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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어(民魚)는 민어(鰵魚)·면어(鮸魚)라고도 하였다. 학명은 Miichthys miiuy 이다. 몸은 옆으로 납작[側扁]하고 아래턱은 위턱보다 짧으며, 턱에 2쌍의 구멍이 있다. 꼬리지느러미는 길고 참빗 모양을 하고 있다. 몸빛은 등쪽이 회청색이고, 배쪽은 연한 흰빛이다. 몸길이는 90㎝에 달한다. 우리나라 서·남해에 분포하며 동해안에는 없다. 경기도의 덕적도 연해와 전라도의 신도 연해에서 많이 잡힌다.
'국민의 물고기'라고도 불리는 민어는 평소 부모를 봉양하지 못한 자식들이 돌아가신 뒤에라도 드시게 한다며 제사상에 반드시 올리는 것이 바로 민어이다. 제사상에 올리는 것은 말린 민어로 만든 찜으로 말린 민어는 민어굴비라 부른다. 농어목에 속하는 민어는 전체적으로 어두운 흑갈색을 띠지만 배 쪽은 회백색이며 근해의 수심 15~100m의 펄 바닥에 서식하며 7~9월에 산란한다.
민어(民魚)는 이름 그대로 국민의 물고기로,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만큼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 횟감으로는 최고의 재료로 꼽히며, 그 맛 또한 최상이다. 때문에 평소에 민어로 부모를 봉양하지 못한 자식들이 후회하며, 돌아가신 뒤에라도 꼭 제사상에 올려야 하는 부담을 갖게하는 수산물이다.
부레는 삶거나 젓갈로도 먹지만 교착력이 강해 선조들은 풀(민어교, 民魚膠)로 요긴히 썼다고 한다. 햇볕에 말려 끓인 뒤 고급 장롱을 비롯, 문갑, 쾌상 등 가구를 만드는 데나 합죽선(合竹扇)의 부채살과 갓대를 붙일 때 이용했다. '이 풀 저 풀 다 둘러도 민애풀 따로 없네' 라는 강강술래 매김소리나, '옻칠 간데 민어 부레 간다'는 속담은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됐다.
민어는 옛날부터 우리 민족이 좋아하는 물고기이며, 어업의 역사도 깊다.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토산조에는 민어(民魚)라는 이름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경기도와 충청도의 여러 곳에서 잡혔고, 전라도·황해도 및 평안도에서도 잡혔던 것으로 되어 있다. 영조 때 편찬된 여러 읍지(邑誌)에도 전라도·충청도·황해도 및 평안도에서 산출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정약전(丁若銓)의 "자산어보(玆山魚譜)"에서는 민어를 면어(鮸魚)라고 하고 그 속명을 민어(民魚)라고 하였으며, 민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큰 것은 길이가 4, 5자이다. 몸은 약간 둥글며, 빛깔은 황백색이고 등은 청흑색이다. 비늘이 크고 입이 크다. 맛은 담담하고 좋다. 날 것이나 익힌 것이나 모두 좋고 말린 것은 몸에 좋다. 부레로는 아교를 만든다.
정문기 박사의 「어류박물지」에 따르면, 전남 법성포 에서는 30㎝ 내외의 것을 '홍치', 완도에서는 '부둥거리'라 했으며, 서울과 인천 상인들 사이에선 작은 것부터 보굴치→가리→어스래기→상민어→민어라고 불렀다. 평안남도 한천(漢川) 지방에서는 민어 새끼를 '민초'라고 불렀고, 전남 지방에선 민어의 특대를 '개우치', 소금에 절여 말린 민어의 수컷을 '수치'라 불렀고, 암컷은 '암치'라 불렀다.
큰 놈은 길이가 무려 4~5척에 달한다. 몸은 약간 둥글고 빛깔은 황백색이며, 등은 청홍색이다. 비늘과 입이 크고 맛은 담담하면서도 달아 날것 혹은 익혀 먹어도 다 좋으며, 말린 것은 더욱 몸에 좋다. 흑산도 앞바다에서는 희귀하나 간혹 물 위에 뜬 것을 잡곤 하며, 더러 낚시로도 잡을 때가 있다.
섬으로 이뤄진 신안지역의 북쪽에서는 음력 5~6월에는 그물로 잡고, 6~7월에는 낚시로 낚아 올린다. 어란포(魚卵胞)의 한짝 길이는 수척에 달하고 알젓도 일품이다.
복더위에 반드시 먹어야 하는 생선 국민들이 선호하는 물고기라 해서 '민어(民魚)'라 부르며, 제사상에 꼭 올리는 귀한 고기로 여겨왔다. 여름이 제철로 '복더위에 민어찜은 일품, 도미찜은 이품, 보신탕은 삼품'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더위에 지친 기력회복에 최상의 보신식품이다.
경골어류 농어목 민어과의 바닷물고기인 민어류는 민어, 꼬마민어, 동갈민어, 점민어(홍민어), 황금리브민어, 대서양꼬마민어 등으로 분류된다. 민어는 심해어로 근해 수심 15~100m 정도의 서·남해안 뻘 바닥에 서식하며, 동해안에는 분포하지 않는 어종으로, 길이 1m, 무게 20kg 정도의 대형 물고기이다.
남제주수산종묘시험장에서 큰민어 종묘를 생산, 양식을 시도한 적이 있으며, 지금은 일부 양식어업인 및 연구소 등에서 시험양식 되고있다. 하지만 종묘생산이 다른 어종에 비해 어려워 양식활성화에는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살은 회로, 뼈는 내장과 함께 지리탕으로 끓여 먹고, 껍질과 부레 그리고 지느러미살은 별도로 떼어내 기름소금과 함께 먹는다. 민어의 본고장인 전남 목포와 신안 지방에서는 별미중의 별미로 꼽는다.
흑산도 바다에는 희귀하나 간혹 수면에 떠오르고, 간혹 낚아서 잡는다. 나주(羅州)의 여러 섬 이북에서는 5, 6월 그물로 잡고 6, 7월 낚시로 잡는다. 그 알주머니는 길이가 수 자에 달한다. 젓갈이나 어포가 모두 맛이 있다. 어린 새끼를 속칭 암치어(巖峙魚)라고 한다. 또한 1종이 있는데, 속칭 부세(富世)라 하며, 길이가 2자 정도에 불과하다.
이를 통하여 민어가 옛날부터 유용한 물고기로 취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유구(徐有榘)의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에는 민어를 한자로 민어(鰵魚)라고 쓰고, 서·남해에서 나며 동해에는 없고 모양이 조기[石首魚]와 유사하나 그 크기가 4, 5배에 달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부레는 교착력이 강하여 전국의 공장(工匠: 물건을 만드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사용하는 아교가 모두 민어의 부레라고 하였다. 또, 민어의 알젓은 진귀한 식품이고 민어의 염건품(鹽乾品)은 손님 접대용이나 제수용으로 쓰인다고 하였으며, 관서지방 사람은 담상(淡鯗), 즉 소건품(素乾品)을 만드는 데 그것은 더욱 좋다고도 하였다.
민어의 염건품은 조기 다음으로 좋아하는 식품으로서, 음력 7월의 관월제(觀月祭)와 8월의 우란분(盂蘭盆: 夏安居의 끝날인 7월 보름날에 행하는 불사) 때는 조기와 함께 민어를 사용하는 풍습이 있어 그 판로가 매우 넓고 값도 싸지 않다고 하였다.
당시 민어의 값은 태이도 어장에서 한 마리에 큰 것은 15전, 작은 것은 10전이었는데 부레가 4전 내외였다고 한다. 부레가 아교의 좋은 원료로 그 값이 비쌌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어의 어획량이 상당히 많은 편이었는데 최고기록을 수립하였던 1924년에는 근 2만 톤이 어획된 일이 있었다.
그 이후 연간 수천 톤이 어획되고 있었다. 광복 이후 약 20년간에는 연평균 2∼3천톤 정도의 어획수준을 유지하여 왔고, 가장 많이 잡힌 1964년 4,174톤이 어획되었으나 그 뒤에는 감소경향을 보였고, 최근 약간 상승하여 2천여 톤에서 3천여 톤이 어획되고 있다.
1992년에 2,272 톤, 1997년에 1,177 톤이 어획되었다. 이는 대형 기선저인망이 동원되어 어획하는 등 어획노력이 증투(增投)된 결과이며, 민어의 자원은 옛날에 비하여 크게 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