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프(COOP)'
우리나라 동네
슈퍼마켓만큼 볼로냐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소비자 협동조합 매장이다. 작은
슈퍼마켓에서 규모가 큰 하이퍼마켓까지 볼로냐 시민의 생활 가까이에 '코프'가 있다. 볼로냐 시민들은 빵·우유·신발·옷·그릇 등 대부분의
먹을거리와
생활용품을 협동조합에서 구한다.
그들에게 소비자 협동조합은 뭘까?
이곳의 소비자 협동조합은
친환경 먹을거리와 생활용품을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나누는 우리나라 생활협동조합과 달리
좋은 물품을 값싸게 조합원에게 제공하는 데 의미를 둔다. 볼로냐 시민에게는 가까이에서 다양하고 좋은
품질의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동네 시장으로 오랫동안 자리 잡아 왔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면 으레 코프 매장이 있으며, 다양한 혜택을 받기 위해 사람들은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이용한다. 이렇듯 소비자 협동조합이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놓여 있었다.
코프 신뢰도 75%, 가톨릭 신자 수와 비슷코프는
이탈리아 북동부 4개주(베네토, 에밀리아
로마냐, 마르케, 아브루초) 124개 소비자 협동조합의 연합체인 '코프 이탈리아(Coop Italia)'의 매장
이름이다. 볼로냐
지역의 코프는 코프 이탈리아 소속으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코프 아드리아티카(Coop Adriatica)가
운영한다. 코프 아드리아티카는 로마냐 지방 전부와 에밀리아 지방의 볼로냐에서 매장을 운영하는 소비자 협동조합이다.
100만 명이 넘는 조합원, 15개의
대형 매장과 135개의 소형 매장, 연 19억2400만 유로의 매출 규모. 이탈리아 국민의 60%가 코프의 조합
원일 정도로 이탈리아 사람들의 생활에 깊숙이 들어왔고, 외형상으로도 대규모 사업체에 버금가는 협동기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155년 전의 코프의 시작은 아주 소박했다.
1854년.
가난한 노동자들을 위해 마련한 작은 가게가 코프의 시작이었다. 적은
임금으로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만든 협동조합이기에 코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원칙은 싸고 품질이 좋은 물품을 인간적이고 공정하게 거래하는 것이다.
이런 원칙이 있기에 협동조합은 조합원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는다. 볼로냐에서 코프에 대한 신뢰도는 75%다.
가톨릭에 대한 신뢰도와 비슷한 수치다. 이탈리아 국민의 두 명 중 한 명은 조합원일 정도로 소비자 협동조합은 이탈리아 사람들의 생활 터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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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살림 |
빵과 우유, 옷과 신발, 약품까지…볼로냐에서 장을 볼 수 있는 곳은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가게와
재래시장, 그리고 코프다. 동네에 자리 잡은 코프는 대체로 소형 매장인데, 우리나라 중소형
대기업 슈퍼마켓 규모와 비슷하다. 주거지와 조금 떨어진 곳에는 이페르코프(Ipercoop)라는 대형 매장이 있다. 우리나라 대규모
농협 매장보다 조금 더 큰 규모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코프 아드리아티카가 볼로냐에서 운영하고 있는 3개의 대형 매장 중 하나다. '이페르코프(Ipercoop)'라는 빨간색 간판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이페르(Iper)'는 이탈리아 말로 '규모가 큰 것'을 뜻한다.
코프 아드리아티카 본부가 있는 이곳은 소형 매장보다 물품 종류가 다양하고 수량도 많은 편이다. 장을 보러온 한 조합원은 "여기 같은 큰 매장에는 일주일에 한 번 오고, 우유나 빵은 동네 코프 매장에서 산다. 여기에 오면 동네에 없는 먹을거리나
공산품,
가공품을 살 수 있다. 한꺼번에 사니까 훨씬 싸게 살 수 있어서 자주 이용한다"며 대형 매장의 장점을 강조한다.
대형 매장인 만큼 온갖 종류의 다양하고 풍성한 먹을거리와 가공품을 잘 갖추었다.
찻잔이나 냄비·식기류와 같은 예쁜 그릇들과 면도기·다리미·세탁기·TV 등
가전제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공정 무역을 통해 들여온 옷과 커피
설탕 등 윤리적 소비의 의미가 담긴 물품도 이곳에서 구할 수 있다. 심지어 의사의
처방전이 필요 없는
약품도 구입할 수 있다.
매장의 한편에는
샌드위치와
피자로
식사를 하거나
음료와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가 있었다. 이곳에서
판매하는 모든 먹을거리는 코프 물품이다. 장을 보고난 후 간단한 요기를 하는 사람들과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로 카페가 북적거렸다.
코프 브랜드…'COOP' 마크매장의 모습은 우리나라 대형
할인 매장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어 보고 고르는 재미에 푹 빠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이곳이 소비자 협동조합이라면
일반 할인 매장과 구분되는 것이 있을 법도 한데 그냥 눈으로 훑어보아서는 뚜렷한 뭔가를 찾기는 힘들었다.
이러한 의문에 155년의
역사를 통해 지켜온 원칙을 설명하는 매장
매니저의 말에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코프의 물품 정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저렴한 가격이다. 협동조합의 시작이 가난한 공장 노동자를 위한 것이었던 만큼 값싸게 구입할 수 있는 걸 최우선의 조건으로 삼는다. 물론 품질도 좋아야 한다.
코프에서는 굳이 친환경
유기 농산물이나 친환경 가공품만 고집하지 않는다. 다양한 생산물을 다루되 품질이 좋은 것을 우선으로 하고 국내산을 원칙으로 한다. 단 공정한
무역 관계에서 들여오는 물품은 특별 항목으로 취급한다. 또 환경의 중요성과 윤리성을 강조하며
어린이 노동이 안 들어갔는지 반드시 확인한다.
이 같은 코프의 운영 방식은 조합원의
눈높이에 맞춰 그 필요와 욕구를 반영하는 유럽의 소비자 협동조합의 일반적인 특성이며, 이탈리아 소비자 협동조합의 모습이다.
일반 대형 할인 매장과 달리 코프만의 물품 정책이 있다면 '코프
브랜드'를 예로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취급 물품에 제한을 두지는 않지만 특별히 이탈리아 국내산이면서 친환경
유기 농업 생산물이나 친환경 가공품, 공정 무역 물품에 대해 '코프(COOP)'마크를 붙인다. 이 마크는 코프 이탈리아에 소속된 협동조합 매장에서만 사용하며, 코프 아드리아티카에서 특별히 부착하는 '코프 아드리아티카(coop adriatica)' 마크도 있다.
코프 브랜드를 구입하는 조합원들의 신뢰는 높은 편이다. 코프 마크가 붙은
토마토소스 통조림을 고르던 어느 조합원은 "코프 마크가 붙은 물품을 주로 구입한다. 가격도 싸지만 품질 관리가 철저하다고 알고 있다"며
식초나 소금, 기름에 절인
저장 가공품은 특별히 코프 마크만 고집한다고 한다. 코프 브랜드는 전체 매출의 25%를 차지할 정도로 조합원이 많이 찾는 물품이다.
비조합원에게도 열려 있는 매장…조합원 이용률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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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살림 |
조합원만이 이용할 수 있는 우리나라
생협과 달리 코프는 조합원이 아니어도 매장의 물품을 구입할 수 있다. 조합원으로 가입하려면 25유로의 출자금을 낸다. 굳이 출자를 하지 않아도 이용할 수 있는데 조합원으로 가입하는 이유는 뭘까?
조합원으로 가입한 지 10여 년이 된 어느 조합원은 "가끔 조합원에게만 하는 특별 판매 행사가 있고, 극장·영화관·서점·스포츠센터에서 조합원 카드를 내밀면 할인을 받을 수 있다"며 다양한 혜택을 강조한다.
특별 혜택뿐 아니라 조합원이 되면 은행처럼 돈을 빌릴 수 있고, 돈을 넣으면 이자도 나온다. 비조합원 이용이 허용되지만, 조합원에게 돌아가는 혜택이 많아서인지 조합원 이용은 총 매출액 중 75%를 차지한다.
매출 면에서 조합원의 역할이 큰 반면, 조합원의 자발적인 활동은 거의 없다. 조합원 개개인의 모임으로
요리 교실을 열기도 하지만 참여하는 조합원이 많지 않다. 하지만 조합원들이 포함된 시민
커뮤니티와 함께 사회 봉사 활동을 적극적으로 한다. 이민자나 폭력에 희생당한 여성들과 같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일을 주로 한다.
그 외에도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책이나 생필품을 구입하여 배달해주는 장보기
서비스를 하며 노약자나
장애인들을 위해 말동무를 해준다. 사회 봉사 활동에 참여하는 자원봉사자는 800명 정도다.
교육 활동도 코프의 중요한 사업이다. 협동조합 시작 때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쳤듯이 코프에서 교육은 155년을 이어온
자부심이다. 교육 활동은 어린이를 포함해 다양한 범주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특히
학교에 찾아가 진행하는
식품 안전·
환경 교육에 열의를 보인다. 좋고 나쁨을 따져 가르치기 보다는 어떤 물건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 어떻게 사용되는지,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사람의 몸과 사회에 끼치는 악영향은 없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설명한다.
매장은 더 크게, 가격은 더 싸게!코프의 매장은 대체로 규모가 크다. 동네의 소형 매장도 개인 가게나 재래시장에 비해 대단히 큰 규모다. 매장의 규모를 키우는 일은 코프가 일관되게 추진해온 정책이다. 싼 가격에 품질 좋은 물품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규모의 확장이 필요했다.
한때 우리나라 주요 생협에서는 조합원의 운영 참여와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데 규모의 확장을 경계했다. 조합원의 협동의 원칙으로 운영되어야 할 생협이 영리사업으로 변질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 협동조합의 주인이 되어야 할 조합원이 단순한 구매자가 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협동조합의 모습은 어때야 할까? 어떤 것이 정답이라고 단정 짓기보다 그들의 역사성과 가치 기준의
차이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친환경 유기 농업 생산물과 가공품을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나누는 우리나라 생협의 모습과는 다르지만 이곳 코프 아드리아티카는 조합원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아내고 그것을 실현해가는 데 중점을 두는 소비자 중심의 협동조합의 모습이다.
방식은 달라도 협동조합의 마음은 하나"코프의 주인은 조합원입니다."코프를 안내해준 한 직원의 말이다. 코프 매장을 둘러본 후
느낌은 협동조합이라는 옷을 입은 슈퍼체인점 같았다. 조합원은 그저
손님에 불과한 사업의 대상이라고나 할까.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조합원에 대한 그 직원의 한 마디는 코프에 대해 내 눈의 초점을 다시 맞추게 되었다. 그들만의 원칙으로 조합원이 필요로 하고 조합원을 위한 사업을 꾸려가고 있으며, 조합원과 시민사회와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뭔가를 하려는 모습을 보았다. 우리나라와 다르기는 하지만 그들만의 소비자 협동조합의 운영방식이 있었다.
한국에서 온 손님을 정성스럽게 맞아준 그들의 모습에서 아시아와 유럽의 차이를 뛰어넘어 협동조합인으로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성의껏 안내하고 코프 물품으로
점심을
대접하고 마지막엔 코프 물품과 책이 든 선물보따리를 안겨주는 모습에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협동조합의 문화는
세계 어디를 가도 똑같았다.
/한살림 볼로냐
연수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