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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욥기36장1~16절
제목 : 하나님이 그대를 환난에서 이끌어내사
욥은 많이 지쳐있습니다. 마음도, 몸도, 피곤함에 지쳐있습니다.
엘리후는 4번째 자기가 다시 말하도록 용납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욥에게 고난의 신앙적 의미와 목적에 대해 교훈합니다.
엘리후의 말은 한마디로 고난이 하나님의 훈련 도구인데,
욥이 하나님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이 교육을 위하여 제공한 고난에 반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 고난의 전문가(1~4절)
고난에 관해서는 그 누구도 전문가일 수 없습니다.
엘리후는 자신이 하나님에 관하여, 그리고 고난에 관한 최고의 전문가인 양 말합니다.
1) 엘리후의 네 번째 연설입니다(1절)
“[1] 엘리후가 말을 이어 이르되”
엘리후의 네 번째 연설인 본장에서 그는 두 가지 중심 사상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는 33장에서 언급한 내용과 유사한 것으로,
고난이 닥치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충돌되는 모순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백성의 교만을 꺾기 위한 '정화의 수단'이라는 주장입니다(1-25절).
이 고난관은 33장 보다 이곳에서 '더욱 강하고 분명히'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설명입니다(26절-37:24).
자연의 이치를 천박한 소견으로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기에,
그 누구도 하나님을 정죄하거나 그 의(義)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입니다.
또한 이 부분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등장을 유도하고 있으며,
폭풍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38:1)을 미리 은연중 묘사함으로써,
자신의 마지막 연설과 하나님의 판결을 연결 짓고 있습니다.
2)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아직도 할 말이 있다(2절)
“[2] 나를 잠깐 용납하라 내가 그대에게 보이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아직도 할 말이 있음이라”
하나님을 위하여(레엘로아흐) - '하나님을 위해 나서겠다'고 하는 대신
'아직도 내(안에) 말이 남아 있다'로 옮겼지만 굳이 이렇게 소극적인 번역을 따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엘리후는 자신의 마지막 연설을 시작하면서 '이제 내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그의 명예를 위해 말하겠다'고 당당히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나를 지으신 이에게 의를 돌려보내리라(3절)
“[3] 내가 먼 데서 지식을 얻고 나를 지으신 이에게 의를 돌려보내리라”
“먼 데서”를 직역하면 '여기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부터'입니다.
이를 단순히 '역사와 자연의 넓은 영역 중에서'라는 뜻으로 보기도 하지만,
엘리후 자신의 연설이 '하나님이 계신 하늘로부터' 오는 것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시 138:6;139:2;렘 23:23). 즉 계시적 가르침을 말합니다.
*시138:6 “여호와께서는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굽어살피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심이니이다”
*시139: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렘23:2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이로써 엘리후는 자신의 말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으며 교훈이 될 만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온전한 지식을 가진 이가 그대와 함께 있느니라(4절)
“[4] 진실로 내 말은 거짓이 아니라 온전한 지식을 가진 이가 그대와 함께 있느니라”
지식을 가진 이가 - 바로 엘리후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한편 '지식'이 복수형으로 사용된 것은 '충만한 지식'(full knowledge)을 뜻하며(Hartley), 사리를 분별하는 데 조금의 부족함도 없는 지고한 지식, 지혜를 의미합니다.
엘리후는 자신의 지식이 거짓이 아니며,
건전하고 온전하다고 말하며 자신의 지식을 뽐냅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고난당하면 그 모든 지식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막상 고난에 처하면 욥처럼 질문하고 항의하게 마련입니다.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섣불리 가르치려 하지 말고,
그들 곁에 있어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줍시다.
2. 고난의 교육 효과(5~10절)
“[5] 하나님은 능하시나 아무도 멸시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사[6] 악인을 살려두지 아니하시며 고난 받는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며[7] 그의 눈을 의인에게서 떼지 아니하시고 그를 왕들과 함께 왕좌에 앉히사 영원토록 존귀하게 하시며[8] 혹시 그들이 족쇄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혔으면[9] 그들의 소행과 악행과 자신들의 교만한 행위를 알게 하시고[10]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나니”
1) 하나님은 능하시나 아무도 멸시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합니다(5절)
“[5] 하나님은 능하시나 아무도 멸시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사”.
델리취(Delitzsch)는 의역하여 '그분은 당신의 창조하신 가장 보잘것없는 것에게라도 결코 불의하게 취급하지 아니하신다'고 이해합니다.
결국 여기서 엘리후는, 하나님이 자신을 멸시하고 불공평하게 대우하신다고 불평했던(16:9;30:21) 욥의 태도를 넌지시 질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방법을 말하십니다(6~7절)
(1) 악인을 살려두지 아니하시며 고난 받는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며(6절)
엘리후는 욥의 불평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엘리후는 욥이 21:7;24:22에서 했던 주장과는 정반대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21:7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
*24:22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능력으로 강포한 자들을 끌어내시나니
일어나는 자는 있어도 살아남을 확신은 없으리라”
이는 욥의 불평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말입니다.
(2) 그의 눈을 의인에게서 떼지 아니하시고 그를 왕들과 함께 왕좌에 앉히사 영원토록 존귀하게 하시며(7절).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의인들을 외면하시지 않고,
그들을 축복하시며 지키신다고 엘리후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엘리후는 의인도 고난을 닥칠 수 있다고 합니다(8절)
“[8] 혹시 그들이 족쇄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혔으면”
족쇄는 주로 포로나 죄인들을 속박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며(사 45:14),
본문에서 문자 그대로 이해해도 무방하겠으나 다음 구절의 '환난의 줄'과 유사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환난의 줄 - 의인의 인생에 닥친 고난과 역경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상반절의 '족쇄'와 함께 이 '줄'은 의인의 삶을 제한하고 어거(馭車)하는 시험을 가리킵니다.
또한 이것들은 그들이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임을 보여줍니다.
즉, 엘리후는 세 친구들의 주장과는 달리 의인들에게도 고난이 닥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섭리(의도)를 9,10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4) 엘리후는 의인이 고난을 받는 것은 회개를 통한 연단과 성숙을 위한 것임을 거듭 밝힙니다(9,10절)
“[9] 그들의 소행과 악행과 자신들의 교만한 행위를 알게 하시고[10]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나니”
비록 의인이라 할지라도 부지중에 죄를 지을 수 있으며,
또한 교만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의인에게 닥친 고난은 단순한 징계의 차원이 아니라,
회개를 통한 연단과 성숙을 위한 것임을 거듭 밝히는 구절입니다.
이러한 엘리후의 사상은 '고난은 죄의 결과'라고 일방적으로 단정하였던,
세 친구들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의인들의 잘못된 죄악들을 밝혀 보인다는 뜻이지만,
그 진정한 의미는 보다 '위엄있고 강한 선고'의 뜻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RSV, declares).
돌이키게- '돌아오다'란 뜻이며, 본절에서는 죄악의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는'(NIV, repent;Hartley) 의미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이 회개는 생명과 죽음을 결정하는 중대한 결단이 됩니다(Habel).
3. 고난은 훈련 도구(11~16절)
“[11] 만일 그들이 순종하여 섬기면 형통한 날을 보내며 즐거운 해를 지낼 것이요[12] 만일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이니라[13] 마음이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하나님이 속박할지라도 도움을 구하지 아니하나니[14] 그들의 몸은 젊어서 죽으며 그들의 생명은 남창과 함께 있도다[15]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에서 구원하시며 학대 당할 즈음에 그의 귀를 여시나니[16]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대를 환난에서 이끌어 내사 좁지 않고 넉넉한 곳으로 옮기려 하셨은즉 무릇 그대의 상에는 기름진 것이 놓이리라”
1) 만일 그들이 순종하여 섬기면 형통한 날을 보게 될것입니다(11절)
“[11] 만일 그들이 순종하여 섬기면 형통한 날을 보내며 즐거운 해를 지낼 것이요”
만일 그들이 순종하여 섬기면 - '임'(if)으로 시작되는 조건문입니다.
이런 구성은 12절에서도 반복되고 있는데,
그 내용들은 모두 앞의 8-10절에서 언급한 주제들과 관련됩니다.
본절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의 축복에 관한 언급입니다.
날을 보내며 - 직역하면 '자신들의 날을 끝내다(마치다)'이다.
즉, 하나님의 경고를 청종하여 자신들의 행위를 고치면
남은 생애를 형통하게 지내고 마치게 되는 복을 누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그 생애는 매우 즐겁고 기쁨이 넘치는 삶이 될 것입니다.
2) 만일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칼에 망하여 죽을 것이다(12절)
“[12] 만일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이니라”
칼에 망하며 - 순종하지 않았을 경우의 불행한 결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3) 마음이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하나님이 속박할 지라도 도움을 구하지 아니합니다(13절)
“[13] 마음이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하나님이 속박할지라도 도움을 구하지 아니하나니”
본절에서부터 15절까지는 11,12절에서 언급한 사상을 다른 표현으로 계속 언급한 것이나 그 순서는 뒤바뀌어 있습니다.
즉 본절과 14절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악인들의 저주에 관한 언급(12절의 내용)이고,
15절은 11절과 유사한 것으로 순종한 자의 축복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분노를 쌓으며 - 본문을 '분노를 품는다'로 옮겨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Lange).
그러나 그보다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무난하겠습니다.
즉 불경건한 자들은 목전의 현실에서 징벌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여 계속 불의를 행하게 되지만, 이는 진노의 날에 필경 임하게 될 진노를 자기 머리에 쌓는 꼴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Hartley, Rswlinson, 롬 2:5).
*롬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4) 그들의 몸은 젊어서 죽습니다(14절)
“[14] 그들의 몸은 젊어서 죽으며 그들의 생명은 남창과 함께 있도다”
남창(男娼)과 함께(바케데쉼) - 개역 성경은 신 23:17;왕하 23:7에서 이를 '미동'(美童)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룩한 자'를 뜻하는 '코데쉬'가 남창을 가리키게 된 것은 이교 사원의 종교적 풍습에서 기인했습니다.
저들의 제사 의식 가운데는 성적인 행위가 포함되어 있어서 사제들이 신전에서 사람들과 음행을 하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특히 수리아인과 가나안인의 신전에서 흔히 행해졌는데, 여기서 그 수종을 드는 남녀 사제들은 창기로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이런 남창들과 함께 거하게 되면 저희의 기력이 쇠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하틀리(Hartley)는 이 부분을 '남창'으로 해석하지 않고, 그 의미를 좇아 '젊은 시절의 부끄러움 속에'라고 번역하여, 젊어서 죽게 되는 수치를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 자신이 난외주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이 구절을 '남창'으로 번역해도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동일합니다.
5)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에서 구원하십니다(15절)
“[15]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에서 구원하시며 학대 당할 즈음에 그의 귀를 여시나니”
곤고한 자를 그 곤고에서 구원하시며 - 오히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고통을 하나의 구원의 방편으로 사용하심을 뜻하는 표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고난 받는 자의 구원 여부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6) 하나님은 귀를 기울이는 자를 사망의 자리에서 거져내실 것입니다(16절)
“[16]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대를 환난에서 이끌어 내사 좁지 않고 넉넉한 곳으로 옮기려 하셨은즉 무릇 그대의 상에는 기름진 것이 놓이리라”
하나님은 귀를 기울이는 자를 사망의 자리에서 건져내실 것이며,
이 계획은 바로 욥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그대의 상에는 기름진 것이 놓이리라 - 기름진 음식으로 잘 차려진 상은 인생의 가치와 승리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의미합니다(시 23:5).
풍족한 식탁은 상반절의 '넓은 공간'과 병행구를 이룹니다.
한편 텔리취(Delitzsch)는 이를 '재산이 풍성해지는 상태'로 이해합니다(시 22:26;107:9;잠 9:2).
고난은 연단이며 훈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여서는 안됩니다.
훈련이며 연단인 고난은 곧 끝나게 될 것입니다.
고난 받는 사람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기다리며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고 인내하면
그 끝 뒤에는 기쁨과 감격과 영광이 될 것입니다.
고난 앞에 순종과 감사로 나 갈 수 있도록 서로 기도 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에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고난에 관해서는 그 누구도 전문가일 수 없습니다(1~4절).
엘리후는 자신이 하나님에 관하여, 그리고 고난에 관한 최고의 전문가인 양 말합니다.
자신의 지식이 거짓이 아니며 건전하고 온전하다고 말하며 자신의 지식을 뽐냅니다.
고난받는 욥은 하나님을 찾지만, 멀찌감치 서 있는 엘리후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늘어놓습니다.
고난당하면 그 모든 지식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막상 고난에 처하면 욥처럼 질문하고 항의하게 마련입니다.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섣불리 가르치려 하지 말고,
그들 곁에 있어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줍시다.
2)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교육하십니다(5~10절).
엘리후는 하나님이 전능하고 의롭기에 악인과 의인에게 모두 공평하게 공의를 행하신다고 말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의인이라고 해도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공의로운 삶을 살지 않으면 족쇄로 묶어버리십니다.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알도록 고난을 허용하십니다.
악행에서 돌이켜 선행을 하도록 확성기로 말씀하십니다.
고난이 아니었다면,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막고 자기 삶에 열중했을 텐데, 고난을 당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비록 지금의 욥에게 꼭 맞는 말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훈련하시고 유익하게 하신다는 것은 진실입니다(시편 119편 71절).
*시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3) 고난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11~16).
욥은 고난이 인간을 노예처럼 만든다고 불평했지만(7장 1~2절),
엘리후는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 의인의 길에 서게 된다고 말합니다.
고난 속에서 어떤 사람은 더 악해지고, 더 망가집니다.
반대로 교만한 자신을 성찰하고, 순종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성숙의 기회가 됩니다.
내게 고난은 끝없는 불평의 시간입니까, 끝내 순종하는 계기입니까?
기도 공동체-고난을 통해 우뚝 서고, 오히려 다른 이를 세워주는 자가 되게 하소서.
열방-일본은 파트타임 근로자의 77%가 여성일 정도로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처우와 지위가 열악하다. 일본 사회에 성차별이 개선되고 여성의 권리가 존중받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