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파소리 은은한 서주 야시장
돈황 시내에 있는 야시장은 주로 회족들이 많았다.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이다. 시내 중심가에는 로타리에 비천상이 서 있어 쉽게 길을 찾을 수 있다. 비천상 북쪽은 호텔들이 밀집해 있고, 오른쪽이 사주시장, 둔황 박물관이 있다. 5월이 여행의 최적기, 명사산 모래언덕의 낙타투어가 가장 낭만적 이란다. 옥, 보석, 도장, 많은 기념품, 말린과일들이 있어 가격도 싸고 특이하고 예뻐서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저넉 식사후 삼삼오오 짝을 지어 둘러보면 운동도 되고, 값도 저렴하고 특히 회족 상인들의 친절함이 좋다. 스카프,목도리, 말린과일,기념춤들을 샀다.
봉화대는 설산 너머에서 달려오는 유목민들을 감시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봉화대는 장안에서부터 천km 떨어진 타향에서 징집되어, 국경을 수비할 병사들과,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설산을 넘어야 하는 사신, 구도자, 상인들이 느낄 아득함, 그 막막함을 가슴에 품고 바람부는 모래언덕에 우뚝 서 있다.
돈황 약탈자로는 오럴 스타인 (영국의 인도 총독부) 고고학 조사부에서 근무하던 스타인은 (1900-1901) 중국의 신장 지역을 탐험한 데 이어 1902년 돈황에서 엄청난 양의 고대 불교 미술품과 고문서들을 쓸어 영국으로 가져갔다.
일본 서본원사 승려이며, 영국 왕립지리학회 회원의 신분으로 영국에 유학 중이던 ‘오타니’는 그것을 보고, 적이 놀랐다. 감춰졌던 고대 유물에 대한 경이를 너머 동양의 불교 미술품이 서양으로 마구 유출된다는 사실에 분개까지 하면서
사실 ‘스타인’은 그때 최대 치적이라 일컬어지는 돈황 천불동 장경동을 발견하기 전이었다. 그리고 그는 영국의 여러 대학에서 페르시아학과 인도학을 전공하기는 했으되, 한문을 알지 못했다. 까닭에 옥석의 가림없이 눈에 띄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싣고 온 편인데 그러함에도 워낙에 보고였던 지역들이라 그 양과 질이 대단했다. 게다가 얼마 뒤에는 다시 스웨덴의 ‘헤딘’이 중앙아시아를 탐험하고 돌아와 약탈품을 자랑했다. 런던에 온 헤딘을 직접 만난 ‘오타니’는 드디어 결심을 굳혔다. ‘헤딘은 1908년 조선에 와 종로 ‘YMCA’에서 강연도 했다. 오타니는 불교를 믿는 동양인의 한사람으로써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의 동점(東漸) 루트를 밝히겠다는 그럴듯한 슬로건 아래 그들 역시 서구 열강의 약탈자들과 다름없이 마구잡이 유물수집으로 일관했다. 오타니는 1902년 영국을 출발 러시아의 안디잔(현 우즈벡 동부)에 이르렀고, 다시 ‘파미르 고원을 넘어 ‘카슈카르’에 들어갔다. 일행은 중국 신장의 초입인 ‘타슈쿠르칸’지역을 함께 탐험한 뒤, 팀을 나눠 파미르, 길기트, 폐사와르‘ 로 통하는 남쪽 루트를 조사한 후 인도를 경유 해 일본으로 돌아갔고, 또 다른 일행은 타림분지, 호탄, 타클라마칸 사막, 쿠처, 투루판을 거쳐 중국 대련을 경유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후 오타니는 혼자 1906-1908년 제2차 중앙아시아 탐험에 나섰다. 1910-1914년 제 3차 탐험을 감행, 돈황, 막고굴에서 중국 승려 왕원록이 숨겨 두었던 잔서 (중국 정부는 서역 유물과 서적들을 중요 박물관으로 이전 시킴) 이때 왕원록이 숨긴 500 여권을 획득해 갔다. 오타니는 1차, 2차때 키질 석굴과 천불동 석굴, 투루판 ’배제클리크‘석굴등을 훑었고, 3차 때에는 돈황의 잔존 유물을 쓸어 담았다. 그리하여 일본은 영국, 프랑스, 중국에 이어 4번째로 많은 돈황 문서 보유국이 되었는데 우리가 알고있는 원효의 ’대승기신론소‘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1908년 프랑스의 ‘펠리오’가 왕원록으로부터 구입한 문서중의 하나로 처음에는 당나라 승려의 인도 기행문으로 여겨지다가 훗날 오타니가 돈황 문서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727년 신라 승 ‘혜초’가 천축국(북인도) 다섯 나라를 여행하며 기록한 인도, 파키스탄, 중앙아시아 기행문 이라는것을 고증해 밝히며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지금 원본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고, 5893자 358cm가 남아있다.
프랑스 극동학원 ‘펠리스’는 유창한 중국어와 뛰어난 한학으로 알짜배기 문서만 추려왔다.
오타니의 3차에 걸친 10년간의 탐험 비용이 당시 교토시의 1년 예산에 버금갈 정도로 거금이 들자, 자신의 가문에서 일부를, 서본원사 혼간지에서 충당했다. 나중에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한 오타니는 대 저택과 서역 유물들을 처분, 1915년 12월 중국 뤼순으로 거처를 옮겼고, 이때 1714건에 이르는 유물과 다량의 돈황 문서를 가져갔다. 이때 미처 옮기지 못한 유물 1500 점은 도쿄 국립박물관에 보관하고, 나라쿠소에 남은 1500점은 집주인인 전 상공대신 구하라 후사노스케‘가 소유했다. 벽화 등과 같이 부피가 큰 것들은 경성의 조선총독부’에 기증,이때 기증받은 유물은 경복궁 수정전에 보관하다가, 지금은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한다.
중앙박물관 3층에서는 그 서역 유물들을 볼 수 있는데 불교 유물, 매장유물, 일상생활 유물의 분야로 나눈다. 고대 이집트를 비롯한 중동지방에서 숭배된 ‘세라피스 상’ 등에서는 실크로드를 따라 전파된 헬레니즘 문화도 읽힌다. 매장 유물은 투루판 지역에서 주로 출토된 묘표, 진묘수, 복희여와도 및 죽은 자의 머리맡에 놓이는 다양한 형태의 인형이 대표적이다. ‘로프노르 샤오허’ 묘지에서 출토된 사람 형상의 나무막대 조형물, 바구니와 모자등의 생활용품은 무려 기원전 17-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스타나‘ 무덤에서 나온 6-7 세기의 그릇 표면에서는 페르시아 사산조에서 유행했던 길상문(吉祥紋)인 구슬 무늬가 묘사되어 있어, 서 아시아와 이루어진 문화교류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되어있는 불교 조각은 주로 서역 남도의 대표적인 불교 중심지인 ’호탄‘에서 출토된 것이다. 이외에 서역 북도의 ’투르판‘과 옛 ’언기국‘에 속하는 ’카르샤르‘ 지역의 문화재도 소장되어 있다.
묘표와 진묘수— 무덤의 널 길에는 무덤 주인의 이름, 관직, 사망일을 적은 묘표가 남아있다. 묘표는 투루판 지역을 다스리던 국씨 고창국의 국가 체제가 정비되는 5천년 무렵부터 활발히 제작되었다. 널방 입구에는 무서운 짐승의 모습을 한 상상의 동물인 진묘수 한 쌍을 바깥을 향해 두었다. 이는 죽은 사람이 내세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무덤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
첫댓글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항상 여행 후 남겨주신 기행문은 많은 사람들이 해당 관광지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흥미로운 역사 공부 많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