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황 (敦煌)문화(2)
당나라의 문화가 다른 시기보다 개방적이고 국제적일 수 있었던 까닭은 당의 국력에 대한 자신감
이라든가 지배층 내부의 진취적 성향 등 내부적 요인과 함께, 비단길을 통한 서역과의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돈황은 역사유적탐방으로 그 진가를 발휘하는 지역적 특성을 지닌 곳이다.
돈황을 여행해 보면 그곳의 지리적 특성이 오늘날 돈황을 역사유적지로 만들었음을 보고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돈황은 책으로 읽거나 말로만 들어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으며, 실제로 직접 보고
확인해야만 비로소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돈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핵심어(키 워드:key word)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선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핵심어들은 늘 돈황이라는 지역적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그 정확한 의미나 개념을 불분명하게 대충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흔히 우리가 쉽게 하는 말인 '비단길'은 영어의 '실크로드(SilkRoad)'라는 말로 널리 알려졌고, 중국
사람들은 '사주지로(絲綢之路)'라고 직역하여 쓰고 있다. 하서(간다라 영양권) 지역은 특히 돈황
불법이 흥성하였는데 비단길의 요충지로서 중국 한족이 모여 사는 곳 중 가장 먼저 불법과 접촉한
지방이었기 때문이다, 하서 지방 불법의 흥성은 우선 불경 번역 방면에서 드러났다.
불법의 광범위한 전파로 인해 하서 간다라인접 지방에는 적지 않은 고승들이 출현했는데, 양주
사람인 보운(寶雲)·지암(智嚴)·축도만(竺道曼)·도태(道泰), 주천 사람인 혜람(慧覽), 장액 사람인
저거경성(沮渠京聲), 금성(신라인) 사람인 현창(玄暢) 등이 있다. 그들은 주사행(朱士行)과 법현
(法顯)처럼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곳과 황막한 사막을 걸어 서쪽으로 가 경을
구하고 성인의 유적을 참배하였다.
또 돌아올 때에는 대량의 산스크리트문이나 호어(胡語)불경을 가지고 왔는데, 하서 경내에 굴을
파고 절을 지어 신도를 모아 경을 강설하기도 하였고, 경전의 번역과 저술에 종사하기도 하여 불법과
간다라 문화 전파와 발전에 공헌하였다. 특히 하서 지방에서 불법이 흥성한 사실은 굴을 파고 절을
세우는 활동이 매우 활발했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석굴로 된 절은 불법활동의 표지였는데, 초기 불법신도의 주요 일과의 하나는 좌선이었다. 즉,
석굴에서 정좌하고 고행하여 잡념을 물리치고 온 마음을 부처로 향하게 하여 해탈을 구하는 것이다.
일설에는 부단히 좌선고행하기만 하면 점점 적멸(寂滅)의 경지에 도달하여, 마음이 무위 자락으로
극락에 삶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석굴로 된 절은 일반적으로 모두 시끄러운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산간벽지에 지어졌다.
「담마밀다전 曇摩密多傳」에서 말하길, "담마밀다는 법수(法秀)라고 하며 카피사(캐시미르)
사람이다, 부호 였으며 관직도 있었다. (중략) 여러 불경에 널리 통달했고 특히 선종의 법리에 깊었다.
(중략) 돈황에 와서 한가한 넓은 땅에 사원을 세우고 능금나무 천 그루를 심고, 100무(畝)의 동산을
개간하고, 선방과 누각, 연못, 숲을 엄정하고 조용하게 선정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후일 황제의 부름을
받고 두 번 거절하였다가 세 번째는 황도로 가서 역참총감을 맏아 역경과 불사를 도왔다라고 전한다.
특히 유명한 돈황 막고굴은 비록 수 당대에 성행하여 송원 시대까지 이르렀으나, 막고굴 제1호 석굴도
16국 시기의 것이다. 초기 불법이 돈황에서 전파된 역사로 볼 때 승려들은 절을 세우고 굴을 파서
정좌하여 수행 참선하는 것을 숭상하였는데, 이 때문에 명사산 아래 물이 흘러 감돌고 초목이 울창한
사막의 오아시스를 선택했던 것이다. 돈황은 시끌벅적한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속세인의
음식공양도 얻을 수 있었기에, 굴을 파고 참선하기에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곳이었다.
또한 돈황 막고굴 중 낙준 법사가 만들었다는 제1호 석굴을 비롯한 초기 석굴들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가장 오래된 석굴은 5세기 전반에 북량(北凉)에서 북위에 걸쳐 만들어진 굴이다. 그리고
다리를 엇갈려 앉은 유명한 미륵보살이 있는 제275호굴은 북위 초기, 정확히 말하면 북량 시기에
만들어진 듯한데, 현존하는 492개의 석굴사원 중에서는 이것이 가장 오래되었다. 제275호굴의
불상은 중국적인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입은 옷도 투명하며 인도 양식(간다라양식) 그대로
표현되었던 것 같다. 인도에서 들어온 불법이 수 당대에 이르러 중국에 맞게 변형되어 표현된 것이다.
200여 년간 돈황문화의 변숙기를 거처 서장어(西藏語)와 한어(漢語)로 된 불경을 서하어로 번역하는
사업을 진행하였는데, 이로 인해 불법문화가 대체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석굴사원도 활발하게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