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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치, 마테오(Ricci, Matteo·1552∼1610)
예수회 소속 중국 선교사. 중국 천주교회의 창립자, 한자 이름은 이마두(利瑪竇). 자는 서태(西泰). 16세기 말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한 동서 문화 교류의 선구자로, 많은 저서와 서양 기기(器機)들을 바탕으로 하여 중화 문화권 안에 ‘서학’(西學)을 정착시킴으로써 천주교 신앙을 전파함과 동시에 스콜라 철학 내지는 르네상스 사조에 입각한 유럽의 새로운 문명을 이식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그의 저서는 보유론(補儒論)과 문화 적응주의(適應主義)에 입각하여 저술되었으며, 훗날 조선의 학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생애와 중국 선교] 서품과 중국 입국 : 1552년 10월 6일 교황령에 속한 이탈리아 안코네(Ancone)의 마체라타(Macerata)에서 9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1561년 예수회 학교에 입학하였고, 16세 때인 1568년에 아버지의 권유로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로마로 갔다. 그러나 중도에 이를 포기하고 1571년 8월 15일 예수회에 입회하였으며, 이후 1577년까지 예수회의 피렌체와 로마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이곳에서 그는 당대의 유명한 수학자인 독일인 클라비우스(Christopher Clavius) 신부로부터 기하학·역산학(曆算學)·건축학·수리학(數理學)·지리학 등을 배워 인정을 받았지만, 일찍부터 마음에 품어 온 예수회의 동양 전교 사업을 지원하여 허락을 받았고, 1577년 5월 18일에는 인도로 가기 위해 리스본으로 가서 그곳 코임브라(Coimbra)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578년 봄, 루지에리(Michele Ruggieieri, 羅明堅, 1543∼1607), 파시오(Francesco Pasio, 1551∼1612), 아콰비라(Rodolfo Acquaviva, 1543∼1615) 등과 함께 리스본 항을 떠난 리치는 9월 13일 인도의 고아(Goa)에 도착하여 신학 공부를 마친 뒤 1580년 7월 25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동안 약 1년 남짓 코친 (Cochin, 북베트남)에서 요양을 한 적도 있었지만, 사제 서품 후에는 본격적인 선교 수업을 받았다. 이 무렵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마치고 마카오(Macao, 澳門)로 와 있던 예수회의 순찰사(visitator)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 1539∼1606)는 리치를 중국 선교사로 임명하였고, 이에 따라 그는 1582년 봄 동료 파시오와 함께 마카오로 출발하여 8월 7일 그곳에 도착하였다.
이때가 명(明)의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 10년이 넘었다. 이에 앞서 1576년에 설정된 마카오 교구는 포르투칼의 보호권(padroado) 교구였으며, 마카오는 16세기 초 이래 광주(廣州)와 함께 포르투칼, 스페인, 네덜란드 상인들의 활동 거점이었다. 발리냐노는 1577년 이곳에 도착하였다가 1579년 일본으로 떠나기 전에 루지에리를 마카오로 불러 그곳 선교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582년에 다시 마카오로 건너와서는 중국 계획을 다시 수립하고 이를 위해 리치와 파시오를 부르게 된 것이다. 당시 발리냐노의 계획에는 그 지역의 언어와 풍습, 문화에 영합하는 선교 정책을 실천한다는 이른바 ‘적응주의’노선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므로 리치도 이 노선에 따라 선교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1583년 9월 10일에는 루지에리와 함께 양광(兩廣, 즉 광동시 광서) 총독부 소재지인 광동성(廣東省) 조경(肇慶)의 지부(知府) 왕반(王泮)의 호의로 그곳에 가게 되었다.
이때부터 리치의 중국 선교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특히 그는 적응주의 선교 정책에 철저하였고, 중국어 학습이나 관습을 배우는 일에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1584년에는 《기인십규》(畸人十規)와 <산해여지도>(山海與地圖, 일명 萬國地圖)를 저술하였고, 아울러 라틴어본 《천주술요》(天主述要)를 토대로 《천주 성교 실록》(天主聖敎實錄, 즉 《천주실의》의 전신)이라는 첫 번째 교리서의 초고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언제라도 중국 관리들에 의해 추방당할 수 있는 불안한 처지였기 때문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유럽의 명품들을 지부나 총독들에게 선사함으로써 환심을 샀고, 한편으로는 지식인들에게는 서양의 새로운 기기(器機)를 제시하였다. 아울러 중국인들로부터 혐오감을 사지 않기 위해 불교식의 복장과 삭발을 한 서방의 승려[西僧]로 행동하였고, 조경에 최초로 세운 성당의 이름을 ‘선화사’(僊化寺)로 명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적응주의는 아직 완전한 것이 아니었으며, 현지 중국인들의 이해도 생각대로 바꾸어지지 않았다. 결국 루지에리는 그곳 관리들이나 지방민들과 물의를 일으켜 1588년 마카오를 방문했다가 이듬해 유럽으로 송환되었고, 리치 또한 신임 양광 총독 유계문(劉繼文)에 의해 1589년 여름 조경에서 추방되었다.
학문 교류와 남경 정착 : 조경에서 추방된 리치는 총독의 허가를 얻고 1589년 8월 26일 동료 선교사인 안토니오 데 알메이다(Antonio de Almeida, 1557∼1591)와 함께 소주(韶州)로 가서 정착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연금술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문인 구태소(瞿太素)를 만나 그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마침내 입교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소주(蘇州)의 명가에서 태어난 구태소는 당시 강호 일대를 돌아다니며 타락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재주와 학문으로 이름이 있었다. 구태소와의 만남은 리치의 선교 과정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구태소에게 교리 외에 서양의 수학·기하학·역학 등을 가르쳤으며 자신은 그에게서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배우고 그 내용을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구태소의 제안에 따라, 불교식의 승복을 벗고 1594년부터는 로마 본부의 허락을 얻어 유학자의 복장을 하는 동시에 이름을 ‘이마두’라 하고, 유학자들의 관습에 따라 호를 ‘서태’라 지은 뒤 서방에서 온 학자[西士]로 행세하였다. 당시 중국 사회의 지도층 유학자들이었고, 그들과 접촉하고 교류하기 위해서는 불교식이 아닌 유교식 관습과 행동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치의 선교 방식에는 아직도 문제가 있었다. 그의 전교 방침은 완전한 적응주의 노선에 합치되지 않았고, 이로 인해 1591∼1592년에는 사소한 일로 지방민들과 충돌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리치는 점차 불교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유가의 미비점을 보완해 준다는 ‘보유 역불론’(補儒易佛論) 즉 ‘보유론’의 이론을 굳혀가기 시작하였으며, 광동성 밖으로의 진출을 모색하였다. 그리고 동료 페트리스(Francesco de Petris, 石方西, 1563∼1640)가 병사한 2년 뒤인 1592년에는 마침내 소주 생활을 마감하고, 동료 카나네오(Lazzaro Cattaneo, 郭居靜, 1560∼1640)와 함께 병부 시랑(兵部侍郞) 석성(石星) 일행을 따라 남경(南京)으로 갔다.
그러나 예부 시랑(禮部侍郞) 서대임(徐大任)에게 쫓겨나 남창(南昌)으로 거처를 옮겨 약 3년을 지내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리치는 지방민들과의 갈등을 최대로 줄이는 한편, 수학과 기예 등의 학문을 바탕으로 지식인들과 교류하였으며, 유명한 《교우론》(交友論), 《서국기법》(西國記法) 등과 몇몇 세계 지도를 저술하고, 1569년에 《천주 성교 실록》을 완성함으로써 서양 선비로서의 위치를 확보했다. 이 중 《천주 성교 실록》은 감수를 위해 이듬해 라틴어로 번역되어 일본의 주교 체르퀘이라(Luis Cerqueira)에게 보내졌다. 한편 1597년 고아에서 다시 마카오로 온 발리냐뇨는 롱고바르디(Niccolo Longobardi, 龍華民, 1559∼1654)등을 다시 중국 선교단에 포함시키는 동시에 8월 4일에는 리치를 중국 선교 단장에 임명하였다.
1598년 리치는 소주에 있던 카타네오를 불러 남경의 예부 상서(禮部尙書) 왕충명(王忠銘)과 함께 북경(北京)을 여행하였다. 그러나 북경에 도착한 뒤 황제 알현은 물론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채 돌아가던 중 양주(楊洲) 부근에서 이질에 걸린 리치 신부는 구태소가 있는 단양(丹陽)으로 가서 간호를 받고 건강을 회복한 후, 다음해 2월 구태소와 함께 남경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서 리치는 새 동료인 판토하(Diego de Pantoja, 龐迪我, 1571~1618년)를 만났으며, 북교계의 논객 삼유(三維) 화상과 토론을 벌였고, 양명(陽明) 좌파의 태주학(泰奏學)을 이은 이지(李贄, 1527∼1602)를 만나 학문을 논의하였으며, 《사행논략》(四行論略, 1598)과 <산해 여지 전도>(山海與地全圖, 1600,增訂王泮本)를 저술하였다.
북경 진출과 활동 : 판토하를 맞이한 구태소와 북경 진출을 논의한 끝에 어사 축세록(祝世祿)과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부(吏部) 상서 왕홍회(王弘誨)의 도움으로 여행 증명서와 소개장을 얻었다. 그리고 1600년 5월 18일에 남경을 출발, 이듬해 1월 24일에는 마침내 북경에 도착하였으니, 이는 중국에서 활동한 지 19년 만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도중에 그는 제녕(濟寧)에서 다시 이지와 총독 유계문을 만나 교유하였다.
북경에 도착한 리치는 우선 사이관(四夷館)에 머무르면서 여러 가지로 노력한 끝에 명나라 신종 만력제를 알현할 수 있었다. 이때 그는 정교한 자명종(自鳴鐘), 프리즘, 양금(洋琴), 천주상과 성모상 등 진귀한 서양의 물품들을 진상하고, 자명종의 수선이나 천문 역학에 관한 일로 자금성(紫禁城)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리치의 궁정 학자로서의 역할은 훗날의 선교사들에 비해 아주 미미한 것이었다. 이후 신종으로부터 선무문(宣武門) 안의 부지를 하사받아 성당을 건립할 수 있게 되었으며, 판토하와 함께 노력하여 1605년 8월에는 남당(南堂)을 설립하고 축성식을 갖게 되었다.
이후 리치가 가장 노력을 기울인 부분은 고관들과의 유대 관계를 더 더욱 돈독히 하는 일이었다. 그 결과 풍응경(馮應京, 1555∼1626)을 비롯하여 서광계(徐光啓, 1562∼1633), 이지조(李之藻, 1565∼1630) 등 명말의 유명한 봉교 사인(奉敎士人)들과 교유하게 되었고, 이들을 천주교에 입교시킬 수 있었다. 그중 풍응경은 옥중에 있을 때인 1600년에 우연히 얻은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 초고본을 읽고 감명을 받아 리치와 교류하기 시작하였으며, 서광계는 소주에서 카타네오를 만난 뒤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1603년 남경에서 《천주실의》를 보고 로차(Juan de Rocha, 羅如望, 1506∼1623) 신부에게 영세한 후 1604년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서 리치와 교유하였다. 그리고 이지조는 리치의 세계 지도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서로 교유하기 시작하여 리치가 사망하기 직전인 1610년에 영세하였다. 이후 리치는 이들 학자들로부터 협력을 받아 그 유명한
서학서들과 세계 지도를 저술 간행하게 되었다.
동시에 리치는 판토하와 함께, 그리고 1607년 북경에 도착한 사바티노 데 우르시스(Sabbatino de Usis, 熊三拔, 1575∼1620)의 도움을 받아 철저히 ‘보유 역불론’의 적응주의에 입각하여 전교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실제의 전교활동은 판토하가 담당하였다. 이들의 적응주의는 죽을 때까지 일관되게 실천되었으며, 그들의 각종 저서와 마찬가지로 봉교사인들의 협력에 힘입은 바 컸다. 또 리치는 발라냐노에게게 부탁하여 남경·남창·소주의 전교를 디아즈(Emmanuel Diaz, 李瑪諾, 1559∼1639)에게 맡긴 후 오로지 북경 전교에만 힘썼고, 1609년에는 우르시스를 예수회 북경 선교원의 원장으로 임명하였으며, 성모회(聖母會)를 설립하여 많은 개종자들을 탄생시켰다.
1609년에 이르러 병으로 죽음을 얼마 남겨 놓지 않게 되자 리치는 수 개월에 걸쳐 그동안의 ‘전교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런 다음 롱고바르디를 선교 단장으로 지명하고, 1610년(만력 38) 5월 11일(음력 3월 18일)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였으니, 그의 나이 58세였다. 이 무렵 중국 전체의 천주교 신자는 2,500여명에 달하였다. 한편 예수회 선교단에서는 리치가 사망한 뒤 판토하의 주선 아래 롱고바르디의 이름으로 황제에게 장지의 하사를 청원하였고, 책란(柵欄)이라 불리는 곳에 장지와 성당 건물을 동시에 하사받아 롱고바르디가 북경에 도착한 후인 1611년 11월에 리치의 매장과 새 성당의 축성식을 갖게 되었다.
[저서와 학문 내용] 저서 : 리치의 중국 선교 활동은 곧 저서를 통한 선교 활동이었다고 할 만큼 28년 동안 그는 한문 공부와 중국 정경 이해에 몰두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천주교 교리와 서양 과학에 관한 책들을 한문으로 편찬하거나 저술하였다. 이러한 저술들은 당시의 수준 높은 목판 인쇄술과 광범위한 독자층에 의해 많은 효과를 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리치 자신은 이들 저서를 통해 자신이 서양의 학자임을 인식시켜 주려고 하였으며,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서로 보완적인 관계 속에서 융합될 수 있는 것임을 나타내 보이려고 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서양의 근대 문명과 기술 서적들은 중국 지식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깊은 관심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였고, 그러는 사이에 천주교 신앙은 점차 지식층으로부터 일반 평민들에게로 침투되기 시작하였다.
리치의 저술 활동은 조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584년에 그는 이미 《기인십규》(1편)와 <산해 여지도>(1폭)를 저술 간행하고, 천주교 교리서의 초고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또 남창에서는 1595년에《교우론》(1편), 《서국기번》(1권)을 간행하고, 1596년에 《천주실의》초고본을 완성하였으며, 몇 편의 세계 지도를 저술하였다. 그리고 남경에서는 1598년에 《사행논략》(1권)을, 1600년에 <산해 여지 전도>를 저술 간행하였다.
이러한 저술 활동은 1601년 북경에 도착한 이후 이른바 봉교 사인들의 도움에 힘입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우선 교리서(敎理書)로는 풍응경의 도움으로 1601년에 완성하여 1603년에 간행한 《천주실의》(2권)를 들 수 있으며, 북경에 도착한 이재(李載)·풍기(馮琦) 등과 대화한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1608년에 간행한 《기인십편》(畸人十編, 2권), 1609년에 간행한 《변학유독》(辨學遺牘, 1권) 등이 있다. 다음으로 지리·과학서로는 1602년에 간행한 이지조의 각판 <곤여 만국 전도>(坤與萬國全圖, 增訂中明本) 6폭과 이를 8폭으로 확대하여 1603년에 간행한 이응시(李應試)의 <양의 현람도>(兩儀玄覽圖), 1604년 귀주(貴州)에서 간행된 <산해 여지 전도>(郭子章 각판)를 들 수 있다. 이어 1601년에는 《경천해》(經天該, 1권, 이지조·藝海珠 편), 1605년에는 《기하원본》(幾何原本, 6권, 서광계)과 《건곤체의》(乾坤體義, 2권), 1607년에는 《혼개통헌도설》(渾蓋通憲圖設, 2권, 이지조) 등이 간행되었으며, 그의 사후에도 《동문산지》(同文算指, 11권, 1614, 이지조), 《환용교의》(1권, 1614, 이지조), 《구고의》(句股義, 1권, 서광계), 《측량법의》(測量法義, 1권, 서광계), 《측량이동》(測量異同, 1권, 서광계) 등이 간행되었다. 이 밖에 잡서로는 《주소》(奏疏, 1권, 1601), 《서금팔곡》(西琴八曲, 1권, 1601), 《이십오언》(二十五言, 1권, 1604), 《서자기적》(西字奇跡, 1권, 1605) 등이 북경에서 간행되었다.
이러한 리치의 저서들은 훗날 이지조가 1629년에 정리 편찬한 《천학초함》(天學初函)과 청의 건륭(乾隆) 연간에 정리된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되었다. 우선 《천학초함》에는 천주실의·기인십편·변학유독 등 교리서와 기하원본·혼개통헌도설·동문산지·환용교의·구고의·측량법의 등 과학서, 교우론·이십오언 등 잡지류가 모두 11종 수록되었다. 그리고 《사고전서》에는 이들 11종 외에 건곤체의·측량이동이 포함되어 모두 13종이 수록되었다. 이 중에서도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은, 교리적 측면에서는 《천주실의》와 《기인십편》이었고, 지리·과학적 측면에서는 <산해 여지 전도>, <곤여 만국 전도> 와 <양의 현람도>, 《기하원본》, 《건곤체의》, 《혼개통헌도설》 등이었으며, 서양 윤리적 측면에서는 《교우론》이었다.
한편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리치는 1609년부터 예수회의 중국 전교사를 이탈리아어로 집필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회와 천주교의 중국 진출》(Della entrata della Compagnia de Gies e Christianit nella Cina)이라는 5장(章)으로 구성된 리치의 수필본이다. 그 후 예수회의 트리고(Nicolas Trgault, 金尼閣, 1577∼1628) 신부는 1613년에 이 수필본을 로마로 가져가면서 배 안에서 라틴어로 번역하였고, 롱고바디 보고서와 우르시스 신부의 라틴어 서간문을 참고로 하여 1615년에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간행하였고, 이후 여러 차례 중간되었다. 그 후 약 3세기가 지난 1909년에는 로마의 예수회 문서고에서 리치의 수필본 원본이 발견되어 벤투리(Tacchi Venturi)에 의해 《마테오 리치 신부의 역사 저작》(Opere Storiche del P. Matteo Ricci)이라는 제목으로 1911∼1913년에 간행되었으며, 1942∼1949년에 엘리야(Pasquale d’Elia, 德禮賢)에 의해 다시 《리치 전집》(Fonti Ricciane)으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1953년에는 갈레거(J. Gallagher) 역의 영문판이, 1986년에는 유준여(劉俊與)·왕옥천(王玉川) 약의 중문판이 간행되었다.
학문 성격과 내용 : 이상의 저서를 통해서 이루어진 리치의 학문과 업적은 곧 “동서 문명 융합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설명될 수 있는데, 그 바탕에는 문화적 적응주의 즉 ‘보유론’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것은 <산해 여지 전도>나 <곤여 만국 전도>에서 중국을 중심에 둠으로써 중국인들의 취향에 부합하고자 한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리치의 보유론은 발라냐노의 적응주의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지만, 남창과 남경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중국 경전들에 관한 연구가 깊어지면서 점차 독창적인 성향을 나타내게 되었다.
1598년 이래 남경에 거처하는 동안 리치는 유교 경전이나 효(孝) 관념에 근거하여 중국 전래의 ‘천’(天) 또는 ‘상제’(上帝) 관념을 천주교의 ‘천주’(天主) 개념에 부합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다. 《천주실의》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리치에게 있어 천주교의 교리는 결코 유교적 세계관이나 윤리관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교적인 관념을 더욱 완전하게 보완해 준다는 의미에서 제시된 것이었고, 이러한 보유론은 훗날 《기인십편》에도 충실히 반영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태극’(太極)이나 ‘리’(理)의 개념을 상제 즉 천주와 동일시하지는 않았으며, ‘의뢰자’(依賴者)나 ‘자립자’(自立者), ‘소이연’(所以然) 등 스콜라 철학에 입각하여 《천주실의》를 저술하였으면서도 스콜라 철학의 개념보다는 천주교 교리를 더 중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중국 지식인들로부터 서양의 윤리를 인정받기 위해 《교우론》을 저술하였지만, 보유론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내용에는 분명 한계성이 있었다.
이러한 리치의 보유론은 ‘역불론’(易佛論, 즉 去佛論)과 깊은 상관성이 있다. 그가 처음에는 서양에서 온 승려를 자처한 것이 사실이지만, 곧 불교는 도교와 함께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도가니 승려들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되어 ‘허’(虛)와 ‘공’(空) 사상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특히 그는 중국 유학자들의 입장에서 불교를 비판하였는데, 이때 가장 먼저 불교의 윤회론과 우상 숭배가 비판되었다. 그렇지만 그 요지는, 남경에서 있는 삼유 화상과의 논쟁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상제가 창조 주요 주재자가 된다’는 주장을 펴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보유 역불론은 천주교 호교론과 연결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그가 지은 지리·과학서들은 중국 지식인들의 호기심을 유도하거나 서양 문화에 새로운 인식을 심어 줌으로써 중국 사회에서 서학(西學)이 형성되도록 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우선 리치는 중국 지식인들에게 세계 지도, 지구의, 천체의(天體儀)를 제작해 보이는 일 외에 정밀한 천문·역법서를 제시함으로써 많은 독자층을 지기(知己)로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자명종이 신종 황제에게 큰 호기심을 주었던 것처럼 해시계나 기계 시계 등도 모든 이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이에 리치는 1605년 중국 역법 개수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유클리드(Euclid)의 기하학에 토대를 둔 《기하원본》을 저술함과 동시에 예수회 본부로 천문에 조예가 깊은 신부를 보내 주도록 요청하였으나, 당대에는 신부 파견은 물론 역법 개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리·과학서는 중국 지식인들에게 종래의 ‘천원 지방’(天圓地方) ‘중화 중심’(中華中心)의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중국의 문화와 위치를 서양 내지는 세계 안에서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반면에 리치의 저술에 반기를 들고 그의 학문을 사학(邪學)으로 배척하려는 ‘벽사론’(闢邪論)을 제기한 경우도 있었다. 1639년 서창치(徐昌治)가 편찬한 《성조 파사집》(聖朝破邪集)에는 그때까지 나온 벽사론이 망라되어 있는데, 여기에 들어 있는 33인 50종의 저술들은 대부분 리치의 저서를 이론적으로 비판하는 데서 시작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것으로는 심심(沈沁)의 《참원이소》(參遠夷疏), 황정(黃貞)의 《존유극경》(尊 極鏡), 진후광(陳候光)의 《변학초언》(辨學草言), 허대수(許大受)의 《성조좌벽》(聖朝左闢) 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도 1646년에 종시성(鐘始聲)의 《벽사집》(闢邪集)이 나왔으며, 1644년에는 양광선(陽光先)이 《부득이》(不得已)를 저술하였다. 이들 벽사론에서는 천주교를 이단 사설로 비판하는 한편 서양의 과학과 기기(器機)까지도 배척한 경우가 많았다.
[조선에 끼친 영향] 리치의 저서는 이후 조선에도 전래되어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저서가 북경을 왕래하던 사신들을 통해 최초로 조선 사회에 알려진 시기는 1603년(선조 36)으로 리치가 북경에 도착한지 2년 만이었다. 이 사실은 부제학 이수광(1563∼1628)이 이해 사신 이광정(李光廷)과 권희(權僖)가 가져온 리치의 <구라파국 여지도>(歐羅巴國與地圖) 즉 이지조 각판의 <곤여 만국 전도>와 《천주실의》,《교우론》을 보고 이를 《지봉유설》(芝奉類設)에서 소개한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이때부터 리치의 저서는 꾸준히 조선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1609년(광해 1) 북경을 다녀온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은 리치라는 인물과 세계 지도, 《천주실의》에 대해 논평했고, 1631년 진주사로 북경을 다녀온 정두원(鄭斗源)은 로드리게스(J. Rodriquez, Juan, 陸若漢, 1561∼1663)로부터 여러 서적들과 함께 리치의 천문서 1책을 받아왔다.
또 <곤여 만국 전도>의 증보판인 <양의 현람도>도 조선에 전래되었으며, 1708년(숙종 34)에는 관상감의 이국화(李國華), 유우창(柳遇昌)이 화가 김진여(金振汝)와 함께 숙종의 명에 따라 <곤여 만국 전도>를 모사한 건상·곤여도(乾象·坤與圖) 병풍을 진상하였다.
그 후 18세기 초까지 리치의 저술은 여러 경로를 통해 조선에 유입되었다. 성호학파(星湖學派)의 대종인 이익(李瀷, 1682∼1763) 같은 경우는 1678년 부친 이하진(李夏鎭)이 구입하여 고향인 광주 성촌(星村)에 소장해 오고 있던 서학서들을 널리 섭렵하였는데, 그 중에는 리치의 세계 지도, 《기하원본》, 《혼계통헌도설》, 《건곤체의》등과 같은 지리·과학서와 《천주실의》, 《교우론》과 같은 종교·윤리서들이 있다. 또 이익의 제자인 신후담(愼後聃) 같은 경우도 1724년 이전에 이미 《천주실의》를 읽었으며, 윤동규(尹東奎)와 안정복(安鼎福) 도한 1749년 이래 《기하원본》과 《동문산지》등을 접하였고, 특히 안정복은 1757년에 《천주실의》, 《기인십편》, 《변학유독》의 내용에 대해 스승 이익의 견해를 질문하였다. 이중에서 《기하원본》은 북학파(北學派)의 홍대용(洪大容)도 보았을 것으로 추측되며, 성호학파의 제3 세대인 이가환(李家煥), 이벽(李檗), 정약전(丁若銓) 등도 일찍이 이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조선의 지식인들은 실용(實用)의 측면에서 서양의 새로운 학문을 수용함으로써 종래의 관념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훗날 서학을 비판하게 된 안정복 또한 처음에는 윤동규와 함께 서양의 천문·역법에 대해 이해하려고 노력하였고, 세계 지도를 통해 새로운 지리 인식을 갖게 되었다. 특히 이익의 서학 수용과 이해는 유교 이념을 ‘체’(體)로 하고 서양 기술을 ‘용’(用)으로 한 중체 서용론(中體西用論)의 입장을 취한 것이었으니, 이 또한 리치의 영향이 컸다. 아울러 리치의 영향은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조선의 지식인들이 전통의 지구·천문관을 극복하거나 지리적 화이관(華夷觀)에서 탈피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더 나아가 리치의 저서들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천주교 교리를 이해하고, 이를 신앙으로 받아들여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지침서가 되었다. 초기의 신자들은 대부분 《천주실의》나 《기인십편》등을 읽었으며, 그 안에 들어있는 보유론에 관심을 갖고 천주교 신앙에 접근하였다. 또 1784년 봄 이승훈이 전래한 《천학초함》 안에 들어 있는 리치의 여러 저서들도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이후에도 《천주실의》는 판토하의 《칠극》(칠극)과 함께 초기의 천주교 신자들에게 가장 널리 읽히는 교회 서적이 되었다. 반면에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리치의 저서들은 척사론자(斥邪論者)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초기에는 신후담의 <둔와서학변>(遯窩西學辨, 1724), 안정복의 <천학고>(天學考, 1785)와 <천학문답>(天學問答, 1785), 이헌경(李獻慶)의 <천학문답>(1787), 홍정하(洪正河)의 《증의요지》(證疑要旨) 등이 척사론에 나왔으며, 이러한 반서학서의 논리가 19세기까지 계속되었다.
가톨릭 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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