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인의 예술관 / 그림은 삶에 빛을 가져오는 것이다
‘보편적 인간(uomo universale)’이란 별명을 가졌던 르네상스의 전형적인 인물 ‘레온 알베르티는 《회화에 관하여》에서 그림에 대해 매우 시적인 표현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생을 빛으로 향하게 하기 위해 지옥에서 그림을 끌어내었다[De Pictura]”
이 한마디에 알베르티의 인생관과 예술관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왜 그런 것인가? 우선 왜 그림을 지옥에서 끌어내었다고 하는가 생각해보자. 이 말은 현실에 대한 냉철한 통찰을 전제하고 있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현대의 여성철학자 시몬 베유는 가장 큰 불행 앞에서 자비는 외면하지만 사랑은 외면하지 않는 힘이라고 하였다. 즉 사랑이란 그것이 아무리 비참해도 삶의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것을 포옹할 수 있는 힘인 것이다. 한국사회에서도 한때 헬조선이란 말이 유행했듯이, 사실 중세 말기와 르네상스 초기는 일반 민중에겐 사는 것이 지옥인 그런 삶이었다. 200년 동안의 십자군 전쟁으로 민초들의 삶은 피폐해져 있었고, 100년전쟁, 농민전쟁 등 크고 작은 전쟁이 삶을 더욱 궁핍하게 하였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페스트가 쓸고 지나간 유럽에는 인구가 반토막이 난 마을도 즐비하였다. 게다가 가톨릭의 성직자들은 마녀사냥, 면죄부 사건 등 도덕적인 추락이 심각하였다. 그러니 당시의 현실을 에누리 없이 바라본다면 그것은 ‘지옥’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한 예를 들면 ‘도미니크’라는 스페인의 한 성당의 사무장은 프랑스 남부를 여행하다,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전쟁 통에 죽은 아기를 무덤에서 다시 파내어 삶아 먹는 부모의 모습을 목격하고 경악하였다. 그는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그곳에서 머물러 오직 교육사업에 전념할 수 있는 ‘도미니크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오늘날 여전히 도미니크 수도회은 교육사업에 전념하고 있다. 이 일화는 당시의 삶이 ‘헬-유럽’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지옥과도 같은 현실에서 예술가는 무엇을 해야하는 것일까? 그것은 빛을 밝히는 일이다. 지옥이란 빛이 없는 곳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항상 빛과 어둠,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것이며, 어둠과 악은 곧 고통을 낳게 된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하지 않는가! 철학도 문학도 예술도 사실은 힘겹고 고통스러운 삶에 빛을 밝히는 것이 그 본연의 사명이다.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어둠과 싸울 수는 없다. 어둠은 오직 빛을 밝히는 것만으로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스럽고 기쁨이 없는 현실에서 고통을 치유하고 기쁨을 가져오는 것, 다시 말해 어둠과 악을 몰아내고 삶의 상처들을 치유하는 것이 사실상 모든 인문학이 지향해야 할 근본적인 ‘이정표’인 것이다. 삶의 이정표가 무디어지면 삶이 추락하게 되는 것이다. 빛을 밝힌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지만 그것은 우선 모호한 것을 분명히 밝히고, 어려운 일을 쉽게 만들며, 누구나 알 수 있도록 공정하고 투명하게 삶을 이끌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인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기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나에게 없는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루소는 “오직 기쁨을 욕망하기 때문에만 알고자 원할 뿐이다”라고 하였고, 서양 영성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아우구스티누스도 “정신은 전체를 이해하는 데서 기쁨을 발견한다”라고 하였다. 사실 모든 학문은 가장 기초적인 가치는 앎이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자신을 기쁘게 한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의무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기쁨이 1도 없는 사회 현실에서 어떻게 기쁨을 가질 수가 있을까? 기쁨은 나를 둘러싼 환경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즐거움(plaisir)은 외적인 것에서 기인하지만 기쁨(joie)은 내면에서 솟아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즐거움이야 포도주 한 병이나 커피 한잔으로도 가질 수가 있겠지만 내면 깊이 솟아나는 기쁨은 나에게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 그 무엇이 성취되었을 때 주어지는 것이다. 즉 기쁨은 오직 자기 인생에서 스스로 일구어가는 그 무엇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삶이 지옥 같다고 해서 기쁨을 가질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환경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기를 조금씩 일구어가는 것에서 주어지는 것이 기쁨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예술가의 표상 그것은 고통 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철학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울하고 음침한 사회 안에서 사람들에게 빛과 기쁨을 주기 위해서는 우선 나의 삶이 밝음과 기쁨과 가벼움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처세술이나 권력에 편승하여 학문을 사회적 성공의 도구로 만드는 것이 아닌, 정직하고 당당하고 떳떳하게 진실과 진리를 밝히며, 빛을 끌어내며, 이것으로 생동감 있는 실존을 가지고 그 기쁨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삶의 작은 것에서 큰 앎을 깨닫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큰 가치를 부여하여야 하며, 부당하고 거짓된 것을 바로 잡으며, 인생의 환희를 느껴야 하는 것이다.
철학자이자, 수학자였고, 수필과 소설을 쓴 작가였고, 독학으로 그림과 음악을 공부하였지만 화가이자 작곡가가 되었고, 그의 곡들은 전문가들도 경탄하였다. 독학으로 오른간 연주자가 되었지만 연주가로서의 명성도 얻었다. 나아가 그는 역사상 최초의 예술 이론서인 <회화론> <조각론> <건축론>을 쓴 예술이론가이자, 실제로 수많은 건축을 설계한 건축가이기도 하였다. 그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경탄할 줄 알았고, 이웃의 슬픔을 함께 슬퍼할 줄 알았고, 노인들의 주름에서 삶의 지혜를 발견하고 존중하였다. 많은 그의 창작물을 무상으로 사회를 위해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알베르티의 놀라운 열정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은 자기 삶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지칠 줄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듯이 르네상스인들의 현실 삶에 대한 애증은 자기 삶의 가능성을 무한에까지 들어 올리는 힘이 되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르네상스를 마치 인류 역사의 ‘젊은 시기’라고 평하는 것이다. 르네상스적 전형이었던 레온 알베르티의 교훈은 “젊은 영혼들이여 깨어 비상하라!”는 것일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한국의 젊은이들에게도 큰 울림을 주고 있다. 고통스런 삶 앞에서 기죽지 말고, 우울해 하지 말고, 비겁해지지 말고, 어둠 속에 숨지 말고, 거짓되이 살지 말고, 자기 삶에 대한 애증으로 당당하고 떳떳하게, 밝고 투명하게, 진실과 정의로 무장하여 현실의 장벽들을 하나씩 넘어서는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라는 주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