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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성주의를 말하다> 우리는 왜 퇴행하고 있는가. 우치다 다쓰루 외 9명. 옮긴이 김경원 출판사 이마
실수다. 책을 샀어야 했는데, 도서관에서 대출하였다. 큰 실수를 하였다. 현재도 반납을 미루고 있다. 불법 점유를 하고 있다. 곤혼스런 책이다. 내가 반지성주의자구나, 내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이 책을 읽으며 경계해야 할 점이 있다면, ‘반지성주의’를 읽고 있기에 나는 반지성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독자들은 타인과 사회의 반지성주의를 개탄한다. 하지만 이 책은 읽고 있는 당자가 우선 표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의 경우엔 지성적 활동이라 생각했던 사항들이 실은 반지성적이었구나 하는 성찰을 불러일으킨다. 뭐, 그렇다고 자신을 심하게 자책할 필요는 없다. 개인의 반성도 필요하지만, 개인적 반성에 매몰되어서는 안되지 싶다.
우리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수 많은 정보와 지식에 포위되다시피 하였는데, 난데없이 반지성주의 타령인가. 돌아가신 이모는 다리가 불편하여 매일 텔레비전만 보셨는데, 모처럼 가족이 방문하면 국제정치부터 국내 정치 경제까지 몇 시간이고 방문객을 상대로 論을 펼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매일 사소한 노력으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정보와 지식을 접할 수 있는데, 반지성주의라. 반지성주의란 지식과 정보의 양과는 상관이 없는 모양이다. 반대로 정보와 지식의 양이 늘어날수록 지성이 줄어드는걸까? 무엇을 지성이라 하고, 무엇이 반지성인가? 우치다 다쓰루는 원고를 부탁하는 글에서 “장기적으로 보면 자신의 이익과 배치된다는 것이 확실한 정책인데도 국민은 지지를 보냅니다. 어째서 그럴 수 있을까요? 솔직히 말해 그 이유를 도통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베 정권이 전쟁을 할 수 있게 개헌을 하겠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왜 찬성하지? 그런 의문도 있었으리라. 뭐 이런 예들은 수없이 많아 일일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옳고, 자신만은 선하다고 생각한다. 변해야 할 대상 중에 자신은 절대 포함시키지 않는다. 늘 개혁의 대상은 나 말고 다른 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의 선택은 불가피하고, 다른 이의 선택은 악의적이거나, 무지하다고 하는 듯하다. 그럼 내가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이 능사일까? 인구수만큼 진리가 존재하는 것도 같다. 자원의 배분은 편파적인데, 진리는 완전 평등해지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21세기에 한국에 부처나 예수가 나타나서 무슨 말이라도 할라치면, 사람들은 이렇게 외치지 않을까. “그건 당신 생각일 뿐입니다. 내게 강요하지 마세요”. 진리가 돈이나 권력으로 바꾸지 않는 한, 진리란 한낱 의견일 뿐이다. 변기가 쓰레기장에 있으면 그냥 쓰레기고, 미술관에 있으면 작품이 되는 세상이다. 전시된다는 의미는 권력을 획득했다는 의미다. 전시장에 있는 변기를 보고 저게 예술작품인가? 하고 문제삼는 이는 드물다. 누군가 저 따위 물건이 왜 미술관에 걸려 있을까 하고 묻는다면 반지성주의자일까? 아닐까? 난 모르겠다. 진리도 평등해졌고, 누구나 예술가가 되는 세상이다. 그만한 이유가 있고, 그만한 의미도 있으리라. 좋은 점도 많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예술의 종말은 아닐까? 모두가 모두를 사랑하면, 아무도 사랑할 수 없게 되는 사태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인간이 절멸할 수도 있는데, ‘핵전쟁을 하자’ 이런 의견도 존중받아야 할까?
원고 청탁의 문장을 하나 더 인용해 보자. /반지성주의를 초래한 역사적 요인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지성의 활동을 정지시킴으로써 얻는 ‘질병 이득’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질병이득이란 질병을 앓음으로써 얻는 심리적, 사회적, 경제적 이익이나 유리함이라 한다. ‘정지’ 꽤 재미난 표현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지성을 획득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 스스로 지성의 작용을 정지시켰다는 의미다. 즉 ‘생각하기’를 포기 했다는 의미다. 지성의 활동을 정지시키는 전략이나 전술을 선택한 셈이다.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 바로 질병이득을 얻기 위해서다. 약간 우회하면 지성의 정지가 생존의 유리하다고 인간들은 결정하여 스스로 그 기능을 퇴화시켰다는 것이다. 마치 사슴이 아름다운 뿔을 가지면 인간에게 사냥당하기 쉬우니 스스로 뿔을 퇴화시켰다든가. 혹은 인간들이 생존 전략으로 아이 낳기를 포기해 버리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임신 포기는 인류의 절멸이고, 지성 포기는 인간의 ‘동물화’가 아닐까? 슬프다.
누구나 반지성이란 소리를 들으면 불쾌하게 생각 할 것이다. 몇 번의 클릭이면 모두가 ‘지성인’이 되는 시대가 아닌가?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지성의 정지란 마치 애 낳기(새로운 인류의 생산)을 정지시키는 일과 비슷한 의미라고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애 낳기가 생존에 도움이 결코 유리하지 않기에 선택했다면, 지성의 정지도 그렇게 볼 여지가 있다. 반지성에 얽매이지 말구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왜, 생존에 지성이 유리하지 않고 하필 반지성이 유리하게 되었을까? 혹은 도대체 왜 지성이 필요한가? 필요하기나 할까? 혹은 반지성이 뭐가 나쁘단 말인가? 반지성이면 어떻고 지성이면 어떠한가?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 수만 있다면 만사형통 아닌가. 이제 ‘지성’은 거추장스러운 짐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장식물정도의 역할만을 요구받고 있는걸까? ‘지성’은 지식이나 정보하고는 다른 개념이다. 그렇다고 ‘지성’을 정의 내리지도 않는다. 그건 불가능한 시도고, 그것 자체가 ‘반지성’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반지성’이란 무엇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도 없다. 어려운 문제이리라. 이 책의 저자들에게 이런 항의가 쏟아질 수도 있다. 그럼 너희들은 ‘지성’적이고, 다른 이들은 ‘반지성’적이란 말이냐?
원래 이 책의 제목은 ‘일본의 반지성주의’ 였고, 제목은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명저 <미국의 반지성주의>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미국의 반지성주의>는 오래 전부터 읽어야 할 목록에 상위에 위치해 있지만 여러 이유로 무기한 연기되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반지성’은 일종의 ‘무지’나 ‘무식’하고는 다르다. 그렇다면 굳이 반지성주의라 하지 않고 일본의 무지 같은 제목을 부치지 않았겠는가? 반지성주의는 지성과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지성의 반대말이 아니다.
“반지성주의에 빠질 위험이 없는 지식인은 거의 없다. 한편, 한결같은 지적 정열을 결여한 반지식인은 거의 없다.”(미국의 반지성주의 중). “반지성주의를 움직이는 힘은 단순한 게으름이나 무지가 아니라 대개 ‘외곬의 지적 정열’이기 때문이다”(우치다 다쓰루) 역설적이게도 반지성주의의 토대는 지성주의일지도 모른다. 과장해서 말해보면(이런 태도는 반지성주의 일까?) 지성인이 많으면 많을수록 반지성주의가 활개를 친다는 의미일 수 있지 않을까? 지성기계의 엄청난 발전이 모두를 지성적이게 만들자, 반지성주의가 시대의 조류가 되었다. 이렇게 말해도 될까? 혹은 네비게이션의 보급이 모든 사람들을 지리학자로 만들었다. 이렇게 생각해 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나 포함 이제 인간 각자는 자신이 가장 지성적이라고 생각한다. 과히 지성의 평균이 달성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누구의 말도 들을 필요가 없다. 각자 다 전문가들이기 때문이다. 축복받은 시대일까.
저자의 면면을 살펴보자. 사상가, 문예 평론가, 작가, 기업가, 칼럼리스트, 정신과 의사, 영화감독, 생명과학 연구자, 철학자. 한편으론 다양해 보이지만, 한편으론 그 세계 부류일 수도 있다. 저자들은 각자가 생각하고 각자가 하는 일에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반지성(작용)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여기에서 어떤 공통점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 소용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저자 모두의 의견을 진열장 속의 전시품처럼 쭉 펼쳐 보일 수도 없다. 궁금하면 읽어보는 수밖에 없다. 검색 본능은 잠시 접어두고 스스로 읽고 생각해 보아야 하지 싶다. 아차, 지금 시대는 생각하기를 어쩌면 검색하기로 바꿔야할지도 모르겠다. 검색하기와 생각하기의 차이는 무얼까? 생각하기란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면, 검색하기는 잠깐이면 가능하다. 그래서일까, 우치다 다쓰루는 지성 작용에는 시간이 중요한 관여를 한다고 했을까?
이 책의 원제가 <일본의 반지성주의>라고 하여, 어떻게 일본인들은 아베 같은 자를 그렇게 지지할 수 있는가? 일본인은 반지성주의자라는 소리를 들어도 싸다고만 애기할 수 없다. 이미 반지성주의는 한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계적 사조나 시대 정신이 된 듯하다. 자신과, 한국인과 한국을 들여다 보기를 권하고 싶다.
저자 중 한 명인 시라이 사토시는 사회학자다. 시라이 사토시는 “반지성주의, 그 세계적 문맥과 일본적 특징”을 실었다. 그는 세계 혹은 일본의 반지성주의 사태가 왜 벌어졌는지, 현대 사회의 구조적 상황을 통해 그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그는 두 가지 맥락을 든다. 중요한 지적이나 통째로 인용을 해 본다.
“후기 포드주의 또는 신자유주의라 일컫는 경향, 즉 1980년대부터 세계적으로 현저해진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면서 반지성주의 풍조는 민주제의 기본적 태도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정이다. 말하자면 새로운 계급의 탄생이다. 다른 하나는 제도적 학문이 상앗대질하고 있는 ‘인간의 사멸’이라는 상황을 꼽을 수 있다. 사회의 세속화로 해방을 맞이한 근대성의 발전은 세계의 중심을 신에게서 인간으로 옮기는 일, 즉 광의의 휴머니즘 원리를 확립했다. 그렇기 때문에 상당히 앙상한 것으로 전락했을지언정 ‘인간성의 완성’이라는 이념을 근대의 학문은 내걸어 왔다. 통제적 이념이라고는 해도 인간 지성의 한없는 발전은 최고도로 인간성의 발전을 실현한다는 궁극적 목표를 세우고, 학문의 발전은 거기에 공헌한다고 여겨 왔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여러 학문 분야에서 목격하는 바는 이러한 이념의 사멸이다. 한마디로 고도의 지성과 풍부한 내면성을 갖춘 인간이라는 이상은 급기야 명분으로서도 소멸했다. 인간은 ‘죽은’것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는 일찍이 근대의 인간상을 부정하고 ‘인간의 죽음’에 축사를 보냈는데, 마침내 그의 꿈이 실현되었다. 다만 악몽으로서”
소위 신자유주의 시대의 민주제란 반지성주의를 통해 작동한다는 의미다. 마치 우리 사회를 보고 있으면, 주식 시세를 중계하듯이 여론시세를 약방의 감초처럼 이용한다. 많은 사람들의 여론이 마치 정의나, 진리라도 되는 양 한다. 그 어떤 정치인이나 정치도 100년 앞을 아니 10년 앞을 내다보고 계획을 하거나 미래을 위해 장기적 기획을 할 여지가 없다. 그런 여지를 주지 않는다. 지금 여기만 있고, 당장의 이익에 사활을 걸다시피 한다. 객소리는 그만하고 본론으로 돌아가면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제란 반지성주의를 동력으로 움직인다로 읽을 수 있다. 즉 반지성주의의 내재화다. 외부의 적이라면 물리쳐 볼 여지라도 있지만, 그 작동원리가 반지성주의라면 대책이 없는 것이 아닐까? ‘인간의 사멸’이란다. 근대적 인간의 사멸인가 아니면 인간이라는 종 자체의 사멸인가. 난 두 가지로 해석해 보고싶다. 이제 우리는 좋은 인간이 되는 목표를 포기했다로 읽힌다. 전지전능한 신의 시대엔 인간은 늘 불완전한 존재였다. 그러나 인간은 신을 밀어내고 인간이 전지전능해지기를 바랬다. 근대라는 대기획이었다. 신의 전능한 능력을 인간의 고도의 지성과 풍부한 내면성과 고상한 인격으로 신의 부재를 극복하려고 했다. 즉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였다. 그래서 근대란 신 중심주의를 대신 인간 중심주의가 되지 않았을까. 그러자 인간 중심주의를 비판하여 신을 몰아낸 것처럼 인간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니체가 신의 죽음을 이야기 했다면, 포스트모던한 세계에서는 인간의 죽음을 선언했다. 그러자 정말로 ‘인간의 죽음’ 실현되었다. 한편으론 다르게도 읽고 싶다. 신(혹은 자연)이 되고자 한 인간의 기획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시도였지 않았을까? 고도의 지성과 풍부한 내면을 가진 인간성의 완성이란 이념일 뿐이고 실상은 ‘난쟁이’들을 신이라고 선언해 버리지는 않았을까? 그렇게 하여 비록 명분이나마 유지되고 있던 거인(고도의 지성과 풍부한 내면)을 잡아먹어 버렸고, 그 가장 노골적인 사태가 지금 벌어지고 있지는 않는걸까? 이제 거인들을 거부하는 단계를 지나서 멸시하고 공격하는 단계까지 온 것이 아닐까? 모든 것이 예술이면 이제 예술은 죽었다는 의미고, 모든 인간이 신이거나 거인이라면 아무도 신이 아닌 세계가 된 것은 아닐까? 내가 거인이 아니라면 거인을 난쟁이로 만들어 버리면 된다. 그래서 모두가 신이나 거인이 되었고, 논의 개구리처럼 시도때도 없이 울어되고 있는걸까? 각자가 전지전능한 신인데 무엇을 더 배우고 익히겠는가. 이미 신인데. 그곳에 반지성주의가 똬리를 틀고 있지는 않는걸까?
옛날이 좋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각자가 개인적으로 반성을 하자는 의미도 아니다. 인간성을 회복하고, 자기를 돌아보자라는 주장이 틀려서가 아니다. 중요한 점은 반지성주의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방식의 작동원리이자 원동력이라는 성찰이 아닐까 싶다. 저자마다 반지성주의를 해석하는 방식과 방향도 제각각이고 자신과 관계되는 업을 중심으로 기술하였기에 다르고, 또 이들의 의견이 다 옳다고만 볼 수 없다. 그러나 이제 숨기거나 쉬쉬하지 말고 이 주제를 공론의 장에 띄우고 진지하게 이야기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쉬운 작업은 아니리라. 누군들 자신이 반지성주의자 임을 인정하려 하겠는가? 반지성이면 어쩌고 지성이면 어쩐가. 잘 먹고 잘 살면 되지 않겠는가? 인간이란 개체는 고작 100년을 살까말까한데 살아있는 동안 내 몸 하나 편하면 되지 않겠는가? 지구야 망하든 말든, 공동체야 몰락하든, 인간이 사멸하든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만, 혹은 내게만 일어나지 않으면 되지 않은가?
이 책은 절대 가벼운 책이 아니다. 몇 마디로 간단하게 요약하거나 이해할 수 있지도 않다.
옛적 유학자들은 논어를 수 천번 읽고 외웠다고 하고, 스님들은 날마다 반야심경을 독경한다고 한다. 그것들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삶의 지침서고 규범이 아니었을까? 늘 자신의 삶과 생각을 점검하고 성찰하고 혹시라도 어긋난 점이 없나를 살폈으리라. 혹시 나는 지성이란 이름으로 반지성주의적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럴 때 한 번씩 펼쳐보면 좋을 책이다.
첫댓글 경계가 모호해진 세상
지성이란 무엇인가?
호호님은 진리를 사랑하고 지성을 추구하는 절대 동물이 아닌 인간입니다.
철학자 호호
늘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ㅜㅜㅜ
*우리는 왜 퇴행하고 있는가
“장기적으로 보면 자신의 이익과 배치된다는 것이 확실한 정책인데도 국민은 지지를 보냅니다.''
*변해야 할 대상 중에 자신은 절대 포함시키지 않는다....변하려면 먼저 자신을 알아야( Who I am), 변해야 할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겠네요....'나의 부족함은 무엇인가'....정숙님의 옛 댓글,
자기 정체성who I am?, who I really am?
지성과 헉력은 전혀 다르다고 하네요 ㅎㅎ
/부처나 예수가 나타나서 무슨 말이라도 할라치면, 사람들은 이렇게 외치지 않을까. “그건 당신 생각일 뿐입니다. 내게 강요하지 마세요”(진리를 거부하는 시대ㅠㅠ), 스스로 지성의 작용을 정지시켰다는 의미다. 즉 ‘생각하기’를 포기 했다는 의미다/
충격적이네요!!!
난 누군가에게서 이런 고백들을 자주 들어요. ''맞는 말이지만 그 선택은 않겠다'' 대부분 그렇더라고요.
반지성주의.. 조금 알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