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의 네가지 모습 / 사 52:3-10, 요 1:1-14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가 나셧다’라는 천사의 음성이 들려지던 유대땅 베들레헴에는 여러 가지 모습의 첫번 성탄의 모습이 나타난다. 빨리 뛰어가 나신 아기 예수를 찾아보고 그 기쁜 소식을 온 유대에 선포하면서 맞아하던 목자들의 크리스마스, 서편 하늘에 나타난 이상한 별을 보고 구세주가 나신 것을 확신하고 먼 사막을 건너 유대땅까지 찾아와서 어린 예수께 예물을 드리고 경배하던 동방박사들의 크리스마스, 그와는 달리 위촉을 받고 낡아빠진 히브리 예언서 속에서 메시야를 찾아보던 학자와 서기관들의 크리스마스, ‘나도 유대인으로 나신 아기께 경배하리라’ 하면서 두살 아래의 어린 아기들을 살해한 헤롯왕의 크리스마스, 또한 유대왕이 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공연히 소동하던 예루살렘 주민들의 크리스마스 등 우리는 복음서를 통하여 그림을 보듯이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듯 베들레헴이 첫 번 크리스마스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듯이, 오늘날 우리들의 크리스마스 풍경도 가지각색임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저는 이 여러 가지 모습들 중에서 어떤 것이 참된 크리스마스의 모습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한다.
1. 그리스도가 없는 크리스마스
12월 초만 되면 시골 읍내까지도 성탄 장식으로 화려하다. 도시는 더 말할 것거도 없다. 특히 백화점은 성탄 장식의 선두주자임에 분명하다. 이는 조용히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하며 예배드리는 기독교인들보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더 인기가 있는 날인 것 같다. 대형 백화점들이나 호화 호텔은 성탄절이 든 초겨울이 연중 가장 큰 성수기라고 한다. 이러한 상술에 빨려들어가는 청소년들로 인해 최근에는 크리스마스 베이비라는 말까지 생겨날 만큼 크리스마스 문화가 타락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목격하는 이런 크리스마스의 풍경은 분명히 그리스도가 없는 크리스마스가 아닌가 생각된다. 오늘 상점이나 백화점, 호텔들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성탄 선물을 사려고 분주히 상가를 출입하는 자들이 만일 1996년 전의 예루살렘 주민들이었다면 그들이 과연 강보에 싸여서 여관집 말구유에 뉘인 아기 예수를 찾아 경배했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만왕의 왕이 탄생했다는 소식만을 듣고 소동하던 예루살렘 주민에 불과했을 것이다. 만일 오늘 그리스도께서 화려하게 꾸민 거리에 오신다면 이런 모습을 외면하시고 돌아설 것임에 분명하다.
크리스마스 상징물 가운데 가장 반성서적인 것으로 둔갑한 것은 크리스마스 카드이다. 지난 2-3년 전부터 불어닥친 크리스마스 카드의 그림 중 아기 예수가 등장하지 않은 것은 이미 옛날이고, 성서에서 가장 가증히 여기는 카드로 점치는 것이 등장하는가 하면 괴물 또는 흰 소복을 입은 귀신들이 버젓이 그려져 있다. 또한 벌거벗은 산타 할아버지에 이어 최근에는 남녀의 애정행위를 비롯한 여성의 주요 신체부위를 빙자한 그림들이 활개를 치고 있으며, 올해는 특히 값비싼 로열티를 제공한 개나 고양이, 오리 등의 만화 주인공들이 청소년들을 집중공략하고 있다. 재치와 위트가 넘치는 대사와 화려한 색상, 귀엽고 아기자기한 새로운 주인공, 가벼운 농담에서 야한 농담까지, 입체적으로 만든 카드 등 그 표현이나 소재에 있어서 첨단을 걷고 있지만 결코 성탄절의 의미를 되새겨 볼만한 카드는 흔하지 않다. 이런 카드들은 그리스도가 없는 성탄절 카드임에 분명하다. 상술에 뒤지는 기독교 회사의 분발이 있어야겠지만 동시에 그러한 해악을 가르쳐주는 교회의 교육이 절실한 실정이다. 또한 카드로 올해 없어지는 나무가 우리나라에서만 40만 그루라고 한다. 일찍이 예언자 이사야는 주전 7백년 전에 ‘너희가 입술로는 나를 부르나 마음으로는 나를 멀리하는도다’라고 탄식했던 그대로 오늘의 현런한 모습은 마음으로는 그리스도가 없는 크리스마스임에 분명하다.
2. 그리스도를 내쫓는 크리스마스
외국 신문에 난 만화를 우리나라에서 소개한 것이 있다. 전쟁이 있을 당시의 상황에 성탄절을 혼합한 만화였따. 만화제목은 ‘산타클로스의 조난’이다. 산타 영감이 성탄전날 밤에 선물을 기다리다 못해 잠든 아이들에게로 몰래 들어가려고 굴뚝 속으로 들어갔더니 놀랍게도 그 굴뚝은 유황불을 내뿜는 대포 구멍이어서 크게 조난을 당하는 그림이었다. 이 만화는 분명히 평화의 왕을 내쫓는 크리스마스를 풍자한 것이었다. 그런데 교회 내에 침투한 크리스마스의 잘못되 문화가 바로 산타클로스라는 것을 아는 성도들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교회 안에 세속 사회의 경우처럼 비윤리적인 활동은 없겠지만 모르는 사이에 성서와 무관한 문화적인 크리스마스의 요소들이 많이 흘러들어 왔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산타클로스이다.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준다는 것은 문화적으로는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교회 안에서는 삼가야 한다. 크리스마스의 의미에는 산타클로스가 존재하지 않으며, 산타클로스를 아무리 정당화 시키려해도 아기 예수의 위치를 대신한다면 그것은 얼마든지 우상이 될 수 있다. 성도들이 성탄절하면 아기 예수보다 먼저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앙적인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사실 산타클로스는 4세기 경에 러시아에서 태어난 니콜라스 주교였는데,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었기에 죽은 후 세인트(성)라는 칭호를 천주교 교황청에서 붙여주어 세인트 리콜라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후에 만화가들이나 백화점들이 빨간 옷과 흰수염 그리고 빨간 코의 루돌푸를 덧붙여서 산타클로스라고 부르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문화들이 그리스도를 내쫓고 주인 행세까지 하는 성탄절이 되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그리스도를 내쫓는 성탄절을 지내서는 안되겠다.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일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크리스마스의 본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구주 예수님이 왜 태어날 수밖에 없었나는 생각하고, 그것이 나와 우리 가족, 우리 인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한번쯤 돠새겨 보는 날이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자세라고 할 수 있겠다.
3. 그리스도를 대접하는 크리스마스
교회 역사를 보면 중세기 교회에서는 크리스마스 축하의 참된 의의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난한 자에게 동정을 베푸는 것과 결부시켜서 크게 평가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주는 행동의 미덕은 훗날 교회에 전승되어 오늘에 와서는 가난한 형제들을 돌보고 고아와 과부들과 노인들을 돌보는 것을 교회의 연중행사로 하고 있다. 참으로 아름답고 좋으 일이다. 그리스도는 분명히 이 땅의 가난한 자와 병든 자와 마음 상한 자를 위하여 오셨다.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는 장차 올 메시야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마음 상한 자를 고치며, 얽매인 자에게 자유를, 슬픈 자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오신다’라고 예언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 예언이 당신을 두고 하신 예언임을 확인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돌보는 자가 곧 자기를 대접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이러한 선행을 하는 사람은 심판날에 하나님께 크게 칭찬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마 25장에 있는 오른편 자리에 앉을 의인의 이야기가 이러한 사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 날에 심판 주는 땅 위에서 선행을 한 의인들을 향하여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라고 하신다. 그러나 그들 의인들은 ‘주여, 우리가 언제 어디서 주님을 찾아서 대접하였나이까’라고 한다. 그때에 임금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복음서에 기록된 이러한 종말사살이 중세기 교회로 하여금 구제를 구원받는 조건과 결부시켜 그리스도인의 미덕으로 높이 찬양했다. 우리가 잘 아는 성탄에 관한 작품인 ‘제4박사’가 있다. 이 사람은 동방박사 세사람과 같이 떠나기로 약속하였으나 헐벗은 자를 돕다가 낙오되어 33년간이나 그리스도를 찾아다녔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가난한 형제를 대접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대접하는 행위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선행의 문제는 기독교 구원의 교리에 있어서 기본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의 현실적인 생활을 말하는 마당에 있어서는 크게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이야말로 우리 교회들이 그리스도를 위하는 심정으로 가난한 형제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고 그를 대접하는 지성으로 그들에게 우리의 적은 것을 주는 생활을 하여야겠다.
4.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크리스마스
그리스도를 그린 성화 중에 이런 그림이 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밤에 등불을 들고 제자들이 불안한 생각으로 한곳에 모여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집을 찾아가서 문을 두드리며 서 계시는 그림이다. 아마 이 성화는 계 3:20절의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라고 하신 말씀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이 성화가 암시하는 내용에서 네 번째의 크리스마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로 찾아오시는 그리스도를 맞이해 드리는 크리스마스이다. 1996년전 유대땅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나신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이 땅위에 어린 아기로 탄생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찾아 베들레헴으로 갈 필요는 없다. 그는 우리가 그를 찾아 헤매는 수고를 덜기 위하여 그 자신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그는 지금 문 밖에 서 계신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우리가 그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그는 우리에게로 들어와 우리와 같이 사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세상의 소라한 소음 때문에 또는 우리의 고집 때문에 우리의 마음 문을 굳게 닫고 있다면 그는 기다리다 못해 돌아서교야 말 것이다. 그러면 우리를 찾아오시는 그리스도를 참으로 맞아드릴 자가 누구겠나? 성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올해의 크리스마스에는 정중히 예수 그리스드를 초청하고 그리스도를 주인공으로 삼는 생일이 되기를 바란다. (1996-51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