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마니아로서 권하고 싶은 자전거 타기-김명수
이 회고는 대열임관50주년 기념책자 (가칭: 대열 반세기 여정) 3부에 포함시킬 예정인 <취미생활 동기생들의 활동 약사>를 수록하기 위해, 그간 대열카페 공지사항과 갤러리에 등장했던 기록들을 정리한 것 외에, 추가로 모은 동기생 취미활동 이야기의 하나입니다.
대열 자전거 동호회 일원이기도 한 김명수의 자전거 이야기로서, 기념책자 수록 여부와 무관하게 취미 스포츠활동의 하나로 더해 올립니다. -편집위원 김명수 (註)-
나의 자전거 이야기
몽산포겨울바다
즐기면서 마니아 입문
2004년 6월 송파 방이동에서 강남 도곡동 사무실까지 자전거 출퇴근을 시작했다. 2006년 9월 성동고 동창 자전거동호회 “BIKEHOLICS”를, 2011년 5월엔 대열동기생 동호회 “쟌차부대”도 결성해 주말 라이딩에 들어가 17년간 정기적인 것만 손꼽아도 710회를 기록한다.
동호회의 주말 라이딩은 처음 한강과 지천(支川)들인 중랑천-왕숙천-창릉천-탄천-양재천-안양천 등을 포함 한강 수계(水界)의 자전거길을 섭렵했는데, 2009년 이후 자전거인구 폭발로 한강수계가 복잡해져 안전을 고려해 동두천-연천-포천-현리-청평, 구리-퇴계원-금곡-마석, 양수리-양평, 퇴촌-광주-오포-용인, 과천-의왕-안양-산본-반월, 수원-기흥, 시흥-소래-인천 등의 수도권까지 영역을 넓혔다. 호승심(好勝心)과 정복욕이 작용한 것이었다.
2010년 이후는 전철운행이 천안-춘천-영종도까지 연장되고 공휴일 자전거탑재도 허용돼, 독립기념관과 현충사, 서해포구와 강화도-신시도-자월도-장봉도-무의도 등 섬, 춘천호반과 홍천강 등으로까지 확장할 수 있었다,
라이딩 범위는 부채살처럼 퍼져나가 김포-강화-교동도, 파주-문산-임진각, 동두천-철원-월정, 청평-가평, 용문-홍천, 안산-오이-시화-대부-영흥-제부도 등 광역권으로 영역을 넓혔다.
한반도 해안 라이딩에도 들어가, 교동도-강화도-서해7도-태안반도-새만금방조제-변산반도-신안 다도(多島)-진도-완도-청산도 등 서해안지구, 울산-구룡포-울진-삼척-강릉-속초 구간의 동해안지구도 마친 상태다.
특별기획으로 산간지대와 역사문화탐방 라이딩도 병행, 일찍이 제주도해안종주를 마쳤고, 영월-단양 동강코스와 충주 청풍호 등 강변과 호반의 절경도 함께 했으며, 대관령을 비롯해 운두-구룡-한계-미실-진부-고치 등 고산준령을 넘고, 함백산 정상과 만항재, 운탄고도도 달려보며 장쾌한 험로산행을 맛보았다. 4대강 개발로 조성된 국토종주자전거 길도 완주한 상태다.
대마도의 동북단 히타카츠 항에서 서남단 이즈하라항까지 해안도로를 종주하며 해외원정 라이딩의 첫발을 내디디기도 했다.
이밖에 수많은 내륙의 저수지 길 등, 달려본 아름다운 코스를 다 헤아리기 힘들 정도인데, 소수의 개별 라이딩도 대단해, 설악산과 평화의 댐에 이르는 고산준령을 넘나들며 일거에 360km를 달리거나, 북한강 남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섬진강 충북5천 길을 발원지 샘터에서부터 하구 바다까지 수백km를 샅샅이 훑었다.
모험성 짙은 홀로 라이딩으로는, 수도권 불곡산 인릉산 등 얕고 완만한 등산로 타기와 매화산-며느리고개, 해룡산-왕방산, 새덕산-봉화산-강촌 등 mtb 챌린저 정식대회 구간을 포함한 수많은 임도타기도 즐겼다. 70중반 지금도 악! 소리 나는 경사의 산악도로 임도 타기의 매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2014년 이후의 가족사정상 여가를 못내, 한반도 해안 라이딩 완주와 전국 하천 호수 타기, 모든 섬 라이딩, 백두대간준령 넘기 등을 못했고, 자전거로 세계 일주를 하는 절정고수들에 비할 수는 없지만, 이만 하면 스스로 자전거 타기의 마니아라 자부해도 될 듯싶다.
또한 이 글의 동기를 부여한 대열임관50주년 개별 회고로서 대열 동기생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취미활동 이야기 속에, 다른 친구 등산과 함께 내 자전거를 포함시켜도 되지 않을까? 한 것이다.
자전거에 대한 추억
이참에 오래 동안 쓰고 싶던, 뜻하지 않게 70넘어서까지 자전거를 즐기게 된 나의 자전거 이야기도 함께 전해 남기고 싶다.
자전거를 가까이 느낀 건, 1958년 강원도 삼척 도계초등학교 4학년 시절 급우(級友) 박복만이가 읍내에서 잡화점 하는 자기 아버지의 성인용 자전거를, 탑 튜브와 다운튜브 사이로 짧은 다리를 넣어 용케도 잘도 타고 다녀 부러워했던 것이 처음일 것이다.
현대의 창업주 고(故) 정주영 회장이 젊은 시절 강원도 통천에서 쌀 2가마를 배달하며 탄 걸로 유명한 무거운 철제 짐자전거와 함께 보다 날렵한 알미늄(?) 승용자전거도 당시에도 있었으며, 보통 자동차수리소와 함께 운영하던 자전거포가 여기 저기 있을 정도였다고 기억된다.
초등학교 6학년인 1960년엔 그 친구네 자전거에 모터가 달렸고, 1967년 생도시절 찾아가 만났던 친구는 300CC쯤으로 기억되던 모터사이클을 타고 있었다. 우리시대 탈 것의 빠른 변화속도에 비례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전거는 1790년 프랑스에서 시작됐다 했고, 우리는 일제(日帝)시대의 엄복동 선수가 자전거대회에서 일본선수들을 통쾌하게 이겨 압제받던 민족의 울분을 해소시켜 주었던 것이 1913년이었으니, 우리 자전거의 역사도 그만큼 오래 돼 가고 있다 하겠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 소중한 자전거의 추억은, 비록 간접적이지만 평소 아들들에게 전해준 우리 아버지의 자전거 이야기에게서 비롯된다.
1914년생 아버지는 일찍 여의신 조부를 대신해 5살 연하의 고모를 돌보며 20대이던 1930년대 초반 고모를 ‘수원고등잠사학교’(지금 수원여고의 전신)로 유학 보내면서, 홍천군 두촌면 자은리에서 수원까지 200여 km를 자전거에 태우고 갔었다는 이야기였다. 그 거리야 지금 같으면 20대 청년의 체력으로 하루 정도에 주파하겠지만. 그 옛날 울퉁불퉁 먼지투성이 자갈길 신작로에, 화촌 말고개, 홍천 며느리고개, 양덕원 신당고개, 용두 용머리고개, 용문 비룡고개 등 수많은 고개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더욱이 당시 자전거의 기어가 극히 단순해 다리 힘에만 의존했었던 사정을 생각한다면, 상상하기 힘든 역경의 여정이었다 할 것이다.
그 자전거를 내가 직접 탄 건, 1961년 중학교를 서울로 진학하려고 유학 와 신설동 고모네 집에서 신세질 때다. 신설동 로터리 동남코너, 지금의 동대문우체국 일대는 당시엔 경마장과 비행장이었다 철거된 거대한 아스팔트광장으로 남아 있었고, 학생들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인근 자전거포에서 빌린 자전거로 타기를 배우거나 즐기던 때였다.
덕분에 나도 자전거를 배운다고 했지만, 중학교 입학직전 짧은 시간 대 여섯 번 정도 맛 본 것이어서, 자빠지기 일쑤였고 삐뚤삐뚤 뒤뚱거린 수준인 채로 그만 두었었다. 그래서 난 어린 시절부터 익힌 친구들처럼 두 손 놓고는 절대 타지 못한다. 그건 위험하다는 핑계를 대면서 자위한다.
그 실력이나마 되살려 자전거를 본격적으로 탄 것이, 전방과 지방 떠돌이의 군복무 중 모처럼 서울 거여동 특전사령부로 발령받아온 1976년 3월. 봉천 사거리 근처 집에서 출퇴근했던 시절이었다.
훈련으로 단련된 청년장교 체력은 15년 전 초보 수준이던 자전거 실력도 바로 힘을 발휘하게 했다. 전방 7사단 창설기념일 연대대항 체육대회에 자전거 경주도 있었는데. 당시 친해 지금도 만나는 우리대대 소대장 학군9기 친구가 신작로길 자전거 통학 실력을 살려 당당하게 1등을 해 무척 부러웠었는데 그 자전거를 나도 통근하며 타게 됐던 것이다.
자전거 출근경로는 낙성대-사당동고개-사당-반포-잠원-신사-압구정(또는 논현동고개)-청담동-봉은사고개-잠실-장지로 이어지는 약 30km에 달했다.
지금은 강남 금싸라기 땅이지만, 당시의 압구정 청담동 일대는 똥지게 지고 다니는 배추밭 풍경이었고, 막 개발되던 잠실지구도 단지(團地) 형태만 가각(街角)블록으로 표시된 잡초 무성한 야지였을 뿐이고, 지금 파크리오 아파트단지 자리에 시영아파트만 댕겅했었을 뿐이다.
잠실에서 특전사입구 장지동으로 가는 길은 송파(松坡)라는 지명이 말하듯 소나무 구릉(丘陵)들을 파헤치며 넒은 길을 내면서 곳곳이 흙탕물 범벅이었음이 생생하게 기억된다. 지금 송파대로의 신설공사였던 것이다.
그 자전거 통근도 1977년 1월까지로 그만. 오랜 세월 직장 변화와 자전거 타기 공백을 지낸 2004년 6월. 모두(冒頭)에서 말한 대로 송파구 방이동 집에서 강남구 도곡동 사무실까지 왕복 자전거 출퇴근을 시작하면서, 자전거가 내 인생의 확실한 스포츠 취미생활로 찾아들게 됐고, 앞서 열거한 힘차고 멋진 라이딩들을 즐기게 됐던 것이다.
자전거 타기의 도약
도곡동 영동3교 옆 “I”빌딩 8층 창밖으로 양재천변 자전거 길을 내려다보고 힌트 받아 자전거 출퇴근을 시작한 나는, 고교동창 치과의사 진료를 받으며 허리를 비튼 자세로 환자를 치료하는 직업병으로 고통 받던 친구에게 건강증진을 위한 자전거타기를 권했고, 효과를 본 친구와 죽이 맞아 고교동기동창 자전거동호회 “BIKE-HOLICS”(자전거에 중독된 사람들이란 뜻)를 만든 것이 2년 후인 2006년 9월.
이슈 하나 잡으면 파고드는 S대 출신 학구파 치과의사 친구가, 대장을 맡아 멋진 동호회 이름도 지으면서 자전거상식 전반을 철저히 공부하고 팀원들에 전파한 덕분에, 자전거 종류와 명품, 구조와 부속품, 필수 장비와 휴대품, 간단한 수리 가능한 미케닉(mechanic), 안전하게 즐기면서 탈 수 있는 개별 및 팀 라이딩 요령 등, 덩달아 자전거 박사가 되어 갔다.
출근과 동호회활동 초기, 아들에게 사주었지만 타지 않던 생활자전거 ‘삼천리 ALTON’으로 시작한 내 자전거도, 같은 알루미늄제품이지만 비포장임도도 타는 스포츠용 mtb자전거 TREK6000으로 상향되었다가, 다시 호가 1천만 원이 넘는 명품 자전거 티타늄 MOOTS로 업 그레이드 되어갔다.
여기서 이야기가 길어지니 전반적인 자전거 상식에 대한 나만의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넘기고. 먼저 자전거를 즐기기 위한 핵심만을 먼저 전한다.
자전거의 동력은 체력이니 달리기를 기초로 한 근력운동에 힘써 주력(走力) 을 키워야하고, 장거리 라이딩에서의 고장과 사고에 대처할 기계적 상황적 대처능력구비가 필수다. 명품 자전거인들 엔진이 부실하면 무슨 소용일까?
내 경우는 자전거를 타고 멀리 높이 오르는 운동효과 증진의 즐거움보다는 역마살 낀 역마직성(驛馬直星)탓인지 효율적인 여행기회의 증폭에 보다 더 무게를 둔다. 길 욕심이 많아 차로는 갈 수 없는, 그러면서 등산이나 트래킹으로는 하루에 다 돌 수 없는 조국산천 아름다운 구석구석을 많이 갈 수 있다는 데에 환호한다.
더욱이 그 코스를 내가 디자인해 가면서 예상했던 새로운 길들이 실제로 눈앞에 펼쳐질 때와 예상 못한 난관을 극복해 가는 과정에 희열을 느낀다.
그 길을 어떻게 멋지게 디자인하고 극복해가는 가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면서 일단 첫 내 자전거 이야기는 여기서 마감한다.
대열 자전거 동호회를 소개하면서도 강조했지만 자전거 타기는 모터사이클처럼 주행 중 전방에 시시각각 나타나는 장애물이 조성하는 위기들을 본능적인 찰라의 판단과 대응으로 극복해 가다보면, 노년의 몸 치매를 예방하는 최적의 효능을 보여준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권한다, 젊은 시절처럼 스피드 있는 BIKE RIDING이 아니라 자전거로 주유천하하는 BIKE HIKING을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난 요즘 “BIKING”을 한다고 한다.
17년이나 자전거를 타지만, 내일 자전거 타러 나갈 이 밤엔 어린 시절 소풍 전날처럼 지금도 늘 가슴이 뛴다. 끝 §
2021.6.28.
김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