工夫終畢과 化天 어느날은 임원들에게 이렇게 하교하셨다.
“시속에 군부(君父)의 상(喪)을 천붕지통(天崩之痛)이라 하고 모상(母喪)을 지붕지통(地崩之痛)이라 하며 처상(妻喪)을 고분(盆)지통이라 하나 천자의 상은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가 칼을 내주고 떠난 후에 돌아오지 않았다 하여 분검(分劒)지통이라 하느니라” 2월 초5일에 시학반의 편성을 최종 확정(부책임자 대신 회원 1인을 추가시킨 36인)하시고 이렇게 하교하셨다.
“이로써 시학반의 완성이니라. 다시는 변경이 없으리니 시법반도 그러하니라. 이는 본시 진법이며 진법(陣法)이므로 군법(軍法)으로 시행함이니 3개호가 1군단(軍團)이고 1군단이라도 족하나 증원(增員)하려면 4군단이라야 되느니라” “지금은 공부인원이 넉넉하지마는 앞날에는 공부반원 구하기가 농촌에서 늦모 심을 때 인부 구하기보다 어려우리라. 그러므로 도인을 금싸라기 아끼듯 하여야 하느니라. 그러나 대강전만 남아도 나의 일은 다 되리니 낙심할 것은 없느니라” “앞으로 배도자의 기승(氣勝)하는 난동(亂動)과 사술자(詐術者)의 흔천(天) 동지(動地)하는 현혹에 의심나고 땀날 일이 있으리니 그때에도 너희는 궁단속(宮團束)과 법방수행을 잘 하라”
“천마산 옥녀봉을 훨훨 날라다니며 나를 따르라는 자가 있더라도 너희가 현혹되지 않고 도를 믿겠느냐. 도는 청(靑)처짐하게 이루어 지느니라” 이달 15일 밤에 윤금현이 여쭈기를 “어느 비결에 ‘청실기주(靑失其柱) 향무일점(香無一點)’이라는 구절이 있사온데 그 뜻을 하교하옵소서”하니, “너희 스스로 알게 되리라” 하셨다.
23일 조회시에 박한경에게, “너를 도전(都典)으로 임명하노라. 앞으로 도전은 종전과 같이 나의 시봉(侍奉)만 하는 직책이 아니라 도중사를 책임하여야 하리니 도무(道務)에 충실하도록 하라”하명하시고 오치국에게, “너를 도전에서 해임함은 과오가 있음이 아니라 직제(職制)를 변경한 연유니라”하셨다.
이에 앞서 1년 전에 부전 이인호가 상고도 없이 산실(産室)에 출입한 부정(不淨)이 있음에도 도장에 올라와 근신(謹愼)하는 기색이 없으므로 해임하시고 후임을 공석으로 두시더니 이달 24일에 유철규를 임명하셨다. 이날 밤 초경에 회룡재에서 학정 김영하와 도정 영대시봉 이창로가 소관업무 관계로 시좌(侍坐)하였을 때 숭도부인(崇道夫人)께서 도주님께, “한경의 위인이 나약(懦弱)하여 도중사 전반을 책임하는 도전으로는 미흡하지 않나이까”하고 사뢰니 말씀하시기를, “나도 그러함은 아오. 그러나 협의회가 있으니 부인은 과념(過念)하지 마시오. 사람을 쓰는데 소인인 줄 모르고 쓰면 실패하지만 알고 쓰면 쓰는 데는 아무 걱정이 없소. 상제님 앞에도 경석(京石)이 있지 않았소”하셨다. 이튿날 낮에 도주님께서 시봉을 부르는 초인종을 울리시므로 박한경이 대령(待令)하니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시봉만 하는 도전이 아니니 초인종이 울려도 네가 오지 말고 다른 시봉을 보내고 너는 임원들과 상의하여 도무를 처리하라”하셨다. 25일 밤에 박중하가 도주님께 여쭈기를, “이번에 임명하신 도전의 직무는 종전의 시봉원 책임자와 어떻게 다르옵니까”하니, “전 도전은 시봉원 수임(首任)이 주무(主務)였으나 신 도전은 시봉원 수임 겸 도중 제원의 업무 전반을 책임지되 협의회의 의결에 따르면 되느니라”하셨다.
박중하가 종전의 제도와는 상이(相異)한 말씀이므로 다시,“그러하오면 어떻게 되겠나이까”하니,“방촌지목(方寸之木)도 가사고어잠루(可使高於岑褸)니라”하셨다.
박중하가 그 뜻을 더욱 깨닫지 못하겠음을 사뢰니, “근본을 헤아리지 않고 그 끝만을 보면 천마산 꼭대기에 세운 숟가락이 산보다 더 높아보일 수 있다는 뜻이니라. 모든 임원이 권한만 알고 의무를 모르면 범람하여 본말(本末)이 전도(轉倒)되기 쉬우니 너는 협의회 의장으로서 한경이 그리 되지 않도록 책선(責善 : 친구끼리 서로 착한일을 하도록 꾸짖고 권함)하라”하셨다.
26일에 도주님께서 임원들에게, “도인(盜人 : 도둑)을 비방하랴 음인(淫人 : 음탕한 사람)을 매타(罵咤 : 욕하고 꾸짖음)하랴. 남의 말을 하지 마라. 마음 지키기가 죽기보다 어려우니 너희들 스스로의 심도(心盜 : 마음에서 우러나는 도둑질), 심음(心淫 : 마음에서 우러나는 음탕함)을 신명이 매타함을 두려워하라. 도인은 오직 무자기(無自欺 : 스스로 자기 마음을 속이지 않음)니라”하고 가르치셨다. 또 이렇게 하교하셨다.
“내 일찍이 구천상제의 명과 교를 받들어 무극대도의 진체(眞體)를 체득(體得)하고 태극진리를 진용(眞用)으로 설법하여 오늘에 이름은 오직 군생(群生)을 광구(匡救)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오늘에 가도(假道), 비도(非道)가 천하에 횡행하며 방자하게 세인을 혹(惑)하고 있으니 실로 가탄지경(可歎之境)이니라”“어찌 오늘 뿐이랴. 장래에는 무극의 진체와 태극의 진용을 봉대(奉戴)하면서도 도인의 수도와 미도인(未道人)의 포덕을 오도(誤導)하여 세상을 어지럽히고 사람들을 미혹(迷惑)하게 할 자가 있으리라. 이 실로 가체 가용자보다 더욱 이단난적(異端亂賊)이 되리니 너희는 오직 정도(正道)를 닦고 정법을 지켜라. 구천상제께서도 공명(孔明)과 마속(馬謖)의 고사(故事)를 들어 경계하셨느니라.” 하셨다. 27일 낮에 도주님께서 박중하, 이윤섭에게,“너희들이 나의 주송소리를 유심히 들어보았느냐”하고 하문하셨다.
그들은 평소에 도주님을 측근에서 시종하면서도 공부내용을 규시절청(窺視竊聽)함이 막중한 금기(禁忌)임을 명심 봉행하였으므로 “없나이다”하고 사뢰니, “주송은 항상 음률(音律)에 맞아야 하느니라”하셨다.
이날 밤에 그들은 각기 마음 속으로 도주님께서 하문하심은 필시 들어보라고 하신 뜻으로 생각되었으나 서로 말하지는 못하고 각자 은밀히 법단 옆에 나아가 경청(傾聽)하니 그 고저청탁(高低淸濁)은 물론 유량청아(淸雅)하심이 마치 선악(仙樂)을 듣는 것과 같음에 심취(心醉) 되었다가 그 경청한 행동이 금기사항(禁忌事項)임을 깨닫고 고대 물러나왔다.
이튿날 박중하가 이윤섭에게 지난 밤의 경청사실을 말하니 이윤섭도 그러하였음을 말하고 함께 감복하였다. 28일에 도주님께서 지난 해 11월 18일 시학공부 시작할 때 설석하셨던 백일공부를 마치신 다음 상급 임원들을 중궁에 시좌(侍坐)시키시고 다음과 같이 명교(命敎)하셨다. “이제 내가 이 세상에서 볼 도수는 모두 마쳤으니 이로써 종필(終畢)이니라. 앞으로 남은 일은 오직 너희들이 나의 50년 공부 종필로써 짜놓은 진법의 법방을 수행하여 대도를 성취함에 있느니라” “내가 이제 구천상제께서 짜놓으신 도수를 풀었다 함을 너희들이 바로 요지(了知 : 깨달아서 앎)하느냐. 때가 이르면 나도 인신(人身)을 해탈(解脫)하고 옥경(玉京)으로 돌아가리니 진실로 이 말을 헛으로 듣지 말지니라. 이미 지기금지사월래(至氣今至四月來)요 운래청룡시사월(運來靑龍是四月)이니라”
“나의 공부종필의 참뜻을 다시 한 번 말하리라. 구천 무극주께서 친히 9년공사로써 도수를 짜놓기만 하셨으니 그것은 체요 원리니라. 나는 도로써 용하여 만수도인을 만들어 기르고 무극, 태극의 창도(創道)를 함이니 이 실로 무극의 정(定)에서 생겨난 태극진리의 기동도수니라. 그러므로 나의 공부는 도를 어떻게 믿고, 배우고, 닦고, 행하라는 진법이니 솥이 있어야 시루를 쓰는지라. 이로써 증정지도(甑鼎之道)와 증정지덕(德)과 증정지교(敎)와 증정지학(學)과 증정지수(修)와 증정지화(化)가 성취됨이니라” “나의 공부는 곧 구천상제의 도수와 음양이며 동정(動定)이며 본말(本末)이며 전후(前後)며 백중(伯仲)이니라. 음이 있고 양이 있음으로써 태극이 기동함이니 이로써 종필이니라” “너희들이 나를 보고 나의 법방으로 도를 알고 닦음은 실로 다행한 일이나 후세에 나를 보지 못하고 믿는 도인들의 신심은 더욱 커야 하리라. 나의 인신이 보이지 않아도 나는 너희와 길이 함께 있으며 또 도와 함께 있으니 도인의 심령신대(心靈神臺) 가운데 나도 항상 함께 하고 도도 함께 함이니라. 상제께서 ‘내가 너희 앞에 있은들 알며 뒤에 있은들 알랴’ 하심은 나의 일이니라”
“내가 명한 수도법방은 공부종필의 총결정(總結晶)이며 전무후무한 삼계의 진법이니 유구(悠久) 5만년 도인의 규구(規矩)라. 수신(修身), 수도, 영통(靈通), 도통이 이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느니라” 이날 밤 자정에 정급 신경희(申景熙)로 부터 ‘도주님께서 갑자기 미령(靡寧)하시다’는 전갈(傳喝)을 받은 상급임원들이 황망히 법단에 올라가 뵈니 환후가 위중(危重)하시므로 옥체를 회룡재 정침(正寢)으로 옮겨 모시고 밤새워 시탕(侍湯)하였으나 차효가 없으셨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도중가족들에게 전편(專便) 또는 서신으로 알리는 한편 최근욱(崔根郁), 김재복(金載福)등 의사를 불러 양방(洋方), 한방(韓方)의 약물, 주사, 침구 등 지극성심으로 치료하였으나 어환(御患)은 여전하셨다. 도주님께서 치료를 받으신 지 7일째인 3월 초5일 인시(寅時) 경에 몸소 기동하셔서 산회당(山會堂)으로 옮겨 누우셔서 가족과 임원들이 올리는 약과 미음을 드시지 않으시며 다음과 같이 간곡하게 분부하셨다. “이제까지 7일간이나 너희들이 나의 병구원을 할 만큼 하였느니라. 이는 지금껏 너희들의 원을 풀어 주려고 약과 침을 주는 대로 받았으나 약은 쓰고 침은 아플 따름이니 이제부터 의약을 전연 쓰지 말라” 도주님의 간곡한 분부는 다음과 같이 계속되었다.
“나의 갈 길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오직 구천상제께서 짜 놓으신 ‘여아동거’(與我同居)의 도수니라, 내가 일찍이 명교를 받든대로 공부를 종필하고 천계(天界)에 올라 구천상제께 뵈오리니 상제님과 나는 도로써 일체임이니라. 그러한 원시반본(原始返本)의 대도수를 모르고 너희들이 인간의 정으로 걱정함이 안타까우니라”
가족과 임원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다가 여러가지 의논 끝에 천식(喘息)에 특효약이라는 백복령(白茯笭)과 추석(秋石)의 가루가 맛도 냄새도 빛도 없음을 이용하여 간간이 드시는 냉수에 몰래 타서 올렸으나 이미 아신 듯, “이도 또한 약이니라”하시며 드시지 않으시고 거듭 올리니 냉수조차 물리셨다.
이날 낮에 도주님께서 임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구천상제님께서는 화천 직전에 창생의 질병을 대속(代贖)하셨으나 나는 이미 50년 고행으로 대속하여 후천 창생으로 하여금 안락을 누리게 하였노라”하셨다. 이튿날 묘시(卯時)경에 환후가 쾌차(快差)하신 듯 의연(毅然)히 일어나 앉으셔서 침구조차 치우게 하시며 소세(梳洗)하신 다음 새옷을 갈아입으시므로 가족과 임원들이 기뻐하면서 수라를 올렸으나 역시 물리셨다. 또 진시(辰時)경에는 박한경과 김용화를 존전(尊前)으로 부르셔서 예금통장, 인장, 패물상자는 한경에게, 창화증권(倉貨證券 : 전남 강진 어느 창고주가 벼 700석을 보관하고 발행한 증서)은 용화에게 각각 내려 주시며, “이는 도중의 공유(公有)니 너희들이 각기 잘 보관하였다가 후일 공의(公議)에 따라 도중사(道中事)에 쓰도록 하라” 하셨다. 사시(巳時)경에 상급임원을 명소(命召)하시므로 모두 나아가 정사 대청에 부복하고 도중가족은 산회당 실내에 시좌하니 대강전의 영대문을 비롯한 도장의 모든 문을 열어 놓게 하시고 먼저 장자 청봉(靑峰)에게 하명하시기를, “나의 도는 요·순·우 상전지법(堯舜禹相傳之法)이니 너는 위선봉솔(爲先奉率)에 전념하고 도중사에는 일체 관여하지 말라”하셔서 다짐을 받으셨다. 이어 임원들에게 하명하시기를, “50년공부종필이며 지기금지 4월래가 금년이니라. 나는 가노니 내가 없다고 조금도 낙심하지 말고 나의 법방과 사업을 푼각(分刻)도 어김없이 잘 행하여 나아가되 일심으로 믿고 닦아서 다시 만나자”하셔서 또한 일동으로 부터 다짐을 받으신 다음 와석(臥席)하셨다. 잠시 후에 와석하신 채 손을 좌우로 흔드셔서 내쫓듯 하시며, “도적놈 내쫓아라”하시고 이를 여러번 반복하시므로 임원들이, “여기에는 도적이 없나이다”하였으나, “아니다. 있느니라”하시며 또 반복하셨다.
이때 임원들 뒷쪽에서 김재복과 이인호 등이 물러가므로 존전(尊前)에 부복했던 박한경은, “이제 없나이다”하고 숭도부인께서는, “만수도인을 어이 하시려고 이러시나이까”하시니 급히 일어나 앉으셔서 정색하시며, “도인들은 엄려없소. 내가 해 놓은 대로 하면 되오”하셨다. 이때 도주님께서는 노기(怒氣)로 어안(御眼)에서 화광(火光)을 발하시며 박한경의 머리채를 잡아 몇 차례 흔드시므로 숭도부인께서 만류하시니 어수를 내리시고 다시, “도적놈 도적놈”을 반복하시며 와석(臥席)하셨다. 이날 하오 1시경에 도주님께서 화천하려 하시므로 시측(侍側) 한 가족과 임원들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청봉이 급히 대석(臺石)에 내려가 오르손 약지(藥指 : 무명지)를 돌로 찧어서(이때 상한 뼈는 끝내 접골(接骨)되지 않음) 선혈(鮮血)을 도주님 어구(御口)에 드리우니 호흡을 가다듬으시고, “도연(徒然)한 일을 하지 말라. 구천(九天) 알현(謁見)의 시각만 늦어진다”하셨다. 이로부터 30분 후에 “감나무골”을 분부하시며 다시 화천하려 하시므로 비록 금하신 일이나 김재복이 창황(蒼慌)중에 최후의 구방(救方)으로 준비하여 숨기고 있던 강심제(强心劑)주사를 놓아드리려 하니 도주님께서 어수로 주사기를 달라고 신호하시므로 부득이 손바닥에 올려드리자 그대로 방 바닥에 엎으시니 주사기가 파손되었다. 이때 용성(龍聲)으로 “대강(大降)대강”하시는 옥음(玉音)과 함께 기식을 거두시고 화천(化天)하시니 이날이 도력기원 50년 무술(戊戌 : 1958)년 3월 초6일(양력 4월 24일)이고 일진은 신미(辛未), 시각은 을미(乙未)시니 하오 1시 37분이며 도주님의 인세향수(人世享壽)는 64년이셨다. 화천 당시에 도중 가족 전원과 임규오, 오치국, 박중하, 김명구, 이윤섭, 박한경, 김용화, 유철규, 신상철, 김영하, 이갑성, 김해구 외 10여인의 임원이 시측(侍側) 임종(臨終)하였다. 도주님께서 화천하시자 청천백일(靑天白日)에 뇌성벽력이 크게 일어나고 정사와 대강전으로부터 5색 광채가 충천하였다. 이때 시내에 있던 중부 도인들은 산너머(감천)으로부터 비쳐 오르는 광채를 화재의 불빛으로 알고 화급히 감천으로 돌아오고 부산 소방서에서는 소방차 2대를 감천 동구까지 긴급 출동시켰다. 도본부에서는 도주님 화천을 도 내외에 알리고 전체 도인의 3년 도상(道喪)을 공포하니 애통하는 도인들의 호곡성(號哭聲)이 감천 동학(洞壑)에서 천마, 옥녀에 메아리쳤다. 이날 화천이 공포되자 삽시에 몇 만 마리의 참새떼가 구름처럼 날아들어 도장 상공과 천마산, 옥녀봉을 선회(旋回)하다가 해질 무렵에 흩어지더니 그 후 매년 이날을 전후하여 한 번씩 이와같이 하였다. 능지는 도주님께서 몇달 전에 임규오 등에게 암시(暗示)하시고 화천 직전에 ‘감나무골’을 분부하심에 따라 정한 천마산 서쪽 기슭 감나무골의 간좌곤향(艮坐坤向)이며 인산대전(因山大典)은 3월 20일에 15일 도장(道葬)으로 모셨다. 인봉(因封)을 마친 지 3일 후인 22일 낮에 능소 봉분(封墳)의 동반부(東半部)가 갈라져서 몇 자나 가라앉았으므로 도중이 경악(驚愕)하고 당일로 수축하였다. 도중에서는 능호(陵號)를 정산릉(鼎山陵)으로 봉대(奉戴)하고 그 경내 동측에 시릉각(侍陵閣)을 지어 능시봉(陵侍奉)을 두고 수호토록 하였으며 매년 2월과 8월에 도중의 의례절차(儀禮節次)에 따라 능향(陵享)을 봉행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