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姓名) 이명백(李命百)
본관(本貫) 가평(加平)
시대(時代) 1552(명종 7) - 1593(선조 26)
자(字) 인노(仁老) 호(號) 한포제
이력(履歷) 36(世) 명백(命百) 1552(명종 7) - 1593(선조 26)
칭호(稱號) 한포재공(寒圃齋公) 자(字) 인노(仁老) 창신교위공(彰信校尉公) 경(耿)의 아들
⊙ 1552년(명종 7년) 보은현(報恩縣)에서 출생하심. 공은 인품이 준수 영민 하시고 제세안민(濟世安民)의 자질을 타고나시어 일찍이 6세에 글을 깨우치고 충군애친(忠君愛親 :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를 사랑으로 섬긴다는 뜻)을 써 놓고 말하기를 "사람의 도리는 이를 실천하는데 있다"고 하시니 토정(土亭) 이지함(李芝含) 선생이 보시고 감탄하시며 장차 나라에 크게 쓰일 인물임을 예언하심. (世譜)
⊙ 장성 하셔서 친 공신으로 음서(蔭敍)로 관적에 오르시나, 초기 행적에 대하여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고 이어 어모장군(禦侮將軍 : 정3품 무관계)에 오르시고 충좌위 부호군(忠佐衛 副護軍 : 종 4품 무관직)을 받으심.(世譜)
⊙ 1582년(선조 15년) 학자요 임진 4충신의 한 분이신 중봉(重峰) 조헌(趙憲) 선생이 보은현감에서 물러나신 후 사림의 선비로서 옥천 밤티에 후율정사(後栗精舍 : 율곡의 학문을 계승하는 집이라는 뜻)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실 때 스승과 제자로 인연을 맺게되고 성리지학을 연마하는 한편 여가에는 활 쏘고 말 타며 무예를 익히니 스승 중봉이 크게 사랑하고“공은 유문(儒門)의 자제로서 무예까지 겸전 하였으니 후일 큰 성취를 이룰 것이다 ”고 칭찬하고 혹독한 추위를 이기고 늘 송백의 기상이 있다하여 한포재(寒圃齋)의 호를 지어 주었다..(世譜)
⊙ 1591년(선조 24년) 일본의 풍신수길이 정명가도(征明假道 : 명나라를 정벌하겠으니 길을 빌림)를 조선에 요청하는 사신을 1589년에 이어 보내니 중봉 선생이 급거 상경하여 수제자(首弟子)인 命百公을 장수로 하여 전술적 방어 요충지인 영남(嶺南)의 우명치(牛鳴峙)를 방어하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된 비왜지책(備倭之策)을 상소하였으나 조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음. (抗義新編)
⊙ 1592년(선조 25년) 4월 14일 왜군 9개 부대 15만여 명이 부산포에 상륙하여 파죽지세로 올라오니 4월 30일 선조 임금은 서울을 버리고 북쪽으로 몽진(피난)하게 되고 이를 알게된 공은 중봉선생을 도와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을 구해야한다는 구국의 일념으로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보은 차령(車嶺)에서 왜병을 크게 물리치고 통로를 차단하여 공을 세우셨다. (趙憲全書)
⊙ 1592년(선조 25년) 6, 7월 웅진, 청산, 옥천, 보은 등지에서 의병1600여명을 모집한 중봉선생과 공은 함께 목숨을 바쳐 국난을 극복하자는 맹서를 다지는 제(祭)를 올리고, 승장(僧將) 영규대사와 합세하여 청주성을 공격하니 적은 야음을 타서 달아나 청주성 탈환의 대승을 거두었다. (趙憲全書)
⊙ 1592년(선조 25년) 8월 10일 당시 금산에 주둔한 왜군이 충청도 일대를 침공할 것이라는 소문에 접한 중봉선생과 공께서는 승장(僧將) 영규대사(榮圭大師)와 같이 호남순찰사 권율(權栗) 장군과 합세하여 적을 협공할 것을 약속하고 의병 700여명을 인솔하여 형강(금강)에 도착하였음. 그 때 노모께서 병환으로 위독하다는 소식을 받고“참으로 충효를 겸전 함이 매우 어렵다”고 한탄하면서 중봉선생과 작별하고 집으로 돌아 와 두 아우와 더불어 노모의 병간호를 극진히 하심. (報恩郡誌.趙憲全書.世譜)
⊙ 1592년(선조 25년) 10월 공격을 연기하자는 권율장군의 통첩이 있었으나 그대로 진격한 조헌 선생의 의병은 금산에서 2만이 넘는 왜군과 대적하여 용전 분투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휘하 의병 700명과 함께 전원 장열하게 전사하였음. 노모의 병환이 쾌차하여 다시 진중으로 가려 할 때 스승께서 순절 하셨다는 비보를 들은 공께서는 스승과 같이 순절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밤낮으로 남쪽을 향하여 통곡과 탄식하시면서 “내 이미 함께 싸우다가 죽지 못하고 살았으니 오직 왜놈을 죽이는 것이 스승의 원수를 갚고 나라를 지키는 길이다”고 결심하고 보은에서 창의, 가졸(家卒)들을 포함한 의병 300여인으로 스스로 충의장(忠義將)이 되어 영남 의병장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검간(黔澗) 조정(趙靖) 등과 합세하여 선산, 인동(仁同)칠곡(漆谷) 등 낙동강 일대에서 왜적들을 모두 격멸 하니, 장졸들의 사기는 충천하고 공의 높은 기상과 위풍에 눌려 소문만 듣고도 왜병들이 달아났다고 함. 이때 공께서 지어 읊으신 "일인산하기 삼군사직심(一 山河氣 三軍社稷心)이라""둔한 한칼은 산과 강의 기를 받고, 온 군사들은 오직 나라에 충성하는 마음뿐이네" 라는 장부로서의 높은 기개를 담은 이 詩가 장졸들의 사기를 드높였다. (報恩郡誌, 世譜)
⊙ 1593년(선조 26년) 3월 11일 한포제공이 휘하 의병들을 지휘하여 마로 면 적암리로 회군하였는데 이곳은 영남과 호서를 잇는 인후(咽喉 : 긴요한 목구멍)와 같은 통로로 일찍이 중봉 선생의 비왜지책(備倭之策)에 수립되었던 방수(防守)의 요충지이다.
⊙ 1593년(선조 26년) 4월 18일 전국 각처의 의병 봉기와 행주산성 대첩(大捷) 등 승보에 전의를 상실하고 퇴각하던 왜군 대부대와 조우(遭遇) 하게된 공의 의병은 구국일념으로 분투하였으나 중과부적인지라, 붉은 피와 시신이 산을 이루고 강이 되었다. 이 전투에서 장열히 순절하시어 스승의 뒤를 따르시었다. 순절의 비보가 전해지자 정부인 신평이씨께서 참상의 현장으로 직접 달려가시어 공의 시신을 치마폭에 친히 거두어 모시니 여성으로서 담대한 기질과 부군에 대한 애정의 단면을 우리는 여기서 엿 볼 수 있으며 후일(後日) 공이 흘리신 붉은 피의 흔적을 상기하여 이곳의 지명을 지금도 적암리(赤岩里 : 피로 붉게 물든 바위)로 불러지고 있다.
⊙ 1625년(인조 3년) 중봉 조헌의 항의신편(抗義新編 : 안방준 찬술)에 공의 형제분들에 관한 기록이 있고, 1652(효종 3년) 장손 되시는 덕소공(德 公)이 공의 행장기를 후손들에게 전하였으며 조정에 포양상소( 揚上疏) 하였다. 1792년(정조 16년)에는 보은, 옥천, 청주의 유림 150여명이 포양상소 하였으며 1797년(정조 21년)과 1812년(순조 12년)에 보은현감이 포양상소 함으로서 1812년(순종 12년) 3월 13일 절충장군(折衝將軍 : 정 3품 무관계)으로 증직(贈職)되시고 공의 충신정려(忠臣旌閭)를 세울 것을 명하였다.
한포재공정려기(寒圃齋公旌閭記)
충신정려(忠臣旌閭)를 세우라.
報恩의 故 副護軍 이명백(李命百)은 文烈公 趙憲의 문인(門人)으로 왜변(倭變) 때 倡義하여 報恩을 지키다가 赤岩里 전투에서 殉節하였다.(贈職 折衝將軍 正三品 堂上官) (敎旨.純祖實錄)
※ 선조께서 명하신대로 보은군 탄부면 구암리에 정려를 세우셨으나 세태변천으로 현재는 보은군 탄부면 하장리 보덕중학교 동편으로 이전하여 보존되어 있다.
⊙ 1823년(순조 23년) 5월 영동 검천서원과 회인 차령서원(지금의 후율사 : 보은군 수한면 차정리)에 중봉 조헌(重峯趙憲) 선생을 비롯한 14분의 충신과 함께 한포재공(寒圃齋公)의 위패가 모셔져 매년 춘추제례(春秋祭禮)가 유림(儒林)에 의하여 봉행되고 있다.
⊙ 1867년(고종 4년) 12월 증 가선대부(贈 嘉善大夫 : 종2품계) 이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 : 종2품관)을 받으심. (敎旨)
⊙ 1892년(고종 29년) 10월 증자헌대부(贈資憲大夫 : 정 2품계)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 : 정 2품관)를 받으심. (敎旨)
⊙ 1995년 8월 6일 공의 묘소가 심히 퇴락(頹落)되어 후손들이 뜻을 모아 원정리(보릿골)에서 덕동리 안산 공의 고조부이신 평호공 사당 동편으로 이안(移安)하여 신도비를 건립하고 석물과 조경, 묘역 정화사업을 시행하였다.
묘(墓) 보은군 탄부면 덕동리 안산 간좌(艮坐)
부(父) 모(母) 배(配) 정부인(貞夫人) 청주한씨(淸州韓氏) 출생 연월일(出生 年月日) 미상 졸년(卒年) 미상 1월 7일 정부인(貞夫人) 신평이씨(新平李氏)출생 년월일(出生 年月日) 미상 졸년(卒年) 미상 9월 16일. 부(父) 이천계(李天啓)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정4품관) 조부(祖父) 이철권(李鐵拳) 장사랑(장사랑:종9품문산계) 묘(墓) 청주한씨 보은 월송리 하월굴(下月窟) 묘좌(卯左) 신평이씨 보은 덕동리 안산 간좌(艮坐) 合封
자(子)
⊙ 자녀(子女) 슬하에 4남 1녀를 두셨음.
장남 여량(汝樑) : 선무랑(宣務郞 : 종6품하계)
차남 여즙(汝楫) : 生員
자(字)는 이섭(而涉) 호(號)는 정우당(淨友堂)으로 부친한포제(命百)의 영향을 받아 학문이 뛰어난 준재로서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명망있고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하였으나 벼슬을 탐하지 않고 오직 선비의 자세로서 초야에서 청렴하게 살기를 원하였다. 세종대왕의 고손(高孫)인 진천군(晉川君)의 따님과 혼인하여 왕실에서 벼슬을 내리려 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시고 일생을 선비로서 마치셨다. 뛰어난 학문과 고고한 삶을 통하여 후세에 길이 전할 수 있는 공의 유고(遺稿)가 있다고 세보에 기록되어 있으나 1850년대 종가(宗家)의 화재로 소실되어 전수(傳受)되지 못함이 아쉬움을 더 한다.(王室과의 사돈關係. 世譜 氏族原流參照)
차남 덕관(德寬)공께서 황해도 해주로 이주 정착하여후손들이 세거하며 크게번창하였으나 국토가 분단되어 이후 행적을 알 수 없음을 탄(嘆)한다.
삼남 여주(汝柱) : 선교량(宣敎郞 : 종6품상계)
사남 여로(汝櫓) : 학생공(學生公)
녀(女)
사위 이 영시(李 榮時)
중봉의 의병을 도와 의병의 사기를 진작시켰다하여 그 마을을 사기막골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