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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글감은 발칙한 해석을 원한다.
강 돈 묵
교술문학은 ‘사실을 가르치거나 전달하기 위한 기술’, 혹은 ‘대상이나 세계를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설명하는 문학 장르’라고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교(敎)는 정보를 알리거나 주장한다는 의미이고, 술(述)은 사실이나 경험을 서술한다.’는 의미라고 학자들은 주장한다. 그러므로 교술문학의 대표격인 수필은 영토 확보 면에 있어서는 나름 의기양양해 하지만, 그 미끼를 자칫 잘못 물으면 고통을 수반한 고민에 쌓이게 된다. 기행문이나 서간문과 같은 실용문이 경계를 뛰어넘어 수필의 세계를 넘보기 때문이다. 수필은 실용문과는 차원이 다른 문학의 개념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은 지당하다. 혹자에 있어서는 이런 실용문들을 수필의 영역에 끼어 넣음으로써 혼란을 초래하기도 한다.
수필은 문학의 형상화와 교술의 기록성이라는 상반된 두 세계를 변증법적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어려움을 안고 있다. 그 어려움을 감내하지 못하고, 안이한 생각에 기록성에만 안주해 버린다면 수필은 영원한 생명력을 획득할 수 없다. 수필이 문학의 영역 안에서 영원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문학적 형상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등하시한다면 글감의 본질조차 찾아내지 못한 현상의 기록에 멈추게 됨으로 친근한 독자를 잃게 된다.
또 하나의 어려움은 수필을 쓰면 쓸수록 자신의 내면이 겉으로 드러나 많은 사람들 앞에 공개된다는 사실이다. 수필이 고백의 문학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 문제 앞에 많은 수필가들이 글쓰기를 주저하고 마침내는 용기를 내지 못하고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수필가들은 이러한 염려를 느끼면서도 밤을 밝히며 수필을 쓴다. 수필은 왜 쓰는 것일까? 나는 그 창작의 심리를 스트리킹에 비유한다. 자신의 치부가 다 드러나는 것을 분명 알면서도 계획을 세우고, 예행연습까지 하면서 준비를 하여 실행에 옮기는 스트리킹. 그것은 누군가가 하지 않으면 페널티를 준다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좋아서 하는 자위행위에 해당한다. 이렇듯 작가의 고백인 수필을 쓰는 것도 어찌 보면 스트리킹인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스트리킹이란 느닷없이 하고 싶어서 갑자기 길을 가던 사람이 냅다 옷가지를 벗어던지고 달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적어도 이런 행위를 하는 사람은 자신이 얻고자 한 효과를 최대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수필을 쓰는 작가도 자신의 글이 독자에게 공감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의무가 있다. 자신의 삶에서 글감을 취택하고, 그 글감이 갖는 의미를 파악하여 본질에 이르는 과정을 세심히 거쳐야 한다. 이때 자신이 영위해 온 삶의 철학이 함께 글 속에 녹아 들어가게 되는 것이고, 작가가 발칙하게 해석해낸 의미가 더욱 커다란 의미로 확산하여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게 되는 것이다.
만약 수필가가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신이 살아낸 삶을 그대로 기술하고 수필을 썼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수필에 대한 모독이 될 수 있다. 자신이 여행한 일을 시간적, 공간적 순서에 따라 기술하고 만다면 그것은 기행문이지, 기행문의 형식을 빈 수필이 아니다. 분명 기행문과 수필은 다르다. 기행문은 여행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적으면 되지만, 기행문의 형식을 빈 수필은 하나의 주제를 정하고 그것에서 이탈되는 이야기는 결코 끼어 들게 두어서는 안 된다.
이번 ⟪문학미디어⟫를 읽으면서 갖는 감정은 바로 이와 같은 아쉬움이다. 자신이 살아낸 삶 중에서 글감을 취택하여 작가만의 해석을 내리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그대로 기술해 놓은 글이 눈에 띈다는 점이다. 이런 글들은 좀 더 깊이 글감을 들여다보는 과정을 요구하고 싶다. 그리하여 작가만의 세계가 글 속에 내재된 수필을 쓰기를 권유한다. 이러한 노력이 없이 수필가의 명예만 챙긴다면 수필에 누가 되는 것이고, 작가 역시 작가이기 이전의 상태보다 더 영예롭지 못할 수도 있다.
강해련의 <현충원의 봄>
글감의 활용에 대해서 고민을 하게 하는 글이다. 수필을 씀에 주제를 정하고 그것과 연이 닿지 않는 것은 과감히 제거하는 결단성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동원된 글감이 과연 어떤 관계로 이 글에 끼어들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냥 작가가 경험한 일상의 한 부분이라면 주제와의 연을 고려하여 과단성이 요구된다. 이 글에는 끼어들어 오히려 글의 문맥에 장애가 되는 글감이 있다.
또 준비된 자료가 어느 곳을 설명하거나 소개한 유인물이나 게시물이라면, 그것을 펼쳐 놓고 활용할 일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자기 글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글이기에 문체에도 상이함이 생기게 되고, 필요 없는 부분까지 끼어들게 되어 글의 흐름에 장애가 된다. 어떤 자료를 활용할 때에는 그것을 보고 자신의 머릿속에 남은 것만 가지고 하는 것이 슬기로운 방법이다. 그러한 것을 메모지나 유인물을 펼쳐 놓고 수필을 쓰면 많은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현충원의 침엽수가 73종, 관목이 43종이라 하거나 새가 26종이 살고 있다는 기술은 전혀 이 글에서 요구되는 바가 아니다. 이런 것은 오히려 수필가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어서 독자들로 하여금 실망감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전반적으로 글이 피상적인 기술에 멈춰 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보다 글감의 속을 깊이 들여다보고 작가만의 참신한 해석이 따라준다면 보다 독자들의 공감을 얻으리라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글감을 구하는 부분에서부터 그것을 해석하고 형상화시키는 과정을 좀 더 진지하게 임할 것을 권한다. 그리고 작가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정확한 문장을 익혀둘 것도 주문한다.
김외남의 <몰입>
지하철역에서 ‘아리아 문화 예술 공연단’의 공연에 깊이 빠지면서 자신의 수필창작에 임하는 자세를 반성하는 글이다.
우선 작가는 공연 모습을 데생이나 하듯 상세하게 기술한다. 그것은 공연을 위해 최선을 하는 그들의 몰입을 토대로 자신을 견줘 보기 위한 장치이다. 출연자들은 최고의 효과를 위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한다. 하지만 이 글을 보다 보면 작가 자신이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흥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좀 더 냉정해야 객관성을 획득할 수 있지 않을까. 흥분된 흔적은 문장에 그대로 묻어난다. 문장이 완성되지 못한 채 말하듯 잘려져 있다. 이것은 작가의 문장 기술 태도에도 벗어난다. 완전한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작가란 어떤 사실을 기술할 때에 냉정한 객관적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다. 작가가 먼저 문장에서 흥분되어 있으면 독자가 감동할 부분을 앗아가는 결과가 초래된다. 한 문장을 제대로 완성하고, 다음 이야기를 기술하는 차분한 집필 태도를 익힐 일이다.
흥분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냉정히 글을 전개한다면, 주제와의 긴밀성도 더 확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백두현의 <그 길은>
학창시절 16년 간 다니던 길.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길이다. 무궁화 꽃이 새벽마다 올라오는 바로 그 길이지만 간직하고 있는 사연은 식구마다 다르다. 아버지께서 항암치료를 하게 되자 그에 임했던 가족들의 길은 조금씩 달랐다.
할머니에게 있어서 이 길은 암에 시달리는 아들을 위해 조기나 자반고등어를 사러가던 길이다. 이른 새벽 할머니는 이십 리나 되는 이 길을 걸어서 읍내시장에 가셨다. 그리고 사온 생선을 요리하여 밥상 한가운데에 놓고 아들이 먹는 모습을 지켜보셨다. 그러니까 할머니에게 있어서 이 길은 아들을 사랑하는 길이다.
어머니 역시 남편인 아버지가 암으로 병원에 입원하자 보신탕을 끓여 나르던 길이다. 누가 뭐라 해도 어머니는 보신탕을 준비해 병원 귀퉁이에서 따뜻하게 덥혀 남편에게 들도록 하였다. 어머니에게 있어서는 이 길은 남편의 건강을 위해 보신탕을 나르던 사랑의 길이다.
두 사람들과는 달리 작가는 이 길을 힘차게 다녔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두 분은 걸어서 음식을 나르던 고통의 길이었다면 작가는 차를 타고 다닌 길이었다. 자식의 출세를 자랑하고 싶어 하는 아버지를 위해 무리해서 차를 구입하고 마음껏 승차하며 자랑하시게 했던 효도의 길이었다.
다닌 방법은 달랐어도 암으로 고생하는 아버지를 위해 다녔다는 공통점은 있다. 사람의 삶이란 다 그런 것이 아닐까. 조금씩은 달라도 함께 공유하는 것도 있다. 작가에게 있어서 ‘이 길’은 인생길이다. 만남은 헤어짐이 따르고, 그것이 길 때도 있고, 짧을 때도 있음을 아는 작가는 이렇게 정리한다.
그 여정을 따라 할머니도 어머니도 어느 날 아버지와의 이별을 완성시켰다. 뒤따라 가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별은 아직 진행형이다. 이별했지만 이별이 완성되지 않은 이유는 여전히 만나기 때문이다. 때로 사진으로 만나고 추억으로도 만난다. 글 속에서도 만나고 꿈속에서도 만난다. 그리움으로도 서러움으로도 만난다. -백두현의 <그 길은>에서
서원순의 <여행, 그 의미>
아들이 결혼하여 남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나는 것을 보고 ‘여행’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많이도 달라진 그 의미를 헤아리다가는 자신이 결혼할 때도 떠올린다. 예식장에서의 복장 그대로 출발한 터라 신혼부부임이 드러나는 촌티가 팍팍 나던 시절의 여행이다.
아들의 신혼여행을 지켜보다 보니, 그의 초등학교 시절 일화가 끼어든다. 옆집 친구와 나누는 대화에서 아들이 신혼여행에 엄마인 작가를 모시고 가겠다고 한 말에 흐뭇해했던 기억.
만약 내 남편이 신혼여행 갈 때 그런 말을 했다면 “이런 똘아이!”했을 텐데 나는 내 아들의 말을 오늘도 상기하고 있다. 지나간 것은 잊고 새 일을 보라는 말씀을 저 멀리 두고 비상식적이고 말도 안 되는 아들의 철없는 말을 흐뭇해했으니….
혹시나 했지만 아들에게서 여행을 같이 가자는 말은 듣지 못했다.
까닭 없이 허한 마음을 달래며 여행의 정의를 재정립해 본다.
이 세상에 주어진 삶. 오늘이 여행이라는 것을. -서원순의 <여행, 그 의미>에서
결국 작가 서원순은 ‘이 세상에서 주어진 삶이 바로 여행’이라고 속단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내고 있는 삶, 그 자체가 여행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반대로 인식할 수도 있다. 그래서 보들레르의 말도 끌어온다. ‘한가로이 사랑하고 사랑하다 죽는 삶’. 그것이 여행이다.
여행의 본질을 찾는 과정이 충실히 이루어졌기에 이 글은 생명력을 얻는다. 작가는 늘 내가 살고 있는 삶의 의미를 찾고 있다. 삶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현저한 의미의 차이를 불러올 수 있다. 여기에 작가 서원순의 수필이 있다.
신명순의 <산 새댁>
복숭아 농사짓는 이야기다. 글감에서 우리는 쉽게 이 글의 방향을 예측한다. 글을 다 읽고는 역시 그런 글이었다고 결론한다. 수필을 읽기도 전에 글의 방향이 감지된다는 것은 작가에게 있어서는 천기누설이다. 이렇게 미리 속이 들여다보이면 독자는 더 이상 시간을 할애하려 하질 않는다. 조금은 궁금증을 독자에게 남겨둘 필요가 있다.
수필이라기보다는 수기에 가깝다. ‘꽃이 피고 공기가 좋은 곳에서 일하면 행복하고 즐겁지 않겠냐고 말하지만 봄은 내게 고달프면서도 길었다.’에서 보듯 다분히 수기적인 면이 있다. 자신이 경험한 바를 줄글로 써놓고 수필이라 하면 곤란하다. 이 글에서 독자들은 과수농사의 어려움을 알게 되지, 작가의 차별화된 목소리를 듣지는 못한다. 작가만의 목소리를 갖기 위해 좀 더 깊이 사고하고 자신의 삶을 집어넣어 해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신예숙의 <밥은 사랑이다>
제목에서 이 글의 내용을 모두 파악한다. 수필의 제목은 글의 내용을 상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독자를 잡아놓는 기능이 더 크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제목을 보니 글의 내용이 다 보인다면 굳이 없는 시간을 쪼개어 할애할 필요가 없다.
이 말은 바로 글의 내용이 식상하다는 것이다. 밥이 사랑이라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어머니일 것이고, 글을 읽지 않고도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예측한다. 좀 더 작가라면 글쓰기에 진지하게 임할 필요가 있다. 발상 자체가 한계가 보이면 안 된다. 글감을 해석하여 새로운 주제를 찾아내는 일은 꼭 거쳐야 할 과정이다. 이를 위하여 작가는 깊이 사고하는 습관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수자의 <십 원의 행복>
세뱃돈에 얽힌 이야기다. 경제적 여유에 맞추어 적당하게 정해지는 것이겠지만, 세뱃돈은 세월의 흐름을 따라 변해 왔다. 그러면서도 나름 함유하고 있는 의미가 있었다. 또 주는 입장에서도 봉투 안의 금액보다 정을 듬뿍 담아 전달하는 분도 있었다. 하지만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대개가 봉투 안의 금액에 관심이 갔다. 작가는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며 너무 인색했던 자신을 반성도 한다.
세뱃돈에 얽힌 에피소드도 끌어낸다. 스스로 혼자 사용한 경우도 있었겠지만, 대부분 부모의 손으로 들어갔다. 그러면 아이들은 그 돈이 나올 때를 기다리며 많은 구매 물품을 준비하기도 했다.
작가는 기억 속에서 작은 돈이었지만, 무한한 행복을 주었던 세뱃돈을 그리고 있다. 책장 깊은 곳 책갈피에 끼워두고 가끔 꺼내보았던 작은 행복. 그것은 엄마의 조청단지를 몰래 손가락으로 찍어먹는 기분이었다.
글감을 잘 소화하고 있다. 욕심을 부린다면 조금만 더 상상력을 발휘하여 전개했더라면 더 많은 독자들에게 오래 남을 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이재영의 <철새가 날아오면>
작가의 철새에 대한 인식은 대단하다. 그냥 우리 곁에 와서 계절을 나고 가는 존재가 아니다. ‘봄이 되면 제비, 뻐꾸기, 소쩍새, 꾀꼬리, 뜸부기 등 여름철새들이 친정 오는 누이처럼 찾아왔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멀리 떠난 가족이 돌아오는 듯 반가워 기다리곤 했다.’에서 보듯 작가는 철새를 가족으로 인식한다. 그만큼 철새에 대해 긍정적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긍정적 애정은 그들의 질서정연함과 우아함에 근거한다. 규율을 지키며 공생하는 그들의 삶의 태도에 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그들을 보기 위해 천수만과 을숙도, 시화호, 순천만까지도 찾아 나선다.
여기서 작가는 인간 철새와 만난다. 정치의 계절만 되면 옮겨 다니는 국회의원, 헛공약만 남발하고 선거만 끝나면 제 잇속이나 챙기는 그들의 모습에 환멸을 느낀다. 당리당약으로 쌈질이나 하고, 국민의 세금을 가지고 후진국으로 연수나 떠나는 국회의원들. 작가는 급기야 철새와 인간 철새를 비교하기에 이른다.
철새들의 삶을 깊이 추출해내어 그들의 삶의 의미를 찾아낸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그런데 그 다음 인간 철새에 빗댄 부분은 좀 더 밀착시켰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너무 성급하게 들이민 기분이다. 좀 더 깊이 성찰하였더라면 많은 독자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두 개념의 비교가 너무 상식선에 머물렀다고 한다면 지나친 평자의 욕심일까.
이재정의 <엄마의 집>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나이 들면 쇄약해지기 마련이다. 작가의 어머니는 자식들이 집에서 모시지 못하고 요양원에 맡겨지게 된다. 첫 번째 간 곳이 불편하여 다른 곳으로 옮긴 다음날에나 작가는 찾아간다.
늘 집으로 돌아가겠다던 어머니가 별 말씀 없이 참아내는 모습을 보면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어머니를 바라보며, 인간의 생로병사의 궤도를 인식한다. 차분한 어머니의 모습에서 이곳을 ‘어머니의 집’이 되길 소망한다.
이 글 역시 작가가 경험을 기술한 글이다. 있는 현상에 그것을 바라보는 작가의 소회를 조금 보탰을 뿐이다. 수필은 이렇게 작가가 체험한 바를 적어 놓음으로써 완성되는 글이 아니다. 적어도 그 글감을 해석한 작가의 시각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 작가의 삶을 밀어 넣어 해석해낸 주제가 있어야 하며, 작가만의 차별화된 형상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문학은 현상의 기록이 아니라 본질의 기록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이택화의 <아름다운 만남>
다분히 긴 이 글을 다 읽고 나면 마치 뷔페 음식을 먹은 기분이다. 눈에 보이는 것마다 나름 맛있어 보여서 실컷 먹고 났는데, 속은 허전하다. 음식마다 가지고 있는 맛깔스러운 것이 있지만, 너무 많은 색깔의 맛에 모두가 중화되어 버린 기분이다. 막상 무엇을 먹었는지, 어느 것이 맛있었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뭔가 속은 그득한데 시간이 좀 지나자 배가 고픈 것이 뷔페 음식이 아닐까.
문장마다 아주 현란한 수식을 동반하고 있는데, 읽고 나면 무엇을 읽었는지 머리에 남은 것이 별로 없다. 뭔가 현란했다는 생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딱히 글의 내용도 머리에 남지를 않는다. 이런 현상은 물론 독자의 무능에서 비롯되는 것이겠지만, 작가도 한번쯤은 음식을 손님의 구미를 유념하며 차렸는가를 생각해 볼 일이다.
진정 맛있는 밥상은 가짓수가 많은 음식만을 요구하지 않는다. 밥상에도 주음식이 있는데, 하물며 수필에서야 더하지 않을까. 수식은 분명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동원되어야 한다. 아름다운 문장에 대한 욕구로 동원되는 수식어는 대개의 경우 손해를 보기 일쑤이다. 문장에도 경제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의 작가는 문장의 길이에 대해 각별히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 너무 길고, 필요 없는 수식어가 많다. 의미 전달에 오히려 장애가 된다면 과감히 줄일 일이다.
이평영의 <세 남자>
남편과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다. 흔히 수필가들에게 과민하게 요구하는 말 중에 아들 자랑, 딸 자랑, 남편 자랑하는 글을 쓰지 말라는 것이 있다. 혈연은 객관적 판단에 장애를 초래하여 글의 완성도를 떨어지게 한다는 염려 때문일 것이다. 글감은 좀 떨어진 거리에서 바라봐야 그 속에 들어있는 본질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가족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혈연으로 맺어져서 객관성을 얻기가 어렵다는 데서 나온 말일 것이다.
이 글은 철저하게 그 기피 영역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염려하는 분야의 현상이 그대로 표출되고 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겨를도 없이 시작에서부터 끝이 날 때까지 가족 이야기에서 이탈하지 않고 있다. 그러니 시종일관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염려와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 있기 마련이다.
수필은 글감이 가지고 있는 본질을 찾아 기술하는 것일진대 본질의 문턱에 가기도 전에 작가가 흥분하여서 있었던 현상에 칩거한다면 그 글의 생명은 보장 받을 수 없다. 세 사람의 취업으로 분주해진 아침의 전경을 그려주는 것은 행복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 글에서 독자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려 한 것일까.
남편도 젊어서 그렇게 근무를 했는데, 그토록 애석하지는 않았다. 아들이 그렇다 하니 마음이 아린 것이다. 작가 스스로 고백했듯이 ‘남편과 아들에 대한 내 생각이 어찌 이리도 차이가 나는가. 나 자신도 믿을 수 없는 감정이다.’ 과연 이 글에서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냥 독자들이 다복한 가정의 한 단면을 그려 주었구나, 한다면 너무 평범한 작품이다. 작가만의 세계를 그린 그 무엇이 있어야 하리라 믿는다.
이혜숙의 <환승역에서>
요즈음 흔한 노인 부양 문제를 다루고 있다. 대개의 경우 이런 글은 노인들을 간병하기 어렵다는 자식들의 엄살로 장식되기 마련이다. 부모가 연세가 높고, 거동이 불편하시어 늘 옆에서 돌봐 드려야 하는데, 먹고 살기에 급급하다 보니 그럴 수만도 없다는 자식들의 엄살로 채워지게 마련이다. 더러는 형제들 간에 부모를 모시는 문제로 갈등하는 것이 글의 지면을 채워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으레 끼어드는 이야기는 자신들도 늙어 남의 도움을 받을 텐데, 이래서 되겠냐는 반성이 뒤따른다.
하지만 이 글은 노인의 문제를 다루더라도 기존의 것들과는 차별화가 되어 있다.
요양원의 모습을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울하다고 회피한다. 미래의 우리의 모습인데 왜 우울하다고 하는 걸까. 지하철을 타고 가다 보면 환승역이 있다. 나는 인생도 환승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이승에서 열차로 갈아타고 다른 세상으로 가는 거라고. 요양원은 죽음의 종착역이 아니라 새 세상으로 가기 위해 열차를 기다리는 환승역이라고. -이혜숙의 <환승역에서>에서
발상부터가 발칙하여 독자의 시선을 움켜잡기에 충분하다. 하나의 글감이 흘러가는 보편적인 길이 있는데, 그것을 부정하고 작가만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전혀 다른 길을 찾아냈다면 그 글은 반 이상은 성공한 것이다. 훌륭한 작가라면 이와 같은 그만의 세계가 있어야 한다. 이런 발칙함 뒤에는 자연스럽게 찾아드는 독장적인 세계가 있게 마련이다. 이곳에서 작가가 독자에게 제시하는 메시지는 독자들에게 오래 오래 기억될 것이다. 작가는 삶의 현상을 이와 같이 자기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읽어내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능력은 하루아침에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두고 연마한 노력의 결실이다. 독서와 상상적 체험과 감각적 유회에서 얻어지는 결과물이다.
임성희의 <잊을 수 없는 말 한 마디>
젊은 시절 사촌 오빠에게서 들은 격려의 말이 지금껏 가슴에 남아 있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도 오빠와 비슷한 외모가 보이면 한참을 멈춰 서서 바라보게 된다. 이와 같이 자신에게 돌아온 칭찬의 소리는 훗날 많은 힘이 된다는 지적이다.
흔히 듣는 이야기다. 그리고 글의 내용도 ‘그럴 거야’에서 한 발 내딛지 않은 글이다. 다시 한 번 글감의 해석에 시간을 주고 고민해 보는 태도를 주문한다. 너무 안이하게 창작에 임하는 것 같다. 글감이 함유하고 있는 의미를 피상에서 진일보하여 깊은 통찰 안에서 찾아내길 주문한다.
이번 《문학 미디어》에 게재된 13편의 글을 모두 살펴보았다. 전반적으로 글감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라기보다는 피상적인 접근이 많은 점이 안타깝다. 좀 더 깊이 사고하여 글감이 갖고 있는 본질을 찾는 과정을 꼭 거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리하여 작가의 삶이 수필 속에 녹아 들어가는 글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작가의 생명은 물론 글의 생명도 길어질 것이다. 수필이 아무리 교술문학이라 하여 기록성을 내세워도 문학적 형상화를 등한시할 수는 없음을 기억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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