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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용 위임목사 주일 오전예배 설교
2020.6.7. - 마태복음의 말씀(23) : 치유가 흘러가는 곳
마태복음 8장 1 - 13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대로 될찌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제가 예전에 아이들에게 읽어줬던 동화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더운 날 아버지와 아들이 나귀를 끌고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니 이렇게 날도 더운데 나귀를 타고 가면 되지 뭘 저렇게 가냐? 낭비하냐 라고 얘기 합니다. 그 얘기를 듣고 아버지가 아들을 나뉘 등에 올려 태웁니다. 이번에는 동네 어르신들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버지가 저렇게 힘들게 걸어가는데 아들이 떡 하니 마귀 등을 타고 올라가네. 야, 불효자식 이구나. 그 얘기를 들은 아들이 이번엔 아버지를 나귀에 타게 하고 본인은 걸어갑니다.
이번에는 동네 여자들이 그걸 보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야, 그 어린 자식이 불쌍하다. 야, 못 봐 주겠다. 나쁜 아버지구나. 또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나귀 등을 타고 올라갑니다. 그러자 이번엔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그걸 보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무리 덥고 힘들어도 그렇지, 어떻게 나귀 등에 두 사람이 올라타서 저렇게 가느냐. 나귀가 힘들겠다. 나쁜 사람들이네.
어떻게 했겠습니까? 이번엔 아버지와 아들이 마귀를 들쳐 매고 가고 있습니다. 강물을 만나서 그 강을 건너려고 나귀를 처매고 그 강물에 건너는데, 그만 나귀를 놓쳐서 나귀가 강물에 떠내려가 죽게 되었다 라는 동화입니다.
제가 예전에 아이들에게 읽어주었던 동화책이었는데,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아니 이 코로나-19 사태를 경험하면서 번뜩 이 동화가 떠올랐습니다. 동화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겪는 일들이 지금 저와 여러분이 또 우리 교회가 겪는 일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이쪽에서 이렇게 얘기하면 야, 그거 맞는 거 같다. 저쪽에서 또 이렇게 얘기하면 야, 그것도 맞는 거 같다. 한쪽에선 예배를 드려야 된다고 하고요, 한쪽에선 아직 예배를 드리지 말아야 된다고 하고. 한쪽에선 기도하는 모임, 찬양하는 모임은 안된다고 얘기하고, 한쪽에선 그래도 지금 우리 신앙을 지킬려면 기도하고 찬양해야 된다고 모임을 가지라고 하고요.
코로나 19 다 끝날 때까지는 교회는 잠잠히 있으라고 얘기하고, 한쪽에선 이러다 우리 신앙, 다 잃어버리겠다고 빨리 모여서 신앙 생활을 회복하자고 얘기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지, 참으로 어렵고 힘든 시기입니다.
누구 하나 책임지기 참 힘들고, 결정하기 또 앞서 나가기 힘든 시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정하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코로나 시기에 우리 연동교회가 두 가지 원칙을 정하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 교회가 최선을 다해 안전과 건강을 지키는 교회가 되자 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최선을 다해 안전과 건강을 지키되 모이기를 힘쓰며 함께 하는 신앙을 지켜내자 라는 것입니다. 두 개를 함께 하는 거 참으로 어렵지만, 교회니까,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니까, 우리는 그것을 해야 합니다.
우리 어르신들은 전쟁 속에서도 예배를 드렸는데 예배를 멈추면 안된다 라고 얘기하시지만, 전쟁의 상황과 지금은 조금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어찌 되었던 저희들의 교회가 안전과 건강을 지키고 더불어 우리의 신앙도 믿음도 지켜내야 합니다.
지금 가장 출석률이 좋은 세대가 누군지 아십니까? 청년부 입니다. 왜 그럴까, 제가 생각해봤더니 그 세대는 그 청년 세대들은 지금 우리가 코로나를 경험하면서 교회가 온라인 교회로 또 디지털 시대에 맞는 교회로 바꿔야된다 라고 얘기 하지만, 이미 우리 청년 세대는 디지털을 이미 경험하고 누리고 살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제서야 뒤에서 그것을 쫒아가겠다고 하니 이 청년들 세대 입장에서는 뭐하는 거야? 이미 우리는 그걸 누리고 있는데, 그런데 지금 이 시기에 그 청년들이 오히려 더 교회 많이 출석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미 그들은 온라인과 디지털을 경험했습니다. 교회에 온라인 교회 디지털 시대에 맞는 교회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그 이상의 것을 교회에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히려 더 출석률이 좋습니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포스트 코로나 시대 더욱 교회를 중심으로 우리 신앙을 단단히 세워가는 저와 여러분 우리 연동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옆에 있는 분들과 멀리 계시지만 이렇게 인사나누기 원합니다. 건강하십시오. 축복합니다. 건강하십시오. 축복합니다.
우리 마태복음의 말씀 23번째 '치유가 흘러가는 곳' 이라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아주 간단한 영상 하나 보시겠습니다.
물은 아래로 흐른다 마지막에 주라고 필명을 썼는데, 그게 바로 접니다. 제가 그린 겁니다. (좌중 웃음)
제가 목판화를 좀 배우고 싶어서 이 목판화는 많은 그림이 필요 없습니다. 메세지가 될 간단한 스케치나 그림이 필요한데 그걸 배우고 싶어서 여러가지 제가 스케치 해 놓은 것 중에 하나가 이겁니다. 물은 아래로 흐른다.
여러분 물은 절대로 위로 올라가지 않습니다. 항상 아래로 흘러가는 것이 물이죠. 아래로 흐른다 라는 의미는 겸손을 상징합니다. 물 같은 사람이 되라 라는 어르신들의 충고는 무엇입니까? 겸손한 사람이 되라. 항상 낮은 곳에 가라. 항상 아래로 흘러가는 자가 되라.
물이 그렇지요. 그래서 물은 제아무리 백두산 천지에 물이 엄청 많은데, 절대로 그 천지에 있는 물이 산 꼭대기로 올라가지 않습니다. 산 밑으로 내려오지요. 산 계곡을 지나서 작은 마을 시골 마을에 냇가로 물은 흘러갑니다. 작은 냇가의 물은 또다시 큰 마을의 강물로 흘러가고, 그 강물은 바다로 흘러가는데, 바다는 항상 땅 아래 있습니다.
물은 이렇게 항상 밑으로 아래로 내려 갑니다. 그게 바로 물이지요.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에서 신약의 십계명이라고 하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위해서 우리에게 팔복을 전해주셨지요.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 그리고 구제하고 기도하는 새로운 방법, 걱정하고 염려하지 마라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가는 주님의 길 또한 어떻게 가는 것인지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통해 그 긴 설교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꿈꾸게 하시고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여러분에게 어떻게 그 하나님 나라를 세워갈지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근데 그런 천국에 대한 말씀을 전해 주시고 바로 그 다음에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셨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냥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마치고 마을 오셨더니 많은 사람들이 따르게 되었다 라고 기록해도 되는데, 성경은 산상수훈 후에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어떤 메세지를 우리에게 주고자 합니다.
그냥 예수님이 마을로 가셨다. 산상수훈이 끝나고 마을로 가셨다 라고 기록해도 되는데, 성경이 1절에서 무엇인가 계속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주고 계시지요. 뭐라고 하십니까?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셨다. 물처럼 흘러 내려가셨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장소를 이동하시고 새로운 공간으로 가셨다 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산에서 내려오셨다 라는 구체적인 표현은 제가 앞에서 말씀드렸던 물에 대한 그림처럼 겸손하신 예수님께서 내려오셨다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더 큰 영광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5장에서 7장까지 산상수훈 말씀 후에 7장 마지막 부분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습니까? 28절 29절 말씀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침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이라.
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침에 놀랐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곳곳에 소문이 퍼졌습니다. 이제 곧 예수의 바람이 일어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좀 더 강력한 메시지와 가르침을 주고 놀랄만한 그런 말씀을 선포하시면 예수님은 완전히 스타가 되실겁니다.
왕보다 더 인기 많은 스승이요 지도자가 될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1절에서 산에서 내려오셨다 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산이란 높은 자리를 의미합니다. 영광의 자리, 인기와 인정받는 자리를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예수가 그 산에서 내려왔다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왔다 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 영광을 포기하셨다는 것입니다.
인정받는 것을 포기하시고, 인기를 포기하시고, 자신이 가진 권한과 권력을 포기하셨던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산상수훈에서 형이상학적이고 이론적이고 신학적이고 학문으로서의 신앙과 믿음의 삶을 포기했다 라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말씀대로 살아가면 율법학자 바리새인보다 더 훌륭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사는 것을 포기하셨다 라는 겁니다. 그대로 산상에 머물고 그곳에서 전해주셨던 수훈과 강론과 설교를 계속했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그 산상수훈을 전했던 그 산에 찾아와서 선생님, 랍비여 우리에게 그 설법, 당신의 설교, 당신의 수훈을 다시 전해주십시오.
아마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큰 기도원이 그 산 속에 세워졌을 것입니다. 인기많은 종교지도자, 모두가 존경하는 성인 군자, 잘 나가는 영적 멘토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가능성을 모두 포기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하게 볼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고 가장 먼저 무엇을 하셨는가? 계속해서 산상수훈에서 가르쳤던 그 하늘나라에 가르침, 영적인 그리고 형이상학적이고 이론적인 그 천상의 완벽한 신학과 율법을 산 밑에서도 가르치셨느냐?
성경은 그렇지 않다 라고 얘기합니다. 그걸 가르쳤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반했을텐데.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증거합니까? 병을 고치셨다. 치유 사역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아주 훌륭한 왕, 양반, 잘 나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문둥병자 나병환자를 고치셨다 라고 증거합니다. 그것은 어떤 영적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까?
그러나 드라마틱한 얘기가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 산에서 하나님 나라를 설교하시고 산 밑에 내려 오셨는데, 처음 만나 처음 병을 고치는 사람이라면 좀 감동적인 이야기 스토리가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아니 그 병 고치는 삶을 통해 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의미가 있는 메세지를 주면 참 좋을 텐데, 성경은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이렇게 기록합니다.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특별한 게 없습니다. 드라마틱 하지 않습니다. 그냥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을 했다 라고 기록합니다. 나병환자가 예수께 나와 절을 합니다 아무런 감동적인 상황, 드라마틱 하지도 않았습니다. 특별히 예수 앞에 나왔다 라고 하는 표현에 프로세루코마이 라고 하는 헬라어가 쓰입니다.
성경 주석을 보니까 그 의미에서 신 앞에 나오는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뭐 이런 걸로 조금 뭐랄까 신학적인 의미, 메시지를 주려고 하는 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구체적인 의미는 중간에 제사장이나 무당 같은 그런 존재 없이, 신 앞에 직접 나아가는 존재.
그래서 주석을 보니까 이렇게 표현합니다. 좀 더 종교적인 해석이 필요한, 단순히 저 고쳐주세요 라고 나간 것이 아니라, 뭔가 예배자의 입장에서 예수 앞에 나가 나병환자를 표현하는 것이 프로세로코마이 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저는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제사장이나 중간에 기도해주는 부담과 같은 매개체 없이 직접적으로 예수님께 나갔다는 프로세우코마이의 뜻을 종교적으로 해석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나병환자가 누구입니까? 가장 추하고 더러운 병자. 제가 봤던 주석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장 전염성 높은 위험한 환자. 종교적 사회적으로 부정한 죄인의 취급을 받았던 자입니다. 육체적 사회적으로는 격리와 추방 당했던 자입니다.
거룩한 성문 안에 절대로 들어올 수 없는 존재. 숨쉬고 살아는 있으나 세상적으로는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의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프로세우코마이를 예수 앞에 나온 것을 종교적 제의적으로 해석한다? 저는 넌센스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프로세우코마이는 곧 예수께 나와 간다는 것은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간 것은, 그냥 뛰어든 것입니다. 무슨 제의적 종교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저 예수님 만나고 싶습니다. 나병 환자가 여러분께 부탁했습니다. 그러면 그래 내가 예수님께 다리를 놔 줄게. 너의 상황을 보니 참으로 힘들어 보이는구나. 그렇게 해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나병환자는 이미 자신의 상황, 세상이 자신을 바라보는 상황을 다 파악하고 프로세루코마이 예수께 그냥 무작정 뛰어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 저를 고쳐주십시오.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해 주십시오 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이 나병환자의 외침을 매우 저급한 종교적 행위, 요청, 기도, 기복적이고 일차원적인 간구라고 평가절하 합니다. 저는 여기서 나병 환자의 대한 어떤 평가와 해석에 대해서는 별 관심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저급하고 또 일차원적인 기복적인 그 기도와 간구 요청에 우리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아무리 목사라도 아무리 장로라도 신앙 연수가 깊고 아무리 신학 공부 많이 하더라도, 우리는 다 1차원적인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아프면 무슨 기도합니까? 아프면 의미를 깨닫게 해주시고 신학적인 방법을 찾게 해주십시오. 그런 기도하십니까?
저 낫게 해주세요! 저 아픕니다! 저 암 걸렸습니다! 암 사라지게 해주세요! 일차원적인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기도하는 것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고쳐주시느냐, 아니냐? 저는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놈아 내가 지금 산에서 무슨 설교를 하고 왔는지 아느냐? 이 거룩하고 위대한 하나님 나라의 설교를 하고 왔어. 내 아우라가 느껴지지 않니? 지금 너 같은 추하고 더러운 병자를 고칠 그럴 상황이 아니야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네가 원하는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 진지라'
할렐루야! 여러분 예수께서 그 위대하신 산상수훈의 말씀을 하시고 왜, 산에서 내려 오셨습니까? 위대하신 신학의 체계를 세우기 위해, 경전을 쓰기 위해서, 대단한 종교적 단체를 세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 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산에서 내려오신 우리 주님은 가장 먼저 우리를 치유하시고 구원하고 계십니다. 산에서 내려오신 이유는 저와 여러분을 치유하고 회복하며 구원하기 위해서 내려오신 것입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비우고 대신에 그 가운데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우리의 죄된 모습을 채우시고 그것을 해결하시기 위해서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나병환자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신다 라는 이 표현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계속 공간과 장소의 이동을 이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이 땅에 내려오시는 것은 자신을 비우고 하늘의 치유, 하늘의 구원을 이 땅에 흘려보내시기 위해서 산에서 내려오신 겁니다.
산에서 내려오신 그분의 겸손은 곧 우리에게 치유와 구원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의 치유는 흘러가는 것입니다. 높은 산에서 이 고통의 땅으로. 거룩한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가장 추하고 더럽다 취급 받았던 나병 환자에게로 치유는 흘러갑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상처받은 영혼 심령들에게로 흘러갑니다. 먼저는 지금 이 상황에서 저와 여러분에게는 주님의 치유와 회복이 상처받은 여러분에게로. 코로나 19로 우울하고 슬퍼하는 모든 심령에게로 그리고 병들어 좌절하고 절망하는 우리 환우들에게로 저는 주님의 치유가 흘러간다고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 나병환자의 무모하리 만큼의 간절한 기도가 때로는 우리 주님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움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주님의 치유의 물줄기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신학 공부 많이해서 박사가 되는 것, 여러분 직분이 높이 올라가는 것, 그걸로 절대로 하나님의 마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유일한 하나님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것은 기도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셨다 라는 것은 우리 기도에 자신의 마음을 비우시겠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신적인 결심을 바꾸겠다는 그 겸손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간구하십시오.
기도할 방법을 모르면 나병 환자처럼 소리라도 지르십시오. 하나님 저를 치유해 주십시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만들어 주십시오 라고 외칠 수있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아무것도 아닌 자의 기도에 우리 주님은 마음을 바꾸시고 새롭게 하시어 치유의 물결을 우리에게 흘려 보내시리라 저는 믿습니다.
이처럼 우리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신 이유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자신의 겸손하심으로 자신의 비움으로 수많은 영혼들과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두 번째 나오는 주님께서 백부장 하인을 고치시는 말씀에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겸손의 치유자이신 주님을 닮은 치유와 회복의 중보자를 세우기 위함이다 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그 다음으로는 백부장 하인을 고치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치유의 대상이 지금 예수님 눈 앞에 있지 않습니다. 저 멀리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서 그 치유를 받아야 할 사람이 눈 앞에 있던 저 멀리 있던 상관없지요. 주님의 능력을 어느 장소 어느 위치에 상관없이 치유의 능력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의 그의 하인을 위해 예수님께 치유를 부탁하는 내용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은 바로 백부장의 영적인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서 입니다.
문둥병자 치유 사건 이야기 다음에 백부장의 하인을 예수님께서 원격적으로 고치셨다 라고 한 줄만 나와도 되는데, 성경은 백부장이 직접 예수님을 찾아와서 그의 하인을 위해서 중보하고 그를 위해 기도를 부탁하고 치유를 부탁하는 이야기가 길게 나오지요.
왜 그렇게 했을까? 백부장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이 아니더라도 예수님이 뜻이 있으시고 계획이 있으시면 그 하인을 어떤 방법으로든 고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예수님은 치유와 회복을 위해 누군가를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서 백부장이 바로 누군가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 치유의 통로가 되었다 라는 것이죠.
여러분 치유는 흘러갑니다. 본문에 나병 환자에게 하나님의 치유는 직접으로 흘러갔습니다. 그러나 백부장 하인에게 하나님의 치유는 간접적으로 누구를 통해서 흘러갑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을가?
나병 환자처럼 직접 기도하고 직접 나서서 간구하며 직접 뛰어들어 절실한 마음으로 치유를 요청하는 이를 고쳐주는 방법 대신에, 왜 백부장의 하인은 백부장을 통해 치유와 회복의 그 모습을 드러나게 했을까?
그 이유는 하나님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치유와 회복을 위한 신적인 능력, 신적인 권한마저도 주님의 자녀들과 함께 나누어 우리와 협력하고 또한 우리와 공동의 치유자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주님이 직접 치료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치유받기 원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그 가족의 기도, 신앙 동료자들의 기도, 중보자의 기도를 우리 주님은 듣길 원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치유 역사를 함께 하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결코 예수님의 1인 연극이나 1인 모노드라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12명의 제자가 있었고요, 이름없는 수많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함께 3년의 공생애를 만들었습니다. 사람만이 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님 태어날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고 감사했습니까? 아니요. 성경을 보면 하늘의 달과 별, 마굿간에 있는 동물들이 오히려 예수의 탄생을 더 기뻐합니다.
예수님 돌아가실 땐 그래도 누구 하나 예수님 곁에서 그 죽음을 그래도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함께 하려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단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예수님께서 마지막 숨을 거둔 때 그의 등을 의지하게 했던 것은 나무십자가 였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살을 찌르고 아프게 했지만 마지막까지 예수님이 숨을 거둔 때까지 있었던 것은 가시 면류관이었습니다. 주님이 창조하신 자연물이 예수님의 마지막을 지켰습니다.
저와 여러분 같은 인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단독 주인공 1인 연극을 해서도 혼자 유명한 스타가 그렇게 될 수 있었습니다. 혼자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스타가 되고 하나님 나라를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길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혼자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아니하시고 손을 내밀어 동역자를 찾으셨습니다. 백부장 하인을 치료하기 위해 주님은 백부장의 중보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 승천 이후에 이 땅에 하나님 나라 사역을 위해서 우리 주님은 12사도를 세웠습니다. 수많은 초대교회를 세웠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해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연동교회를 사용하고 계신다 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동역하는 이들을 우리는 축복의 통로라고 이야기하지요. 하나님은 아프고 병든 이들을 치유하고 회복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런데 때로 고난 중에 있는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은 나의 가족 나의 친구 나의 신앙 동료 여러분이 전혀 알지도 못하지만 중보하고 중보해서 지구 반대편에 어느 누군가가 여러분의 고통과 아픔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 잊지마셔야 합니다.
병 고침을 위해서 의사를 만납니다. 약을 먹습니다. 지인을 만나기도 하고 뜻하지 않은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치료해 주시고 치유해주시고 때로는 구원의 역사를 경험케 해주신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직접 하실 수 있지요. 하지만 때로 하나님은 중보자와 사람을 이용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마치고 아래로 흐르는 겸손한 물처럼 산에서 내려오신 이유는 바로 수많은 영혼과 병자들을 치유하고 구원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구원과 치유와 축복을 저와 여러분 같은 중보자들과 함께 하기를 원해서 백부장을 통해 백부장 하인을 고치신 것입니다.
제 아들이 조립식으로 하는 로보트 상자를 두 개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게 조립하기가 되게 힘들어서 처음 첫 번째 상자는 제 아들과 함께 만들었습니다. 근데 아들에게 한 파트를 맡기고 제가 따로 하고 그래서 합쳐서 같이 딱 만들었는데, 이게 제 아들이 제대로 못하니까, 이게 작동이 제대로 안됩니다.
제대로 서지도 않고요. 그래서 두 번째 만들 때는 제 아들이 하는 걸 딱 선을 그었습니다. 넌 하지 마. 그랬더니 징징징 거리면서 나도 하고 싶은데 라고 짜증냅니다. 제가 딱 만드니깐 얼마나 잘 만들었겠습니까?
작동도 잘 하고 잘 되고 정말 좋은 로보트가 됐습니다. 제 아들한테 주니까, 아들이 좋아하는데 그 다음날부터 제가 그 로보트 두 개 중에 뭘 갖고 노나 봤더니, 제가 잘 만들어 준 그 로보트는 눈으로 보지도 않습니다.
본인이 만들었다가 고장나고 잘 서지도 않는 그 로보트만 가지고 놉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가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완벽하진 않지만 함께 아빠랑 만든 그 로보트가 자기에게는 진짜 로보트인 겁니다.
우리 주님이 그걸 원하십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완전하지 않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도 완전하지 않지만, 내가 너와 함께 누군가를 치유하기를 원한다. 너와 함께 이 교회를 세우기 원한다. 네가 부족하지만 너가 부족하지만 나는 너와 함께 이 신앙에 공동체를 더욱더 부흥하기를 원한다.
미국의 조지 플로이드가 안타까운 일로 죽었습니다. 블랙 라이브스 매터 (Black Lives Matter)라고 하는 구호가 곳곳에 퍼졌습니다. 여기서는 흑인들이 이제 내 중심이 되겠단 얘기가 아닙니다. 적어도 흑인인 우리의 생명도 조금이라도 소중하게 생각해 달라고 하는 얘기입니다.
그들의 생명을 조금이라도 인정하면 이 세상은 아름다워진다는 것이지요. 미국의 흑인 여성 운동가는 그곳에서는 이런 얘기를 주로 합니다. 마더스가든스 (Mother's Gardens) 엄마의 정원이라는 것이죠. 엄마의 정원이 무엇입니까?
아빠들이 정원 만들면 딱 여섯 개만 심어놓고, 또는 10개만 심어놓고, 거기서 열매만 자라는 것입니다. 그냥 뿌리뽑고 잡초 뽑고 거기서 열매만 딱 나오는 것이 중요하죠. 근데 엄마의 정원은 그렇지 않습니다.
애들이 먹다 많은 수박 씨도 심어놓고, 복숭아 씨도 심어놓고, 때로는 고양이가 오기도 하고, 나비가 오기도 하고, 잡초가 자라기도 하지만, 풍성하게 가드닝 (gardening) 을 하는거죠. 정원을 만듭니다. 하지만 그 정원이 진정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예배를 위해서 어떤 분은 기도를 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성경을 읽으시고, 또한 안내 위원으로 함께 하시고, 여러분 오늘 편하게 예배 드리지만 어제 방역하고 하나하나 의자를 닦고 청소하신 분이 계십니다.
찬양으로 악기 연주를 지휘도 하시고 수많은 사역자들이 예배를 위해 함께 예배가 경건하고 거룩하게 드리기 위해 준비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저같이 부족한 설교자를 굳이 세우실 필요가 있을까요? 예배위원 기도자 봉사자들이 굳이 필요할까요? 그들이 없어도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통해서 주님의 안식의 날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1부 예배 때는 제가 이 설교를 하는데 바깥에서 새 소리가 나더라고요. 그새 소리에 하나님이 영광 받으십니다. 바람이 지나가는 곳에 나무가 부딪치는 그 소리로 하나님은 영광 받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가 필요 없습니다. 굳이 그것이 필요 없어도 주님의 날에 주님은 영광 받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예배 가운데 저와 여러분을 예배자로 이 예배가 더 풍성하고 의롭고 기쁨으로 채워지기 위해 아무것도 아닌 저와 여러분을 예배 동역자로 세우셔서 이 예배를 통해 말씀과 치유와 구원을 세상에 보내실려고 저와 여러분을 이곳에 부르신 것입니다.
여러분, 왜 교회 모이셨습니까? 다시 코로나가 창궐하는데 왜 이곳에 계십니까? 왜 예배를 강조합니까? 예배는 요, 세상을 향한 중보의 신앙 행위, 예배는 우주적 중보입니다. 다른 사람이 예배를 드리지 않더라도, 나만이라도 주님 앞에 온전히 예배를 드려서 그들의 치유와 그들에게 구원이 이루어지게 해주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자리를 지키는 것은 여러분 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열 명, 백 명, 천 명의 사람이 될 수 있는 중보의 힘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목적을 위해 저와 여러분을 동역자로 부르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치유가 여러분 가운데 흘러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한 저와 여러분 우리 연동교회 또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치유가 세상으로 흘러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이에 응답하여 은혜 바다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의 연동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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