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95) 고종 10
- 몽고와의 전쟁이 끝나다.
한편 공납까지 중지하며 약속한 것을 이행하지 않는 고려의 태도를 보다 못한 몽고는 1257년 5월 또다시 침공을 해 옵니다. 6월에 서경에 이른 몽고군은 고종이 친히 나와 군사를 맞이하되 태자를 몽고에 볼모로 보내야만 철군하겠다고 협박을 합니다. 고심 끝에 고종이 태자를 몽고에 보내기로 결정하자 몽고군은 바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고종은 아무래도 태자를 몽고에 보내는 것이 불안했던지 11월 계측일에 4품 이상 관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태자를 몽고에 보낼 것인가 아니면 어찌 몽고군을 막아낼 것인가를 토의하게 됩니다. 결론은 바로 나왔습니다. 태자 대신에 그의 동생 안경공 창을 몽고에 다시 보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듬해 3월 김준과 유경 등이 최의를 죽이고 정권을 고종에게 올리는 대사건이 발생하여, 최씨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형식적으로는 모든 권력이 왕에게 이양 된 것처럼 보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최의를 죽인 김준 일파에게 넘어가 있는 상태가 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는 기나긴 대몽항쟁의 끝을 향해 치달아 가고 있었습니다.
그즈음 태자를 대신하여 안경공 창이 연경에 도착하자, 속았다는 것을 안 몽고는 이듬해 6월 또다시 고려로 침공해 들어옵니다. 군사들을 이끌고
평주에 진을 친 몽고군의 수장 여수달은 태자가 직접 나와 항복을 하라고 윽박지릅니다.
30년 가까이 고려를 침공하였으나 굴복시키지 못한 몽고로서는 대제국으로서의 자존심에 큰 손상을 입었을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들도 지긋지긋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대군을 이끌고 침공해 왔지만 요구사항을 한층 낮추어 왕이 아닌 태자가 나와서 영접하고 항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려의 대신들은 여수달이 불측지변(不測之變)을 꾸미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태자가 와병 중이니 병이 낫기를 기다리라며 일축해 버립니다. 이에 약이 바짝 오른 여수달은 고종에게 다시 태자를 보내라고 재촉하지만 고려 조정에서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군사를 풀어 분풀이 노략질을 시작합니다. 때마침 또 다른 대군을 이끌고 개경에 도착한 차라대도 군사를 풀어 백성들의 집을 약탈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극악 상황에서도 끝끝내 버티던 고려 조정은 예상치 못했던 변수에 손을 들고 맙니다.
통진현의 조휘와 정주의 탁청이 화주(和州, 영흥) 이북 땅을 떼어 몽고에게 바치자 몽고는 그곳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조휘를 총관으로 탁청을 천호로 삼아 몽고의 휘하에 두고 고려 땅을 통치하게 됩니다.
게다가 달보성 백성들이 방호별감 정기 등 관헌들을 붙잡아 몽고군에 투항하는 일까지 발생하는 등 곳곳에서 몽고군에 항복하는 자들이 속속 줄을 잇자, 고종은 그해 12월 사신을 보내 항복의사를 표명하고 태자 전(倎:元宗)과 40여명의 대신들을 몽고로 보내면서 30년 가까이 진행되어온 전쟁을 겨우 끝낼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고려는 몽고의 요구대로 강화의 성을 모두 허물어 버립니다.
재위46년 동안 30여년을 몽고의 침략에 시달리고, 무신들의 눈치를 살피며 왕위를 지켜왔던 고종은 1259년 6월 향년 68세를 일기로 운명을 달리하게 됩니다. 시호는 안효(安孝) 능호는 홍릉(洪陵)입니다.
고려왕조실록(96) 원종 1 - 원종의 등극
고종이 죽자 대장군 김준은 안경공 창을 추대하여 왕위를 잇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신들은 맏아들이 왕위를 잇는 것이 통례이며 더구나 태자가 몽고에 볼모로 들어가 있는데 그 아우를 임금으로 삼을 수 없다고 극렬히 반대하고 나서는데다가, 고종이 죽기 전에 남긴 조서를 가지고 반드시 태자 전이 왕위에 등극해야 함을 주장하자 아무리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김준이라도 더 이상 고집을 피우지 못하게 됩니다. 고종의 조서에는 분명히 태자 전이 왕위를 잇도록 하고 태자가 몽고에서 돌아오기 전까지는 손자와 상의를 하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태자 전은 몽고에 머문 채 왕위를 이어받게 되니 그가 바로 고려 24대왕 원종입니다. 나라의 힘이 부족하여 오랜 기간 펼친 대몽 항쟁을 접고, 고종 대신 볼모가 되어 몽고에 머무르고 있는 원종은 마음속 밑바닥 부터 몽고에 대한 반감이 극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종은 몽고 왕의 동생 쿠빌라이를 만나면서 다소나마 호감을 갖게 되었고, 막강한 몽고의 힘을 빌려 부왕시절에 아니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무신들의 꼭두각시 놀음에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해왔던 선왕들이 꿈에 그려온 완벽한 왕권회복을 도모해 보고자 마음먹게 됩니다.
그 당시 국명을 원으로 고친 몽고의 내부 사정을 살펴보면 몽고 왕 헌종이 죽고 나서 왕의 아우 쿠빌라이와 아리패 간에 왕위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태자 전이 쿠빌라이를 만나러가자 그는 매우 기뻐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고려와 우리는 만 리나 떨어져 있는 먼 사이요. 일찍이 당나라 태종이 친히 고려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항복시킬 수 없었는데 이제 그 나라 태자인 그대가 스스로 와서 나를 따르겠다하니 이는 하늘의 뜻이로다.”
원종이 보기에 쿠빌라이는 얼굴이 그림같이 아름답고 행동거지가 예의범절에 맞았습니다. 하여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고려에서 고종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쿠빌라이는 무장들을 시켜 원종을 호위하게 하였고, 태자가 왕으로 등극하게 되었다는 소식에 쿠빌라이는 일국의 국왕으로 대접하여 숙소도 옮겨주고 더욱 후대하자 원종은 더욱 마음이 풀어져 몽고와 친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고 몽고의 힘을 빌려 왕권회복을 도모 해야겠다는 뜻을 더욱 굳히게 됩니다.
고종의 죽음으로 곧바로 고려로 돌아온 원종은 1260년 4월 무오일에 41세의 나이로 왕좌에 앉게 됩니다. 비록 몽고(원)의 속국이 되더라도 그 힘을 빌려 왕권을 회복하겠다는 원종,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고 개경 환도를 막고자 하는 김준, 나라를 이끌어 갈 두 사람의 생각이 이렇듯 달랐으니 고려의 앞날은 예측불허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