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미헌집 제9권 / 묘갈명(墓碣銘) / 찰방 사우당 김공 묘갈명 병서 〔察訪四友堂金公墓碣銘 並敍〕
호가 사우당(四友堂) 선생이며 본관이 서흥(瑞興)인 김공(金公)은 휘가 대진(大振)이며 자가 이원(而遠)으로 고려 시대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휘 봉환(鳳還)의 후손이다. 조선조에 들어와 휘 중곤(中坤)이 있었는데 관직이 예조 참의였다. 2대 뒤에 문경공(文敬公) 한훤당(寒暄堂) 선생 휘 굉필(宏弼)은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분이 휘 언숙(彥塾)을 낳으니 선무랑(宣務郞)을 지냈으며, 그분이 휘 대(岱)를 낳으니 정랑(正郞)을 지냈으며, 그분이 휘 수열(壽悅)을 낳으니 증직이 호조 참판이며, 그분이 휘 응복(應福)을 낳으니 벼슬이 참봉으로 곧 공의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파평 윤씨(坡平尹氏) 언호(彥豪)의 따님이며, 둘째 어머니는 청주 한씨(淸州韓氏)로 영(寧)의 따님이다. 공은 융경(隆慶) 신미년(1571, 선조4)에 태어났다.
공은 태어나면서 총명하고 비범하였으며 성장하여서는 나의 선조 여헌(旅軒) 선생을 좇아 배웠는데, 가족을 이끌고 여헌 선생의 이웃에 거처하면서 조석으로 훈도(薰陶)를 받았다. 또 치재(癡齋) 허명신(許命申)과 함께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 등의 책을 토론하였는데, 견해가 탁월하여 사우들에게 추중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 소모관(召募官)으로 곽망우당(郭忘憂堂)의 의진(義陣)에 달려가 힘을 다하여 계책을 도왔다.
기유년(1609, 광해군1)에 성균관 생원(生員)이 되어 추천으로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에 임명되었고, 봉사(奉事)와 직장(直長)으로 벼슬을 옮겼다가 외직으로 나가 김천 찰방(金泉察訪)이 되었는데, 벼슬은 자기의 본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임기를 채우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도동서원(道東書院) 옆에 정자를 지어
관수정(觀水亭)이라 이름하였으니, 추부자(鄒夫子)의 ‘물결을 관찰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숭정(崇禎) 갑신년(1644, 인조22)에 돌아가시니 도동서원 뒤 경좌(庚坐) 언덕에 장례를 지냈다.
공은 한훤당의 후손인데다가 스승의 절차탁마하는 교화를 받아, 덕망과 기량을 성취하여 마치 장차 세상에 크게 훌륭한 일을 할 것 같았으나 끝내 지위가 덕망에 부합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바로 하늘이 공에게 동강(東岡)을 견고하게 지켜서 만년에 공부를 실컷 하여, 위로는 선조의 실마리를 잇고 아래로는 후손들에게 넉넉함을 드리우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부인 숙인(淑人)은 진양 강씨(晉陽姜氏) 근(近)의 따님으로 공보다 1년 전에 태어났고 공보다 1년 뒤에 죽었는데, 묘소는 공과 쌍분이다. 3남을 두었으니 확(確)은 사맹(司猛)의 벼슬을 지냈으며, 잡(磼)은 어영청 천총(御營廳千摠)의 벼슬을 지내다가 병자호란 때 죽었으며, 율(硉)은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2녀는 엄사화(嚴士和)와 이승후(李承後)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측실에서 난 무(碔)는 부사과(副司果) 벼슬을 지냈다. 사맹을 지낸 확의 아들은 원귀(元龜)로 참봉을 지냈으며 딸은 생원인 이엽(李燁)에게 시집을 갔다. 어영청 천총을 지낸 잡의 두 딸은 생원인 곽세귀(郭世龜)와 그리고 박점(朴點)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통덕랑을 지낸 율의 아들은 진귀(震龜),명귀(命龜),성귀(聖龜),만귀(萬龜)이고 딸은 송정필(宋廷弼)에게 시집을 갔다. 부사과를 지낸 무의 아들은 신귀(愼龜),충귀(忠龜),석귀(錫龜)이고 딸은 남천국(南天國)에게 시집을 갔다. 증손자와 현손자 이하는 점차적으로 매우 많다. 과거시험을 거쳐 벼슬한 이도 면면히 이어졌으니, 종갓집에서는 참봉 하석(夏錫), 도정(都正) 정제(鼎濟), 현감 규찬(奎燦), 교리(校理) 희국(熙國), 생원 화식(華植)이 있고, 지차집에서는 참봉 계원(繼遠), 선전관(宣傳官) 오운(五運), 도사(都事) 규한(奎漢), 능령(陵令) 규응(奎應)이 있다. 규한 씨가 바야흐로 비석을 세우려고 하면서 내가 선사(先師 장현광(張顯光))의 후손이 된다고 생각하여, 그의 조카 성동(晠東)이 불에 타다 남은 것을 수습한 유적(遺蹟)을 보여주면서 묘갈명을 지어주기를 부탁함이 매우 정성스러웠으니, 이 일을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
명은 다음과 같다.
효도는 병란에 달려가는데 미루어 충성하였고 / 孝移於赴亂
뜻은 초지(初志) 닦는 것을 이루었네 / 志成於修初
공의 업적이 지금 한두 가지 뿐이라 말하지 마라 / 莫謂公事行今一二
집에는 대조(한훤당)의 단전(單傳) 《소학》 책이 있다네 / 家有大祖單傳一部小學書
[주-D001] 허명신(許命申) : 1569~1637. 본관은 분성(盆城), 자는 군익(君益), 호는 치재로 고령에 거주하였다.
[주-D002] 도동서원(道東書院) :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있는 서원이다. 1605년(선조38)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굉필(金宏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07년(선조40) ‘도동(道東)’이라고 사액되었으며, 1678년(숙종4) 정구(鄭逑)를 추가 배향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주-D003] 추부자(鄒夫子)의 …… 뜻 :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물을 보는데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결을 볼 것이다.〔觀水有術,必觀其瀾.〕”라고 하였다.[주-D004] 스승 …… 교화 : 원문의 ‘鍾木之化’는 좋은 스승을 만나 학문이 진보하는 교화를 말한다. 《예기》 〈학기(學記)〉에 “질문을 잘하는 사람은 견고한 나무를 다듬는 것과 같아서 그 쉬운 것을 먼저 하고 그 절목을 뒤로 한다.……질문을 기다리기를 잘하는 사람은 종을 치는 것과 같아서 작게 두드리면 작게 울고 크게 두드리면 크게 운다.〔善問者,如攻堅木,先其易者,後其節目.……善待問者,如撞鍾,叩之以小者小鳴,叩之以大者則大鳴.〕”라고 하였다.[주-D005]
동강(東岡)을 견고하게 지켜서 : 동강(東岡)은 동쪽의 산 언덕이라는 말로,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은둔하는 곳의 뜻으로 쓰인다. 《후한서(後漢書)》 권83 〈주섭열전(周燮列傳)〉에, “선세(先世) 이후로 국가에 대한 공로와 임금의 은총으로 대를 이어왔는데, 어찌하여 그대 혼자 동강(東岡)의 언덕만을 지키려고 하는가?”라고 하였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송희준 (역) |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