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끼 앞에, 뿌리
이 홍사
발가벗은 뿌리는 초췌한 표정으로 줄을 섰다 표를 끊는다 어느 하늘로 가는 기차인지 모른다 무작정 오줌으로 표시한 개의 영역을 벗어나야 했다 창구에는 예매하려는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새치기하는 나무는 없었고 뿌리는 저마다 번개의 죽음을 향해 던질 꽃을 쥐고 있었다 그가 앉았던 회전의자가 살해되었다 판을 완전히 뒤엎었어야 했는데 늦은 후회가 명치에 칼날처럼 꽂혔다 앉은 자리에 꼬리뼈를 실하게 박아 내리기에 자갈땅은 척박했다 실뿌리는 참혹한 현실에 무릎을 꿇고 지나가는 바람에게 빌고 있었다
뿌리가 해고되었다
그를 지칭하던 직급이나 호칭 따위는 이미 내장이 터져 길바닥에 흥건했다 붉은띠를 이마에 두르고 내지르던 함성은 아스팔트 밑에 납작하게 깔려 숨통이 끊어졌다 아스팔트 위로 무수한 바퀴가 바람을 일으키며 차갑게 지나갔다 이젠 줄기의 왼쪽으로 뻗은 가지조차 뿌리의 선동적인 화법에 흔들리지 않았다 모가지가 날아간 외래종 활엽수 이제 숲에는 더 이상 잡목이 없다 모두가 근실하게 쭉 곧은 침엽수뿐 나무는 더 높이 자라기 위해 햇빛을 향해 마디가 불거진 손을 길게 뻗었다
계절은 바뀌었다 지난겨울 얼음장 아래로 물은 흘렀다 창밖에는 휘날리는 눈보라 알몸의 뿌리가 싹을 틔우기에는 엄혹한 시절 나서야 한다 맨발로 저 매서운 들판으로 알몸으로 나서기에는 바람이 매섭고 햇빛이 강열했다 전별금을 고사하고 손을 흔들어주는 가지도 없다 뿌리의 등짝에는 도끼가 꽂혀 있었다 줄기가 벼린 무쇠 도끼였다 늘 뿌리임을 빙자하여 줄기와 가지의 물을 빨아 먹었다
돌이키니 뿌리는 비닐 온실에서 거꾸로 자랐다 허공에 뿌리를 두고 뿌리는 결코 자학하지 않았다 그를 남겨두고 줄기와 가지는 이미 따스한 불의 자궁으로 들어가 팔베개를 하고 누웠다 뿌리는 맨발로 길을 나서야 했다 기차를 타야 한다 벼락을 찾아서 가는 기차 뿌리의 손에는 번개의 죽음에 바칠 꽃이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