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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로마제국
Christianity and Rome Empire
조명은
제1장 세계의 제국 로마
*로마의 역사적 실체
중부이탈리아에 주전 3000년 전부터 인도-게르만 일족인 이탈리키인이 정주하기 시작함. 티베르 강가의 구릉지대에는 기원전 8세기 경부터 라티니의 후족인 라틴인의 촌락이 세워짐. 실제 건국은 약 B.C. 7세기 경으로 추정
초기에는 왕정으로 출발했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귀족과 평민의 연합으로 공화정이 성립. 전기 공화정은 이태리 반도의 통일을 이룬 시대이고 후자는 포에니 전쟁 이후 지중해 세계를 기반으로 한 대제국을 형성한 시대. 이후 오타비아누스가 제정을 성립. 지중해 세계를 통일 하고 다가올 중세 유럽 세계의 기틀을 정립함으로 희랍의 고전 문화를 국가적으로 발전시킴. 기독교를 세계종교로 발전시킴으로 서양 문명의 한 모체가 되게하는 역사성.
로마 정체의 발전
1. 왕정(B.C. 753-509) : 전설상의 왕조와 에투루리아인의 시대
에루투리라인은 인도 게르만 계통의 종족으로 주전 10-9 세기 경에 이주한 것으로 추정. 이들은 이태리 반도 중, 북부를 강한 군사력으로 지배하였고 특히 로마 왕정을 세운 라틴인을 1세기 동안 지배하며 많은 영향력을 미치게 됨. 종교의식과 로마의 신상한 국가종교적 행동이 여기에서 근원. 왕정 축출의 주축이 되었던 계급은 토지 귀족. /
공화정의 정치적 실권은 귀족 대표에 의해서 구성되는 원로원(Senatus). 임기 1년의 통령(Consul) 2명이 선출되어 집권했고 평민은 참정권이 없는 귀족정의 형태.
2. 공화정(B.C. 509-27) : 이태리 반도와 지중해 통일 시대
전기 공화정은 귀족과 평민의 화합으로 이태리 반도의 통일을 가져오게 됨. 이유는 공화정의 정치 구조 효율성. 평민과 귀족이 함께 누리는 정치적 명분과 경제적 실리라는 상호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는 유동성의 결과. 계급투쟁을 통하여 상호간의 통혼, 귀족의 토지 보유 제한, 원로원의 승인 없이도 평민회의 구성과 참정권의 공유. 이는 상호주의와 평등성의 원칙을 세움. 공화주의라는 민주주의 결과를 탕생시킴. 이 사상은 세계제국 로마라는 팽창의 원동력. 포에니 전쟁을 계기로 세계제국의 기반을 마련.
후기 공화정은 포에니 전쟁을 3차례에 걸쳐 승리함으로서 지중해 세계를 내해로 하는 대제국을 건설. 사회적 혼란으로 양극화. 대부분의 토지를 점유한 전통적 귀족과 상공업의 부를 통해 나타난 신흥귀족인 기사계급의 등장으로 독적점인 부를 취함. 사회적 불안은 평민과 농민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고 새로 생겨난 신흥귀족의 독점적인 부의 착취로 사회적 문제를 야기. 정치의 불안은 군인들의 정치 참여를 가져오게 됨. 이에 하층민의 종교귀향과 정치 개혁운동을 야기. 평민들의 정치 개혁 운동은 로마 명문가문 출신인 형제에 의해 추진. 형인 티베리우스가 평민의 권익을 옹호하는 법을 제정했으나 혁명주의자로 몰려 살해. 동생 가이우스도 토지 분배와 평민의 권익을 대변했으나 원로원의 압력으롤 자살. 이후 사회 동요로 군인 들의 정치 참여. 이를 수습하고자 제1차 삼두정치로 케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가 정치 세력을 형성함. 케사르가 퐄페이우스가 루비콘 강에서 격전 후 승리하여 로마의 집정관으로 취임. 하지만 부루투스에게 암살되어 2차 삼두정치가 시작됨. 케사르 양자인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데스가 형성하고 공화정 로마는 몰락의 위기. 후기 공화정의 사회적 불안은 로마 대중의 종교 귀향으로 제신에 대한 숭배 사상을 나타냄. 관용적인 종교적 제형태는 후에 올 제장 로마시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관용의 배경이 됨.
3. 제정(B.C. 27-A.D. 476) : Pax Romana와 기독교 시대.
제1시기 원수정(B.C. 27-235, Principatus) : 황제와 원로원이 권력을 양분한 시기. 정치가 안정되고 영토가 확장되어 로마의 최대 전성기를 구가하는 시대로 문화와 사회가 발달하는 시대. 로마 황제에 따라 간헐적인 기독교의 박해가 전개.
제2시기 군인 황제시기(A.D. 235-285, Barrack Emperor) : 쿠테타가 빈번히 일어나는 정치적 혼란기. 약 50년간 26명의 황제가 바뀜.
제3시기 전제 군주정시기(A.D. 285-476, Dominatus) : 황제가 동방의 군주와 같은 권력을 독점하는 시기. 기독교를 가장 혹독하게 박해하고 지하예배당인 카타콤이 등장. 콘스탄틴대제에 의해서 기독교가 공인(313)되는 시기이기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제국을 두 아들에게 양분함으로써 제국의 동서분열(395) 기독교가 국교화(392) 되어 국가 종교 형태를 이룸. 평민들의 지위 격하와 로마 귀족의 독점적인 부의 추구로 옛 영화를 이민족에게 넘겨주는 시기를 가져옴. 왕정, 공화정, 제정의 로마는 약 1000년 이라는 거대한 시간성을 가지고 서양유럽에 정치, 경제, 법률, 사회, 문화, 종교(기독교) 등에 많은 영향을 미침. 특히 로마의 제정시대는 기독교와의 반목과 대립, 조화의 역사를 통해서 기독교의 전통과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
제정 로마와 기독교 박해시대
1. 원수정 시대의 경향성
옥타비아누스의 탁월한 정책을 기반으로 로마의 평화시대가 구현. 원로원이 그에게 정신 집정관, 최고의 재판관을 경한 전승장군(Imperator), 원로원 의장, 아우구스투스(Augustus : 존엄자, 신성한 자), 독재관(Dictator)의 존호를 부여. 보편화와 지방화(속주)의 원칙. 국민의 지지를 통해 군대, 관료조직, 제정을 정비. 빈민을 구제하고 도로를 정비. 각종 문화시설을 세움. 전 제국민의 인구조사를 통해 제국의 인적 자원 정책을 확립(베들레헴에서 예수의 출산). 제국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전 속주민들에게 그들의 고유한 문화, 종교, 사상 등에 관해 관용 정책을 취함. 내란과 혁명을 종식하고 로마의 평화를 구현.
2. 팍스 로마(Pax Romana)
1세기 말엽부터 2세기에 걸쳐 정치, 사회, 문화, 종교의 평화시대. 5현제 시대(96-180) 로마의 법대로 원로원에서 선출되어 참 정치를 함으로서 로마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 로마법의 속주보급, 화폐와 척량술의 통일. 로마제국의 문화는 통일된 헬레니즘 문화에 의해서 동질화. 동질화된 문화 세계의 형성은 정치, 사회상 차별이 소모. 한편, 로마제국의 종교정책은 제1,2차 유대 전쟁 이후 유대교와 기독교에 대해서 비우호적. 유대 전쟁 동안 많은 손실을 입었고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종파로 여겼으므로. 가끔 평신도들이 로마의 국가 종교 행사와 군복무를 거부한 것으로 간헐적인 박해.
3. 프린켑스의 변질과 군인 황제 시기
국경 밖의 게르만족의 침입이 빈번. 프린켑스 이념이 변질되면서 50년간 군사적 쿠테타가 연속. 사회적 혼란은 종교와 신비사상으로 자연히 연결. 사회 저층민의 많은 수가 기독교에 귀의. 로마의 당국자들은 기독교를 거대한 정치집단으로 간주하는 계기.
4. 전제 군주정과 기독교 박해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내란을 진압하고 황제로 즉위하여 관료를 쇄신하고 군사적인 개혁을 통해 제국을 다시 통일. 그는 공화정의 프린켑스의 제도를 파괴하고 강력한 명령 계통인 군현제도를 만듦. 동방적 군주제도를 세움. 도미나투스 창립. 동방의 의례를 채용하고 황제 예배를 부활. 기독교를 가장 조직적으로 무섭게 박해를 가한 자이고 기독교 박해의 마지막 황제. 이 때 순교의 피를 흘린 기독교도들의 신앙은 로마제국의 복음화라는 승리의 밑걸음.
기독교 공인과 제국의 몰락
1.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기독교 공인
4명의 적대적 황제를 제거하고 황제로 즉위하여 다시 로마를 통일한 다음 도읍을 비잔티움으로 옮겨 콘스탄티노플로 개칭. 전국을 4개의 대관구, 14개의 관구, 117개의 주, 군단을 175개로 나누워 군권을 장악. 제국 통일의 한 방편으로써 기독교를 허용하였고 나아가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여 기독교를 공인.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사상적 지주로 나타남.
2. 기독교의 국교화와 로마의 멸망
니케아 회의를 통해 기독교는 국가 종교로서의 발판을 확립. 데오도시우스제에 의해 기독교가 국교로 정식 선포. 제국의 모든 분야에서 사상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고, 특히 기독교가 헬레니즘 문화를 변혁하여 고유한 기독굑 문화를 형성하는 계기. 제국을 이분하여 두 아들에게 상속하여 동서로 분리되어 서로마의 몰락을 가져옴. 동방교회는 동로마제국의 국가종교로 존속. 서방교회에서는 레오1세가 교황권 확립을 하여 기독교가 로마대중뿐만 아니라 중세 서유럽의 대중들에게 정신적, 사상적 지주로 등장.
역사의 뒤안길로
서양 역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공화주의는 인간의 평등과 자유 사상을 가져오는 초석. 르네상스 이후에 회복되어진 현대 민주주의 사상적 모체로 굳건한 반석으로의 역할.
제2장 기독교의 발흥(Rise)
유대주의 몰락과 기독교 발흥의 배경
기독교는 1세기 초기에 유대주의와 대립, 반목을 거치면서 새로운 사상 체계를 만듦. 기독교가 세게적인 종교로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첫째, 기독교가 탄생할 수 있었던 기나긴 역사적 배경. 두번째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으로 전파되고 그곳에서 발아되어 성장하고 시련을 거쳐 국교화 됨.
1. 바벨론, 페르시아(B.C. 632-539, 537, 331)와 유다
디아스포라가 활동하는 장소에 유대의 문화를 이식함으로써 후에 기독교의 발흥을 위한 계시적 사건이 됨.
2. 헬레니즘과 유대주의(B.C. 331-63)
희랍의 도시국가는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함으로서 헬라주의를 성립시키고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도시국가 세력이 약화되자 마케도니아 왕이었던 필립2세에 의해 합락. 그의 아들 알렉산더 왕이 정복사업을 벌인 후에 대제국을 건설하고 헬레니즘 문화시대를 만듦. 지중해 세계와 오리엔트 세계를 통합하여 하나의 문화세계를 형성. 한 문화권의 형성을 위한 절대적인 도구는 코이네라는 언어. 헬레니즘의 종교는 관용주의 사상이 로마의 제신관과 연결. 종교 관용주의, 세계동포주의, 언어의 통일이라는 문화의 형성은 기독교의 탄생을 위한 배경. 알렉산더 사후에 헬라 제국은 3명의 부하에 의해 분할. 이중 톨레미 왕조하에 자유로운 정치와 종교생활을 영위하다가 안티오코스 3세가 이스라엘 말살 정책을 펴 제사형태가 완전히 파괴되고 안식일과 절기가 폐지되고 예루살렘 성전에 여호와 대신에 쥬피터 신전을 세움. 이 때부터 팔레스틴의 유대는 마카비를 중심으로 하는 하스몬 왕조가 시작되어 독립 전쟁이 로마의 지배 때까지 계속.
3. 희랍 로마의 사상적 배경
희랍 철학은 고전철학과 헬레니즘 철학으로 나뉘는데 고전주의 철학은 귀족을 중심으로하는 관념론적인 철학이라고 한다면 헬레니즘의 철학은 평민적 철학으로서 인간이 현세에 살아갈 수 있는 처세술로써 인간의 현실 문제를 적응할 수 있는 것. 플로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중세 기독교의 스콜라 철학에 많은 영향. 초기 기독교의 발흥에 많은 영향을 미친 헬레니즘 철학은 철학으로써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와 현실의 조화를 찾으려는 것에서 기독교와 상관성을 가짐. 스토아 학파 철학의 주된 사상은 철학과 인생은 덕을 닦는데 있다고 하여 윤리학을 중시. 신플라톤주의의 일원론 사상은 기독교의 일원론적 세계관과 일맥 상통하는 것. 신플라톤의 일자론은 어거스틴의 신관과 죄론을 형성할 수 있는 많은 영향. 로마의 신관은 희랍의 제신관과 같이 대중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종교로 시대적 욕구에 대응하지 못함. 로마의 종교적 사상은 황제 숭배의 국가 종교와 밀의 종교가 주류를 이름.
4. 후기 유대주의
예전과 신학, 예배에 기초적인 역할을 함. 디아스포라 유대교가 번창한 곳은 알렉산드리아로 기독교가 사상적 지리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 헬라 철학적으로 기독교를 조직하고 출발함. 플라톤의 관념론과 스토아의 내재론의 절충주의 성격을 가미함. 헬라의 로고스를 기독교에 도입하여 요한복음의 로고스와의 절충을 취함. 팔레스틴의 유대교는 신적 실체에 대한 개념. 구약의 신 개념은 지혜에 대한 창조적인 개념으로 생각. 이것은 바울이 예수를 신적 객념에서 사용할 수 있는 배경이 됨. 후기 유대주의의 사상은 초기 기독교가 팔레스틴에 전파될 수 있는 사상적, 율법적, 지리적 배경을 준비한 것.
로마 치하의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
로마의 이민족 통치정책은 대체로 예속된 모든 민족에게 자치권과 고유의 관습을 허락. 다만 군사적인 일과 세금, 재판권은 로마인이 장악. 돼지 고기와 같은 음식의 금기, 안식일의 준수, 할례, 타민족과의 결혼 금지 등 때문에 로마인은 유대교에 대한 매력을 상실하였고 유대인에 대하여 악의와 증오감까지 가지게 됨. 사도시대 초기 유대교에 의한 박해시기가 지나면서 기독교는 급속도로 성장하여 광대한 로마제국의 안으로 전파되었고 로마 정부는 기독교를 주목하게 됨. 종교적 진리를 위하여 재래 종교와는 다른 비타협적인 자세를 취하자, 로마제국의 권력과 충돌하게 됨. 스데반의 순교 사건 후 교회에 가해진 박해로 많은 신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원근 각지로 흩어져 복음을 전파함.
로마 선교의 기원과 과정
바울은 다메섹 도상의 체험을 계기로 개종한 후 약 30년간 로마 세계의 복음화를 위하여 선교의 선봉에 서서 최선을 다함. 바울이 기원 후 57-58년 경 겨울 그의 서한을 로마 교회에 보냈을 당시에는 벌써 상당히 번영하고 있었음. 바울이 로마에서 투옥 중에도 어느 정도 자유가 보장되어 적극적으로 전도한 결과 로마사회는 큰 발전을 함. 기원후 100년 경에는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큰 공동체로 성장함. 로마교회는 코넬리우스 감독 때에 신도수가 수십만명을 넘었고 46명의 감독과 백명이 넘는 교역자들이 선교하고 있었음. 희랍어가 보편적으로 쓰이는 국제어가 됨. 초기 기독교의 복음의 내용은 풍성한 구호, 교사와 지도자에 대한 지원, 광산에 있는 죄인과 전과자의 위문, 가난한 사람의 장사 협력, 노예 보호 및 재난 구조, 고용의 알선과 자선사업. 철학자 플라톤은 가난한 사람이 죽는 것은 그 비참함을 단축시키는 것이라 했고 키케로는 박애사업도 그것은 현명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만 베풀어야 한다고 말할 정도. 기독교의 구호 사업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베풀어졌기 때문에 기독교의 복음이 많은 사람의 매혹을 끌었던 것이고 그만큼 빠른 속도로 전파될 수 있었음.
다가올 시련
마지막 유다 왕국이 주전 582년에 몰락하여 유대주의 종언. 디아스포라는 중간기 시대에 유럽의 각지에 흩어진 최초의 복음의 씨앗.
제3장 기독교와 로마의 갈등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 제요인
시련의 시작
재래 종교와는 다른 비타협적인 자세는 사상적인 변혁을 촉구하는 종교적 독소의 위험성과 사회적 변화를 초래할 독질성과 정치적 도전을 초래할 정치성을 지는 것으로 비추어짐.
사가들의 제 관점
기독교 박해의 시기
첫번째는 64년 네로에 의한 박해이전까지의 기간으로 스데반과 야고보가 순교함. 로마의 정책적인 박해는 없었음.
두번째 시기는 64년 네로 황제의 박해로부터 250년 데키우스 박해까지로 비조직적이고 지방적이고 각각 고립된 박해
세번째 시기는해데키우스 박해로부터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때에 일어난 로마정책의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대박해
사회경제적 측면
1. 로마대중의 혐오심.
기독교인들의 생활은들변천하는 세계에서 행하는 그의 세속적, 사회적 활동에 나타나는 사회적 조건에 따라서 결정되므로 로마적 배경을 이해해야. 로마 세계의 중산층과 상층 계급들은 희랍 종교의 사상과 철학의 영향을 받았던 전통적 종교사회를 이루고 있었음. 대중들도 생활의 모든 영역과 순간이 다신교적 분위기를 형성한 기존의 사회 구조내의 혈통과 신앙의 체제를 이루고 있음. 로마인에게서 옛 신을 버린다는 것은 곧 로마사회에서의 격리를 의미하는 것. 고대의 도시들은 대개가 정치, 경제, 문화 및 종교의 중심지. 도시에서 살고 있던 많은 소매상인들이 신전경제가 없어지게 되면 실직 위기에 놓임.터툴리아누스는 기독교들이 우상제작업, 점술, 마술사, 교사, 장사, 공직자, 장교 등의 직업을 제한. 신들의 이름이 포함된 말도 써서는 안되고 이교도적인 축복도 거절해야. 극장이나 운동경기도 우상숭배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대. 배우나 첨투사가 되는 것과 극장을 관람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치도 엄격이 배격. 사치에 쓸 돈은 차라리 자선에 쓰는 것이 훨씬 낫다. 교리에 근거한 공직과 군 복무의 기피, 종교의식의 참여의 거부와 공공행사의 붚참등으로 기독교도의 배타성을 보임.
2. 로마 사회에 와전된 기독교관
아이를 밀가루 반족으로 싸게 한 후 떡이니 자르라고 명하고 유아의 피가 나오면 그것을 받아 먹는 다고 하고 남녀가 정서적으로 흥분된 분위기에서 만찬에 참석한 후 색욕의 비밀제가 이루어짐.
3. 로마제국 신분제도의 타파
기독교 공동체는 로마제국 세계에 기존 구조 내의 혈통과 신앙, 피부색이 차별 없는 기독교회를 이루고자 함. 처음 몇 백년 동안의 기독교 공동체는 로마제국 내에서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 즉, 노예, 해방노예, 하층계급의 자유민 등 다양한 비로마인이 중심.
정치적 측면
1. 유대적 요소와 그 정치적 배경
로마는 유대교까지 관용함. 티투스에게 유대인의 반란을 진압하도록 8만명의 병력으로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A.D. 70년에 로마군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됨. 예루살렘 성전터에 주피터 신전을 세워 제사하도록 함. 바르코크바가 제2차 유대전쟁을 주도하였으나 로마군의 반격으로 50만명의 희생자를 내고서 로마에 항복함. 유대인을 국가적 배신자로 극도로 혐오하였고 나아가서는 반로마적 정치 집단으로 인식하게 됨.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갈라져 나온 한 종파로 인식. 이러한 이유로 기독교는 로마인에게 금지당한 유일한 종교.
2. 기독교의 반국가관
교회와 국가는 한 세계 안에 존재하는 두 실체 내지 권력 사이의 상호관계. 교회와 국가는 근본적으로 하나의 역사적 문제이면서도 또한 신학적, 정치학적, 사회학적 문제이기도. 로마의 이방민족에 대한 국가정책 개요는 첫째, 국가적 종교의식에는 누구나 참여해야. 둘째, 새로운 종교나 외국의 종교는 국가의 승인을 받아야. 셋째, 외국의 종교는 허용됨. 대표적인 경우가 유대교. 넷째, 국가에 유해하다고 판단되는 외래종교는 억압함. 다섯째, 제정 시대의 군대 구성의 속주화 정책,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황제들은 제국을 강화하고 사상을 통일하는 국가정책을 펼침. 기독교는 국가에 대해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 지배적이었고 황제나 정무관, 관료, 세계의 보존과 평화를 위해서 기도.
3. 로마정부 권력 신격화의 황제 예배정책과 충돌
로마제국의 정치형태는 신정정치가 아니고 전형적인 전제정치 체제. 황제 신격화는 왕권의 존엄성에 대한 희랍인들의 사상과 로마의 집줭관이나 전승 장군들을 로마의 제신과 동리시 하는 로마인들의 현실적 사상이 혼합된 결과. 아우구스투스는 신의 아들로서 사제들의 신성한 언어. 기독교는 권력의 화신인 인간황제를 예배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음. 우상숭배의 죄이므로.
종교적 측면
1. 로마의 제종교 및 종교관
수도의 삼위신인 쥬피터, 주노, 미네르바, 헬라클레스, 실바누스, 님프. 미네르바는 의사, 예술가, 변론가와 시인의 크고 강력한 계급의 숭배를 받음. 헬라클레스는 진리와 풍요와 믿음의 신으로 희랍인이 있는 곳에서는 숭배.로마의 제종교들은 공화정 초기부터 헬레니즘화 하기 시작하여 아우구스투스에 의한 원수정의 성립기에는 최하계층을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희랍종교의 사상과 이념의 영향을 받고 있음. 에베소의 아르테미스 신전은 소아시아의 토착 '산의 모신'으로 짐승의 수호여신을 섬기는 곳. 지방에서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토착 종교들이 지방민에 의해 신봉. 로마의 종교개념은 본질적으로 신비적이 아니고 거의 언제나 실제적이고 합리적. 로마의 종교는 독자적 기능을 가진 사제조직이 없었음. 종교 관사들은 다른 관리자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정치적 기능상의 관료들. 개인적이고 정서적 신앙을 요구하지 않고 영적 신앙이나 도덕을 가르치려고 하지도 않음.
2. 종교관의 상홓 대립
다신교의 특색은 관용. 기독교들에 대한 가장 큰 비난은 무신론.로마제국은 2세기 말엽에 쇠퇴기에 접어듦. 3세기 초에는 고트족이 다뉴브 강을 침범해 옴으로써 로마의 국경이 위험에 직면하게 됨. 옛 로마제국의 영광을 찾는 것은 고대의 로마 제신들에게 귀의하는 것이라 생각. 기독교인들은 우상숭배와 제신 숭배를 동일시 하여 전통적인 로마 종교를 거부.
제4장 기독교의 시련과 신앙생활
신앙공동체 카타콤
지하도시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이르러 기독교를 공인할 수 밖에 없게 된 역사적 요인은 박해를 이겨낸 기독교도들의 인내와 신앙공동체인 카타콤.
로마제국의 공인을 얻게 된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접근 방식
첫째 기독교도 개개인들 마음속 깊이 스며있는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강한 신앙.
둘째, 예수의 제자들이 행한 이적과 기적의 위력에 의한 기독교도들의 청렴한 도덕 생활과 조직.
셋째,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로 인하여 기독교도들의 피난처였던 카타콤의 생활과 신앙
카타콤의 기원과 신앙적 배경
1. 카타콤의 어원적 기우너과 구조
중세라틴어인 카타쿰바는 지하를 뜻하는 희랍어 카타와 경사를 뜻하는 쿰베에서 그 기원을 가짐. 특수지역인 아삐아가의 명칭이기도.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것이며 부활을 기다리는 잠이라고 믿는 기독교 사상. 로마시를 둘러싼 대평원은 화산 폭발에 의해 생긴 축적물로 이루어져있고 토질은 응회암이라 굴착이 쉽고 기둥도 필요없어 지하도를 만들기에 적합함. 묘굴인부
2. 카타콤의 유대적 배경
아브라함은 여호와께서 사람을 죽음에서 조차도 살릴 수 있다고 생각. 바벨론 포로시대.
3. 카타콤의 신약적 배경
희랍예술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의 건물에 의해 상징되고 로마의 예술은 제국광장과 팔리틴 언덕에 의해 상징되고 초기 기독교 예술은 카타콤에 의해서 상징.
카타콤의 유대적 배경은 그리스도의 상징적인 예포료서 구약의 위대한 신앙인들을 묘사하여 기독교의 부활, 구원, 신앙관으로 연결시키고 있다면 신약적 배경은 그리스도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인물과 그리스도의 기적, 모범적인 행동으로 나타남. 세례식과 성찬식. 세례는 내적인 죄에 대한 죽음과 새 삶의 시작을 의미. 그리스도인의 개개인에게 목자로서의 시작을 나타냄. 기독교의 목자는 희생보다는 양들을 구하고 안전한 우리에 들어가게 하는데 더 큰 의미.
카타콤에 나타난 생활과 신앙
1. 카타콤에서의 기독교도들의 생활
로마의 지상의 도시는 이도교도들의 상징으로 기독교도들에게 적그리스도의 상징이 되었던 황제의 권위와 그 권위하에 박해가 자행됨. 기독교도들은 음란한 밤집회를 여는 반항 정신이 강한 집단으로 생각. 기독교도들에게는 확실한 소유물이 허락되지 않음. 카타콤의 내부는 암흑이 짙게 드리운 곳이고 습기가 대단히 많은 곳. 타는 횁불로부터 나오는 짙은 연기는 상호 혼합이 되어서 사람들의 호흡기와 눈을 상하게 할 수 있었음. 박해의ㅡ 가장 심한 압력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 지상에 남아 있는 기독교도들이 카타콤을 감싸고 그들은 필요한 것을 감추어 주었고 양식과 필요한 모든 것을 원조해 줌. 카타콤으로 들어온 상층 계급에 속한 기독교도들은 그들의 재산을 정리하여 그것을 모든 카타콤에서 사용하도록 함.
2 .카타콤 교회의 신앙과 교리
사랑이나 평화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는 하인들을 청하여 그들을 위해 포도주를 섞어 주고 그것을 데워줌. 성찬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나누어 받는다는 성서의 개념.
카타콤이 미친 영향
1. 로마제국의 기독교화
기독교의 내세관은 몰락되어 가는 로마제국의 무신론자들의 마음을 끌었다. 또한 희랍, 로마인 할 것 없이 상류계급의 지식인과 원로원 가족, 로마의 여성들, 군대에까지 퍼져나감. 로마 전지역으로 기독교의 세력이 확장. 가혹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유대인들의 배타성을 물려받아 어떤 다른 종파와도 연합하기를 거부하고 끝까지 그들의 유일신 하나님을 섬김. 매사에 모범적으로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구가와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면서 죽어가는 그들의 모습은 대중을 감동시킴. 카타콤의 궁핍한 생활과 경건된 금욕주의적 청렴 생활은 바로 로마귀족 사회의 복암화 과정에 큰 영향이 됨. 기독교의 이방인에 대한 박애심과 죽은자들의 묘에 대한 배려에서 감화를 받았고 이방인들이 믿는 전통적인 신에게서는 구원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그들 신앙관에서 느끼는 불안이 기독교로 귀의하는 동기가 됨. 기독교인들의 강인한 순교정신은 박해자들 스스로가 패배를 자인할 때까지 박해를 멈추지 않게 함. 사도시대 말기의 기독교도들의 총수는 약 50만명이고 1세기의 로마제국의 인구를 홉킨스가 정산한대로 5천만명으로 본다면 기독교도들은 제국 전체 인구의 100분의 1, 2세기의 기독교도의 수는 더 많이 증가.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면서 먼저전파. 카타콤의 신앙르 가진 자들이 로마의 상류계급에 대해 선교를 우선시함.
2. 기독교 문학(변증서)의 발달
기독교 문학은 기독교도에 대한 로마정부의 박해와 희랍, 로마의 이교철학자, 수사학자들이 문서 또는 지식적인 방법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을 격렬히 공격하는데 대하여 반박하고 변증하는 학문. 변증가들은 교회부흥을 못마땅하게 여긴 로마의 황제들에게 붓을 들어 항의하며 기독교의 진리를 설명하고 그 진리가 이교의 사상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항변함. 노예 가운데는 숙련된 재능(시, 문학, 수사학)을 가진 자들이 로마의 귀족과 접촉점이 형성됨. 그들은 능숙하고 현란한 글을 쓰기 위해서는 대부분 미천한 신분으로 있던 수사학자(노예도 포함)나 교사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됨. 미천한 신분의 기독교들이 귀족과 접촉점을 통해 자연스럽게 복음이 전파되고 변증의 글이 스여진 것을 추론.
지상교회를 향한 또다른 열정
신앙과 예술의 상징적 조화를 상관시키면서 신앙을 생활화 함.
제5장 로마사회의 신분제도와 기독교의 선교
로마의 노예제가 선교에 미친 영향
선교의 열정으로
로마제국의 복음화라는 지상 최대의 명제를 가지고 로마사회의 하층계급인 노예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짐. 사회의 모든 계층에도 복음의 평등성을 강조하며 선교의 열정을 가지게 됨. 3세기 초에는 기독교가 스페인과 브리튼에까지 확장됨으로써 거의 로마제국 전역에 전파됨. 3세기 중엽에도 북아프리카와 이집트 상반부에도 기독교가 확장되어 이교의 예배가 거의 중단. 노예와 해방노예들에게 많이 전파되어 노예들의 신분이 상향적 유동을 하면서 제국 내의 기독교 선교와 확장에 커다란 영향을 전반적으로 미침.
노예제의 기원 및 어원
히브리의 노예제는 희랍인이나 로마인의 노예제보다 관대하고 인도적인 형태로 나타남. 시대적 변천 과장에서 무의식 중에 완화되고 족내노예제를 통해 폐지되었을 것. 에베드로 주인에게 소속된 노예, 왕을 섬기는 신하,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의 노역. 희랍어 둘로스는 다른 사람의 소유자가 된 사람. 노예신분은 세습적이고 노예신분은 원칙적으로 변경될 수 없었음.
고대 노예들의 사회적 위치
1. 희랍의 노예제
헬레네스를 사용하여 이민족과 구별. 헬레니즘이란 말은 혈연적이라기 보다는 정신적으로 이해. B.C. 5-4세기에 이르러서는 희랍인은 우월적 문화를 갖는 민족이며 비희랍인은 우월한 문화를 가질 수 없다는 데까지 발전. 생계를 위한 정당한 수단에 대해 아무련 편견을 갖지 않아 직업에서 자유인의 것과 노예의 것이 구별되지 않음. 플라톤은 야만인이 합리적 이성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선을 알지 못하고 자결 능력이 현저하게 부족하여 무질서와 악을 가지고 있으므로 최고 선의 원리에 강한 사람에게 예속되어 가능한 모두가 동등하고 친한사이가 되어야.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가 도덕적이고 생물학적이고 우주적인 의미에서 자연스러운 것이고, 노예제에 필요한 수단을 제공받는 주인을 위해서도 이로우며 주인의 보다 나은 이성에 의해 지적인 결핍, 사려를 보충받게 되는 노예를 위해서도 이로운 것임을 입증하려고 함. 부자들은 100-1000명에 이르거나 또는 훨씬 더 많은 수의 노예를 소유하여 이들을 통해 얻은 수입으로 막대한 부를 쌓음.
2. 로마의 노예제
전쟁으로 인한 포로 획득, 해적, 노예시장에서 거래로 노예가 발생. 노예는 고대 문화와 경제, 영농의 담당자이고 고대문화가 발전된 주원인은 노예제. 기원전 3세기 말 이후 스토아 철학이 로마의 교양 사회에 유포됨으로써 노예의 인격이 점차 인정받음. 공격 또는 체포로부터의 자유, 행동의 자유, 이동의 자유와 같은 권리 중의 일부를 누림으로써 자유노예로 종사. 노예라 불릴지라도 훌륭하고 현명한 사람은 노예가 아닌 자유인. 어떤 욕망에 의해 일련의 원칙에 매여 있는 자는 몸은 자유인이라 할 지라도 노예와 다름 없다는 주장.
기독교와 노예와의 관계
1.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노예관
노예제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예수 그리스도도 현재하는 사회적 현실로 인정함.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받아들임으로써 그의 가르침이 사회와 역사 가운데서 열매맺기를 바람. 노예나 자유민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고 함. 신 앞에 만인이 평등함. 죄악이 그 거짓 스승들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한, 그들은 죄악의 노예. 바울과 제자들이 노예제를 즉각 정죄하지 않은 이유. 첫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가르침이 적당한 시기에 이행되리라는 암시를 하였으므로 둘째, 로마제국에서 시도한 바있는 즉각적, 의도적 노예제도 폐지가 사회구조의 붕괴를 야기하는 원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셋째, 초기교회는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희망에 부풀어 있어서.
2. 교부들의 노예관
교회발전과 교리 발전에 크게 공헌하여 후세에 권위가 된 인물을 교부. 사도적 교부와 니케아회의 이후의 교부. 니케아 이전의 교부는 변증교부, 헬라교부, 라틴교부로 구분. 영적인 자유라 말로 완전하고 참다운 것으로 강조. 노예들은 마치 당연한 것처럼 교회의 비용으로 그들의 해방을 요구하는데 익숙해져 있음. 하나님이 인간을 평등하게 창조하셨음에도 불고하고 현실적으로 노예ㅔ제라는 불평등적 구조가 존재하는 부조화의 현상에 대하여 해명의 필요성. 신학적이고 이론적인 답변은 노예제는 인간이 타락한 결과.
3.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노예
노예들은 기독교의 신앙을 통하여 종족의 고무보다 더 위대한 감화와 의기양양할 만큼 과감한 정신적인 해방을 동시에 받음. 상위 계급의 로마인들은 라틴어를 주로 사용하고 희랍어는 가난한 계급과 노예의 언어. 노예의 수를 기원전 224년에는 전 인구 400만 명중 60만 명으로 노예의 인구 점유율 15%, 기원저 31년에는 전 인구 500-600만 명 중 200만 명으로 전 인구의 35%를 차지하는 노예가 존재. 많은 노예들이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분포되어 있음은 기독교의 공인과 확장에 절대적인 요소
노예의 자유적인 요소
1. 재산 소유
로마 시민법은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은 법적으로 완전한 인격자. 저축한 것을 가지고 자유를 살수도. 숙련 노동을 하는 노예가 재산을 축적하는 사례는 제정초기에 들어와서 더욱 보편화. 해방노예들의 부야말로 지난날의 자유로웠던 로마제국의 도덕적 타락을 풍자하는 유명한 주제. 로마에서의 의학은 초기 로마의 이상적인 사회정치가인 카토에 의해서 사용된 가정 구급약 정도의 일종의 가정의학에 만족할 숩ㄲ에 없었음. 의사로서 훈련된 아주 훌륭한 기능을 가진 노예들 가운데 한 사람을 소유하려고 함. 노예 의사들이 보상으로 받은 것은 자유였고 이 자유롤 그들은 자신이 개업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 재산을 소유하는 것이 왕국으로 들어가는데 결정적인 장애.
2. 행동의 자유
해방노예들의 경우에는 그들의 부인들중에 최고 15%가 자유민 태생. 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고위직에 오를수도. 기독교의 확장과 선교가 될 수 있는 조건.
3. 주거의 자유
많은 노예들의 생활조건은 시가에서 잠자거나 매우 값싼 방에서 생활하였던 자유민보다 나음. 주인의 도시 거주지 다락방에서 삶. 노예들은 음식과 복장에 있어서 비슷한 기술을 가졌던 자유민보다 열등하지 않음. 자유민이 평상시 입던 것 만큼 옷을 입음. 최소한 주인이 노예에게 주인과 다른 음식물을 공급했다거나 잘 먹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기는 어려움. 원수정 초기부터 그 책임자로서 지사계급 뿐 아니라 노예와 해방노예들도 임용. 루디아는 빌립보에 거주하는 두아디라 출신의 노예로 장사하는 여성.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자유인.
노예의 상향성과 기독교 선교
1. 상향적 유동성
원로원 의원, 기사, 지방의 원로원 의원, 도시의 평민들과 농민, 법률상으로 최하층에 있는 사람들은 기독교도들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노예들과 해방노예가 로마의 계급사회. 계층 간에 수평적인 유동은 물론 수직적인 유동이 존재. 사회적 유동성은 로마가 공화정체에서 전제정체롤 전환되면서 비롯. 재능과 활기의 왕실재정을 위한 경로로서 자신의 통제하에 들어올 제도를 창설하는데 부심. 관직은 노예와 해방노예들에게 사회적으로 상향적인 유동을 위한 중요한 경로를 제공해 줌. 황제가 구제도에 맞서기 위해 관직을 만듦. 토지재산의 관리인이나 위탁인들은 대부분 소유주의 노예. 노예가 소작료를 징수하고 그 농경을 감독하는 농업 노동 소작인들은 대체로 자유민. 주인들로부터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노예와 해방노예들이 각종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유민인 외인들은 로마시내의 직업인으로 들어올 수 없었음. 문학적인 재능을 가진 미천한 신분이었던 수사학자, 교사들은 귀족들에게 문학적인 기예를 가르치거나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줌.
2. 상향적 유동성이 기독교에 미친영향
관료제도의 창설이후 수많은 직책에 로마의 하층 계급 사람들을 대폭 등용. 황제는 그 지상권을 위협했던 귀족의 권력 행사를 제한하기 위해 권력을 장악하는 직위에는 귀족출신을 임명하지 않음. 가이사 집안의 사람은 황제가 고용한 노예나 해방노예로 황제의 노예중에도 기독교도가 있음.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는데 기여.
제6장 기독교의 승리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과 영향
멀비안의 승리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한 동기와 밀라노 칙령을 반포한 역사적 배경.콘스탄티누스가 리키니우스와 연합하여 멀비안 다리에서 승리하였는데 전날 밤에 꿈속에서 두 그리스 문자인 로와 카이(그리스도와 구세주)가 교차된 문자들과 이 군호로 정복하리라는 계시를 받음.
밀라노 칙령문
기독교도들이 그들의 종파와 종교적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어떠한 종교생활이나 또는 그 예식을 공공연히 자유롭게 모든 국민들에게 주어졌음. 어떠한 종파나 종교에 대해 최소한의 제약이라도 가해진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동기. 크리스천 황제의 출현은 크리스챤들이 제국의 생활에 있어서 번영과 안정을 가져옴. 제국 안에서의 법률과 교육, 언어와 예술분야에서까지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전 제국에 걸쳐 환영받는 종교가 됨. 가정교회의 시대는 지나고 바실라카 공회의 시대가 도래. 정치적 가치를 더 조장했던 의존과 복종을 대가로 치룸. 크리스천들은 그들의 헌신에 대해 이전보다 적은 열의와 정열을 보임.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공식적인 국교로 인정받게 된 것은 데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이루어짐.
유세비우스와 콘스탄티누스 대제와의 관계
1. 유세비우스와 문헌들.
가이사랴에 있는 기독교 학교에서 연구활동을 하고 교회사의 아버지.
2. 유세비우스와 대제와의 관계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유세비우스는 325년 6,7월 2개월을 같은 도시인 니케아에서 보냈는데 대제가 환상을 보고 기독교로 개종한 경위를 이때 설명함.
대제의 기독교 개종
1. 사가들의 두 관점
첫째, 로마주민들이 막센티우스의 폭정에서 구해 달라고 콘스탄틴대제에게 요청을 함.
둘째, 대제는 처자를 죽게 함으로 그의 일생에 큰 오점을 남겼는데 이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속죄의 필요성을 느껴 기독교로 개종.
부정적인 측면으로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성취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 했던 야심 때문. 니케아 교회의 교인인 아리우스에게 호의를 베풀고 아타나시우스를 추방. 새 수도로 콘스탄티노플을 건슬하여 그곳에서 사치와 향락으로 낭비를 일삼음. 제국이 4분할되고 변경의 군대를 이동시켜 이방인들을 로마 영토안으로 불러들이는 결과를 가져와 명문 대가들의 몰락을 초래.
2.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대한 평가
헬레나는 신앙심이 뚜렸했고 대제 역시 자기 자녀를 기독교 신앙으로 가르치게 함. 대제의 아들들이 부황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을 때도 그들은 기독교 인이었고 그들의 장례식 때에도 기독교식으로 치름. 처에게 사형을 내린 이유는 대제에게 이교숭배를 권면하였기 때문.리키니우스는 기독교를 박해하여 배약자가 됨. 콘스탄티노플 천도 목적은 유사시에는 동유럽의 야만인이나 남방의 페르시아인을 제거하는 데 유리한 곳이고, 로마 평화시에는 로마제국 각 지방으로 연락하기에 편리한 위치. 기독교의 사상은 보편성과 인종을 초월한 세계동포주의적 성격과 빈부와 신분의 차이를 초월한 평등주의를 배출.
세계화의 웅비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될 수 있었던 첫 번째 요인은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한 무대가 있었음. 한 개의 통합된 정치문명을 조성 시켰으며 관용과 화합 동화라는 정책을 통해 인간의 장미빛 꿈을 지상에서 이루고자 함. 우편제도와 화폐제도의 통일로 문서 전달이나 개인 교류에 매우 유익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바탕이 됨. 기독교의 복음이 더욱 활발하게 전파됨.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는 로마의 불신 대중들은 기독교를 박해할 때와는 다른 동맹관계를 맺기 원했으며 로마의 시민이 된다는 것은 기독교도가 된다는 것과 동일시 함. ㅢ식과 정치제도를 확립하여 제국의 국력 신장과 함께 국가종교와 세계로 진출하는 커다란 계기.
두번째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영향력. 교회 건축자금을 지우너하고 모든 국민에게 기독교를 믿도록 격려. 종교적인 혜택을 받지 못하거나 또 다른 박해를 받을 시는 즉각적으로 군사적인 조치를 통해 주민들과 사회를 안정시키는 조치를 취함. 지하도시 카타콤에 있던 교인들이 지상교회로 신앙의 패턴을 바꿈. 공인이전에는 로마제국의 전체 수의 10%가 기독교로 추산하였으나 공인 이후에는 4배에 달함. 교회의 조직표를 국가 제도와 비슷하게 만듦. 그의 정책을 후대의 황제에게ㅔ 계승시킴. 55ㅔ기 말에 이르러서는 로마 제국내의 전 인구가 압도적으로 기독교의 신자가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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