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17 주일설교
예수 부활을 주장한 죄
사도행전 25:13~27
성탄절이 한 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런 시기에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설교가 적절할까요? 약간은 어색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탄이 빛나는 것은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탄생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성탄이 파종이라면 부활은 수확이기 때문입니다. 파종이 중요한 이유는 마지막에 수확이 있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성탄절을 앞두고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색한 것이 아니라 성탄의 의미와 가치는 높이는 일입니다. 아멘.
예수님의 부활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사도들의 설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2에서 사도 바울은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앞부분에만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는 사복음서 모두에 자세히 나옵니다. 또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설교를 보면 사도행전 2장의 베드로 설교와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 설교, 사도행전 13장의 바울 설교를 보아도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설명은 거의 없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는 매우 강조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설교에서 탄생 이야기를 할 때도 예수님이 성경이 약속하신 그 메시아라는 차원에서만 이야기합니다. 즉 예수님이 이 땅에 탄생하신 것은 인류를 대속하기 위해 죽으려고 오셨고 또 부활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탄절에는 어떤 메시지가 들립니까?
대중매체에서는 예수님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 오신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그러면 안 됩니다. 교회에서는 “아기 예수님 탄생 축하해요”라는 낭만적 분위기와 산타클로스 선물 이야기에서 벗어나 대속물로 오신 예수님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본문에는 사도 바울이 세 번째로 재판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재판받을 때 바울에게 붙은 죄목은 오로지 예수님의 부활을 주장한 것 뿐입니다.
13절 등장하는 아그립바 왕은 헤롯 아그립바 2세입니다. 그는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이고 헤롯 대왕의 손자입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사도행전 12장에 나오는 헤롯입니다. 헤롯은 야고보 사도를 죽인 사람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다가 벌레에 먹혀 비참하게 죽은 왕입니다.
로마의 4대 황제 글라우디우스는 헤롯 아그립바 2세를 성전 관리자로 임명해서 대제사장을 세우거나 패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래서 아그립바가 신임 총독 베스도를 방문했을 때 베스도가 바울 사건을 재판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왕과 함께 베스도 총독을 방문한 사람은 버니게입니다. 버니게는 아그립바의 누이동생인데 처음에는 그녀의 삼촌과 결혼했다가 남편이 죽자 오빠에게 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 버니게를 아그립바의 내연녀로 생각했고 왕이 근친상간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왕이 왕비 대신 버니게와 함께 온 이런 행동이 버니게가 왕의 내연녀라고 생각할 빌미를 제공하지요.
베스도는 아그립바에게 바울의 죄목을 정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지금 베스도는 곤궁에 빠져 있습니다. 베스도가 스스로 말하기를 바울은 무죄입니다. 굳이 죄가 있다면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주장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황제 앞에 보낼 죄목이 되지 못합니다. 바쁜 황제에게 지방 통치자인 총독이 죄목도 없는 죄수를 재판하라고 보내는 것은 직무 유기이고 무능함입니다. 그랬다가는 총독의 관직이 박탈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베스도는 유대 종교와 관습을 잘 알고 성전 관리자로 임명받은 아그립바 왕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18~19절을 보면 바울의 죄는 성전 모독죄도 아니고 역적모의를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종교적인 문제인데 유대인들은 바울이 예수의 부활을 주장했다고 고발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바울이 8절에서 간단하게 말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자세하게 설명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여간 지금 바울에게 성전 모욕죄나 불법 단체 결성 죄 같은 말은 사라지고 오로지 부활 문제 하나만 남았습니다. 바울이 예수의 부활을 주장하고 가르치고 다닌다는 것이 핵심 쟁점이 되었습니다.
사두개인은 부활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은 부활은 인정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로마인 베스도는 부활이 무슨 소리이며 그것이 왜 문제인지 이해를 못 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울이 예수님의 부활을 자세히 설명했지만 베스도는 마음을 열어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크신 은혜인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성육신을 믿으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것은 엄청나게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이 큰 은혜를 받은 것 하나만 생각해도 여러분은 크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베스도의 말을 들은 아그랍바 왕은 자기도 바울을 만나보고 바울의 말을 들어보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황제에게 보낼 때 그에게 죄목을 붙이기 위한 재판을 열었습니다. 바울에게 죄가 없는데 죄목을 붙이기 위한 재판이라니, 이 얼마나 부당하고 억울합니까? 바울에게 있는 죄라곤 그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주장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23절을 보면 다음 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왔습니다. 여기서 위엄을 갖추었다는 말은 근엄(謹嚴)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φαντασία인데 상상력이라는 의미이며 영어 fantasy의 어원입니다. 화려한 트럼펫이 연주되는 가운데, 왕과 왕의 내연녀 버니게가 상상을 초월하는 차림으로, 옷자락을 끌면서 등장하고 그들이 화려한 좌석에 앉자 트럼펫 연주가 멈추었습니다. 바로 그때 바울이 죄수 신분으로 군인에게 인도되어 재판석 가운데 섰습니다.
자, 여기서 여러분이 보기에 누가 주인공입니까? 판타스틱한 옷차림으로 화려한 좌석에 앉아 있는 왕과 버니게가 주인공입니까? 죄수 신분으로 초라하게 서 있는 바울이 주인공입니까?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꼭 기억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왕과 버니게는 껍데기가 전부이고 바울은 초라한 외모와는 달리 그 속에 천지를 창조하고 운행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영이 함께 계십니다. 과연 누가 주인공입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바울이 주인공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주인공 바울처럼 되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아그립바가 화려하게 등장하는 이 대목에서 사도행전 12장의 사건이 소환됩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나오는 헤롯은 아그립바의 부친 헤롯 아그립바 1세입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야고보를 참수한 후 이를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까지 죽이려고 잡아 가두었습니다. 무교절 기간이 끝난 후 베드로를 처형하려고 했는데 처형 전날 밤에 천사가 와서 베드로를 데리고 나갔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베드로가 없는 것을 확인한 헤롯은 파수꾼들을 죽이라 명했습니다.
그 후에 헤롯은 가이사랴로 가서 왕복을 입고 백성들 앞에 서서 연설했는데 백성들이 헤롯의 목소리를 신(神)의 소리라고 소리쳤습니다. 헤롯은 기뻐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다가 천사가 치자 곧 쓰러져 벌레에 먹혀 죽었습니다. 헤롯은 벌써 천사에게 두 번째 당한 셈입니다. 그런 헤롯의 아들 아그립바 2세가 바울을 재판하는 자리에 나오면서 이렇게 야단스러운 차림을 하고 있으니 참 볼썽사납지요.
아그립바와 베니게와 천부장들과 도시의 높은 사람이 다 들어오고 바울이 재판정 한가운데에 서자 베스도 총독이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보고 있는 이 바울은 유대의 모든 군중이 죽여야 할 사람이라고 나에게 말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도 그랬고 여기 와서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살펴보니 이 사람은 죽일 죄를 지은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황제에게 상소했기에 황제에게 보내야 합니다.”
이 대목에서 자기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을 받겠느냐고 물어서 바울이 궁여지책으로 황제에게 상소했다는 말은 생략했습니다. 베스도는 이어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황제 앞에서 죄수를 보낼 때 죄목을 정하지 않고 보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사람을 황제에게 보낼 때 이 사람의 죄가 무엇인지 황제에게 소명할 자료가 필요해서 아그립바 왕과 여러분 앞에 세웠습니다”
베스도는 재판정에서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한 사유가 예수님의 부활을 주장한 죄라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 전날 아그립바 왕에게는 그 이야기를 다 했습니다. 여기서 베스도는 오직 바울에게 죽일 죄가 없다는 말만 했습니다. 여기에 생략된 말을 표현하면 이것입니다.
“만일 바울에게 죄가 있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주장하는 것, 그것뿐입니다.”
이어지는 26장에서는 바울이 그가 만난 예수님을 그 어느 때보다 자세히 설명합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다 들은 아그립바 왕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 그러다가 나까지 예수쟁이 만들겠구나.”
그리고 자기들끼리 의논하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이 황제에게 상소하지 않았다면 석방할 수 있었겠다.”
즉 바울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지금 죄수가 되어있는 이유는 그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전한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야 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황제에게 상소했기 때문이지만 더 중요한 진짜 이유는 로마에 가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반대파가 있습니까? 여러분을 미워하는 원수가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반대파가 없다면, 여러분이 그냥 좋은 사람으로만 인식되고 있다면 여러분이 예수님의 부활을 집요하게 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과 진짜 진리를 집요하게 전하면 반드시 반대파가 생깁니다. 싫어하는 사람이 생깁니다.
그리고 반대파가 생기면 반드시 추종자도 생깁니다. 여러분을 죽일 만큼 미워하는 사람이 생기면 여러분을 위해 목숨도 내놓고 싶어 하는 사람이 생깁니다.
모름지기 신자는 오직 예수님의 부활을 전한 것이 죄가 되도록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반대파 없이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만 듣는 것이 좋은 것 아닙니다.
정치인들에게는 추종자도 있고 반대파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치인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추종자와 반대파를 만들어야 할까요?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 부활 이야기를 해서 이런 소리를 듣는 신자가 되기 바랍니다.
“당신에게 죄가 있다면 누구에게나 너무 열심히 예수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이야.”
“당신은 다 좋은데 예수 부활을 주장하는 것이 문제야.”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나가서 그런 소리를 듣기 위해 지금 한번 연습해 봅시다. 옆 사람에게 서로 말해 봅시다. 그리고 나가서 이런 소리를 듣기 바랍니다.
“당신은 다 좋은데 예수 부활을 주장하는 것이 문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