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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0713. 연중 제 15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7.13 05:27 - 잔정 때문에 큰 사랑을 놓치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오늘 주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시고, 일치가 아니라 분열을 주러 왔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껏 알고 있는 것과 당연히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우리가 평화롭기를 바라시고, 우리가 일치를 살아가기를 물론 바라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빼놓고 우리끼리만 평화롭고 일치되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과도 일치하고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에 일치하는 일치를 바라십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일치하지 않는 일치는 신앙인에게는 일치가 아닙니다. 같은 맥락에서 주님을 따르지 않는 일치는 칼같이 끊어야 하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칼을 주러 왔다 하십니다. 사실 칼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끊어버리는 기능과 찌르는 기능입니다. 찌르는 칼은 죽일 때 쓰는 것이고 당연히 이 칼은 주님께서 주시는 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칼은 끊어버리라는 칼입니다. 욕심을 끊어버리는 것부터 온갖 인연을 끊어버리는 것까지,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에 어긋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끊어버리는 칼입니다. 프란치스코도 그래서 아버지를 끊어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시다시피 프란치스코는 주님의 가르침 대로 가진 걸 다 나눠주려고 했고 아버지는 그것을 반대하여 그에게서 상속권을 뺏으려고 재판을 걸었습니다. 그때 주교님 앞에서 프란치스코가 속옷까지 다 벗어 아버지에게 돌려주며 이제부터 자기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자유롭게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 선언하였고 그는 그렇게 아버지와의 관계를 칼같이 끊어버립니다. 요즘 아들의 살인 범죄를 조금이나마 줄이려고 한 경찰 아버지와 경찰들의 조직적인 조작 문제로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너무나도 잘못된 것이고 잘못한 것이지만 자기가 뒤집어쓰면서 자식에게 최악은 면하게 하려고 한 아비의 사랑과 희생은 제가 보기에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강하고 질긴 것이 부모 자식 간 사랑이기에 칼로 끊어야 하고 칼처럼 끊어야 하는 것이고, 이것이 자기에게도 아들에게도 더 참되고 완전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것을 주님께 가르침 받고 있고 머리론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들 하실 텐데 그게 그 아비에게서 볼 수 있듯이 너무 힘들고 괴로운 노릇입니다. 어쨌거나 괴롭고 힘들어도 끊어야 합니다. 스스로 끊든지 그렇지 못하면 하느님께서 끊어주시든지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를 포함해서 잔정 때문에 큰 사랑을 놓치는, 그런 우를 범하지 않는 오늘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 260713. 연중 제 15주간 월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갈망이 사랑이 되기까지 3. 이것이 내가 원하는 바다 갈망이 사랑이 되기까지 3. 이것이 내가 원하는 바다 복음은 언제나 한 사람의 갈망을 찾아옵니다. 말씀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마음속 깊이 숨어 있던 가장 참된 갈망을 깨울 때 비로소 인간은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씨앗처럼 모든 사람의 귀에 떨어지지만, 그 씨앗이 생명이 되는 순간은 한 영혼이 그 말씀 안에서 자기 존재의 이름을 발견할 때입니다. 그때 말씀은 더 이상 글이 아니라 생명이 되고, 계명이 아니라 사랑이 되며, 명령이 아니라 오랫동안 기다려 온 귀향의 부름이 됩니다. 아시시의 젊은 프란치스코는 오랫동안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살았고, 젊은이들이 꿈꾸던 명예와 성공을 좇았으며, 기사로서 이름을 얻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언제나 설명할 수 없는 허기가 남아 있었습니다. 세상이 성공이라 부르는 것들을 가까이할수록 그의 영혼은 더욱 멀리 떠나가는 자신을 느꼈고, 사람들의 환호성 속에서도 설명할 수 없는 침묵이 그의 마음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직 하느님의 이름을 분명히 알지 못했지만, 이미 하느님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때때로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이미 그것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습니다. 갈망은 언제나 의식보다 먼저 길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복음이 그의 귀에 들려왔습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말고,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다른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성경 말씀이었지만, 프란치스코에게는 하늘이 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그의 귀를 스쳐 지나간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닫혀 있던 그의 심장을 두드렸습니다. 그는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평생 찾던 것은 부도 아니었고, 명예도 아니었으며, 세상이 약속하는 안전도 아니었다는 것을. 자신이 진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복음을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자유였다는 것을. 그는 외쳤습니다. **"이것이 내가 원하는 바다. 이것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다."** 이 외침은 어떤 감동적인 결심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마침내 발견한 사람의 탄성이었습니다. 잃어버렸던 이름을 되찾은 사람의 기쁨이었고, 오랫동안 헤매던 사람이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었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이 짧은 한마디는 한 인간의 인생 전체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참된 갈망은 사람을 설명하게 하지 않습니다. 참된 갈망은 사람을 움직입니다. 영혼이 참으로 원하는 것을 만나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곧바로 신발을 벗었습니다. 지팡이를 내려놓았습니다. 지갑을 버렸습니다. 허리에 매고 있던 가죽 띠를 새끼줄로 바꾸었습니다. 세상은 그것을 포기라고 불렀지만 프란치스코는 그것을 자유라고 불렀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가진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비로소 자신을 얻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언가를 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을 붙잡고 있던 것들로부터 풀려난 것입니다. 복음은 그의 손에서 무엇인가를 빼앗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두 손을 비워 하느님을 붙들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많은 것을 가질수록 안전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프란치스코는 많은 것을 내려놓을수록 더 자유로워졌습니다. 움켜쥔 손으로는 아무도 끌어안을 수 없지만, 빈손은 세상 전체를 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지키려는 사람은 결국 삶에 붙들리지만, 기꺼이 내어주는 사람은 삶보다 더 큰 사랑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설이며,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그날 이후 프란치스코의 갈망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향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눈은 가난한 사람들을 향하였고, 그의 발걸음은 나환자들을 향하였으며, 그의 손은 버림받은 이들을 향하여 열렸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갈망은 언제나 사람을 향한 사랑으로 흘러갑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사람을 외면하는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가장 작은 이들의 얼굴을 통하여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망은 관계를 낳습니다. '어떤 것'을 원하는 사람은 결국 그것을 소유하려 하지만, '당신'을 원하는 사람은 자신을 내어주게 됩니다. 소유는 경계를 만들지만 사랑은 길을 만듭니다. 욕망은 더 많이 가지려고 하지만 갈망은 더 깊이 사랑하려고 합니다. 욕망은 사람을 경쟁하게 만들지만 갈망은 사람을 형제로 만듭니다. 프란치스코는 복음을 들은 그날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경쟁자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함께 살아가는 형제와 자매였고,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의 얼굴이었으며, 세상은 소유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찬미해야 할 창조의 집이었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복음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얼마나 많이 들었느냐가 아니라, 단 한 말씀이라도 우리 존재를 뒤흔들 만큼 들었느냐는 것입니다. 복음은 지식을 늘리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삶을 바꾸기 위해 주어진 말씀입니다. 어느 날 우리도 프란치스코처럼 가슴 깊은 곳에서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내가 원하는 바다." 그날 우리의 삶은 비로소 새로운 방향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날 우리는 세상이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실 때부터 바라셨던 바로 그 사람이 되어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갈망은 언제나 선택을 요구합니다. 두 마음으로는 한 길을 걸을 수 없고, 두 주인을 함께 섬길 수 없으며, 두 개의 왕국을 동시에 세울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갈망은 내 왕국을 내려놓을 용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 용기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자유의 시작입니다. 내려놓음은 상실이 아니라 더 큰 생명을 위한 공간이며, 비움은 결핍이 아니라 성령께서 머무르실 거처를 마련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의 외침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울려 퍼집니다. **"이것이 내가 원하는 바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조용히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는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가?"** ---------------------------------------------------- |
| 260713. 연중 제 15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10,34-11,1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는 말씀은 처음 들으면 낯설고 무섭습니다. 그러나 이 칼은 미움이나 다툼을 부추기는 칼이 아닙니다. 진리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지를 드러내고 가르는 칼입니다. 오리게네스는 이 ‘칼’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읽습니다. 말씀은 양날의 칼처럼 우리 안의 참과 거짓을 갈라내고, 낡은 나를 베어 새로운 나를 빚습니다. 그 칼이 들어올 때 잠시 아플 수 있지만, 그것은 살리기 위한 갈라냄입니다. 오리게네스에게 ‘평화가 아니라 칼’이라는 말씀은, 값싼 평온에 안주하지 말고 말씀의 진실 앞에 정직하게 서라는 부르심입니다. 이어 주님께서는 당신을 그 무엇보다 사랑하라 하시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 하십니다. 그리고 역설을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고, 나 때문에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움켜쥐면 잃고, 내어놓으면 얻는 것 ― 이것이 아낌의 가장 깊은 신비입니다. 참으로 아끼는 길은 주님을 위해 기꺼이 내어놓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엄위한 말씀이 뜻밖에도 ‘시원한 물 한 잔’으로 끝맺습니다. 가장 작은 이에게 건넨 물 한 잔의 사랑조차 결코 그 상을 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리게네스는 여기서 위로를 봅니다. 거창한 일을 못 해도 괜찮습니다. 작은 사랑 하나도 하느님 앞에서는 결코 헛되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낌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이 복음은 두 가지를 함께 말합니다. 나를 위해 움켜쥔 것은 잃고, 주님을 위해 내어놓은 것은 영원히 남는다는 것. 그러기에 가장 확실한 아낌은 작은 사랑이라도 아낌없이 내어놓는 것입니다. 그 한 잔의 물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말씀의 칼이 내 안에 들어오도록 허락하는가? 나는 무엇을 그 무엇보다 더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움켜쥐려다 도리어 잃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물 한 잔’의 작은 사랑을 아끼지 않는가? 주님, 말씀의 칼이 제 안의 거짓을 갈라내게 하소서. 당신을 위해 기꺼이 내어놓아 참으로 얻게 하시고, 가장 작은 이에게 ‘물 한 잔’의 사랑을 아끼지 않게 하소서. 아멘. ---------------------------------------------------- 260713. 연중 제 15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발견하기’를 읽고 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 수련’을 중심으로 다양한 기도의 방법을 전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그리스도교의 영성에는 두 개의 전승이 두 줄기 강물처럼 흐르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아포파틱(apophatic)’이고 다른 하나는 ‘카타파틱(kataphatic)’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아포파틱을 이야기하고 내일은 카타파틱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아포파틱은 ‘부정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말과 생각으로는 하느님을 온전히 규정할 수 없다는 겸손한 고백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계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도 믿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의 언어와 개념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바닷물을 손바닥에 담을 수 없듯이, 무한하신 하느님을 유한한 인간의 생각 안에 모두 담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아포파틱 영성은 하느님 앞에서 말을 많이 하기보다 침묵하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하느님을 붙잡으려 하기보다 하느님께 붙잡히는 길을 가르쳐 줍니다. 성경 안에서도 아포파틱의 전통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는 있는 나다.”라고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셨지만, 그 이름조차 인간이 하느님을 소유하거나 통제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엘리야 예언자도 하느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거센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 속에 계시지 않고,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 가운데 엘리야에게 다가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예상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의 삶 안에서도 아포파틱의 길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뜻보다 깊고 크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기도는 아포파틱 영성의 깊은 자리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느님을 움직이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 수 없는 하느님의 뜻 앞에 나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외치셨습니다. 그 외침은 하느님의 침묵을 경험하는 인간의 가장 깊은 고통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바로 그 침묵 속에서 구원의 신비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아포파틱 기도는 기도가 응답 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를 지켜 줍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도해도 하느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병이 낫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억울한 일이 풀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쉽게 실망하고 원망합니다. “하느님께서 정말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실까?” 하고 묻게 됩니다. 그러나 아포파틱 영성은 말합니다. 하느님의 침묵이 하느님의 부재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신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도 일하고 계십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위대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하느님에 대하여 방대한 신학을 전개했습니다. 그러나 생애 말년에 깊은 신비 체험을 한 뒤, 자신이 쓴 모든 것이 “지푸라기처럼 보인다.”라고 고백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신학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말과 이성이 아무 의미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하느님의 신비가 인간의 모든 언어와 사유보다 훨씬 크다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말할 수 있지만, 하느님을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지만, 하느님을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지만, 하느님을 내 생각 안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무지의 구름’의 전통도 같은 길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에는 지식의 구름이 아니라 무지의 구름이 있다고 합니다. 하느님을 완전히 이해해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때로 이해보다 깊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다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하듯이, 우리가 하느님을 다 이해하지 못해도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모든 답을 아는 것이 아니라, 답을 알 수 없는 순간에도 하느님께 머무르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내 뜻을 관철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 앞에서 내 마음을 비우는 여정입니다. 아포파틱 기도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검색하면 답을 얻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인공 지능에게 물으면 즉시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검색 결과처럼 붙잡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입력한 질문에 즉시 답을 출력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신비이십니다. 하느님은 인격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관계에는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침묵이 필요합니다. 비움이 필요합니다. 이해되지 않는 순간에도 신뢰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아포파틱 기도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고백하게 합니다. 내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깨닫게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언제나 하느님의 뜻은 아닐 수 있음을 받아들이게 합니다. 기도 중에 아무 느낌이 없어도, 하느님께서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져도, 그것이 실패한 기도는 아닙니다. 때로 하느님께서는 위로보다 침묵으로 우리를 정화하십니다. 감동보다 기다림으로 우리를 성숙하게 하십니다. 응답보다 신뢰로 우리를 깊어지게 하십니다. 아포파틱 기도는 바로 그 침묵의 자리에서 하느님께 머무르는 길입니다. 아포파틱은 하느님의 존재를 알기는 하지만 하느님의 모습을 온전히 알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면서 코끼리를 온전히 알 수 없듯이,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느님을 온전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합니다. 다만 하느님의 모습이 아닌 것은 알 수 있으며,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자비를 느낄 수는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하느님을 느끼지만, 하느님을 직접 볼 수는 없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만 알 뿐,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보다는 어떤 모습이 하느님이 아니신가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합니다. 기도 중에 하느님과 직접 통하지 않는다고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고 원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 260713. 연중 제 15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하신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분명,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일진데, 어째서 평화에 칼이 필요한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병든 환자에게는 수술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사실, 중병에 걸린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금은보석의 값비싼 선물더미가 아니라, 그를 수술할 수 있는 칼인 것입니다. 병든 몸에다 금은보석으로 치장했다 해서 결코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듯, 병자는 칼로 병을 도려내는 수술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 던지신 칼이야말로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칼입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한 칼이요, ‘말씀’을 이루기 위한 쌍날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내 칼을 받아라.’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의 칼’을 선사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내 목에 칼을 견주시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심장에 꽂혀 우리의 안주와 이기심을 도려내고, 세상에 꽂혀 세상의 불의와 부정을 절단하는 칼입니다. 그렇습니다.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우리 가슴에 꽂혀 우리를 살리는 칼이요, 이 세상에 던져져 이 세상을 살리는 칼입니다. 죽이기 위한 칼(살인검)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칼(활인검)입니다. 그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십니다. 평화로운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마태 5,9) 곧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칼을 주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는 한 권의 혁명서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뒤집혀진 혁명가들입니다. 그리고 “참 행복선언”을 선언하는 진복팔단은 혁명선언서입니다. 그것은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혁명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혁명가가 아니라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은총의 혁명가가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우리를 혁명가가 되게 만듭니다.”(강론, 2013.11.15) 오늘 당신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아멘. 하오니, 주님! 저희에게는 금은보석의 값비싼 선물더미가 아니라, 수술을 할 수 있는 예리한 칼이 필요합니다. 오늘 제 심장에 당신의 칼을 꽂으시어 저희를 살리소서!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주님! 칼을 주소서, 진리의 말씀인 쌍날칼을 주소서! 제게는 값비싼 선물더미가 아니라, 수술을 할 수 있는 예리한 칼이 필요합니다. 어떤 칼날보다 날카로운 당신 말씀의 칼을 주소서! 제 영혼이 꿰찔리게 하소서! 제 속을 꿰찔러 관절과 골수를 가르고, 마음의 속셈과 생각을 가르소서! 굳은살이 되어 박인 제 완고함을 도려내소서. 오늘 제 심장에 당신의 칼을 꽂으시어 저를 살리소서! 아멘. ---------------------------------------------------- 260713. 연중 제 15주간 월요일. 백재욱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은 마태오 복음서 10장의 이른바 ‘제자 훈련’이 마무리되는 대목입니다. 앞선 내용이 파견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오늘 복음은 그보다 본질적인 스승과 이루는 ‘관계성’을 다룹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꽤나 충격적인 말씀을 건네십니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마태 10,35). 이는 집안 식구들과 정말로 갈라서게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구속하며 상대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는 ‘어긋난 애착’의 오류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참된 사랑은 상대를 내 곁에 묶어 두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향한 하느님의 계획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왜곡된 사랑의 중심에는 언제나 ‘내’가 있습니다. 상대를 위하는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내가 상처받지 않으려고 또는 나의 안전과 생존을 위하여 이기적으로 선택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첫자리에 둘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 왜곡된 사랑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당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보여 주신 무조건적 사랑(아가페)입니다. 자기를 비우고 제 목숨까지 기꺼이 내놓는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바라보고 그분의 사랑을 직접 체험하지 않고서는 결코 가닿을 수 없는 경지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선포하는 제자들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는 일입니다. 그 사랑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우리의 용기는 무모한 객기가 될 것이고, 우리의 열정은 잠깐 타오르다 이내 꺼져 버리는 불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복음 선포가 쉼 없이 울림을 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언제나 우리 사랑의 첫자리에 두어야 합니다. ---------------------------------------------------- 260713. 연중 제 15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율법과 사랑의 하나 됨!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성령께서는 우리를 진복팔단의 급진적인 삶으로 부르십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율법과 사랑의 하나 됨! 2026년 7월 12일 일요일 리처드 로어 신부는 진복팔단이 어떻게 십계명의 지혜 위에 세워진 것인지를 숙고합니다: 진복팔단은 역설적인 "계명"입니다. 이 계명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하느님 나라 안에서 살아간다면 그들이 어떤 이들과 같아질지를 말해 줍니다: 그들은 영이 가난한 이들이 되고, 마음이 깨끗한 이들이 며, 자비롭고 온유한 평화의 일꾼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정의를 갈망하다가 그로 인해 박해를 받고, 또한 슬퍼할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복팔단은 제자직의 삶을 "행복한 삶"이라고 일컫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느님과 서로 올바른 관계 안에 살아갈 때, 우리는 위로를 받고, 우리의 갈망은 채워지며, 자비를 입고, 하느님을 뵙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며, 하느님의 다스림 안에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진복팔단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십계명이 그러했던 것처럼, 새로운 관계 맺음의 방식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하느님과 부모님께 존경을 드리고, 살인이나 거짓, 도둑질, 속임수, 질투를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진복팔단은 이 계시에서 아무것도 빼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것을 더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규칙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대신, 우리를 연약함과 자기 비움, 그리고 협력에 기초한 삶으로 초대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에게 "도덕적"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냐고 질문한다면, 많은 이는 진복팔단이 아니라 십계명을 먼저 떠올릴 겁니다! 그들은 법적 규범에 따른 도덕성을 생각하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제도적 법의 틀 안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큰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더 성숙한 믿음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며, 그곳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율법을 주시는 분'이라기보다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더욱 심오하게 발견하게 됩니다. [1]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문제를 자각하게 합니다. 그것은 사회에 일정한 기본 질서를 부여하고, 사람들이 그 안에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틀을 마련해 줍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단지 율법만 지키고 그 이상은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율법이 있습니까? 사랑에 빠지도록 강요하는 율법이 있습니까? 주체적으로 살아가며 무언가를 성취하거나 행복해야 한다고 명하는 율법이 있습니까? 고통받을 때 누군가가 반드시 당신을 돌보아야 한다고 규정하는 율법이 있습니까? 물론 없습니다! 사실 삶을 즐겁고 만족스럽게 만드는 거의 모든 것은 법적 최소 기준을 넘어서는 데서 비롯됩니다. 바로 율법의 글자 그대로를 넘어설 때, 삶은 참으로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이 됩니다. 우리의 영적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계명의 틀은 영적 생활 안에서 기본적이고 필요한 규칙성을 제공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계명을 넘어 축복을 찾아내려면, 진복팔단과 같은 특별한 "그릇"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법을 결코 지키지 않는다면, 하느님 나라 안에서 살아가는 행복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법조차도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율법 안에서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여, 성령께서 부르시는 더 급진적이고 심오한 영적 삶, 곧 진복팔단의 삶으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초대받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2] 우리 공동체 이야기 신시아 부르조의 포도밭 일꾼들에 대한 묵상(Cynthia Bourgeault’s meditation)은 저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하늘 나라로 초대하고 계심을 깨닫게 해 줍니다. 어떤 이들은 평생을 하느님께 헌신하며 살아가고, 또 어떤 이들은 생애의 마지막 즈음에야 그분께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 보상은 모두에게 동일합니다. —Mark S. References [1] Adapted from Richard Rohr, The Great Themes of Scripture: New Testament (Franciscan Media, 1987), 23–24. [2] Rohr, Great Themes, 135–136.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Malek Larif, untitled (detail), 2019, photo, Indi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저 나뭇잎 위에 맺힌 빗방울처럼, 진복팔단은 세상의 문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하느님 나라(kin-dom of God-하느님의 자녀들로 이루어진 왕국)를 창조해 가는 처방을 내려줍니다. ---------------------------------------------------- |
260713. 연중 제 15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스타우로포비아(십자가에 대한 두려움)을 스타우로필리아(십자가에 대한 사랑)로 바꾸기 위하여...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신약성경 가운데에서 아주 무시무시하게 들릴 수 있는 구절들 중 하나입니다. 평화의 임금이신 주님께서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하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예수님께서 요한 복음에서 하신 말씀, 즉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하신 말씀과 연결하여 찾아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요한 복음 14장은 우리가 다 알다시피 예수님께서 당신의 처절한 죽음을 목전에 두고 당신이 당하셔야 할 수난과 죽음은 제쳐두시고 제자들이 당신의 수난과 죽음 앞에서 겪게 될 충격과 두려움 앞에서, 그리고 그들 역시 당신의 일을 이어가면서 겪어야 할 시련과 고난(죽음까지도...) 앞에서 용기를 잃지 않도록 독려하시는 유언의 한 부분입니다.
이 유언을 시작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그러고는 예수님께서 이 유언을 마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너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런 권한도 없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일어나 가자!"(요한 14,29-31).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적인 평화와는 분명히 다른 것인데, 그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특별히 박해와 고난의 상황에서도 예수님과 하느님의 진정한 사랑의 힘을 용기 있고 확신 있게 믿고 따르는 데서 오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세상적 평화는 대개 싸움이나 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여전히 불화와 평화를 위협하는 요소들이 잠재해 있을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여전히 우리 에고의 이기적 야욕이 우리 내면 깊숙한 곳, 즉 무의식의 한 켠에 자리하고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요소들이 우리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한 그것은 진정한 평화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일전에 말씀드렸듯이, 어떤 언어든 "전쟁이 발발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영어에서는 "War breaks out!"이라고 합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이미 내면에 평화를 깨는 요소가 있다가 그것이 전쟁이나 싸움으로 "터져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제시하시는 예수님의 평화는 참된 평화를 위협하는 우리 무의식의 이기적 요소들을 의식하고 인식하여 그런 것들을 우리 마음에서 떼어내고자 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들과 아버지, 딸과 어머니, 며느리와 시어머니" 같은 관계성들은 참되고 드넓은 [우리]라는 자유로움으로 넘어서지 못하게 하는 "협소한 우리"를 의미하는 관계성들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관계성은 우리 에고가 "거기까지만!" 하며 고집하는 이기적 면모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평화란 병이 제거될 때 이루어집니다. 평화란 암이 도려내질 때 이루어지는 거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참된 평화란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내면과 삶 속의 근본적인 악과 병이 치유되고 제거되는 상태라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잡다한 생각이나 판단들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자주 깨어 의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이런 잡다한 생각이나 판단들에 우리의 정신이 이리저리 끌려다니게 내버려두기가 일쑤입니다. 그런 것들을 의식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런 판단과 생각들에 의해 지배당하고, 더 나아가서는 마음의 어두움을 더 어둡게 만드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내면 더 깊숙한 곳에는 하느님의 모상이 아주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도 우리는 의식하고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무의식의 생각이나 판단들을 제거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느님 사랑의 힘을 믿고 따르는 삶의 자세가 아닐까 합니다.
예를 들어, '내' 마음에 어떤 사람에 대한 미움이나 판단이 서게 될 때, 그냥 그 생각이나 판단, 미움 등에 그저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깨어 의식하여 그런 것이 하느님의 모상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에고의 이기심에서 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뚜렷하게 '의식'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물리칠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이 말하듯 우리 안에서 있는 '병'의 원인을 제거할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가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자세"일 것입니다.
미국의 가경자 풀턴 쉰 대주교(Fulton Sheen: 2026년 9월 24일에 시복 예정)는 그의 저서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에 빠르게 퍼져가는 한 가지 정신적 태도를 지적합니다. 그것은 바로 "스타우로포비아(Staurophobia)", 곧 "십자가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교의 기본 규범이며, 그리스도인의 길은 언제나 십자가의 길인데도 말입니다.
사실 우리 주님은 안일한 마음과 무딘 이해를 흔들어 깨우십니다. 그분은 편안함을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오히려 십자가에 대한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그리스도교를 삶의 방식으로 선택한 이들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또 십자가 이야기야?" "고통과 고난은 이제 그만!" "우리는 성당에 와서 위로받고 싶지,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을 듣고 싶지 않아. 우리는 영광스럽고 승리하신 그리스도만을 원해." "죄와 회개 얘기는 그만하고, 기쁨과 구원만 이야기하자구!" 하며 에고의 목소리를 내고자 합니다.
이것이 바로 스타우로포비아 – 십자가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 삶 속에 은밀히, 그러나 강력하게 스며드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원하지만… 죄를 회개하는 십자가는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축복을 원하지만… 정직하게 사는 십자가는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평화를 원하지만… 하느님 사랑의 섭리를 신뢰하는 십자가는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풍요를 원하지만… 자비와 나눔의 십자가는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선하게 불리기를 원하지만…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한 십자가는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기쁨을 원하지만… 집착을 버리고 온전히 하느님께 속하는 십자가는 두려워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스타우로포비아를 스타우로필리아(Staurophilia) – 십자가에 대한 사랑으로 바꾸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구체적인 일상 안에서 우리 내면의 생각들을 "의식"하고자 하는 노력, 혹은 수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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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13. 연중 제 15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매 순간 주님께 올리는 분향처럼!
몽골 자연 피정이 벌써 종착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첫 번째 피정이라 서툰 점이 참 많지만, 너그럽고 관대한 순례자들의 따뜻함에 힘입어 너무나 따뜻하고 가족적인 여행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불편함에도 서로 배려하고 인내하는 모습에서 짧은 순간이었지만, 언젠가 맞이할 천상 공동체를 미리 앞당겨 체험할 수 있는 은혜로운 여정이었습니다.
8월에 있게 될 2차 피정, 그리고 내년 여름 운영하게 될 4차례의 피정을 위해 활짝 열린 마음으로 피드백을 받았는데, 저를 가장 기쁘게 한 피드백이 있었습니다.
세상 귀여운 최연소 참가자 10살 어린이의 피드백이었습니다.
“내년에도 꼭 다시 오고 싶어요.”
어제는 멋진 산자락을 뒤로한 게르 캠프에서 지냈습니다.
원래는 오후 시간 단체로 뒷산을 오르기로 했었는데, 갑작스러운 낙뢰와 강우로 인해 저는 만사 제쳐놓고 홀로 게르 안에 머물렀습니다.
게르 천막을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홀로 앉아 있노라니, 마치 시계 바늘이 멈춘 듯 아주 천천히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언제 또 이런 호젓한 시간을 맛볼 수 있으려나 하는 생각에, 그 시간이 너무나 은혜로웠습니다.
그러면서 지난 제 인생 여정을 천천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니 한 순간 한 순간이 주님 섭리의 손길 안에 이어져 온 은총과 축복의 세월이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이토록 부족하고 나약하고 큰 죄인인 저를 살리시고 뽑아주신 하느님께 깊은 감사의 정이 솟구쳤습니다.
또한 전혀 자격을 갖추지 못한 저를 가족으로 받아주신 수도회가 너무 감사했습니다.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제게 남은 시간은 오로지 주님의 것이요 수도회의 것이라는 결심을 합니다.
어떻게든 주님께, 그리고 수도회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 한 구절이 더 유난히 깊이 있게 다가옵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어차피 숨 한번 끊어지면 먼지요 흙으로 돌아갈 목숨입니다.
뭐 그리 아깝다고 잔뜩 몸을 사릴 것입니까?
빈둥거리다가 순식간에 지나갈 우리네 인생인데, 촌각의 순간도 허투루 보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매 순간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며 주님께 올리는 분향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부끄럽게 살아온 지난날 가슴 칠 시간이 아깝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 걱정할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오늘 충만한 주님 은총 안에 혼신의 힘을 다해,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목숨을 살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조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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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13. 연중 제 15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마태 10,34-11,1)>
1) 신앙인은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참 평화’를
누리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 평화를 ‘기쁨’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신앙인의 평화와 신앙인의 기쁨은 거의 같은 성격의 행복입니다.>
사도들이 박해를 받는 상황에서도 기쁨과 평화를
누리는 모습들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들여 매질한 다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고서는
놓아주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사도 5,40-42).”
여기서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고 기뻐하며”입니다.
사도들의 기쁨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 기쁨이 아니라, 신앙인들의 ‘영적인 기쁨’이고, 주님 안에서 참 평화를 누리고 있음을 드러내는 기쁨입니다.
모욕을 당하는 것이 기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런 일을 당해도 평화를 잃지 않았습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과
그 도시의 유지들을 선동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게 만들고 그 지방에서 그들을 내쫓았다.
그들은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나서 이코니온으로 갔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사도 13,50-52).”
박해자들은 신앙인들에게서 현세적인 것들과 물질적인 것들을 빼앗아 갈 수는 있어도, 신앙인들이 누리는 기쁨과 평화를 빼앗아 가지는 못합니다.
2) 베드로 사도의 경우,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후에 평화를 완전히 잃었습니다.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마태 26,75).”
여기서 ‘슬피 울었다.’ 라는 말은, 베드로 사도가 자신의 죄에 대해서 큰 슬픔과 아픔에 사로잡혔고, 그래서 평화를 완전히 잃었음을 나타냅니다.
아마도 그는 예수님을 슬프게 해 드린 것 때문에
크게 슬퍼했을 것이고, 자기가 잘못한 일에 대해서 칼에 찔린 것보다 더 큰 아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슬픔과 아픔은 회개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34절의 ‘칼’은, 그런 경우에는, 죄를 끊어내는 칼이고, 회개를 위한 칼입니다.
‘칼’을 ‘거짓 평화를 잘라내는 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에 죄를 짓고서도 마음이 편안하다면, 그것은 사탄의 거짓 평화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참 평화’를 얻어 누리려면, 그 거짓 평화를
과감하게 잘라내는 칼이 필요합니다.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 6,17).”
3) 37절에 있는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은 실제 가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내가 정말로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 그러나 신앙생활에는 방해가 되는 것들”을 상징합니다.
예수님 말씀은 “가족을 사랑하지 마라.”가 아닙니다.
가족은 가장 먼저, 가장 많이 사랑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그 사랑의 방향이 빗나가서 멸망의 길로 함께 간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어리석음입니다.
그쪽으로 가는 것을 막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선과 구원을 지향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구원받기를 희망하고, 또 함께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가는 길에는 온갖 걸림돌들이 놓여 있습니다.
유혹과 박해도 있고, 여러 가지 고난과 시련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내 안에서 나를 가로막는’
걸림돌들을 단호하게 버리는 것이 특히 중요합니다.
‘버림’을 실천해야 ‘따름’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버림’만 실천하고 ‘따름’은 실천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무소유나 청빈을 실천하면서도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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