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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생겨나서부터 인간의 생활과 항상 연관이 지어오면서 지금까지 지내온 것중 하나가 종교일 것이다. 사람들은 그 눈에 보이던 보이지 않던 간에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대상을 섬기고 경배하며 맹목적인 어떠한 힘에 의지하며 살아 온 것이리라.지금부터는 세계의 삼대 종교중 하나인 불교, 그 중에서 일본의 불교에 대하여 간략하게 알아보고자 한다. 야마토 국가의 점증하는 힘과 제도적 복잡성은 아마도 부분적으로는 대륙, 특별히 한국과의 계속적인 접촉의 결과들이라 하겠다. 특히, 불교는 한국을 통하여 일본에 전해진 대륙문화의 많은 요소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일본열도에 유입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진다. 우는 불교전래 이후 일본열도에 불교가 정착화 되기까지 각 시대별로 살펴보았다.
⊙ 불교의 전래
기원전 5세기경 인도에서 성립한 불교는 중앙 아시아를 거쳐 기원전 1세기경 중국에 전해졌다. 4세기 후반에는 고구려와 백제에, 6세기 초에는 신라에 전해졌다.
이미 5세기경부터 대륙에서 일본에 이주한 사람들은 불교를 믿었던 것 같다. 6세기에는 고대 국가의 확립과 함께 불교가 본격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공식적으로 일본에 불교가 도입된 것은 538년 백제 성왕(聖王) 때 도장(道藏)이 불상과 경전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성실종(成實宗)의 개조가 된 때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백제는 일본과의 접촉이 빈번하여 관륵(觀勒)은 역법(曆法) ·천문 ·지리 ·술수(術數) 등을 일본에 전하였고, 혜총(惠聰) ·도림(道琳) ·담혜(曇慧) ·혜미(慧彌) 등 많은 고승이 일본에 건너가 불교와 문화에 크게 공헌하였다.
595년에는 고구려에서 승려 혜자(慧慈)가 건너가 일본의 황자에게 불교를 가르쳤고 같은 해 백제에서는 혜총(慧聰)이라는 승려가 건너갔다. 602년에도 백제에서 관륵(觀勒)이라는 승려가 달력과 천문-지리에 관한 책을 전하였으며, 610년에는 고구려의 담징(曇徵)이 건너갔다. 이 담징은 불교뿐 아니라 유교에도 통달한 고승으로 물감, 종이, 먹 등을 만드는 기술도 가지고 있었다. 물레방아도 담징에 의해 일본에 소개되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새로운 종교인 '불교'는 처음에는 보수적인 집단들에 의해 반대되었지만 오오미의 정책을 보유하고 있던 소가'우지'에 의해 지원을 받았다. 결국에는 587년의 왕위계승 전쟁에서 그들의 경쟁자들에게 승리를 거둔 후에 소가문은 성덕태자를 섭정에 임명하여 조정에 불교를 투입, 확립시켰다.
일본불교의 초석을 다진 인물은 '성덕'태자(574-622)에 의해서다. 그는 스승이었던 고구려 스님 '혜자'의 가르침에 따라 국가체계를 정비하고 불교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채택했다. 그가 제정한 17조의 헌법은 불교의 이념을 근간으로 한 것으로써 삼보에 귀의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는 또 스스로 불교를 열심히 배워 법화 승만 유마경에 대한 주석인 <삼경의소>를 저작했다고 전한다. 뒷날 일본에서는 성덕태자를 '일본불교의 교조(교조)'로 평가하면서 일본에서는 태자를 존중하는 신앙으로까지 발전했다. 일본은 이후 한국으로 뿐만이 아니라 중국으로 직접 유학승을 파견, 대륙불교를 받아들이고 국가적인 힘을 기우려 대사원을 건립했다. 또 한편으로는 일본고대의 종교와 습속을 지키려는 세력과의 타협책으로 '본지수적설'을 내세웠다.
'본기수적설'이란 일본재래의 제신(제신)들이 인도불교의 제불보살의 화현으로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신불습합(神佛습합)은 이후에도 일본불교의 가장 큰 특색 중 하나로 계승되었다.
불교철학의 심오함은 당시의 일본인들에게는 거의 이해되지 못했으나 토착신앙보다는 우월한 마법적 힘을 소유한 것으로 흥미를 끌어 기독교가 지중해 문명을 북유럽에 전파하는 매개체의 역할을 했던 것처럼, 그것은 또한 중문화의 많은 것을 일본에 전파시키는 운반수단이 되었다.
일본에 전해진 불교는 출가자의 출가장의 입장을 존중하는 동남아시아의 소승불교와 달리 세속의 사람들에 대한 자비와 아타행의 실적을 중시하는 대승불교이다. 이 때문에 일본의 불교는 신앙과 현실의 사회생활을 결부시키는 재가 불교의 성격이 강하다.
⊙ 시대별 불교의 특징
1) 아스카 시대
6세기 말에는 고대 국가의 실권을 쥐고 있던 소오가가 쇼토쿠 태자(574-622년)를 세워 약 30년 간 섭정을 했다. 쇼토쿠 태자는 어려서부터 유달리 불심이 깊어 불상 앞에서 합장 배례하기를 좋아했다. 섭정이 되면서부터 그는 불교를 온 세상에 널리 보급시켜야 하겠다고 굳게 다짐하였다. 이 같은 불교에 대한 신앙심은 호족들의 세력을 견제하고 조정의 힘을 강화시키기 위해 만든 17조의 헌법 가운데도 나타나 있다. 17조의 헌법 가운데는 '깊이 삼보(三寶)를 받들라'고 쓰여 있는데, 이 삼보란 첫째가 부처, 둘째가 부처의 가르침, 셋째가 불법승이라고 한다. 그는 이처럼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부처를 받들어야 한다고 이따금 관리들에게도 강조하였다.
이 때부터 일본 불교는 유력한 씨족의 우즈테라(氏寺)를 중심한 불교로부터 고대 국가를 지켜 주는 국가 불교로 발전하였다. 국가 시설로서 사원을 짓고, 공적 신분으로 승려를 승려 계급에 앉혔다. 부처에게는 국가를 지키며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힘이 있다고 믿었던 고대 국가는, 정권의 기초를 쌓기 위해 막대한 부와 힘을 쏟아 불교를 부흥시켰다.
쇼토쿠 태자는 스스로 많은 절을 세웠다. 그가 세운 절은 시텐오사(四天王寺), 호류사(法隆寺) 등 마흔한 개로 추산되고 있다. 그 가운데 나라시 남쪽에 있는 호류사는 특히 유명하다. 일본인들은 이 호류사를 목조 건축물로서는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최고의 것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호류사는 동원과 서원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 절에 안치되어 있는 백제관음은 삼국 시대 백제에서 건너간 것이고, 금당의 벽화는 고구려의 승려 담징이 그린 것이라 한다. 쇼토쿠 태자는 불성의 보편성과 불법의 광대무변한 포용력을 내세워 당시 분열로 약화된 국력을 정비하려 하였다. 그의 비호 하에 불교는 국가종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의 불교에 대한 공헌은 인도에서의 불교성장에 미친 아쇼카 대왕의 업적에 비교될 정도이다.
2)나라시대
710년 C.E.수도가 나라로 옮겨지면서 불교는 나라불교라고 불리는 독특한 특성을 형성하게 되었다. 나라 불교란 중국의 각 시대에 걸쳐 번성했던 여섯 파의 교종을 망라한, 일본 불교교학의 전성기를 일컫는 말이다. 그 여섯 파란 구사종, 삼론종, 화엄종, 법상종, 율종, 그리고 성실종을 말한다.
이 시대의 불교는 불교도입 후 초창기에 해당되는 주로 수도에 집중되어 있었고 일반적으로 지배계급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8C에서 9C에 걸쳐 전국으로 점차 확산되어 나갔고 불교사상이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불교사상은 새로운 내세에 대한 개념과 자선과 봉사에 관한
새로운 윤리적 가치들을 강조하였다. 이 시기 불교영향에 의해 매장이 감소되고 화장이 채택되었으며 살생을 금하여 당시의 일본인들 사이에 자리잡고 있던 호전적인 잔인성이 명백하게 감소하였으며 생선 외에 육식을 반대하는 편견이 늘어나게 되었다.
과연 토착적인 종교가 깊게 자리했던 이 시기의 일본에서 불교가 급속도로 확산될 수 있었던 원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 신토와 불교가 서로 다른 철학적 수준에서 작용하여 서로 심각하게 대립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리고, 이미 중국에서 증명된 것과 같이 불교가 확산되면서 만났던 신앙들에 적용하고 또 여러 신앙들을 흡수할 수 있었던 불교의 능력 속에서 부분적으로 찾을 수 있으며, '신토'의 가미(神)들과 숭배가 부처들과 보편적인 불교 원리들의 종속적인 지역적 현시로서 불교에 조화될 수 있었다. '신토'의 불교에 대한 점증하는 종속은 12세기 신곤슈 승려들에 의해서 체계화되었으며 19세기에 비로소 '신토'는 불교로부터 다시 분리해 나가게 된다.
《잠시 참고사항!!》 불교미술 : 불교는 일본인들에 의해서 의식적으로 받아들여진 대륙 문화의 첫 번째 요소였고 그것과 관련된 예술들은 초기의 차용들 중에서 두드러진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술들은 곤란한 언어의 장벽이 방해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수월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일본 초기 불상들의 일부는 한국으로부터 전해진 것이거나 한국 이민들의 창작품들이었으나 이미 7세기에 일본인들 자신이 완벽한 아름다운을 지닌 작품들을 만들어 내고 있었으며 나라시대의 전신불상과 사실적인 인물상은 이 시대 동아시아 예술 중에서 최상의 작품들에 속하는 것이었다. 특히, 일본인들은 중국의 건축술과 교량건설의 기술, 그리고 다른 많은 기술들을 완벽하게 습득하였다. 7C와 8C동안에 일본에 세워졌던 불교사원들은 고적인 당 건축술이 남아있는 최상의 실례들이다. 이 예로서 쇼토쿠에 의해서 나라평야의 서단에 창건되었으나 수십년 후에 재건된 사원인 호류지의 금당과 탑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일본불교는 이 나라시대(719-784)에 국가의 보호아래 번영하면서 토착화됐다. 교학적인 측면에서는 중국과 한국의 학적 성과를 흡수해 수입경로에 따른 종파를 성립시켰다. 이를 남도6종(남도육종)이라 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여섯 파의 종은 나라시대의 불교적 특성이다.
남도 6종의 첫 번째는 '삼론종'으로 고구려의 혜관에 의해 성덕태자 시절에 전해졌다. 혜관은 원흥사에 머물며 '삼론'을 가르쳤으며, 많은 학자를 배출했다. 두 번째는 '성실종'으로 백제의 도장(도장)이 712년 일본에 와 <성실론>을 가르침으로써 비롯됐으며, 나중에는 삼론종에 통합됐다. 세번째는 '법상종'으로 당나라에 유학한 도소(도소 : 629-700)가 전래해 온 것이 최초인데 이후 일본 유학승과 신라 승려가 4차례에 걸쳐 교의(敎義)를 전했다. 흥복사를 중심으로 법륭사(法隆寺), 약사사 등에서 학풍을 떨쳤다. 네 번째는 '구사종'이다. 법상종의 유식학과 쌍벽을 이룬 구사학은 오랫동안 불교학의 중심을 이루었으나 법상종에 통합됐다. 다섯 번째는 '화엄종'으로 신라의 심상(심상)이 동대사(동대사)에서 <화엄경>을 강설함으로써 비롯됐다. 이때 낭변(낭변 : 689-773)은 그의 제자가 되었으며 일본화엄을 확립했다. 이후 '동대사'를 중심으로 발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섯 번째 율종(律宗)은 당나라 감진(감진 : 687-763)의 입국으로 성립됐다. 감진은 다섯 차례나 도입할 뜻을 냈다가 좌절하고, 여섯 번째로 성공해 <사분율(四分律)>에 의한 계단을 설립했다. 이로써 일본의 승려들은 수계의식에 의한 득도(득도)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들 학파는 일반대중과는 거의 접촉이 없었으며, 적극적인 전법활동도 없었던 것이 특징이다.
나라시대에는 매년 득도하려는 승려의 수를 국가에서 통제해야할 만큼 불교가 융성했다. 국가의 보호와 관리 아래서 승려들은 직접 민중을 포교하는 공익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특히 국분사 불사를 대대적으로 벌였으나 이로 인해 민생(民生)은 대단히 어려움을 겪었다. 또 권력을 등에 업은 승려들의 부패들도 큰 문제가 되기도 했다.
2)헤이안(平安)시대
794년 C.E. 수도가 교토로 옮겨지면서 헤이안 시대가 열린다. 이때의 불교는 그 세력에 있어서 일본 불교사상 최고의 정점을 나타내며, 아울러 후대의 일본 불교에 주요한 영향을 미치는 계기를 이루게 된다. 9세기 초, 사이쵸에 의해서 중국으로부터 천태종이 도입되었다. 또한 9세기 C.E.초, 흥법대사 구카이에 의하여 중국으로부터 진언종이 소개되었다. 일본의 진언종은 티베트와 네팔 등지에 전파된 밀교의 한 형식으로서, 비로사나불을 본존불로 삼고 있다. 이 진언종은 그 의식의 장엄함과 화려함으로 인하여 조정 및 지배층으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이후 진언종은 천태종을 대신하여 점타 조정과 밀착되어갔으며, 구카이 또한 조정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헤이안 시대의 불교도 그 전체적인 상황은 승가와 세도가와의 별탁으로 볼 수 있으며, 그로 인한 승가의 타락, 그리고 부패와 야망이 뒤섞인 우려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각 종파간의 대립은 소속 승병 조직간의 피비린내 나는 혈전으로까지 나타났다. 이때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불교ㅡ이 말법사상에 심취해갔고, 사회에는 일종의 염세주의적 경향이 널리 확산되었다. 한편 불교교단에 반발하여 불교의 전형적인 형식을 무시하고 비정통적인 방편으로써 일반 민중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이 출현하였다. 이 일부 승려들을 히지리라 부른다. 이들은 쑥과 고기를 먹으며, 승복이 아닌 옷차림으로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그리고 아이타 부처의 명호를 거듭 암송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단순한 형식의 불교신앙을 전파하였다.
특히 앞에서 언급한 나라 시대의 육종의 위계제도는 엘리트층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면서 다른 계층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때 새로운 2개의 불교종파가 나타났다. 중국에서 전래된 이 두 종파는 모든 사회문화 계층을 망라하여 그들 전체를 통합하려고 하였다. 천태종과 진언종이 바로 그것이다. 이 두 종파는 중국에 있는 천태종과 진언종보다 더 절충적이었다.
i)천태종 ; 천태종의 원조는 사이쪼로 알려져 있다. 이 사람의 이름의 의미는 "가르침을 전한 최고의 스승" 이다. 사이쪼는 그 당시의 많은 일본 승려들이 그랬듯이,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갔다. 그는 또한 당시 불교 승려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 신들을 신실하게 믿었다. 그는 일본을 떠나기 전에 길고도 위험한 여정을 돕고 보호해 달라는 의미로 신사에서 신들을 참배했다. 중국으로 간 그는 천태산에 위치한 사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사이쪼는 그 산의 이름을 딴 천태종이 달마(진리)를 완벽하게 가르친다는 확신을 얻었으며, 그 교리를 전파하기 위해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대승불교의 교단에는 대승의 사상에 어울리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인도, 중국에 없는 대승보살계라고 하는 계율을 정했다. 그는 "국보"라고 하는 것은 금, 은보석이 아니고 "불교를 믿는 마음이 있는 사람" 결국 구도의 마음을 가지고 민중을 이끄는 보살이라고 하는 산악수행에 의해 정신을 단련하고 자비의 마음을 기르는 것을 교단의 교육 방침으로 했다. 사이쪼는 또 '법화경'과 '열반경'의 가르침을 토대로 모든 인간은 그 출생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 무차별, 평등하다고 하는 사상을 보급시켰다. 사이쪼는 또한 '법화경'에 대한 천태종의 교리를 받아들였지만 중국의 해석에 반대하여 다른 해석을 내렸다. 그가 중국의 해석이 틀렸다고 지적한 이유는 그것이 소수의 사람들만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본질은 동일하기 때문에 모두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그 경전의 핵심 내용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는 일본의 승려들이 중국에서 받는 훈련이 형편없다고 생각하여 일본에 12년 동안의 이수 과정을 만들었다. 학생들은 12년 간의 과정을 이행하는 동안에는 사원을 떠나지 못했다. 사이쪼가 일본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으며 한때는 사원에서 훈련받는 승려들의 숙자가 3만 명이나 되었고 히에이 산 전역에는 수천 개의 사원과 강원이 있었다.
ii)진언종 ; 진언종의 원조는 쿠우까이로 알려져 있다. 진언종이 쿠우까이를 신격화시켜 예배함으로써 일본 사회에서 천태종보다 더 유행하였다. 진언종의 이상은 "즉신성불"이라고 불려진다. 여기에는 명상 숭행을 중시하는 사고가 있다. 수행은 3밀(身, 口, 意)의 작용을 삼위일체로 하는 인간의 혼의 걁미층을 졺구하고 깊은 명상 속에서 전개되어 오는 궁극의 불교이다. 대일 여래와 일체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부처의 힘이 나에게 들어오고 내 혼은 부처에 들어가 불과 내가 신비적 융합의 경지에 이르는 상태이다. 거기서 우주의 대생명과 일체화 한 진리가 명확해진다. 쿠우까이는 이 즉신 성불의 경지를 만다라에 의거하여 표현하고 있다. 만다라는 모든 부처, 보살, 제천, 신들을 그린 도상이다. 이것은 우주 대생명의 신비한 작용을 표현하고 있던 것으로 중앙에 궁극의 초월자인 대일 여래를 두고 있다. 모든 부처와 신들의 활동을 이 궁극의 중심으로부터 나타난 것이고 그는 일본서민의 마음 속에 살아 있던 신화시대 이래의 종교적 심정과 불교사상을 하나로 결부시킨 것이다. 헤이안 시대에는 신불습합 사상이 일어나고, 本地乘迹設(부처, 보살이 일본 중생을 제도화하기 위해 일본의 신이 되는 설)이 성행하게 되지만 그것은 쿠우까이가 펼친 밀교의 힘에 의한 바가 크다. 천태종도 그 영향에 의해서 밀교를 중심으로 하게 되었다.
천태종과 진언종은 모두 고매한 철학과 주술적 요소를 결합시켰다. 밀교의 절충적 성격은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산악지방의 금욕주의자들이 스스로를 천태종과 진언종에 연결시키기도 했다. 더구나 가미의 본래적 성격은 부처이고, 가미는 일본에 출현한 부처라는 개념을 유행시킨 것은 바로 이 두 종파이다.
그러나 천태종과 진언종이 과거 나라시대의 불교종파들처럼 제도화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두 종파는 왕실과 귀족가문 특히 섭관 정치를 행하던 후지와라 가의 지지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종파는 경건한 사람들과 지식인들을 계속 끌어당길 수 있었다.
3)후지하라(藤原)시대
대륙영향의 연속적인 물결에 심하게 위존 했던 9세기까지의 일본불교는 후지하라 시대동안 일본불교로 발전하였다. 조정에서 세속생활에 있어서의 정교한 의식들에 대한 강조는 대응하는 불교 의식들에 대한 강조와 병행하였는데 그것들을 위해 신곤슈와 덴다이슈의 일교적 예식은 풍부한 여지를 제공하였다. 동시에 불교는 수도로부터 바깥으로 사회에 있어서는 밑으로 확산되었으며 '신토'숭배와 융합되는 가운데 국가의 마법적 수호로서 그것이 원래 강조했던 얼마간의 것을 상실하는 대신에 더욱 평민들을 위한 신앙과 소망의 매개물이 되어갔다. 새롭고 보다 대중적인 성격을 짙게 띄고 있던 이 불교는 9세기에 중국으로부터 소개된 정토사상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그 중심적인 개념을 현재는 타락한 시대이며 모든 생물들의 구원을 맹세했던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의 왕생은 오직 신앙을 위존 하였고 그것은 나무아미타불을 계속해서 외는 염불을 통해서 가장 잘 성취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10세기동안 이러한 사상들의 승려들에 의해 대중화되었다. 이 기간동안에 불교는 또한 대륙에서는 결코 가질 수 없었던 방식으로 일본이 제도적 생활 속에 통합되었으며 9세기를 경과하면서 조직된 사원들이 제약 없이 성장하였다. 불교 사원들은 점점 그들 자신의 토지로부터 지원을 끌어냈고 사원들은 또한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들의 쇼엔에 젊은 승려들과 경작자들로 무사단을 형상하기 시작하였다. 11세기 말 후에 승려들이 반복해서 수도에서 당국들을 위협하는 등 이제껏 가졌던 것보다 훨씬 큰 경제적, 세속적 역할을 성취하였다.
(4)가마쿠라(鎌倉)시대
일단의 사무라이에 의해 조정의 실권이 장악된 가마쿠라 시대는 1192년 C.E.부터 시작된다. 이후 1867년 C.E. 메이지유신이 시행되기 전까지 권력은 무사들의 손안에 있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 정세의 급변은 가마쿠라 시대의 불교에도 가히 혁명적이라 부를 만한 병화를 초래하였다. 그것은 바로 불교의 급속한 대중화라 할 것이다.
즉 이 시기의 불교의 가르침은 점점 민중의 생활에 침투되기 시작한다. 그 출발점이 된 것은 아미타불의 자비에 의해서 극락 정토에 왕생하려는 비는 정토의 신앙이다. 이것은 극락정토로 가는 길은 곧 염불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정토신앙의 경전에 의하면 먼 서방에는 아미타불의 맑고 깨끗한 세계(극락정토)가 있다고 한다. 아미타불은 이승의 괴로움으로부터의 구원을 구하고 있어서 구원에 이를 수있는 유일한 길로서 부처의 원래의 소원을 믿고 후우넨과 그 제자인 신란이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정토와 부처(아미타여래)의 힘 : 호우넨은 염불의 가르침이야말로 오탁악세의 말세의 세계에 나타난 [時機相?]의 가르침(시대의 조건과 인간의 능력에 적합한 가르침)이라고 한다. 또,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일컫는 칭명엄불(부처의 명호를 외는 염불)은 부처의 원대소원에 적합한 행위로서 그 외의 지졔(불교도로서 계율을 지킴), 조사(절을 지음), 조불(불상을 만듦)등은 전혀 필요 없다고 설명했다. 시란은 이 호우넨의 가르침을 받아 계승하고 미타의 원래 소원을 오로지 신앙하는 것을 설명한다. 이 정토의 가르침은 주로 농민사이에 퍼졌다. 선종은 수행에 의한 자력의 체험을 가지고 부처의 세계에 들어가려고 하는 가르침이다. 즉 경전에 의하지 않고 쓰여진 가르침이 아니고, 자기의 체험과 수행에 따라서, 직접 불처의 경지에 합체하려고 하는 것이다. 도우겐 수행 속에 자기의 모든 것을 던져 넣은 생활, 그 자체가 부처의 생활이다. 거기에는 일상생활 모두에 있어서 현재의 순간에 전력을 다해 살아가는 생활이었다. 명예와 이익, 자존심을 버리고, 생활을 간단하고 소박하게 하여 타성적인 생활방식으로부터 해방되어 시간을 소중히 여겨 불도의 길을 닦는 이러한 생활을 보내는 사람이 부처의 가르침을 이어받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같은 선의 정신은 신흥 무사 계급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고 카마쿠라 시대부터 무로마치 시대에 걸쳐 선종은 그들 사이에 깊게 뿌리를 내렸다. 일연은 불교의 경전 중에서 [법화경]이야말로 말세의 세계에서 행해져야 할 정법이라고 믿었다. 올바른 불법을 세우는 것에 의해 국가는 태평무사 할 수 있다고 하는 立正安國論을 주장했다. [법화경]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 [나무묘우호우렌게쿄우]의 일곱 자의 제목을 외기만 하면 남녀노소 귀천의 차별 없이 누구나 형세에 있어서 성불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것을 외는 것에 따라 법화경에 설명된 구원의 부처로서의 석가와의 만남이 실현되고 우리들의 중심이 되는 불성이 나타나고 이 세상에 있어서의 영원의 생명과 접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일연의 가르침은 당초에는 관동의 무사, 농민층에 전파되었지만 무로마치시대에는 서일본에 보급되고 교토 사카이드의 마을 무리 속으로 전파되었다. 게다가 에도 시대에는 에도의 도시 사람들 속으로 전파되었다.
초창기의 불교는 귀족중심이었으나 카마쿠라시대에는 피지배층까지 확산되었다. 신분의 차이에 따라 종파나 수행방법도 조금씩 달랐다. 일본에 전해진 불교는 출가자의 입장을 존중하는 동남아시아의 소승불교와는 달리 세속의 사람들에 대한 자비와 이타행의 실적을 중시하는 대승불교이다. 이 때문에 일본의 불교는 신앙과 현실의 사회생활을 결부시키는 재가불교의 성격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와 같은 일본 불교는 각 종파를 통해서 일관된 어떤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일본 불교에서는 어느 종파도 계율에 그리 크게 집착하고 있지 않다. 일본의 승려들은 정토진종의 창시자인 신란으로부터 시작하여, 일정기간의 수행 후에는 결혼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의 승려들에게는 화려하게 수놓은 비단 승복도 금지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예배의식은 산속의 사원에서보다 집 안에 설치되어 있는 불단 앞에서 행해진다. 그리고 가마쿠라 시대 이래 승려는 사원관리, 불교의식의 집전, 장례행위 등의 사회적 기능에 의하여 그 지위를 보장받을 뿐, 그들의 특별한 능력이나 거룩한 삶 등이라는 이유로서 경배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한편 일본의 예술 및 미적 양식에 끼친 불교의 영향력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다도, 묵화, 하이쿠, 검도와 궁도, 그리고 일본 예술이 지니는 단순 적절한 미적 양식 등은 본질적으로 불교의 영향력을 암시하고 있다. 즉 일본인은 불교에 의해서 문화와 사상이라는 것을 자각하기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불교의 일본전개는 일본에 있어서 정치, 문호, 사상 및 국민의 도덕관념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 현대 일본불교
1867년 명치유신(明治維新)이 일어나자 불교는 배불론자들에 의해 폐불훼석(廢佛毁釋)의 운명을 맞는다. 명치초기 일본의 국학자들은 '신도'에 의한 교육추진을 선포하고 신불(神佛)을 분리하는 정책을 폈다.
정치권력으로부터 외면을 받게된 불교는 자위책의 하나로 더욱 '신불일치'를 강조하는 한편 천황과 군국주의에 대한 충성을 강조했다. 일본 군국주의가 저지른 이른바 '대동아(大東亞)전쟁'을 온 세상을 한집으로 만드는 성전(聖戰)으로 찬양하는가 하면, 천황에게 신권(神權)을 부여하고, 불교적 성왕(聖王)인 전륜성왕과 동일시하여 정복전쟁을 정당화하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일부 양심적인 불교도는 이러한 그릇된 작태를 비판하고 신앙쇄신운동을 일으켜 불교정신 회복에 앞장섰다. 1932년 '일련종'의 매미의랑(妹尾義郞 : 1883∼1961)이 주도했던 신흥불교청년동맹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일본불교의 역사적 특색 가운데 하나는 엄격한 종파불교다. 일본의 종파불교는 '가마꾸라' 시대부터 시작되어 '무로마찌' 시대에 완전히 확립됐는데, 취징을 조사로 하는 천태종, 공해의 진언종, 법연의 정토종, 친란의 정토신종, 도원의 선종, 일련의 일련종 등이 대표적이다.
일본에서는 종파가 다르면 본존불이 다른 것은 물론이고, 가람배치 양식, 가사의 색깔과 모양, 심지어는 독경의 음률까지 틀린다. 이 같은 종파는 1945년 이전까지는 13종 56파로 나누어져 있었다.
13종은 법상종·천태종·임제종·조동종·황벽종·일련종·시종(時宗) 등이다. 그런데 종전(終戰) 이후에는 화종(和宗)·아함종 등 신흥종파가 더 생겨났다.
일본의《종교총감≫에 의하면 현재 일본의 불교종파는 7개 계통의 1백 8파에 이르고 있다. 천태계가 20파, 진언계가 43파, 정토계가 25파, 선종계가 23파, 일련(法華)계가 36파, 기타 33개파 등이다. 이중 전국에 4천개 이상의 말사를 가지고 있는 종파는 천태·진언·일련·임제·정토진종등 8개 종파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불교를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불교학에 대한 연구 열의와 성과다. '에도'시대 이후 종학(宗學)불교의 발달을 바탕으로 각 종파가 세운 4년제 대학은 10여 개가 넘고 있으며 2년제 단기대학도 상당한 숫자에 이르고 있다. 불교학자의 숫자도 많아 대학의 강사급 이상으로 구성된 인도학·불교학회 회원은 3천 명에 육박하고 있다.
일본불교가 대승불교 권에 속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불교는 종파사상이 발달해서 통불교적인 우리나라와는 전연 비교가 안 되는 실정이다. 일본서 소수의 인사들이 '종조에게서 벗어나서 불조에게 돌아가자'고 외치고 있지만 그것은 다만 극소수의 운동에 불과한 것이니 일본불교가 통불교로 되는 것은 역사적으로 봐서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종조의 사상을 믿고 따르는 것으로 제1을 삼고 있는 각 종단은 석가모니를 공분모로 해서 연합운동을 하고 있는 것 뿐, 그들은 그들대로의 종파불교가 특징인 동시 또 장점도 되는 것이다.
일본불교가 전해 내려온 역사를 간단히 추린 것이 이상과 같은데 과거의 일본불교의 특색을 일본에서 발행한 '신불교사전'에 있는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불교는 국가 수호의 도구로 간주되어 황실과 밀착되어 국가불교로 발전하였다.
2.주술기도가 민중의 생활에 깊이 침투되어 실리추구의 도구가 되었다.
3.중국의 장례 법이 전래되고 정토신앙의 보급과 함께 장례가 중의 중요한 직책이 되어 버렸다.
4.江戶시대에 단가제도가 설정되어 가정종교로 변모하여 개인의 신앙배양이 희박해졌다.
5.고래의 신도사상과 동화하여 타협의 결과 신불혼합의 성격이 강해졌다.
이상은 단점을 말했고, 장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다른 나라보다 일본불교는 자선과 이타에 앞섰다.
2.민중의 교화가 계속되었다.
3.사상적으로 순수화하여 불교사상을 발전시켰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일본불교는 중국불교의 종을 계승한 것도 있지만 일본에서 성립된 것이 많이 있는 바 각자 상이한 각종의 종지를 간단히 살펴보자.
⊙ 각종단의 종지
법상종:유식론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만법유식'을 종지로 하기 때문에 '유식종'이라고도 부른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인식을 통해 존재를 결정한다는 사상이다.유식관법을 통해 성불한다고 하지마는 5성이 각별하다고 설하는 것도 타종과 다르다. 본존불은 석가모니불과 약사여래불이다.
화엄종:화엄경을 소의 경전으로 하기 때문에 부친이름이다.중중무진한 인연 속에 사사무애의를 설하고, 일체즉일 일즉일체를 설한다. 본존은 비로자나불이다.
율종:이 종단은 일본에서도 드물 게 순전한 비구승단이다.제법유식의 리와 계,정,혜 3학의 원융을 설한다. 계율에는지지와 작지로서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이 종단은 당초제사 1사 뿐이고 함께 율종이던 서대사파는 진언율종으로 나누어져 있다.
본존은 노사나불이며,소의경전은 사분률,금망경,법화경이다.
천태종:단,밀,선,계를 병학병수하는 종지에 염불까지 가해 있는 것이 이 종단의 특징이다. 법화경에 나와 있는 법신불을 본체로 할 뿐 본존불은 없고,미타,약사여래 등을 봉안한다. 선종의 영서,도원 정토진종의 친란, 일련종의 일련 등이 모두 천태종의 비예산에서 수도했기 때문에 鎌倉불교의 모태가 되는 종단이다. 소의 경전은 법화경이다.
진언종:현교는 역사상의 석가모니가 교주가 되지만 진언밀교에서는 법신 대일여래가 교주가 되고 대일여래가 직접 설한 대일경,금강정경이 소의경전이다. 3밀(신,구,의)의 가지(가호와 호지)로서 '즉신성불'한다는 것이 종지다.태장,금강의 양부 만다라에 천8백 가까운 불보살을 모시고 현실긍정의 교의가 특색이다.
정토진종:정토종을 개창한 법연의 제자 친람이 세운 종인데 교세로는 일본에서 최대의 위치에 있다. 종지는 위에서 간단히 소개했지만,'부처의 본원력이 우리들에게 나타날 때 우리는 염불을 하지 않고는 못베기며 그 본원을 믿음으로써 제도된다. 염불로써 제도되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본존은 아미타불이고, 소의경전은 정토3부경이다.
율통엽불종:良忍上人이 개창한 이 종도 역시 종명 그대로 염불왕생을 주장한다. 정토 교의에 천태종과 화엄종의 교의가 혼합되어 있으니 일즉일체 일체즉일로 일체인일체행이 융통하여 '상즉상입 하는 것이 십계일념 융통염불이라'고 한다. 자타염불로 왕생극락을 한다는 것이 이 종지의 특색이며 본존과 소의경전은 모든 정토계열의 종과 같다.
일련종:일련상인이 개창한 종으로 한국의 법화종계통이 여기에서 나왔는데 일본서도 '법화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염불대신 '나무묘법연화경'이라고 만다라를 써 붙여놓고 염불대신 '묘법연화경'을 창제하는 것이 특징이다.
종지는 정토계가 개인이 제도를 역설하는 대신 일련종은 국가 사회의 제도에 중점을 둔다. 교의는 천태교학에서 발전시켜 5단상대니 3대비법이니 한 것을 고조한다. '나무묘법연화경'이라 써 붙이는 것이 본존인데 그것은 '구원성실의 본불'이 그로써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소의경전은 묘법연화경이다.
임제종:선3종 가운데 하나인 이 종은 서영선사에의해 중국서 전래되었다. 송안화두로써 하는 좌선과 제자에게 인가를 준다.'불립문자 교외별전'이 종지다.
조동종:간화선 공 공안선의 종인데 임제의 한 파로서 중국서 발생한 것이다. 경전을 중국의 명나라 음으로 읽고 제반의식도 중국풍인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임제종과의 차이는 염불왕생을 겸섭하여 염선일치를 주장한다. 그런데 염불종과는 달리 '기신미타 유심정토'를 주장하고 '만법유심 심외무법'이라는 선종의 종지이다.
이와 같이 현재 일본 전국에 있는 사찰의 수효는 8만여 개이며 승려는 약20만명,신도수는 8천8백만으로 나타나 있다. 이 신도수는 일본 독특한 단가제도에 의한 숫자인데 전 국민의 90%가 되는 수효이다.
그 중에 제일 큰 종파는 '정토진종'인데 크게 두파로 나뉘어 있다. 정식명칭으로 하면 '정토진종 본원사파'와 '진종대곡파'라는 2대산맥이 있다.그런데 왜 일본은 이런 종파 불교가 다른 나라보다 더 발달되었는가 생각해보면 이들은 원래 상, 하 주종친자관계가 지극하기 때문에 이러한 파벌이 조성되었다고 본다. 또 그들은 겉치레와 예의와 절도가 심한 국민성이 있어서 의제와 의식이 통일되어 있으며 또 번잡하게 발달되어 있다. 법계 같은 것도 있고 세분되어 있어서 상하종류만해도 15계단쯤 되는데 거기에 급수가 붙어서 백층이상으로 나누어지는 형태로 되어 있다. 모든 사물을 개괄적인 것보다 부분적인 천책에 재증이 있어서 불교의 교학도 우리가 보면 현세학적인 것인데도 아주 발달해 있는 편이다. 우리들 편에서 보면 아주 많이 배울 것이 있는데도 배워봐야 얻은 것은 별로 없다고 할 정도로 부분적인 것들의 연구가 많은 편이다.
그리고 일본불교는 그들 국민에게 장례치뤄주는 일이 필수적인 사무가 되어 있어서 '장례불교'라는 말을 듣는 것이 일본불교이지만 꼭 본받아야 할 점이다. 그러니 국민들에게도 관습적인 의식과 무속 적인 기복 그리고 학문적인 연구만으로 흘러서 진정한 신심에 우러나오는 종교로서의 불교신앙인으로서의 신도가 얼마나 있는지 의심이 간다. 그러나 과거 미개한 일본에 한국불교가 건너가게 된 이후 지금까지 국민정신을 함양해 왔으니 불교를 떼어 놓고서의 일본은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일본의 종교중 하나인 불교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조사를 하면서 이것저것 여러 가지 모르던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그중 하나는 일본의 불교는 우리나라 백제에 의하여 전파되었었고 또 우리나라의 여러 승려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맘이 뿌듯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일본에 불교를 전해 주었었지만 일본은 독자적인 일본적인 불교를 발달 시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란 것도 깨달았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어렵고 경건하고 우리생활에서 좀 멀다..싶은 생각이 항상 들고는 했는데 일본의 불교는 다른 나라에서부터 들어왔지만, '매일의 삶이 그대로 부처의 삶이다'라는 말처럼 생활에 가까이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법 자체를 이해하고 그것에 알맞게 세속과 인연을 끊는 등 생활과는 따로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일본의 불교는 그게 아닌 것 같다. 굳이 불교를 공부하려고 출가하여 산 속으로 들어갈 필요도 없으며, 애써서 죄선 수행에 힘쓰거나 계율에 급급해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승려는 결혼도 하지 않고 세속과 관계를 아예 끊고 부처님의 말씀을 깨닫기 위해 밤낮으로 불경을 외우고 심신을 수련하지만 일본의 승려들은 세속과 생활을 하면서 고기도 먹는 등 한마디로 우리나라에서 본다면 굉장한 큰 잘못을 하는 생활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에 너무도 놀랐다.
어찌 보면 이러한 일본의 불교는 우리나라나 중국의 불교와는 같은 점도 있으면서도 다른 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문화가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지만, 한가지 자명한 일은 일본은 불교에 의한 문화나 정치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역사는 불교와 함께한 역사라는 것이 나의 마지막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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