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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 입문] 다음 시간 자료입니다.
제 17강
1958. 7. 22.
근대 체계적 사고의 통일원칙인 의식·293 | 19세기 체계 비판과 구제시도들·294 | 오늘날 체계 개념의 매력·295 | 체계적 사고의 유령적 잔존·296 | 체계에 대한 욕구와 완결된 세계경험·296 | 개별 과학들 사이의 범주적 연속은 없다(탤컷 파슨스)·298 | 기능적 체계 개념은 변론적이다·301 | ‘관련 프레임’·302 | 과학논리와 조야한 형이상학은 오늘날 상보적이다·304 | 변증법의 치유적인 시대착오·305
데카르트 이후 합리주의 부류의 서양 철학에 특징을 부여하는 체계 개념은 그 후 칸트의 경우 처음으로 전적으로 타당하고 필연적인 인식들의 최소치를 하나의 통일된 지점으로부터 전개하려는 시도로 강력히 등장합니다. 칸트의 경우 통일성의 개념과 체계의 개념은 등가적입니다. 그의 경우 체계화는 실제로 의식 통일성의 증거이자, 그러한 통일성에 대한 의식적 소여들 내지 의식적 사실들의 연관일 뿐입니다. 그 후 칸트를 넘어서, 또 어떤 점에서는 상^당히 엄격하게, 즉 스스로를 충족시키는 체계화라는 이 개념과 단지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다가오는 우발적 우연적 다양성이라는 관념의 화해불가능성을 통찰함으로써, 칸트 이후의 관념론은 체계 개념을 총체성으로 끌어올리고자 시도합니다. 즉 어떤 것을 바깥에 두지 않고 완전한 내재성 속에서, 다름 아니라 단절 없이, 전체 현실을 사고로부터 발전시키고자 시도합니다.(247) 그리고 이런 부류의 가장 천재적인 시도는 헤겔의 변증법적 체계였는데, 이 체계는 사실 그 나름으로 의식에 고유하지 않은 것, 우연적인 것, 우발적인 것을 의식으로부터 추론하려고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연성의 형식 자체를 필연성의 한 계기로서 규정하려고 시도했습니다.(입문293-294)
이러한 체계 개념은 19세기에 양쪽으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즉 한편으로 특히 헤겔과 또한 셸링의 자연철학의 선험주의적 구성들로부터 벗어나고, 마침내 칸트의 범주표 내지 칸트의 원리 체계 속에도 아직 보존되어 있던 최소한의 아프리오리들까지 비판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어들이기에 이르는 실증적 자연과학 쪽의 비난을 받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체계 개념은 역사와 삶이라는 범주를 지향하는 철학, 즉 체계적 논리적 구성과 이른바 비합리적 사실들, 그 자체가 의식으로 환원될 수 없는 사실들의 결합불가능성을 강조한 철학의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발전은 어느 정도 이미 쇼펜하우어에게서 시작되는데, 물론 체계 개념에 대한 그의 입장은 애매한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러한 비판의 정점을 이루는 것은 그후 매우 영향력 있게 되는 체계에 대한 불성실이라는 니체의 격언입니다.(입문294)
공식적 강단철학들은 그 후 체계 개념과 관련해 다소 까다롭고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습니다. 즉 그것들은 한편으로 철학이 과학의 여왕이며, 모든 지, 모든 과학을 하나의 통일된 관점에서 통일하거나 어쩌면 구성할 수 있다는 관념을 버리려 하지 않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물론 이 양극단으로부터 집중적으로 체계 개념에 가해지는 비판에도 저항할 수 없었습니다.(248) 그리고 이로써 매우 복합적이고 복잡한 딜타이^ 철학의 해결책과 같은 어중간한 해결책들이 생겨났습니다. 사실 그의 철학은 체계 개념을 빼버린 실증주의적 헤겔 세속화의 일종이라고 묘사할 수 있습니다. 그 후 다른 철학들은 체계 개념을 다시 칸트의 경우에 그것이 차지하던 약소한 규모로 환원하려 시도한 셈입니다. 이것이 마르부르크학파(Marburger Schule), 허먼 코엔(Herman Cohen)과 파울 나토르프(Paul Natorp)가 추구한 해결책입니다. 그리고 빈델반트(Windelwand)와 하인리히 리케르트(Heinrich Rickert)의 남서독일 학파와 같은 여타 신칸트학파 조류들은 마침내 체계 개념을 희미하게 만들고 그것을 아주 일반적인 원칙들로 끌어내렸으며, 이로써 그것은 사실상 일종의 그릇과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입문294-295)(249)
하지만 이 기이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체계 개념이 그 매력을 명백히 잃지 않았다는 점, 또 오늘날 철학의 체계를 기술하겠다고 나서는 철학자는 바로 이로써 처음부터 일종의 우스갯거리가 되지만, −왜냐하면 사람들은 세상을 모르는 자만이 전 세계를 그런 나비채 따위로 잡을 수 있다는 이념에 도달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계 개념은 어떤 의미에서 잔존한다는 점은 특이한 일입니다.(입문296)
전체의 비합리성이 존속하고 있는 동안에는 사실상, 그 자체의 요구에 비춰볼 때 말하자면 끝나고 문자 그대로 낡아빠진 형식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식으로, 하지만 −아마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 부패한 형식으로 여전히 존속하며, 변화한 세계 속에서 일종의 독소처럼 출몰하고 여기서 온갖 가능한 재앙을 야기하는 것입니다.(250)(입문296)
다름 아니라 실증주의자들은 어느 정도 어떤 하나의 이론에 자신을 고정시키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포괄하고 모든 것에 그 위치를 부여하도록 해 주는 부류의 사유방식에 만족합니다. 아니 오히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개별 계기들의 규정에서 구성의 이론적인 힘이 적게 작용할수록, 그만큼 더 −그러니까 예컨대 개별 조사결과들 자체 사이의 정신적 유대가 소멸하는 경우처럼− 모든 것을 어떻게든 포괄해 넣을 수 있는 그처럼 추상적 안전상태에 대한 욕구가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 경우 이러한 총체성 내지 이러한 포괄이 개념⋅파악⋅이해⋅의미심장함 등의 본래적인 계기를 얻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이 최근 스타일의 체계들은 실제로, 모든 것을 그것으로 포착할 수 있어야 하고 그 바깥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그 서랍 속에 들어 있지 않은 어떤 것이 나타나는 일은 없다는 데에 비춰 평가되는 질서의 도식일 뿐입니다. 나는 오늘날 이런 부류의 체계적 혹은 유사체계적 조형물들에서 나오는 매력이 우연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사람들이 세계를 오늘날 어떤 새로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부정적 의미에서 닫힌 세계로 경험한다는 사실과 관련 있다고 봅니다.(251)(입문297)
하지만 그것은 예컨대 중세 전성기 철학에서처럼 계시된 도그마가 가장 진보적인 의식 상태와 하나로 결합되어 있던 식의 닫힌 세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가능한 경험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아무튼 미리부터 사람들이 경험하거나 아니면 이미 사회적으로 미리 형식화된 것으로 간주하고 그래서 실제로 진지하고 중요한 있는 의미에서 새로운 것에 대한 경험을 배제한다는 뜻에서 닫힌 세계입니다. 또 경제학적으로 말하자^면 세계가 단순재생산으로 돌아가고 확대재생산은 축소되는 경향이 있다는 뜻에서 그렇습니다. (…) 또 그 속에서는 사람들이 미리부터 모든 것을 이미 미리 정돈된 것으로 아무튼 지각합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상황에서 생겨나는 체계적 성격에 대한 욕구는 실제로 그처럼 미리 정돈된 상태에 부합되고 존재자에 미리 각인되는, 즉 ‘세계의 관료화(bureaucratisation du monde)’ 현상을 통해, 그러니까 관리되는 세계라는 현상을 통해 각인되는 개념 형식들을 찾고자 하는 욕구일 뿐입니다.(입문297-298)
이에 반해 위대한 체계들은 사실상 신적 정신의 세속화이며, 개별자 혹은 사실적인 것에 대립하는 의식의 초월성, 정신의 초월성이 이제 내재성으로 바뀌었다는 점, 그러니까 그러한 체계들 자체가 정신이 아닌 것을 마치 정신적인 것, 그 자체 이상의 것처럼 파악한다는 점에서 그 충동을 얻어냈습니다.(252) 옛 체계들의 이러한 경향, 즉 단순한 존재자에다, 그것을 총체성 속에 받아들임으로써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은 오늘날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모든 것을 자체 아래에 포괄하고 그다음 실제로 단절 없는 상호적응의 관념을 그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의 결정적 척도로 삼는 거대한 관료적 계획과 같은 어떤 것만이 아직 중요할 뿐입니다.(입문298)
이 경우 나는 무엇보다 탈코트 파슨스(Talcott Parsons)의 체계, 즉 구조적-기능적 사회이론을 생각합니다. (…) 여기서 결정적인 방법론적 관념은, 이른바 인간에 대한 과학들의 영역, 따라서 광의의 사회과학들에서 유래하는 모든 개별 과학들을 다소 동일한 범주들로 사실상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는 범주체계를 구상한다는 관념입니다. 그는 이를 명백하게 심리학 및 사회학과 관련해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의 경우 사회학과 경제학의 경우에도 유사한 것이 요구된다는 점, 예컨대 기능과 무기능이라는 사회학적 기준들이 사실상 본질적으로 케인즈(Keynes)의 경제학에서 얻어온 것이라는 점을 입증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253)(입문299)
하지만 나는 이와 관련해, 적대적인 사회에서는 사회를 지배하는 법칙들과 개인을 지배하는 법칙들이 상당히 벌어진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근본적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니까 내용적으로 보자면, 사회적인 법칙들은, 막스 베버와 상당 정도는 탈코트 파슨스도 인정한 바와 같이, 교환에서 형성되는 목적합리성 따위와 같은 것이며, 우리가 본래적인 의미에서 심리학의 영역이라고 지칭하는 영역은 그러한 합리성에 들어가지 않는 인간적인 것 내부의 영역들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진부하다고 해서 피하지 않고 정확한 의미에서 심리학은 비합리적 현상들과 언제나 관계한다고 말해도, 진실을 크게 그르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각 개인들이 사실 완전하지도 개인들을 충족시키지도 못하는 합리성인 사회적 합리성의 요구들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부에서 그와는 반대되는 것을 의미하는 증상의 연관들과 콤플렉스들을 발전시키는 곳에서 어디서나 생겨나는 현상들과 심리학은 관계합니다.(254) 즉 사회 발전 자체의 근거들로 인해, 사회는 개인에게 부단히 희생과 체념을 요구하면서 본래 합리적으로 보상하겠다고 약속하는 이 희생과 체념의 대가를 현실적으로 치르지 않는다는 데에 근거를 둔다는 단순한 사실로 인해, 사회 자체의 이 내적 모순 구조로 인해, 각 개인들을 파악해야 할 법칙들은 바로 사회적 총체를 전체로서 지배하는 법칙들과 정반대되는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입문300)
그리고 이제 심리학의 법칙들과 사회학의 법칙들 사이의 이러한 대립상태를 감당하고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대신 그것들을 추상하여 마침내 사회학의 영역에서도 심리학의 영역에서도 구속력 있는 더 높은 제삼의 보편자가 남도록 한다면, 이때 완전히 희미해지고 추상적인 어떤 것이 나올 테고, 이는 사회학이나 심리학의 구체적 요구들을 실제로 온당하게 대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로써 그러한 질서체계들 속의 개념 형성의 연속성에 대한 요구는 처음부터 극히 심각한 난관에 처합니다. 그것들 자체가 처음부터 그것들이 아무튼 다루어야 하는 계기들의 내용적 구조 혹은 내용들의 구조와 대립하기 때문입니다.(입문300-301)
따라서 여러분은 이러한 비판에서 우리가 이 고찰들 전체에서 고수한 우리의 변증법적 모티프를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즉 단순한 주관적 이성이나 방법 혹은 단지 주체에 근거해 주조된 형식들에 맞서 자립적 계기인 객관을 중요시해야 한다는 점, 또 정리하는 이성의 분류법적 혹은 여타 논리적 욕구들과 꼭 마찬가지로 대상의 즉자존재에 근거해 형성되지 않은 모든 부류의 범주적 형식은 그로써 실제로 진리에 위배된다는 점이 그것입니다.(255)(입문301)
오늘날에 특징적인 이 체계 형성들은, −이와 관련해 나는 그것들이, 관리되는 세계 자체가 일종의 관리적 논리 혹은 관리적 형이상학을 통해서도 점점 더 반영될 경우, 곧 더 큰 규모로 등장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싶습니다− 이 조형물들은 특이한 부류의 중립성을 천명하는 특징을 지니는데, 이는 예컨대 파슨스의 체계에서 다음과 같은 점에서 나타납니다. 실제로 단지 ‘기능적’이냐 혹은 ‘비기능적’이냐 하는 개념들이, 즉 그러한 질서가 기능하느냐 기능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만이, 특정한 사회구조의 척도, 그러니까 사회구조의 진리 또는 허위, 정당성 혹은 부당성에 대한 척도가 됩니다. 이 경우 암암리에 기능의 척도는 그러한 질서 자체가 생명을 부지하느냐, 그것이 존속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끔찍한 희생을 치르며 이루어지더라도, 이 사회의 그러한 체계적 질서의 자체보존이 인간들 자신의 이익을 대가로 치르고 이루어지더라도 말입니다. 따라서 동일성의 논리적 형식만이 관건이고, 또 그런 구조가 그 자체의 개념 속에서 또 체계의 자체와의 이러한 동일성을 통해 유지된다는 것이 관건이며, 그것이 본래 관여하는 것, 즉 그것이 포괄하는 인간들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외견상 유지되는 중립성은 단순한 가상이 됩니다. 즉 외견상 단지 질서사유인 듯한 그런 사유가 그때그때의 기존질서에 대한 변론이 되는 것입니다. 이 질서가 인간의 이익에 대해^ 어떤 관계를 지니느냐와 전혀 무관하게 말입니다. 그러한 중립적 사유의 조화론적 경향, 즉 자체의 범주적 형식들을 통해 모순들을 사라지게 만드는 경향은 기존상태의 옹호에 기여합니다.(256)(입문301-302)
즉 실제의 지배적인 사회적 모순들이 이러한 사유 속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결국 어떤 기존상태를 기존상태로서 정당화하고, 아무튼 그러한 기존상태가 계속 기능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추천하는 데에 이르며, 그러한 범주적 체계화에 의해 은폐되는 바로 그러한 모순들이 이제 그 체계를 넘어서 다른 성격의 체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은 보지 않게 됩니다. 아마 여기서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해도 좋을 것입니다. 즉 중립적 사유가 다소 자의적인 가치체계들 혹은 입장들과 관련된 어떤 사유에 대립한다는 실증주의적 관념은 일반적으로 널리 퍼져 있지만, 그 자체가 일종의 기만입니다. 이른바 중립적 사유란 아예 존재하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한 사유가 다루는 사태에 대한 이른바 그 사유의 중립성이라는 것이야말로 그것의 단순한 형식을 통해, 즉 통일된 방법론적 체계화의 형식을 통해, 기존상태에 대한 변론으로 귀결되며, 따라서 자체 내적으로 어떤 변론적 성격, −여러분이 원한다면− 실제로 어떤 보수적인 성격을 지닙니다.(입문302)(257)
실증주의적 사실조사 영역에서 우리는 되풀이하여 관련프레임에 대한 질문에 부딪치며, 우리는 하나의 관련체계를 가져야 한다는 훈계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다름 아닌 실증주의적 사유에 대해서는 마치 우리가 수집하고 분류한 사실들을 관련짓는 그 관련프레임을 가짐으로써, 단순히 소재를 쫓아다니거나 자료만 수집하는 데에서 벗어난 것처럼, 그리고 이처럼 수집된 사실들을 그러한 관련프레임에 포괄하고 편입하는 데에서 본래의 정신적 혹은 과학적 성과를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나타납니다.(입문303)(258)
사실상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그것은, 관료제에서와 마찬가지로 또한 정신의^ 관료제에서 강요되지만 사태 자체에서는 실제로 정당화되지 않는, 일종의 지적 관리행위이며 일종의 처리도식입니다. 대체로 모든 유형의 당관료, 재단들에 호소하는 비망록 기록자, 그리고 돈을 좀 벌거나 어떤 직책을 얻기 위해 이른바 이념들을 가능한 한 영리한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그와 유사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들과 관련되는 개별 사물들을 그와 같은 관련프레임 아래 보관하고, 이로써 여기서 전체를 파악하고 전체를 목표로 하는 듯한 인상을 불러일으키는 아주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습니다.(입문303-304)
하지만 관련프레임이라는 생각은 그 이상으로 또 한 가지 매우 불길한 측면을 지닌다고 여겨집니다. 즉 그러한 관련프레임은 (…) 일종의 신앙고백과 같은 것이 됩니다. 예컨대 우리가 동료 사회학자들과 토론하는 가운데 “그러면 당신의 관련프레임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부딪치게 되면, 일반적으로 그 뒤에 숨겨져 있는 것은, “이제 네가 도대체 어떤 이론적 사상들을 가지고 있는지 밝혀라. 또 너는 혹시 경우에 따라 사회에 대한 네 견해들의 관련체계로서 이 사회 자체의 도식에 어울리지 않고 어쩌면 그것을 위태롭게 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라는 점을 상당히 확신할 수 있습니다.(259)(입문304)
이 경우 흥미로운 것은, 사실상 체계에서 남은 유일한 기능이 형식적 확실성의 기능이라는 점, 그러니까 이 경우 체계가 관념론적 구상들이 나오던 시대에 의미한 바와 같은 것을 더 이상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 사유가 어디서나 고향처럼 느끼며 세계를 관통하여 스스로에게로, 정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 오히려 사유는 어떤 하나의 개념 질서 속에 숨어들어감으로써 비호받게 되고 그 속에서 사유는 충분히 영리하기만 하다면 그때그때 적합한 관련프레임을 택함으로써 대체로 별 일을 겪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내 생각에 오늘날 조야한 형이상학과 조야한 과학논리가 실로 악마적인 방식으로 서로 어울린다면, 바로 이 대목에서처럼 그것을 그렇게 정확히 간파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입문305)(260)
시대착오적 특징을 지니고 무기력하다고 할 수도 있는 변증법적 사유는 현실의 막강한 경향에 맞서, 오늘날 주도적인 자체 내적으로 단절 없고 유선형인 범주적 형식들에 맞서, 유일하게 허위의 계기를 진술할 수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사유가 더 이상 개척정신을 알지 못함으로 인해, 그 치명적 내재성 바깥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으로 인해, 기존의 과학주의 활동 자체 범위 내에서는 실제로 아무것도 인식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내게는 변증법적 사유를 통해서만 관리되는 세계를 곧이곧대로 지적하는 것이 가능해 보입니다. 비록 관리되는 세계가 모든 것을 삼키게 되고 그 막강한 힘 앞에서 예측할 수 없는 기간 동안 내가 여러분에게 몇 가지 모델들을 여기서 제시하려고 시도하는 사유 역시 소멸할 개연성은 크더라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나는 경우에 따라 다름 아닌 시대착오적인 것이, 그 자체의 표면에 비춰볼 때 즉 주어진 장치들 내부에서의 기능이라는 의미에서 더 큰 현재성을 요구할 수도 있는 것보다, 오히려 더 큰 현재성을 지닌다는 점도 역사변증법에 포함된다고 믿습니다.(261)(입문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