑인이유일천수참봉) 擢拜刑曹佐郞(탁배형조좌랑) 燕山戊午史禍起(연산무오사화기) 以佔畢門徒配煕川(이점필문도배희천) 又移順天(우이순천) 甲子加罪(갑자가죄) 中廟初例贈都承旨(중묘초례증도승지) 十三年特加贈右議政(십삼년특기증우의정) 謚文敬(익문경) 先生謫煕川(선생적희천) 趙靜庵從往之遊(조정암종왕지유) 得聞爲學大方(득문위학대방) 久而歸(구이귀) 目送之曰(목송지왈) 吾道東矣(오도동의)).”
〈주석〉
〖玉堂(옥당)〗 홍문관(弘文館)의 별칭. 〖靄〗 자욱하게 낀 구름 애, 〖鬧〗 시끄럽다 료, 〖後塵(후진)〗 남의 뒤(여기서는 후배의 의미로 쓰임). 〖娟〗 예쁘다 연
각주
1 김굉필(金宏弼, 1454, 단종 2~1504, 연산군 10): 본관은 서흥(瑞興). 어렸을 때의 이름은 효동(孝童)이며,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蓑翁)·한훤당(寒暄堂). 서흥의 토성(土姓)으로서 고려 후기에 사족으로 성장한 집안이다. 김일손(金馹孫)·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소학』 등을 배웠다. 이를 계기로 그는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고, 누가 혹 시사(時事)를 물으면 ‘소학동자가 무엇을 알겠는가?’라고 답할 정도로 『소학』에 심취했다. 1480년(성종 11)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여, 척불(斥佛)과 유교진흥에 관한 긴 상소를 올렸다. 1486년 당시 이조참판으로 있던 스승 김종직에게 시를 지어 올려 그가 국사에 대해 별다른 건의를 하지 않는 것을 비판, 사제지간에 사이가 벌어졌다.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이 은일지사(隱逸之士)로 천거하여 남부참봉이 된 뒤, 전생서참봉·군자감주부·사헌부감찰 등을 거쳐 형조좌랑에 이르렀다. 1498년 훈구파가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해 무오사화를 일으켰을 때,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고 하여 장형(杖刑)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 조광조(趙光祖)가 그에게서 『소학』을 배운 것은 이때의 일이다. 2년 뒤에 유배지가 순천(順川)으로 옮겨졌다가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당인이라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했다.
노방송 / 김굉필
路傍松 金宏弼
一老蒼髥任路塵(일로창염임로진) 한 늙은 푸른 소나무 길 먼지에 맡겨
勞勞迎送往來賓(노로영송왕래빈) 괴롭게도 오가는 길손 맞고 보내네
歲寒與爾同心事(세한여이동심사) 겨울철에 너와 마음 같이하는 이를
經過人中見幾人(경과인중견기인) 지나는 사람 중에 몇 사람이나 보았는가?
〈감상〉
이 시는 밀양의 길가에 있는 노송(老松)을 두고 노래한 것으로, 절의(節義)의 정신을 읊고 있다.
길가에 푸른 노송(老松)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서서 길가에 오가는 길손을 힘들게 맞이하고 또 보낸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 중에 추운 겨울에도 너와 같이 마음이 변치 않은 마음을 가진 사람을 몇이나 보았는가?
「경현록(景賢錄)」에 김굉필의 언행(言行)에 대한 일화(逸話)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선생은 후배를 가르쳐 인도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멀고 가까운데서 소문을 듣고 모여 온 학도들이 집 안에 차고, 날마다 경서를 가지고 당(堂)에 오르므로 자리가 좁아 다 수용할 수가 없었다. 선생이 벗들과 같이 거처할 때 첫닭이 울면 일어나 함께 앉아 호흡을 세는데, 남들은 겨우 밥 지을 동안도 못 되어 다 잊어버렸으나 홀로 선생만은 또렷이 세어서 밝을 때까지 잊어버리지를 않았다. 『소학』을 점필재에게서 배울 때에 점필재가 말하기를, ‘광풍제월(光風霽月, 맑은 바람과 비 갠 뒤의 달이라는 뜻인데, 마음이 상쾌하고 깨끗함을 형용하는 말이다. 『송사(宋史)』 「주돈이전(周敦頤傳)」에, ‘그의 마음이 쇄락(洒落)함이 광풍제월과 같다.’ 하였다.)이라는 것도 결국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였는데, 선생은 이 말을 명심하고 지켜서 잊어버리지 아니하였다.
선생은 평소에 아침에 일어나 머리 빗고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하고는 먼저 가묘(家廟)에 참배하였다. 무오년의 옥사를 만나 희천(熙川)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내 순천(順天)으로 이배(移配)되었는데, 그때 화가 어떻게 번질지 그 형세를 헤아릴 수가 없었으나 그는 태연자약하게 처하여 몸가짐이 평상시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先生以訓迪後生爲己任(선생이훈적후생위기임) 遠近聞風來集(원근문풍래집) 學徒塡溢(학도전일) 每日執經升堂(매일집경승당) 坐不能容(좌불능용) 先生與友同棲(선생여우동서) 鷄初鳴(계초명) 共坐數息(공좌수식) 他人讒過一炊皆失(타인참과일취개실) 獨先生歷歷枚數(독선생력력매수) 向明不失(향명불실) 授小學於佔畢齋(수소학어점필재) 佔畢齋曰(점필재왈) 光風霽月(광풍제월) 亦不出此(역불출차) 先生服膺不忘(선생복응불망) 先生平居盥櫛整衣冠(선생평거관즐정의관) 先拜家廟(선배가묘) 遭戊午獄謫煕川(조무오옥적희천) 俄移順天(아이순천) 時禍機叵測(시화기파측) 處之晏如(처지안여) 不變常操(불변상조)).”
〈주석〉
〖髥〗 구레나룻 염, 〖心事(심사)〗 심정.
독소학 / 김굉필
讀小學 金宏弼
業文猶未識天機(업문유미식천기) 글을 읽어도 아직 천기를 알지 못하였더니
小學書中悟昨非(소학서중오작비) 『소학』 속에서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도다
從此盡心供子職(종차진심공자직) 이제부터 마음을 다하여 자식의 직분을 하려 하노니
區區何用羨輕肥(구구하용선경비) 구차스럽게 어찌 잘살기를 부러워하리오?
〈감상〉
이 글은 『소학(小學)』을 읽고서 쓴 시이다.
공부를 해도 아직 천기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는데, 『소학』을 읽고서 어제의 잘못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마음을 다하여 자식의 직분을 다하고자 한다. 구차스럽게 가벼운 외투를 입고 살찐 말을 타는 잘사는 삶을 부러워하겠는가?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의 남효온(南孝溫) 찬(讚)에서 위 시에 대해,
“김굉필은 자(字)가 대유이며, 점필재에게 수업하여 경자년에 생원이 되었다. 나와 동갑인데 생일이 나보다 뒤이다. 현풍에 살았는데, 그의 독특한 행실은 비할 데가 없어서 평상시에도 반드시 의관을 갖추고 있었으며, 집 밖에는 일찍이 읍 근처에도 나가지 않았다. 손에서 『소학(小學)』을 놓아 본 적이 없었고, 파루를 친 뒤에야 침소에 들었으며, 닭이 울면 일어났다. 사람들이 국가 일을 물으면 그는 반드시, ‘『소학』 읽는 아이가 어찌 대의(大義)를 알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점필재 선생이 평하기를, ‘이는 곧 성인 될 바탕이 됨 직하니, 허노재 이후에 어찌 사람이 없다고 하리오’ 하였으니, 그를 추중함이 이와 같았다
(金宏弼字大猷(김광필자대유) 受業於佔畢齋(수업어점필재) 庚子年生員(경자년생원) 與余同庚(여여동경) 而日月後於余(이일월후어여) 居玄風(거현풍) 獨行無比(독행무비) 平居必冠帶(평거필관대) 室家之外(실가지외) 未嘗近邑(미상근읍) 手不釋小學(수불석소학) 人定然後就寢(인정연후취침) 鷄鳴則起(계명칙기) 人問國家事(인문국가사) 必曰(심왈) 小學童子何知大義(소학동자하지대의) 嘗作詩曰(상작시왈) 業文猶未識天機(업문유미식천기) 小學書中悟昨非(소학서중오작비) 佔畢齋先生批云(점필재선생비운) 此乃作聖之根基(차내작성지근기) 魯齋後豈無人(노재후기무인) 其推重如此(기추중여차)).”
라 되어 있다.
〈주석〉
〖天機(천기)〗 =천의(天意), 〖從〗 ~부터 종, 〖何用(하용)〗 =하이(何以), 〖羨〗 부러워하다 선,
〖輕肥(경비)〗 경구비마(輕裘肥馬)의 준말
차노두운 / 신용개
次老杜韻 申用漑
白沙翠竹波萬尋(백사취죽파만심) 흰 모래와 푸른 대나무에 파도는 만 길
朝煙暮靄閑晴陰(조연모애한청음) 아침 안개와 저녁노을이 한가롭게 갰다 흐리네
鳥去雲移歲月遠(조거운이세월원) 새 날아가 구름 흘러가니 세월이 아득하고
山長水闊杯觴深(산장수활배상심) 산 따라 강물 넘실거리니 술잔이 깊어지네
秋風萬里數莖鬢(추풍만리수경빈) 가을바람 만 리에 불 때 몇 가닥의 귀밑털
蟾桂一宵千古心(섬계일소천고심) 달밤은 한밤중에 천고의 마음
醉睡飽嬉從意好(취수포희종의호) 취하여 잠들며 마음껏 즐김은 뜻에 합당한 바니
誰能愁盡床頭金(수능수진상두금) 누가 침상 맡의 금을 다하는 것 근심하리오?
〈감상〉
이 시는 두보(杜甫)의 시에 차운한 것으로, 31세 때 독서당(讀書堂)에서 수학할 때 당시 일기 시작한 학당(學唐)의 문풍을 체험하면서 학두(學杜)의 시를 쓴 것이다.
강가의 풍경은 흰 모래와 푸른 대나무에 파도는 만 길이며, 하늘의 모습은 아침 안개와 저녁노을이 한가롭게 갰다 흐렸다 한다. 하늘 멀리 새가 날아가 구름 흘러가는 것을 보니 세월이 아득하고, 다시 시선이 아래로 내려와 산 따라 강물 넘실거리는 것을 보니 세월의 무상함에 술잔을 기울인다. 가을밤, 바람이 만 리에서 몇 가닥의 귀밑털에 불어오고, 가을 달밤은 한밤중에 천고의 마음이다. 무상감을 달래기 위해 취하여 잠들며 마음껏 즐기니, 누가 침상 맡의 금을 다 써 버리는 것에 대해 근심하리오(이 구절은 장적(張籍)의 「행로난(行路難)」에 있는 “군불견상두황금진(君不見牀頭黃金盡), 장사무안색(壯士無顔色)”이란 말에서 나온 것임)?
『해동잡록』에, “본관은 고령(高靈)으로 자는 개지이며 호는 이요정 또는 송계라 한다. 신면의 아들로 호매하고 문장을 잘하였다. 성종 때에 급제하고 대제학을 지냈고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高靈人(고령인) 字漑之(자개지) 號二樂亭(호이요정) 又曰松溪(우왈송계) 㴐之子(면지자) 性豪邁(성호매) 能文章(능문장) 我成廟朝登第(아성묘조등제) 主文衡(주문형) 官至左議政(관지좌의정) 謚文景(익문경)).”라 하여, 신용개가 문장에 뛰어나다고 말하고 있다.
〈주석〉
〖尋〗 자 심, 〖靄〗 구름이 길게 낀 모양 애, 〖闊〗 거칠다 활, 〖莖〗 줄기 경, 〖蟾桂(섬계)〗 달 속에 있는 두꺼비와 계수나무. 〖宵〗 밤 소
각주
1 신용개(申用漑, 1463, 세조 9~1519, 중종 14):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개지(漑之), 호는 이요정(二樂亭)·송계(松溪)·수옹(睡翁). 할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신숙주(申叔舟)이며, 5세에 부친이 사망하자 신숙주에게 양육되었으며,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배웠다. 1483년(성종 14) 사마시에 합격하고, 1488년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성종이 그의 높은 학덕을 사랑하여 어의(御衣)를 벗어 준 일도 있었다. 1492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투옥되었으나 곧 석방되었고, 직제학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강직한 성품이 연산군의 비위를 거슬러 1502년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 1503년 형조참판, 이어 예조참판이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504년에는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영광(靈光)으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 후 성희안(成希顔)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고명(誥命)을 받아 온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그 뒤 우참찬·대사헌을 거쳐 이조·병조·예조의 판서, 우찬성을 역임했다. 1516년 우의정, 1518년 좌의정에 올랐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