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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열왕기상18장16~29절
제목 : 어느 때까지 머뭇하려느냐?
여로보암이 22년간 통치하다 죽으므로 그의 아들 나답이 왕에 오릅니다.
나답이 2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에 바아사가 나답을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어 24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립니다.
여로보암과 바아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위해 선택되었지만 은혜를 망각하고 왕권만 지키는데 연연하다가 진멸합니다.
바아사의 아들 엘라가 왕이되어 2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리지만, 시므리가 모반하여 왕이 됩니다.
시므리가 왕이 될 때에 바아사의 친족과 친구까지 한 사람도 남김없이 멸합니다.
시므리는 7일동안 왕이 됩니다.
깁브돈을 향하여 진을 치고 있던 군대 들이 시므리가 모반하여 왕을 죽였다는 말을 듣고 지휘관 오므리를 왕으로 삼습니다.
오므리가 시므리를 죽이매 왕이되어 12간 이스라엘을 다스립니다.
오므리가 죽으매 그의 아들 아합이 왕이 됩니다.
이때에 엘리야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아합에게 자기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없을 것이라 선언하고, 그릿 시냇가에 숨어 까마귀들이 아침저녁으로 가져다 준 떡과 고기를 먹습니다.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
하나님께서 시돈에 속한 사르밧 과부 집에 머물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에게 두 가지 시험을 합니다.
하나는 물을 조금 가져다가 마시게 하라.
또 하나는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순종의 길’을 따랏습니다.
순종하였더니 엘리야의 말씀과 같이 비가 올 때 까지 먹을 양식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십니다.
많은 날이 지나고 제 3년에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그 때에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만나게 되고,
오바댜를 통하여 아합 왕을 만나게 됩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비난하며 국가 재난의 주범으로 몰아갑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의 대결을 요청합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이 종일 외치고 춤추고 자해하기까지 했지만 바알은 응답하지 않습니다.
1. 아합이 엘리야를 찾음(16~19절)
1) 오바댜가 가서 아합에게 말하매 그가 엘리야를 만나러 갑니다(16절)
“[16]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그에게 말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가다가”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 여기서 '만나다'('카라')는 의도적인 만남을 말합니다.
이는 곧 7절의 엘리야와 오바댜의 만남과 같이,
분명한 목적을 지닌 만남을 의미합니다.
그에게 말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가다가. - 아합이 만만찮은 중대사인 '꼴 구하는 일'(5절)을 간단히 포기하고 이처럼 즉각 엘리야를 만나려 한 것을 보면, 엘리야의 비중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비중이란 실상 아합이 엘리야를 어떤 식으로든 가뭄의 원인으로 결부시켜 생각한 데서 비롯됩니다. 10절 주석 참조.
그런 점은 다음 절에서 아합이 엘리야를 가리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troubler of Israel)로 부른 데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야 출현소식을 접한 아합은 이제야 가뭄의 원인을 해소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Hammond).
그렇다면 그보다 더 서두를 일이 어디 있겠는가 !
2) 아합이 엘리야를 볼 때에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외침니다(17절).
“[17] 엘리야를 볼 때에 아합이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는 자. - '괴롭게 하다'에 해당하는 '아카르'는 대개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행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아합은 지금 엘리야를 나라 전체에 해악(害惡)을 끼치는 국적(國賊)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언동은 오로지 아합 편에서의 논리만을 반영한 것입니다.
우상 숭배 장려 정책을 펴 나가는 아합 왕조(16:29-33)에 대한 엘리야의 평소 행동은 국정을 어지럽히는 훼방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심각한 위기로 몰아넣은 가뭄은
그의 저주(아합이 보기엔) 이후에 시작되었습니다(17:1).
따라서 어느 모로 봐도 엘리야는 아합에게 불길하고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아합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식할 수 있었다면,
그래서 자신의 행위를 자기 바깥의 척도(즉 하나님)로 비쳐 볼 수 있었다면,
문책의 대상은 분명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비난받을 자는
엘리야가 아닌 바로 아합 자신인 것입니다(18절).
3) 엘리야는 내가 아니라 아합에게 당신이라고 말합니다(18절)
“[18] 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 엘리야는 가뭄의 책임을 전가시키려는 아합의 비난에 대하여 이처럼 똑같이 '아카르' 동사를 사용하여 아합을 힐난(詰難)합니다. 17절 주석 참조.
즉 가뭄이라는 국가적 재난에 책임이 있는 편은
자신이 아닌 바로 아합과 그의 왕조라는 반박입니다.
여기서 '당신의 아버지의 집'은 곧 오므리(아합의 아버지) 왕조를 가리킵니다.
(1) 하나님의 명령을 버렸습니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였으나 우상을 섬겼습니다.
사실 아합 가문은 아합의 부친 오므리(Omri, B.C. 885-874).
가 왕조를 연 이래 더욱 가증한 우상 숭배 정책을 시행 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켰습니다(16:25, 26).
*16:25,26“[25]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26]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여 그들의 헛된 것들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본절에서 엘리야가 단지 아합 개인을 비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신의 아버지의 집'까지 함께 공박하고 있음도 그 같은 연유에서입니다.
(2)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 - 물론 오므리 왕조 이전의 왕 중에도 금송아지 숭배 등으로 하나님을 진노하게 한 여로보암(Jeroboam, B.C. 930-910) 같은 악왕(惡王조)이 있습니다(12:25-33).
그러나 아합의 가증한 죄악은 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스라엘에 본격적으로 바알(Baal) 숭배를 도입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16:31, 32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16:30~33“[30]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31]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32]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33]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4) 엘리야가 아합에게 온 이스라엘과 바알의 선지자450명과 아세라의 전지자 400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라고 합니다(19절).
“[19] 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
그런즉. – 지금 서로를 재난의 원인으로 비난하니(17, 18절),
'이제 기필코'(앗타, now) 시비를 가리도록 하자!
그런즉 이는 대단한 박력의 도전이 행간(行間)에 넘쳐흐르는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 '상에서 먹는다'는 말은 본문의 문맥상
'공급과 지원을 받는다'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왕비의 식탁에서 850명이나 되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함께 식사했다는 것은 있음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상'(슐한)은 그 식탁에 둘러앉은 자들 사이의 '교제'를 은유하는,
보다 중요한 용법을 갖고있습니다(시 69:22; 128:3: 단 11:27).
한편 본절로 미루어 이세벧은 마치 바알과 아세라 선교사처럼 이스라엘에 바알 및 아세라 숭배 이식을 위해 인력을 양성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갈멜산. - 갈멜산의 위치를 지도상으로 나타내 보면 곧 다음과 같습니다.
한편 '갈멜'(카르멜)은 '정원(庭園)' 또는 '과수원(果樹園)'을 의미합니다.
이 산은 지중해 쪽에 위치한 갈멜산맥(Mountains Carmel)의 일부로서 각종 식물이 무성하고 또한 석회 동굴이 많은 곳입니다. 4절 주석 참조.
그런데 이 갈멜 산이 여호와 종교와 바알 종교의 대결 장소로 선택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갈멜 산은 엘리야, 엘리사의 경우에서 보듯 여호와 신앙인돌에게도 특별한 장소였지만(왕하 2:25; 4:25), 동시에 바알에게 바쳐진 성소이기도 한 때문입니다.
(2) 갈멜 산은 이스라엘과 바알 종교의 본산지인 두로 사이의 중간 지점
에 위치한 때문입니다.
2. 엘리야가 대결 방법을 제안함(20~24절)
1) 아합이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로 사람을 보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이게 합니다(20절)
“[20]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로 사람을 보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
여기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콜 –베네이 이스라엘)이란 이전의 세겜 총회(12:1)에 상응하는 말입니다(Montgomery).
즉 이스라엘 각 지파의 대표자 집단이 이에 해당되는 것입니다.12:1주석참조.
그런데 21절 이하의 내용으로 보아 갈멜산에는 이 대표자 집단들이 집합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한편 본절은 당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전국 각지에 퍼져 활동하였음을 암시합니다.
왜냐하면 아합이 이들을 집합시키기 위해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기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이 무렵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이전 여호와의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역할을 모두 장악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2)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라고 합니다(21절).
“[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 원문에서 '두 사이에서'는 '알 쉐테이 하세입핌', 즉 '두 의견(opinion)으로(혹은 사이에서)'입니다.
그리고 '머뭇머믓 하려느냐'는 '파사흐', 즉 '절뚝거리다'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문자적으로 옮기면 '어느때까지 두 의견으로 나뉘어 절뚝거리려느냐'는 뜻이 됩니다.
이는 곧 단순히 당시 백성들의 미온적인 태도를 지적하기 보다는 분열상을 지적, 그 해소를 촉구하는 말입니다.
이로 보아 당시 이스라엘은 여호와 신앙과 바알 승배를 혼합하려는 세력과 순수 여호와 신앙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었을 것입니다(Bahr, Keil).
그런데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박해했던 데서도 알 수 있듯,
그 두 신앙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백성들은 왕실의 강압적 우상 숭배 정책에 눌린 나머지, 조상 대대로 이어져 왔던 전통적인 여호와 신앙을 고수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하여 그것을 내팽개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그들은 하나님과 바알을 겸하여 섬기는 미지근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노를 격발(激發)시켰던 셈입니다(마 6:24; 계 3:16).
*마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계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한편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진리와 비진리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자들을 향해 과감한 신앙적 결단을 촉구하고 계시니 우리는 스스로의 미적지근한 태도를 중용(中庸)이라는 말로 미화시켜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참된 중용의 도(道)란 애매한 중간치기 내지는 비굴한 기회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고 더 경건한 제 3의 길을 따름인 것입니다.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이 장면을 수 24:16 이하와 비교해 보면 아합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상태를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수24:16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즉 여호수아 당시 '하나님과 다른 신 중 과연 누구를 섬길 것인지 결정하라'는 요구에 그 시대의 백성들은 즉각 '다른 신을 섬기다니 말이되는가, 여호와가 우리의 하나님이시다'고 응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아합 시대의 백성들은 묵묵부답 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직껏 하나님과 바알을 겸하여 섬기려는 어정쩡한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마 6:24).
*마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항상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 3:15)가 아닌가?
3) 엘리야가 백성에게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호로 남았으니 바알의 선지자는 450명이라고 말합니다(22절).
“[22]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나만 홀로 남았으나. - 나만 홀로 남았으나! 이 말은 당시 여호와의 선지자가 정말 단 한 명만이 남았음을 말하고자 함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다만 지금 여호와 선지자로서 활동하는 자는 엘리야 자신 홀로이며,
이제 그 홀홀단신으로 다수의 바알 선지자와 맞서게 되었다는 극적인 대조에 강조점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해하여야만 앞서 오바댜가 숨긴 100명의 선지자(4절)가 그 동안 죽임을 당하고 말았으리라는 불필요한 추측(Thenius)을 삼갈 수 있게 됩니다.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 오십 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인'과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탓입니다.
즉 19절에는 이교(異敎) 선지자들의 총수가 850인으로 언급되어 있는데 본절에는 오직 450인만 언급되어 있는 탓에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25절과 40절에서도 오직 '바알의 선지자'만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관한 주석가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이는 다음과 같이 이해, 정리될 수 있습니다.
(1) 아세라 선지자 400명은 갈멜 산의 대결에 참예하지 않았습니다(25절). 따라서 그들은 학살을 당하지 않았습니다(40절).
(2)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알의 선지자와 아세라의 선지자가 엄밀히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즉 그들은 모두 '바알의 선지자'로 통칭(通稱)될 수 있습니다.
(3) 그렇다면 아합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세벧이 일부(아세라의 제사장? )를 보내지 않은 탓에 갈멜 산 대결에는 450인의 바알 선지자만이 참석하였을 것입니다.
4) 엘리야는 여호와와 바알 중 어느 신이 참 신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희생번제 방법을 제시합니다(23절)
“[23] 그런즉 송아지 둘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그들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며 나도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고”
이는 백성들과 바알 선지자들 모두에게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왜냐하면 희생 번제는 이스라엘과 이방 지역을 막론하고 고대 팔레스틴에
있어서 예배의 기본적인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Lange).
각(脚)을 떠서. - 이에 해당하는 동사 '나타흐'는 '잘라서 조각 조각으로
나누다'(cut in pieces)는 뜻입니다.
이는 곧 희생(犧牲) 제사에 쓰일 제물을 취급하는 방식을 말합니다(출 29:17; 레 1:6, 12; 삿 20:6).
5)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라(24절)
“[24]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
이름을 부르라. –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단순한 개인의 호칭이 아니라 그 인격의 본질과 특성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즉 이름과 존재는 불가 분리한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창 25:19-26).
그러므로 상대방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곧 그 존재의 응답을 기대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때 그 이름의 존재가 실존(實存)한다면 필연코 응답이 있을 것입니다.
본절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알이 허구 존재가 아니라면, 그 이름을 부르는 요청에 응답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밝히리라는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불로 응답(應答)하는 신. - 비단 이스라엘 뿐 아니라 고대 근동 세계의 희생 제의는 제물을 불로 사르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즉 신이 불태워진 제물을 흠향할 때
비로소 인간의 성의가 가납(嘉納)된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는 곧 신이 있어서 차려진 제물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불로 응답하리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믿음입니다.
그런데 바알은 자연력을 지배하는 신이자 태양과 불의 신이었습니다.
레 26:1-13 강해. '가나안 땅의신들' 참조.
그러므로 불로 응답하는 일은, 바알이 참신이라면, 그의 전문 분야와도 같습니다. 그런데도 바알은 끝내 침묵하고 말았으니(25-29절),
그 허구성이 여실히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한편 이처럼 그 신의 가장 핵심 요소를 공략하여 허구성을 드러내는 방식은, 일찍이 모세가 10가지 재앙으로써 애굽의 거짓 신들을 무색하게 한 것과 비견됩니다(출 7:4-12:34).
3. 바알 선지자들의 기도와 무응답(25~29절)
1)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먼저 신의 이름을 부르게 합니다(25절)
“[25]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붙이지 말라”
먼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합니다.
그러나 불은 붙이지 말라합니다.
본절은 결과적으로 엘리야의 승리(30-40절)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요소들을 담고 있습니다.
즉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에게 우선권을 부여해 줌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 말미암는 확고한 자신감을 드러내어 보였습니다.
다시 말해 우선권을 잡은 바알 선지자들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큰 굴욕을 안겨주었던 반면(26-29절) 엘리야의 승리를 더욱 값지고 위대한 것으로 부각시켜주는 역할을 하여 준 셈입니다.
2)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도 응답이 없습니다(26절)
“[26]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아침부터 낮까지. – 여기서 '아침'(보케르)은 '이른 아침', 즉 동이 트고 난 직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바알 선지자들이 이렇게 일찍부터 회합을 갖은 이유는 무더운 팔레스틴의 기후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 총론, '성경의무대 팔레스틴' 참조.
다음으로 '낮'(초하르)은 다음 절에서 '오정'으로 번역된 바로 그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바알 선지자들은 이미 5-6시간 정도를 바알의 이름을 부르며 뛰논 셈입니다.
응답하소서. - 이에 해당하는 '아나'는 본래 '보다', '향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자신들을 외면치 말고 사랑과 관심을 갖고서 '쳐다 봐 달라'는 간절한 염원(念願)의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뛰놀더라. - 이에 해당하는 원어 '파사흐'는 본래 '절뚝거리다'는 뜻으로
이미 21절에 나온 단어입니다. 21절 주석 참조.
그런데 여기서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다음과 같이 의견이 나뉘어 있습니다.
(1) 당시 바알 선지자들이 추었던 광란(狂亂)의 춤(28절)을 비꼬아 표현한 것입니다.
(2) 당시 바알 선지자들이 추었던 춤의 형태가 실제로 절뚝거리는 동작
으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Davis).
이상의 두 견해 중 어느 쪽을 취하여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계속적으로 바알 선지자들을 조롱한 것으로 보아(27절) 첫 번째 견해가 보다 타당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한편 이스라엘 역사상 춤은 자주 예배 의식의 일부로 포함되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넜을 때나 여호와의 절기에 실로의 처녀들이 포도밭에서 춤춘 것, 법궤 앞에서 춤을 춘 다윗 등 많은 예를 찾아 볼 수있습니다(출 15:20; 삿 21:16-24; 삼상 18:6; 삼하 6:14).
그러나 이러한 춤도 참된 찬양의 대상자에 대한 진솔한 경외의 표현이 아니라면 본절에서 보듯 이는 한갓 광란의 몸짓에 불과하고 마는 법입니다.
출15:20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3)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합니다(27절)
“[27]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그는 신인즉. – 이처럼 '바알은 신이니까'로 서두를 연 본절은 그러나 신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바알 선지자들이 아침부터 오정에 이르기까지 간절히 바알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자 엘리야는 바알 우상의 허구성을 유한한 인간에 빗대어 조롱조로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묵상하고 있는지.
바알 선지자들이 그토록 발버둥치고 있는 마당에(26, 28절) 바알은 멀찌감치 물러 앉아 묵상에 잠겨 있다고만 한다면 그것처럼 어리석고 우스꽝스런 장면은 없을 것입니다.
(2) 잠간 나갔는지.
'나가다'에 해당하는 '수그'는 '옮기다', '이동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본절은 '잠깐 자리를 옮겼는지'의 뜻입니다.
그런데 이는 '좀 쉬려고 물러갔는지' 정도의 뉘앙스를 지닌 말이라 합니다. 하지만 신이 쉬어야 한다는 것은 우스운 말입니다.
실상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피곤치 않으시며 곤비치 않으시지 않는가(사 40:28)!
*사40: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3) 길을 행하는지.
여기서 '길'(데레크)은 '여행'(대개 수일이 걸리는)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신이 여행을 떠나서 자신의 경배자들의 청원을 듣지 못한다는 것은 곧 그 유한성(有限性)을 시사해 줍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분이십니다(시 139:7-12)
(4)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무더위로 인해 한낮에 낮잠을 자는 습관이 있습니다.
엘리야의 조롱은 바로 그러한 습관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십니다(시121:3, 4).
4) 그들은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합니다(28절)
“[28]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그 규례를 따라...상하게 하더라 - (신 14:1; 렘 16:6; 41:5; 47:5).
그런데 본절에서 처럼 피가 흐르기까지 자해하는 습속은 피가 신비한 효능으로 신을 감동시킨다는 이교적 관념 때문입니다(Plutarch).
즉 당시 이교도들은 자해와 고행이 신에 이르는 길을 여는 일종의 공로로 간주하였던 것입니다.
한편 본절은 바알 선지자들의 한낮, 팔레스틴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의 광란을 묘사함으로써 마지막 안간힘을 써서 바알에게 호소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자해 행위는 물론이거니와 지나친 금욕주의적 태도 또한 자의적(恣意的) 숭배의 소산으로 간주하여 참된 경건에는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하는 것이라하였습니다(골 2:20-23).
5) 정오가 지났고 저녁 소제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니 아무 소리가 없었습니다(29절).
“[29] 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났고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
저녁 소제(素祭) 드릴 때까지. - 요세푸스의 기록(Josephus, Antiq., XIV, 65))에 따르면 이스라엘 인들이 저녁 소제를 드리던 시간은 오늘날의 오후3시쯤(유대력의 9시)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이때 신약 당시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시간과도 일치합니다(행 3:1).
한편 '소제'(민하)란 매일 아침 저녁으로 드리는, 비교적 간단한 제사입니다.
이 제사에는 희생 제물이 아닌, 떡과 과자가 바쳐졌습니다(출 29:28-41; 민 28:3-8).
이 소제의 의미는 백성들이 자신의 일상적이고 전체적인 삶을 하나님께 위탁한다는 뜻입니다. 레 2:1-3 강해, '소제에 대하여' 참조.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 - 이 부분에는 '전혀 없다'는 뜻인'아인'이 세 번이나 거듭됩니다.
이 단어는 26절에도 두 번이나 나오는데 전체적으로 점층법적 강조의 효과를 줍니다.
*문제의 원인이 ‘나’에게 있는데도, ‘너’에게서 찾으려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인간의 신념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분명히 다릅니다.
하나님이 내 전부가 되지 않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 신입니다.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아합은 엘리야를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비난하며 국가 재난의 주범으로 몰아갑니다(16~18절).
하지만 엘리야는 나라를 도탄에 빠뜨린 장본인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숭배한 아합과 그의 가문이라고 지적합니다.
엘리야의 가뭄 예언(17:1)이 바알을 노엽게 하여 이런 재앙이 왔으니, 그를 죽임으로써 바알의 짅노를 풀려는 아합의 노력(10절)이 가련합니다.
문제의 원인은 ‘나’에게 있는데도, ‘너’에게서 찾으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2)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의 대결을 제안합니다(19,20절).
‘누가 참 신인지,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인지 밝히겠다는 것입니다.
제안을 받아들인 왕은 갈멜산이 바알 숭배의 성지였기에 승리를 확신하고 바알 종교의 위상을 높일 기회로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만한 신념입니다.
인간의 신념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분명히 다릅니다.
3) 엘리야는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백성에게 믿음의 결단을 촉구합니다(21~24절).
하지만 백성은 묵묵부답입니다.
그런데 제단에 불을 내리는 신이 참신임을 인정하자는 엘리야의 제안에는 ‘옳다’고 동의 합니다.
‘누가 참 신인지’지켜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언제든 도움이 안 되면 버릴 수 있는 우상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나에게 잘해 줘야 하나님 대접하겠다는 불경한 생각이 내게도 없는지 돌아봅시다.
하나님이 내 전부가 되지 않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4) 바알 선지자들이 하루 종일 그 이름을 부르며 부르짖어도, 응답 없는 제단 주위에서 춤추며 심지어 지해하면서까지 애원하는데도 바알은 응답하지 않습니다(25~29절).
광란의 의식 속에 차가운 침묵만 흐를 뿐입니다.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허상에 불과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대결할 수 있는 신이 아닙니다.
돈이 위세를 떨치는 시대에, 신앙을 위협하는 교묘한 세속주의와 혼합주의의 우상을 경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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