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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간공(文簡公)주인원(朱印遠)
1246(고려 고종33년)~ 1304년(59세)
문간공(文簡公) 주인원(朱印遠)의 자는 모인(慕仁)이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246년 문절공 주열의 차남으로 태어나 1277년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에 제수되고 1278년 안주병마판관(安州兵馬判官), 1279년 예부시랑(禮部侍郞), 1301년 경상도안렴사(按廉使: 지방장관, 절도사 또는 안찰사) 겸 권농사 등을 거쳐 삼사좌윤(三司左尹)을 지냈다. 당시 간신배들의 중상모략과 농간에 실망하여 낙향하여 행방을 감추고 살았다. 별세 후 현재까지 묘소도 못 찾았지만 후손은 삼형제 중 가장 번성하였다.
2004년 4월29일에 주자묘(朱子廟)에 합사(合祀) 고유제를 올리고, 매년 5월5일 주자묘대제 때 배향하고 있다.
* 문간공 주인원의 후예
문충공(文忠公) 주사충(朱思忠)의 자는 국보(國輔)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359년 고려로 쳐들어 온 홍건적 3000명을 의주에서 분멸하였다. 벼슬은 호부상서(戶部尙書) 밀직사부사(密直司副使)에 올랐는데 덕흥군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가 혐의가 풀렸다.
웅성군(熊城君) 주자정(朱子精)은 문간공 주인원의 현손이다.
휘는 자정(子精) 자는 덕성(德性)이다. 고조부가 고려 때 간신들의 흉계로 억울한 누명을 받아 통분하던 차에 이씨조선이 개국되자 조선왕조의 인척이 되어 10촌 동생인 안천군 주인(朱仁)과 더불어 문과 급제 이후 조선 개국공신이 되었다. 의정부 좌찬성과 의금부사로 웅성군(熊城君)에 봉하여졌으며, 왕자의 난을 보다못하여 조선 태조를 호종하였다. 웅성(熊城)이란 현 충청남도 공주(公州)인데 고려의 세자사부(世子師傳) 벼슬을 지낸 10세손 주문익(朱文翊)을 입향조로 하였다. 이에 웅천파는 웅천(熊川)을 본관으로 삼아 주로 경상도 지방에서 세계를 이었다.
동부령(東部令) 주내경(朱乃敬)과 현감(縣監) 주내근(朱乃謹) 형제는,
본래 재야사림으로서 관직에 등용되어 강원도와 경상도의 동해안에 부임하여 백성을 다스리고 외침을 방비하였다.
전적공(典籍公) 주선림(朱善林)의 자는 정옹(挺翁)이고 식년시(兵科15)에 급제 후 전적으로 역전(歷典)・언양(彦陽)・진보(眞寶)에서 선정을 베푼 치적들이 있다. 1504년(연산군 10년)에 울진에 입향하였으며, 할아버지 주내근(朱乃謹)의 묘를 오류촌(五柳村) 위에 있는 경주 진덕왕릉(眞德王陵)의 밑에 두고 울진 구만촌(九萬村)으로 피해 산 것이 입향의 내력이다.
삼군(三郡)의 군수를 역임하며 칭송을 받았으며 왜(일본)에 사신으로 두 번 봉직하여 왜인들로부터 현대부(賢大夫)로 명성이 높았다. 후에 벼슬이 봉렬대부(奉列大夫) 전적감찰(典籍監察)에 이르렀다. 장손 주수(朱壽)는 만호벼슬을 지냈으며 차남 주의(朱懿)는 강릉부사(江陵府使)를 지냈다.
자손은 울진・청도・영월・강릉・대구・제천・진양・서울에 분포하고 있으며 입향 이후에는 부사공파(府使公派) 효자공파(孝子公派) 교수공파(敎授公派)로 분파되었다.
무열공(武烈公) 주몽룡(朱夢龍)
자는 운중(雲仲), 호는 용암(龍巖)이고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1563년 9월25일 경상도 사천 장천리(현 경남 사천군 정동면 장산리 몽대촌)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호조참판을 지낸 휘 읍(浥)이며 모친은 선산(善山) 이윤도(李潤道)의 딸이다. 출생 시 아버지 꿈에 청룡이 집안으로 날아들고 주위에 서운이 자욱하여 이름을 몽룡, 자를 운중이라 지었다. 후에 동네 이름도 몽대(夢岱)라 부른 것도 이에 연유하며 지금도 주장군등(朱將軍嶝)이라 부른다.
몽룡은 어려서부터 지모와 용기가 뛰어났다. 13세 때 열 길을 뛰어넘었고 학문에도 능통했다. 15세 이후에는 무예에 힘을 쏟아 21세(1583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무과 급제 이후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부모 공양에만 온 힘을 기울였다. 25세(1587년) 2월4일에 부상(父喪)을, 동년 3월7일에 모상(母喪)을 당하자 정성으로 장례를 치르고 3년간 묘막살이를 했다. 28세(1590년) 때 집 뒤 와룡산 입구 용암바위에 길이 10여 척의 이룡(이무기)이 도사리고 있어 통행도 못하고 사람을 해치고자 한다는 말을 듣고 현장에 갔다. 괴물이 영롱한 비늘과 번갯불 눈빛으로 도사리고 있었으나 몽룡은 두려움 없이 활을 쏘니 괴물은 사라지고 신령이 내려준 대검이 놓여 있어 신중히 보관하였다 한다.
그 해 처음으로 선전관에 제수되어 금산군수(金山郡守: 현 전북 익산, 종4품 외관직)가 되었는데, 부임하고 보니, 군 전역이 왜적에 함락된 뒤라 침식을 잃고 군민고초를 탄식하다가 의병을 모아 대항하여 잃었던 땅을 되찾는 무위를 높였다. 당시 전국토가 왜적에 짓밟힌 상태였으나 금산군에는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왜병은 삼남일대를 정복하고 서울로 진격할 무렵, 몽룡은 왜적을 섬멸하는 길이 국태민안의 길이다는 일념으로 금산군수직을 사퇴하고 의병으로 싸울 결심과 함께 조정에 계장(啓狀)을 올렸다.
‘소신의 마음은 마치 준마가 마구간에 엎드렸으되 마음은 천리를 훨훨 달리고 싶고, 매가 비록 홰(매를 매는 시렁)에 앉았으되 뜻은 창공을 날고 싶은 것과 같습니다. 이곳 금산군은 적당한 인재를 택하여 맡기시고 소신을 놓아 왜적을 섬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 것을 복원합니다.’
몽룡은 의병을 급히 모집하여 의령지방에서 의병을 지휘하고 있는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장군을 만났다. 곽 장군은 크게 기뻐하면서 같이 살고 같이 죽기로 맹세하고 왜적을 섬멸하기로 맹약하였다. 몽룡은 편장(한 방면의 대장)을 맡아 종군하여 전란이 종식되기까지 신명을 걸고 싸워 연전연승하여 큰 공을 세웠다.
몽룡 편장은 곽재우 장군이 영산전투에서 왜적에 사로잡히자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곽 장군을 구출해 내고, 연이어 적진의 중심부를 급습하여 무찌르니 왜적은 감히 맞서지 못하고 현풍(玄風)・성주(星州) 방면으로 도주했다. 계속하여 잔적의 퇴로를 막아 공략하여 전멸시키니 전세가 역전되기에 이르렀다. 화왕산전투에서는 장작을 높이 쌓고 승전하지 못하면 다같이 이 불에 타 죽기를 맹세하고 왜적을 공격하니 의병 사기는 충천하고 적장은 무기마저 버리고 도망가기에 추격하여 섬멸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 우병마절제사(右兵馬節制使)에 제수하였다. 추풍령전투에서는 지원군 없이 정예병사로 급습해 오는 대군을 맞아 중앙돌파관전법으로 대파하였다.(영동군 승전비문) 조령전투(鳥嶺戰鬪)에서는 강덕룡(姜德龍)・정기룡(鄭起龍)과 더불어 거창 우지현 싸움 시 왜적 대군을 격파 방어하여 큰 공을 세워 영남3룡(嶺南三龍)이라 한다.(慶北聞慶 鳥嶺行陣碑)
몽룡은 그 외 지산・솔예・팔량산・거제 등의 전투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여 백전백승하니, 당시 사람들이 ‘지(智)는 신(神)과 같고 용(勇)은 맹호(猛虎) 같다’ 하였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전략참모회의에 합석한 사실로 미루어 지용(智勇)을 겸비한 성장(聖將)이라 하겠다.(충무공 난중일기 갑오년 9월29일 조)
임진왜란 종식 후 공신 선정 논의 시 전공을 시기하는 간신들이 적과 모의한 적수(敵首)라고 참소하여 왕이 친국한 일이 있었다. 몽룡장군의 충의와 전공을 잘 아는 왕은 비지(批旨)를 내려 ‘그가 비록 정예하나 어찌 그리 했으리오’ 하면서 믿지 않았다.(선조실록 권151) 이러한 권신배들의 사악한 모함은 이순신 장군의 하옥・김덕령공의 사사도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몽룡장군의 임란 전공은 당초 공신 책정에는 들지 못했지만, 무고한 사실과 혁혁한 무공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나자 조정은 뒤늦게나마 공훈을 내린다.
첫째로 공의 시호(諡號)를 무열(武烈)이라 내리고, 가선대부(嘉善大夫) 형조판서(刑曹判書; 종2품 법무장관)의 직을 증(贈)하였고, 둘째로 3대(三代) 추증(追贈)의 은전(恩典)을 내렸다.
전장에서 8년 만에 집에 돌아오니 일가친척과 자손마저 흩어져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을 감내해 내기 위해 가계의 고대사와 근세사를 기록하는 한편, 오탐명(五貪銘)과 오난명(五難銘)을 좌우명으로 삼아 스스로 경책(警策)하고 후손을 훈계하는 글을 남겼다.
무열공은 1633년 12월18일 향년 71세로 하세하여 경남 진주시 나동면 삼계리 칠봉산 묘좌에 안장되었다. 조정에서는 전라남도 광양시 태인동의 충렬사(忠烈祠)와 의령 충익사에 배향되게 하였다. 오늘날은 진주 세덕사(世德祠)에 동국시조 청계공(淸溪公)을 위시한 12 현조(顯祖)의 위패를 같이 모시고 음력 3월15일에 제향(祭享)을 올린다.
주경안(朱景顔)
전적공 선림의 증손이다.
휘는 경안(景顔), 자는 여우(汝愚), 호는 충효당(忠孝堂)이다.
1536년(中宗 31년) 父 통정공(通政公) 세홍(世弘)과 母 현풍 곽씨(玄風 郭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명석하여 글 읽기를 좋아했다. 매사에 지극한 정성을 다하고 순리대로 실천하였고, 어른을 공경함에 있어 한결같고 가식 없이 하였다.
국상(國喪)을 당했을 때는 친부모의 상(喪)과 똑같이 3년씩 죽(粥)만 먹으면서 복상하기를 15년이나 했다. 임진왜란 시 왕이 파천(播遷)하자 제단을 쌓아 그 곳에서 7년간이나 매일 아침 향을 피워 국태민안(國泰民安)과 왜적섬멸(倭敵殲滅)의 기도를 올렸다. 이처럼 충(忠)과 효(孝)가 세상에 명성을 날려 생전에 정문(旌門:일명 紅門: 충신 열녀 효자를 표창하기 위하여 붉은 색으로 단장한 액(額)에다 충 효 열과 직함 성명을 새겨 마을 입구나 그 집 문 앞에 세우는 문)을 받게 된 것이다.
이러한 효행(孝行) 충의(忠義) 덕행(德行) 등으로 남아 있는 유적(遺蹟)이 많은 조상으로서 신안주문을 빛낸 자랑스런 선조이다. 추모 유적지는 정려각(旌閭閣: 1578년(宣祖 11년) ‘孝子 贈通德郞司憲府持平 朱景顔之閭’ :울진읍 고성리 소재), 불천사(不遷祠: 1644년(仁祖 22년) 울진읍 고성리 구만동 소재 사당), 충효당(忠孝堂: 종중행사와 강당으로 불천사 아래 소재), 향현사(鄕賢祠: 격암 남사고(南師古) 선생을 모신 사당인데 합사 관리되며 옥계동 소재), 축천대(祝天臺: 주경안이 임진왜란 때 석단을 쌓고 기도드린 유일한 유적지) 등이 있다.
주사호(朱士豪) 언양현감
휘는 사호(士豪), 호는 무심당(無心堂)이다. 경주부 중리(현, 경주시 황남동)에서 태어났다. 과거 급제 후 경북 언양현감을 지낸 후에 벼슬에서 물러나 후학을 양성하고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국난을 당하자 아우 사웅(士雄)과 사위 최계종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임진왜란에 용맹 참전한다.
유명한 전과로는 경주 노곡전투에서 수많은 백병전 끝에 승전하여 공훈으로 운량사(運糧使)가 되었으나 표창받은 날 퇴관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임란 공훈록 공적 작성을 거부 사양하고 문천강변에 정자를 지어 무심당이란 현판을 걸고 빈객과 더불어 시와 거문고를 즐긴 선조이다.
주의수(朱義壽) 제포만호
휘는 의수(義壽), 호는 병암(屛菴)이다. 관은 만호(萬戶: 정3품 벼슬)를 역임하였다. 주의수는 1573년 7월27일 경상도 웅천군 웅천면 신기(현, 경남 창원시 진해구 웅천1동)에서 태어났다. 조선 개국공신 주자정의 10세손이다.
유년시절에는 학문에 심취했으나 성장하면서 무예에 두각을 나타내어 강인하고 용맹스러워졌다.
임진왜란 때 제포(薺浦: 현 진해 웅천1동 제덕리 내이포) 만호(萬戶: 조선수군 정4품 벼슬)로서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서 참전했다. 순천 왜교성 전투와 노량해전에 참전하여 수많은 전공을 세우고 용맹함을 떨친 선조이다. 난중일기 곳곳에 기록이 남아 있다.
난중일기 10월16일 조에 ‘…밤 10시에 순천부사 금갑호만호 제포만호 등이 해남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왜적 13명과 적진에 투항해 들어갔던 송언봉 등의 머리를 베어 왔다…’고 기록된 것을 볼 때, 적진을 뚫고 들어가 왜적 머리와 반역자 머리를 잘라서 적진을 빠져나오는 일을 생각하면 그 용맹함과 투쟁성이 하늘을 찌른다 할 것이다.
1598년 11울18일 밤에 노량해전이 벌어진 날은 충무공 이순신 최후의 날이며 임란 7년 전쟁의 마지막 날로 기록되었다. 충무공의 전사로 통제사 작성이 필요한 공훈기록이 없고, 병자란 때 소실 등으로 실전을 찾지 못하고 있다.
개신교 목사(牧師)이자 독립운동가 주기철(朱基徹)
호는 소양(蘇羊)으로 경상남도 창원(昌原) 사람이다. 1891년 11월25일 진해시 웅천면 북부리 백일부락에서 父 주현성 母 조씨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6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조만식(曺晩植) 선생을 따라 전도(傳道)여행을 다녔다. 연희전문학교 상과를 중퇴한 후 창원에서 남학회(南學會)를 창설하여 국민교육과 애국사상을 고취하였고, 3.1 운동 당시 향리에서 대표로 활약했으며, 1925년 평양의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초량교회에 시무했다. 1936년부터 예수교장로회 주임목사로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목회와 신앙구국에도 헌신하였다.
1938・1944년까지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5차례에 걸쳐 투옥되었다, 일제 말엽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여 10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44년 4월21일 광복을 앞두고 평양형무소에서 5년4개월간의 복역 끝에 옥사로 순교하였다. 순교기념비(비명: 순교자 소양 주기철 기념비)는 창원시 진해구 성내동 소재 웅천교회에 있으며 1987년 9월8일에 세워졌다.
정부는 광복 후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簞章)을 추서하고 국립묘지에 모셨는데 그가 사용한 찬송가만 넣었다. 실제 묘소는 평양 돌박산(대성산) 공동묘지에 있다.
주기용(朱基瑢) 제헌국회의원 1897(광무1년)~1966 경남 창원 출신, 교육가
주진수(朱鎭洙) 신민회 강원도 대표. 독립운동가
1878~1936년 경북 울진 출생. 일제 강점시대에 독립운동가로 육영사업에 힘썼으며, 고려혁명당 창당에도 가담했다. 일찍이 개화운동에 투신하여 독립협회와 관동학회의 회원이 되었다. 1907년에 울진에 만흥학교를 설립, 교장으로 취임하여 육영사업에 힘썼다. 1909년 신민회 강원 대표로 만주에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한 모금운동에 공헌하였다. 1911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와 경학사 설립에 노력하였다. 1914년 대한국민회의 회원이 되고,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1926년 이규풍・최동희 등과 함께 러시아에서 열린 민족혁신 대표자회의 대표로 참석하고 고려혁명당 창당에 가담하였다. 1968년 한국 독립운동가로 대통령 표창이 수여되었다.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 주석면(朱錫冕)
자는 경화(敬華)이고 호는 월산(月山)이다.
1859년(己未年) 11월9일 30世 문옥공(文玉公: 嘉善大夫議政府參贊)의 셋째아들로 태어나고 1919년(乙未年) 1월13일 객지 순사하였다.
한말의 대신으로 군부협판・법부협판・원수부검사총장・궁내부대신 ・경기도관찰사・전라남도관찰사・강원도관찰사・충청남도관찰사・함경남도관찰사・군부대신서리・주차미국특명전권공사・주차아국(러시아)특명전권공사・중추원 찬정 등의 벼슬을 역임하고 품계는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다.
1902년(광무 6년)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 칙임 시에 주씨문중 대종회의 합의로 고종황제에게 상소문(上疏文)을 올려 신안(新安)으로 복관할 것을 윤허(允許) 받았다. 강원도 춘천시에는 주석면의 선정을 기리는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남아 있고,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 무등산의 암자인 약사암(藥師庵)은 그의 광주관찰사 재임시절 관청의 도움과 시주로 중건한 것이다.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주자묘에도 영송비가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