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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회 선교 백주년 준비와 제15대 서병주 감독회장
1976년부터 전개된 ‘5천 교회, 100만 신도운동’으로 감리교회는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선교 100주년을 맞는 시점에서 감리교회 성장은 특별한 일이기도 했다. 감리교회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야 하는 것은 시대적인 요청이었다. 1982년 10월 27일에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15회 총회는 이런 시대적인 요청을 구체적으로 수용해야 했다. 지난 2년간의 비약적 성장을 토대로 제14회 특별총회에서 결의한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의 시행 세칙을 작성하여 위원회를 조직하고 100주년 기념사업을 보다 구체화했다. 이런 역사적인 획을 긋는 중요한 일을 감당할 새로운 일꾼을 뽑는 일이 제15회 총회가 해야 할 일이었다. 제15회 총회는 각 연회마다 감독을 선출하였으니 서울연회는 서병주 목사를, 중부연회는 최용환 목사를, 동부연회는 김기종 목사를, 남부연회는 장만석 목사를, 삼남연회는 여관구 목사를 각각 감독으로 선출하였다.이어 감독회장 선거에서 전체 550표 중에 서병주 감독이 316표를 얻어 제15대 감독회장에 당선되어 감리교회를 이끌게 되었다.
제15회 감리교 총회에서 선출된 이들이 이끄는 감리교회는 1984년에 개최할 ‘백주년 기념사업에 관한 사항’이 당면 과제였다. 이는 1884년 6월 24일 미국 감리교 일본주재 선교사 맥클레이가 조선에 들어와서 고종을 알현하고 교육과 의료 부분에 한하여 선교활동을 윤허받은 지 100년을 기념하는 행사다. 그래서 1983년 4월 25일~27일에 경주 도큐호텔에서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 및 선교 제2세기를 향한 감리교단 정책수립”을 위한 협의회를 구성하여 여러 가지 주요 행사를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84년 6월 19일~22일까지 정동제일교회에서 ‘100주년 기념 국제대회’를 개최하였다. 8월 27일 서울 잠실체육에서 “선교백주년 남녀선교대회”를 개최하였다.
서병주(徐丙柱) 감독회장은 1922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46년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 정회원에 허입하였다.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총리원 교육국 간사로 일하였으며 1949년 천태교회, 1951년 부평사거리교회를 담임했다. 1952년에는 육군 군목으로 입대하였고 1958년 전역 후 1963년까지 포천교회를 담임하던 중 철원지방 감리사를 역임했다. 1963년 4월부터 서대문지방 석교교회를 담임하였다. 1982년 제15회 총회에서 제2대 서울연회 감독과 제15대 감독회장에 당선되어 선교 100주년 시대를 맞는 감리교회를 이끌게 된 것이다.
서병주 감독은 제3회 서울연회(1983년 3월 22일~24일, 정동제일교회 개최)와 제4회 서울연회(1984년 3월 20일~22일, 정동제일교회 개최)를 이끌었고, 1984년 6월 19일부터 22일까지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한 100주년기념국제대회를 주관하였다. 또한 제15회 총회 특별총회(1983년 9월 28일~30일, 정동제일교회 개최), 제16회 총회(1984년 10월 29일~31일, 정동제일교회 개최)를 주관하였다.
감독의 임기를 마치고 서병주 감독은 서대문지방 석교교회에서 목회를 마무리하였고 1993년 3월 10일~12일까지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13회 서울연회에서 은퇴하였다. 그 후 1999년에 향년 77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
최용환(崔龍煥, 호 水岩) 감독은 1926년 3월 1일에 황해도 연백군 용도면 옥야리 36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51년 중앙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수촌교회에서 목회했다. 1967년부터 수원서지방 감리사를 3회(1971년, 1975년) 역임하였다. 21년 동안 담임하던 수촌교회를 이임하고 1972년에 수원 매산교회에 부임한 후 1996년 은퇴할 때까지 담임하였다. 1971년에는 수원경찰서 경목위원장, 1973년 수원시 기독교연합회장과 수원 YMCA 이사로 활동했다. 1974년에 감리교신학대학 선교대학원을 졸업했다. 1981년부터 1993년까지 평통자문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84년부터 1993년까지 경기도정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1982년 제15회 총회에서 제16대 중부연회 감독에 당선되었다. 감독 재임 시 제42회 중부연회(1983년 3월 16일~18일, 수원 매산교회 개최), 제43회 중부연회(1984년 3월 14일~16일, 인천 주안교회 개최)를 이끌었다. 감독직을 마친 후 매산교회에서 남은 목회활동을 계속했다. 1990년 12월 30일에 국민훈장 동백상을 수상했으며 1993년에 경기도 기독교 연합회 회장과 기아대책 경기도 지부장의 직임도 맡았다. 1994년 8월에 미국 세인트 찰스대학 신학대학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해 학교법인 감리교 대전신학원 이사, 1995년 학교법인 감리교 영명학원 이사장, 수원기독교문화원 총재로 일했다. 이듬해 최용환 감독은 1996년 3월 26일~28일까지 여주중앙교회에서 개최된 제7회 경기연회에서 은퇴하였다. 은퇴 후 수원성교회(매산교회 변경된 이름) 원로목사로 있으면서 1997년 한국 목회연구원 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2017년 향년 91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최용환 감독은 목회 45년 중에 국외에 3개의 교회를, 국내에 5개의 교회를 개척하였으며 네 번의 성전을 건축하여 하나님이 맡기신 귀한 사명을 감당하였다. 강순애 사모와 슬하의 3남 1녀(최리균 목사, 최신균 장로, 최승균 목사, 최인숙 권사)를 두었다.
김기종(金基宗) 감독은 1922년 3월 5일 평안남도 덕천군 풍덕면 신풍리 210번지에서 태어났다. 1935년 덕천읍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1940년에 두르미중학교, 1946년 강원도 경찰학교를 졸업하여 경찰 업무에 종사하다가 1955년 뒤늦게 감리교 신학대학을 졸업하였다. 신학교에 들어가면서 바로 1948년에 오가교회에서 첫 목회를 하였으며 1951년 응봉, 예산제이교회를 담임하고 1957년 4월 정동제일교회에서 3부 연회 연합으로 개최된 제3회 남부연회에서 류형기 감독의 집례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58년부터 1964년까지 양막, 수원 제암리교회를 담임했고 1964년~1974년까지 남부연회 광주제일교회, 전주제일교회에서 목회했다. 1964년에 전라지방, 전남지방 감리사를 역임하고 광주기독교연합회 회장을 역임하고 1971년에 삼남선교연회 관리자로 임명받아 활동하였다. 1974년에 동부연회 제천제일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제천지방 감리사, 제천 기독교연합회장을 역임했다. 1982년 제16대 동부연회 감독으로 피선되었다. 그는 감독 재임 시 감리교 선교 100주년 기념관을 세우고, 동부연회 선교센터를 건립하고 농어촌, 광산지역 교역자 돕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감리교 교역자 은급사업에도 힘을 쏟고 선교 100주년 헌금도 할 것에 대해서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김기종 감독은 제34회 동부연회(1983년 3월 9일~11일, 제천제일교회 개최), 제35회 동부연회(1984년 3월 7일~9일, 춘천 중앙교회 개최)를 이끌었다.
감독 임기를 마치고 제천제일교회에서 남은 목회를 다하고 1989년 3월 14일~16일까지 강릉중앙교회에서 개최된 제40회 동부연회에서 은퇴하고 제천제일교회 원로목사로 있었다. 2007년에 별세하였으며 정상윤 사모와 슬하에 1남 6녀(김철휘, 김철순, 김철자, 김철옥, 김은희, 김은숙, 김영석)를 두었다.
장만석(張萬錫) 감독은 1918년 충남에서 태어났다. 감리교신학대학과 목원대학 교역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삽교, 좌방, 청양, 오전교회를 담임했으며 대전 성남교회를 담임하던 중에 1982년 남부연회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장만석 감독은 감독에 선임되기 전에 감독직을 수행했었다. 1980년 3월에 박우희 감독이 별세로 하여 공석이 된 감독직을 1980년 5월 16일에 모인 남부연회 총대회의에서 보선되어 전임자 잔여 임기를 채우고 제13회 총회 2차 특별총회에서 연회 경계가 조정됨에 따라 새로운 남부연회 조직을 위하여 1980년 9월 29일 대전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조직연회를 인도하였다. 그리고 1982년에 제4대 남부연회 감독이 되었으니 두 번의 감독의 경험을 하게 된 특이한 이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제29회 남부연회(1983년 3월 23일~25일, 대전제일교회 개최)와 제30회 남부연회 (1984년 3월 28일~30일, 대전제일교회 개최)를 주관하였다.
여관구(呂觀九, 호 恒春) 감독은 1920년 11월 18일 황해도 신천군 궁흥면 농사리에서 아버지 여훈호와 어머니 황호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53년에 중앙신학교를 졸업하고 1958년 동아대학교 철학과 3학년에 수료했다. 이후 1979년에 부산연합신학대학원을 수료했다. 1952년 부산지방 충무교회 부담임전도사로 있었고 1953년에 부산 구포교회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고 성전을 증축했다. 1956년에 은천교회에 부임하고 성전을 건축했다. 1959년 3월 17일~22일까지 정동제일교회에서 3부 연회 연합으로 개최된 제5회 남부연회에서 김종필 감독의 집례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58년 부산지방 주일학교 연합회 총무로 일했으며 1959년에 마산지방 함안교회로 부임하고 성전을 건축했다. 1959년 마산지방 청년부 총무, 1960년 마산지방 전도부 총무, 1967년 마산지방 감리사를 역임했다. 1968년에 마산지방 밀양교회에서 목회하면서 1970년 밀양지역 교회연합회장으로 활동했다. 1971년 마산지방 감리사를 역임하고 1972년에 경북 안동교회로 부임하여 성전을 건축했다. 1975년에 북마산교회를 담임하고 교회 이름을 성은교회 바꾸었다.
1982년에 제2대 삼남연회 감독에 당선되었다. 감리회 총회 실행위원(1983~1984), 서울 감리교신학대학 이사(1983~1984), 기독교대한감리회 기본재산관리위원(1983~1987), 대한성서공회 이사(1983~1990)로 활동했다. 여관구 감독은 감독 재임 시 제3회 삼남연회(1983년 3월 15일∼17일, 경주교회 개최)와 제4회 삼남연회 (1984년 3월 13일∼15일, 마산중앙교회 개최)를 주관하였다. 여 감독이 재임하던 1984년에 부산시 서구 동대신동 49번지 소재 구 제일교회 건물 중 80평 건물을 8천 5백만 원에 매입하여 연회 센터로 사용하였다. 특히 제4회 연 표어를 ‘자립 선교하는 삼남연회’라는 표어를 가지고 개최하여 그해 17개 교회(서울연회 10개, 삼남연회 7개)를 개척 설립했다.
여관구 감독은 감독 임기를 마친 후 성은교회에서 목회하였고 1991년 3월 20일~22일까지 대구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11회 삼남연회(김종수 감독)에서 은퇴하고 서울에 거주했다. “대신관계, 대인관계, 대물관계를 잘하자”라는 좌우명을 가진 여관구 감독은 2008년 향년 88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
여관구 감독은 1971년 내부부장관 표창을 받았고 1972년 제2군 사령관 표창, 1973년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표장, 1975년 안동경찰서 공로표창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인생궤도」가 있다. 이영순 사모와 슬하의 3남 2녀(여우훈 목사, 여주훈 권사, 여미순 권사, 여은순 권사, 여성훈 목사)를 두었다.
중부연회 최용환 감독
제15회 총회 감독들 앞줄 좌로부터 장만석 감독(남부), 서병주 감독회장(서울), 여관구 감독(삼남)
뒷줄 좌로로부터 임순목 감독(동부), 최용환 감독(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