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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믿음 / 삼하 7:8-16, 눅 1:26-38
성탄을 기다리는 여러분들께 하나님께서 우리가 감히 생각할 수 없는 그러한 평화를 주시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한다면 그 평화를 누가 막겠는가? 오늘은 대림적 마지막 주일이며 내일은 성탄절이다. 대림절 네 번째 주일은 특별히 마리아를 기억하는 주일이다. 교회력 중에서 두가지 큰 절기가 있는데 하나는 부활절을 앞두고 잇는 사순절(수난 절기)이고, 또 하나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있는 대림절이다. 그런데 이 두 계절이 똑같은 보라색을 쓰고 있다. 전통적으로 사순절에는 보라색을 사용한다. 고난을 상징하는 색깔로, 대림절에는 희망을 가지며 기다리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 보라색이 다른 두 절기에 쓰여지는 것을 보면 고난과 희망이 굉장히 다른 것 같으면서도 함께 얽혀진 삶의 앞뒤면이 아닌가 생각된다.
성탄절이 다가올 때마다 언제든지 배경적인 이야기로 마리아와 요셉에 관한 이야기와 생각을 하게 된다. 침착하고 신중하였던 요셉의 인품에 대하여 누구나 다 칭찬을 아끼지 않는 남성다운 매력을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에 대하여서는 약혼자 마리아가 임신하게 되었는데도 침착하게 처리하고자 하였던 그의 인간성에 대하여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물론 이 점은 대단히 위대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더우기 그 당시의 유대인 사회의 배경과 풍속에서 이해하면 보편적인 경우가 결단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아침은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의 신앙 태도에 대하여 생각하도록 하겠다. 세가지 점에서 마리아는 위대한 신앙을 가졌던 여자였다.
1. 마리아는 기적을 믿었던 여인이었다.
본문 눅 1:26절 이하에 보면 기쁨의 소식을 전하는 천사 가브리엘이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요셉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라는 천사의 말을 듣자 마리아는 놀라 천사에게 이르기를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대답하였다. 이때 천사는 계속하여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하였을 때에 마리아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하므로 천사가 이른 말씀을 믿게 되었던 것이다. 자기 몸에서 아기가 태어날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마리아는 믿었다. 자기 몸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이 사실, 이 큰 기적의 사건이 이루어질 것을 믿었던 것이다. 기적 중에는 최대의 기적인 것이다.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남자와 관계없이 성령으로 마리아이 태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탄생될 것이라는 이같은 예고에 대하여 마리아가 믿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믿을 때에 가능한 것이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으므로 자기에게 일어날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적 탄생도 믿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기적을 믿는 사람들이다. 우리들은 기적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야 한다. 우리들은 합리적인 또는 과학적인 사건이나 내용은 기적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너무나 크다. 사실 넓은 의미에서는 우리들의 모든 삶의 내용 전체가 기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로리는 ‘인생은 중단이 없는 기적이다’라고 말한 것은 일리가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반적인 삶의 내용 전체가 기적이다. 병원의 의사들을 통하여, 약국의 약사들을 통하여 인체의 병이 치료되는 이런 것 자체도 하나님의 기적의 보편화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기적의 사건들도 있다. 이런 경우는 기적의 특수화라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99%가 하나님이 주신 합리적인 기적의 보편화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기 바란다. 우리는 종종 기적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좁혀 놓아야 위대한 신앙을 가지는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어느 병원 의사는 입원하여 수술 및 치료를 받는 환자들에게 이렇게 말을 한다. ‘우리 의사들은 하나님의 연장된 손입니다. 우리가 약을 쓰고 수술을 하여도 하나님이 고쳐주셔야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의사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을 먼저 믿으시고 그리고 의사들을 믿으십시오.’ 참 귀중한 말이다. 기적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들을 보호하시고 선하신 뜻으로 다스리신다는 이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한다. 사상가 몽테뉴는 ‘나는 이 세상에서 나 자신보다 더 큰 기적을 본 적이 없다’라고 말하므로 자기의 존재와 삶의 의미를 파악하고 바르게 보람있게 살고자 하는 자신을 곧 신의 섭리와 기적의 결정체로 보았던 것이다. 여러분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자세히 생각해 보라. 여러분 자신의 기적을 깨닫게 될 것이다. 변화, 성장, 그리고 발전의 기적을 보게 된다.
마리아는 전폭적으로 자기 자신이 전능자의 능력 안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믿고 복종하였던 것이다. 우리들에게 종종 어떤 불행이, 병고가, 실패가 닥칠 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기적의 손을 볼 수 있을 때에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마리아는 앞으로 자신의 몸에서 이루어질 엄청난 변화의 기적을 믿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큰 기적이 있다면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되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는 이 궁극적인 기적을 확신하기 바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란 기적 안에서 기적을 누리며 기적을 믿으며 기적을 행하면서 산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E 카이벨의 ‘사랑은 기적이며, 사랑은 은총으로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이슬과 같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2. 마리아는 최대의 생명의 위협을 예견하면서도 순교적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유대 사회에서는 처녀가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게 되면 돌로 쳐 죽여도 상관없는 그런 엄격한 사회였다. 약혼한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요셉은 마리아의 몸에 이상이 나타나는 것을 의식하고 조용한 가운데 관계를 끊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생각하면 마리아의 믿음은 생명을 결어놓은 순교적 신앙이었다고 말씀드릴 수가 있다. 순교적 믿음을 달리 표현하면 마리아의 순종이라고 할 수 있다. 마리아는 자신에게 돌아올 위험과 손해를 예감하몀서도 천사의 말에 거역하지 않았다. 마리아는 자기를 통해서 메시야가 탄생하리라는 천사의 말을 믿고 순종하였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고 대답하는 태도는 죽음까지도 각오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참으로 큰 순종의 자세이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은 많은 여인 중에 마리아를 택하셔서 구원의 역사를 펼치셨던 것이다.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들은 후 자기 몸에 변화가 나타나자 얼마나 은근히 당황했겠는가? 그러나 그는 천사가 이른 말을 믿고 기억하였던 것이다. 이상한 눈초리로 지켜보는 요셉 앞에 변명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적어도 천사가 요셉에게 이르기 전에는 말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참고 믿음을 지켰던 것이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덕망 중의 하나가 인내이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마리아의 경우 자기 자신은 천사가 일러준 말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마리아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상상해 보면 마리아는 얼마나 강한 믿음을 가졌는가를 상상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마리아의 경우 천사에게 ‘그러면 내가 오해받지 않도록 어떤 표시를 주시든지, 우리 가족이나 친척 또는 동네 사람들에게 이 엄청난 사실을 알려주십시오. 그래야 제가 처신하기가 쉽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마리아는 한마디 불평하지 않고 천사의 말을 계속하여 믿기로 작정하고 지켰던 것이다. 우리들 자신이 마리아의 경우가 되어 자신을 물어보게 되면 마리아의 위대한 신앙을 깨닫을 것 같다. 마리아는 죽음을 각오하는 신앙을 가졌던 것이다. 신앙이란 자기의 전 생명까지 하나님께 위임하는 결단으로 이해해야 하겠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의 명령 앞에서 마리아처럼 순종하고 있는가? 주께서 어떤 일을 요구하실 때, ‘내가 이 일을 하면 어떤 유익이 있을까? 내가 이 일을 행하므로 어떤 피해를 입을까’를 따지지는 않는가? 또는 주께서 어떤 명령을 하시는데도 그것이 주님의 일인지 아닌지 분간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듣고 그 뜻을 새기면서 의심하지 않고 비장한 각오로 순종하였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는 큰 축복을 받았다. 마리아와 같은 자세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꼭 필요한 자세이다. 때로 우리는 교회 일을 하면서 순종하는 자세로 하기보다는 따지거나 핑계대고 빠지기를 좋아한다. 이런 태도는 자신의 신앙성장을 위해서도,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일을 할 때나, 또 봉사의 일이 맡겨질 때 ‘예’ 하고 순종하는 것이 좋다. 이 순종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과 교회 공동체가 건강하게 자라나는 것이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난이 있는 곳, 어려움이 있는 곳에 찾아갈 일꾼을 부르고 계신다. 이러한 주님의 부르심에 ‘예, 부족하지만 제가 가겠습니다’ 하는 자세로 순종하며 나아가는 성도가 되자.
예수님께서는 요 5:17절에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필요한 때, 필요한 사람을 불러서 그 일을 감당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2천년 전 마리아를 택하셔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가장 큰 일을 하셨던 것처럼, 오늘도 인류의 구원과 해방을 위해 우리를 택하셔서 우리에게 적절한 일을 맡겨 주신다. 사도 바울은 집에는 금과 은처럼 귀하게 쓰이는 것도 있고, 질그릇처럼 천하게 쓰이는 것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누구든지 주님을 위해서 일을 하면 그 사람이 바로 귀한 존재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과 내 삶이 주님께 쓰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쓰임 받는 사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끝까지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또한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끝까지 겸손해야 한다. 주가 주신 사명을 담당했다고 자랑할 수 없다. 주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봉사할 때나 옳은 일을 하다 박해를 받을 때에도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도록 하는 것이 좋다.
3. 마리아는 겸손의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일러준 말은 하나님의 아들이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탄생할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이 얼마나 엄청난 뉴스인가? 보통사람들 같으면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야가 저를 통하여 내어나게 된다고요?’라는 놀라운 반응으로부터 시작하여 굉장한 자존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나를 통하여 메시야가 탄생할 것이다’라고 떠들고 돌아다니며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마리아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하는 그는 하나님의 아들을 임신하게 될 자신을 ‘주의 여종’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같은 마리아의 자세는 겸손한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올바른 신앙이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바로 깨닫는 자기 발견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이요 죄인임을 분명히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자기 위치를 ‘종’의 위치에 놓았던 것이다. 종은 그 정신 자세가 언제나 순종하는 자세여야 한다. 순종하는 자세는 곧 겸손의 덕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낳게 될 스스로를 ‘종’으로 인식하였던 마리아의 신앙을 우리도 본받아야 하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이 얼마나 오랜 세월 믿음을 가졌느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겸손한 사람이 되었느냐 하는 점에서 자기 신앙의 깊이와 너비를 확인해야 하겠다.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의 내면을 깊이 파고들 때에 자기의 무가치함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늘 자기를 가리려고 하기 때문에 겸손할 줄 모르게 된다. 췌닝이란 사람은 ‘겸손이란 사람이 자기를 알려고 생각하였을 때 그의 마음 속에 최초로 생긴 감정이다’라고 하였다. 사실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옆에 세워보면 머리를 들 수 없는 부족한 우리들이 아닌가? 좀 겸손해 보아야 하겠다. 구세주의 나심을 축하하는 성탄절을 앞에 두고 마리아의 믿음을 본받아야 하겠다. 기적을 믿었던 마리아의이 믿음을 따라야 하겠다. 또한 생명까지 두려워하지 않았던 마리아의 믿음을 따라야 하겠다. 그리고 마리아의 겸손의 신앙자세를 배워야 하겠다. (1995-0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