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욥의 인내와 결말
2008년 7월 27일 / 대예배 / 욥 42:1-6
■ 캔사스시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그 폭발로 인해 한 젊은이가 양손과 두 눈, 얼굴전체에 심한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더 이상 자기의 눈으로 읽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에 심한 상실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영국에 사는 한 여자가 입술로 점자를 읽는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위해 입술로 읽을 수 있는 점자성경을 어렵게 구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폭발 사고로 입술 신경들마저 마비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성경에 입술을 대도 아무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는 답답한 마음에 성경에 엎드려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 순간 혀의 감각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렵게 혀로 점자 성경을 읽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부드러운 혀로 성경을 읽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성경을 읽었다고 합니다. 이 내용을 접하면서 ‘신앙의 고집’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이런 고집스러움이 있어야 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매어달리는 고집스러움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는 고집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고집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 버려야 할 고집도 많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유명한 욥기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욥은 참으로 고집스러운 사람입니다. 욥은 어느 날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가장 소중한 자녀들도 잃어 버렸습니다. 숨 쉴 틈도 없는 엄청난 비보를 접한 상황에서 그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욥 1:21 / 이렇게 말하였다. “어머니 뱃속에서 빈 몸으로 나온 이 몸 다시 빈 몸으로 돌아갈지라. 여호와께서 주셨으니 가져가지는 분도 여호와시라. 오직 여호와만이 찬양받으실지라.”
그런데 욥의 시련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악창이 생겼습니다. 얼마나 심했던지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어야 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그의 아내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나 봅니다.
욥 2:9 / 그러자 아내가 말하였다. “그래,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믿음을 지키고 있단 말이에요. 참, 속 터지는 양반 다 보겠네. 차라리 하나님에게 욕이나 퍼붓고 죽는 편이 더 낫지 않겠어요?”
그런 그 아내를 향해 이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욥 2:10 /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도 말아요. 당신조차도 어리석은 여자같이 말하는구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을 때 우리가 얼마나 좋아했소. 그런데 이렇게 어려움을 겪는다고 해서 어찌 하나님을 비난할 수 있겠소.” 욥은 이렇게 큰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말로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았다.
이런 욥의 태도는 ‘고집’(무서운 신앙)이라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할 것이 없습니다. 정말 대단한 고집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욥의 고집(무서운 신앙)은 전혀 흔들림이 없습니다. 이렇게 욥이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으니 그를 시험하던 사탄이 혀를 내두르며 도망갔습니다. 그래서 2장 이후에는 사단의 모습이 나오지 않습니다. 욥기 1, 2장은 욥이 고난을 당하는 장면입니다.
그렇다면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은 욥에 대해서 3장부터 축복의 말씀이 나와야 당연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42장에 가서야 겨우 나옵니다. 그만큼 욥의 시련은 길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욥의 시련이 이렇게 길었을까요? 3장부터 39장까지의 내용은 어려움을 당한 욥에게 친구들이 찾아와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욥, 너에게는 우리가 모르는 죄가 있어. 그러니까 회개해야 해.” 그때마다 욥은 길길이 뛰면서 “난 죄가 없어, 나는 의인이야.”라고 반박합니다. 이것이 논쟁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욥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의 잘못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가장 무서운 죄는 자신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스스로 의롭다는 자아(自我)”입니다. 겉으로는 자신을 그럴듯하게 위장하고 있지만 “여전히 자기 의(義)가 살아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회개와 기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욥에게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고난과 시련이 있었던, 해결해야 할 유일한 문제는 바로 ‘자기 의’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나면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욥 42:5-6 / 전에는 내가 소문으로만 주님에 대해서 들어 왔습니다만, 이제 이 두 눈으로 주님을 똑똑히 뵙고 있군요. 이렇게 내가 꿇어 엎드립니다. 먼지바닥 위에 앉아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합니다.
처음에 친구들이 그렇게 회개하라고 소리쳐도 그는 눈도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소리칩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회개하니 기다렸다는 듯이 놀라운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복이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언제까지 고난과 시련을 끌어갈 생각입니까? 여전히 자신의 의(義)를 고집하는 한, 그 시련과 고난은 계속될 것입니다. 하지만 벗어날 방법이 있습니다. 이젠 그만, 하나님 앞에서 백기를 드는 것입니다. 나의 고집과 자아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고난과 시련을 이길 수 있는 길입니다. ♫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외면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이렇게 백기를 들고 투항하는 자세가 복의 통로가 되는 길입니다. 사실 항복이란 말은 인기있는 단어가 아닙니다. 우리는 패배에 수반되는 굴욕과 관련하여 이 단어를 씁니다. 어느 국가가 전쟁에서 패하면 이유가 없이 무조건 항복해야 합니다.
▶ 그러나 위엄이 있고 적절한 형태의 항복도 있습니다. 바울은 두 가지 측면에서 말을 합니다.
① 우리의 욕망과 의지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굴복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요 6:38 /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다.
② 우리가 하나님의 최고 통치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듯이 우리가 헌신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그 앞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라고 우리도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한다는 것이 짧은 생각으로는 힘들고 때로는 고통스러워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무서운 폭풍이 부는 갈릴리 바다를 평정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사람들이 말하는 선지자 중의 한 분이 아니십니다. 세례 요한도 아니십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사랑이시며, 우리의 영원한 목자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선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닌다 할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우리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면에서 볼 때, 내 의지 즉 인간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항복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행하실 것이라고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바울사도가 말했던 것과 같이 내가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선택하는 것이며(빌 4:11-12), 하나님께서 우리의 쓸 것을 채우시리라(19절)는 것을 믿음에 의해 아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은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감당할 수 없는 형편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길입니다. 아마도 지금이 하나님과 그의 완전하신 뜻과 계획에 “저는 항복합니다.”라고 고백할 때인지도 모릅니다.
▶ 창 32:24-32 말씀은 얍복강에서의 야곱의 기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고향을 떠나 갈 때는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해 외로이 혼자 갔지만,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간의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는 그는 대단히 성공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기쁨보다 불안했습니다. 그 이유는 400명의 부하를 이끌고 오는 형 에서를 만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을 고향으로 가라고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외삼촌 라반의 손에서 보호해 주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대도 야곱은 과거 자신을 찾아 죽이려 했던 형의 분노를 생생히 기억하기에 심히 두려워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야곱은 기도(창 32:9-12)하였는데, 이는 예전 형 에서의 낯을 피해 도망가던 때 벧엘에서 드린 기도(창 28:20-22)에 비하면 몰라볼 정도로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야곱의 기도는 진실하지 못했습니다. 기도 후에 취한 야곱의 행동(형에게 엄청나게 비싼 예물을 건네줌)을 통해 전혀 그렇지 못하였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예물을 드린 것은 에서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아주 고도로 계산된 심리적 요법이었습니다. 야곱이 진정 기도한 대로 하나님을 믿었다면 그는 종, 아내, 자식, 소유물을 다 건네지 않고 자신이 앞서 갔어야 했습니다. 아니면 함께 갔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홀로 남아 얍복강 가에 남아 있었습니다. 기도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앞서 보낸 사람들로부터 좋은 소식이 들려오기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창 32:24 이하에서 하나님은 야곱과의 씨름을 통해 끈질긴 기도의 중요성과 더불어 지금까지의 야곱에게 남아있었던 나쁜 습관을 고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야곱의 문제는 언제나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신의 얕은 재주와 잔꾀를 의지하여 살아온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의 환도뼈를 치셨는데, 야곱은 그의 환도뼈가 위골된 다음에야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달리게 되었고, 무기력해진 야곱에게 하나님은 져 주셨습니다. 야곱이 자신의 모든 잔꾀를 포기하고 항복하고 나자,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속이는 자’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싸우는 자’로 바꾸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기력할 때,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매달릴 때 비로소 우리의 간구에 응답하십니다. 가장 능력 있는 기도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나의 모든 잔꾀를 포기하고,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는 기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그의 역사하심을 앙망하는 것, 이것이 기도의 필수 요건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야곱은 얍복강의 사건을 통해 환도뼈가 위골되어 그의 남은 평생을 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은 그로 하여금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 욥의 인내와 결말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욥도 견디기 어려운 고난과 고통과 슬픔과 아픔을 당한 다음 두 손 들고 하나님께 항복을 했습니다. 욥이 마지막에 가서 하나님께 항복한 말(욥 40:1-5 / 욥 42:1-6)을 봅니다. 욥은 마지막에 가서 두 손 들고 항복했습니다. 아니 모세도 마지막에 가서 두 손 들고 하나님께 항복했습니다. 다윗도 나단 선지 앞에서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나이다.” 고 말하면서 두 손 들고 항복했습니다. 탕자도 마지막에 가서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습니다.” 라고 하면서 아버지께 와서 두 손 들고 항복합니다.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를 시작하면서 ‘항복’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했던 것입니다. 욥은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 자기 변명이 많았는데 이제는 하나님께 항복을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랑이 많고 자기 변명이 많습니다. 우리는 매를 많이 맞기 전에 두 손 들고 하나님께 항복하십시다. 항복하지 않고 버티어보았자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항복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복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 야고보서는 욥기 1장에서 42장까지 나타난 많은 가르침을 단 두 단어로 요약해서 기록했습니다. ‘인내’라는 단어와 ‘결말’이라는 단어입니다. 욥에게서 배울 것은 ‘인내’이고 ‘결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욥의 인내에 대해서 배워야 합니다. 욥이 그렇게도 견디기 어려운 고난과 고통, 환난과 슬픔, 아픔과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인내했습니다. 인내는 참으로 귀한 것으로, 인격이 단련되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을 당겨오게 됩니다.
야고보서는 초대교회 성도를 향하여 아예 처음부터 인내의 귀중함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습니다.
약 1:4 / 인내력을 기르십시오. 여러 문제가 닥쳐올 때 거기서 빠져 나오려고 몸부림을 치지 마십시오. 인내력이 충분히 길러지면 여러분은 완전히 성장해서 어떤 일에도 굴하지 않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가 될 것입니다.
약 5:11 / 그들은 심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끝내 주께 진실했으므로 지금 하늘나라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욥은 슬픔을 이기며 끝까지 주님을 믿은 사람의 모범입니다. 욥이 겪어 낸 일을 보고 우리는 주님의 계획이 축복으로 끝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께서는 한없는 은총과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사도 바울도 인내의 귀중함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롬 5:3-5 / 우리는 어떤 어려운 문제와 곤경에 처했을 때도 그것들이 가져다 줄 좋은 결과를 생각하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시련은 오히려 우리에게 인내를 배우게 하고 4) 인내는 강인함을 길러 주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희망과 믿음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것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5) 그렇게 되면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실망하지 않고 모든 일이 유익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극진히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는가를 알게 됩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하나가 인내이고 사랑의 특성 중의 하나가 인내입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인내를 잘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혼하는 사람도 많고 특히 청소년들의 죽음 중 가장 많은 것은 자살이라고 합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도 인내가 없으므로 분쟁과 분열이 많습니다. 자기 생각과 기분에 많지 않으면 토라지고 화를 내고 싸우기를 잘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욥의 인내를 배우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제부터 ‘결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욥이 인내하므로 얻은 ‘결말’입니다. 욥이 인내하면서 얻은 ‘결말’이 무엇입니까? 주께서 욥에게 주신 ‘결말'이 물론 물질적 복과 자녀 손들의 복과 장수의 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욥 42:10-17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욥이 얻은 ‘결말’이 그것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보다 더 값진 ‘결말’을 하나님께서 욥에게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욥이 고난과 인내의 과정을 거치면서 얻은 값진 ‘결말’이 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보다 깊이 알게 된 것과 사람들을 보다 깊이 알게 된 것과 그리고 하나님을 보다 깊이 알게 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1. 욥은 고난과 인내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보다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욥은 자기가 미천한 죄인이고, 무지한 죄인이고, 쓸데없는 말을 많이 지껄인 수다쟁이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입을 가리게 되었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 사람이 자기 자신을 바로 아는 것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어거스틴과 칼뱅의 간절한 소원과 기도도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과 함께 자기 자신을 바로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과 칼뱅은 말년에 가서 “나는 망할 자입니다. 나는 망할 자입니다”라는 고백을 거듭했습니다. 바울도 그러했습니다만 신앙이 깊으면 깊을수록 자신을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어 죄인됨을 더 알게 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기를 잘 몰라서 자신을 괜찮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욥도 자기를 아주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욥이 그렇게 말을 잘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말을 많이 했습니다. 자기가 의롭고 순전한 사람이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욥 12:1-4 / [하나님 하시는 일 이해할 수 없어] 욥이 다시 대답하였다. 2) 자네들만 참말로 지혜롭군 그려. 자네들이 죽으면 지혜도 함께 따라 죽겠군. 들어 보니 별소릴 다하는구먼. 3) 나도 자네들이 하는 말쯤은 다 알고 있네. 아니 그래, 자네들만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4) 하나님께서 내 목소리를 듣고 대답해 주셨어. 내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말일세. 내게 흠이 없다고 말일세. 그런데 친구인 자네들까지도 나를 비웃고 조롱하는군.
욥은 자기를 의롭고 순전한 자라고 말하고 또 말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고난, 고통, 환난과 슬픔, 아픔, 괴로움을 겪으면서 그리고 그것을 인내하면서 자기 자신을 조금씩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시 119:71 / 주께서 고난을 주셨으나 오히려 이것에게는 약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명령을 배울 기회가 되었습니다.
고난과 고통과 환난과 슬픔과 아픔과 괴로움은 자기 자신을 바로 알게 하는 교사이기 때문입니다. 욥이 수많은 고난과 고통과 환난과 슬픔과 아픔과 괴로움을 겪으면서 그리고 인내를 배우면서 발견한 자기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는 별볼일 없는 존재였습니다. 욥이 고난과 인내를 통해서 얻은 귀중한 ‘결말’ 중의 하나는 자기 자신이 미천하고 무지한 죄인임을 보다 정확하게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번 일로 인하여 욥은 절대로 교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2. 욥은 고난과 인내를 통해서 사람들을 보다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욥은 고난과 고통을 당하면서 그리고 인내를 배우면서 친구, 형제, 친척, 아내, 이웃도 모두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과 사람은 자기에게 불리하면 언제나 등을 돌릴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욥의 가까운 3친구처럼 사람이란 사랑의 대상은 될지언정 믿음의 대상은 될 수 없으며, 기도의 대상은 될지언정 믿음의 대상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욥은 형제들과 친척들과 종들을 향해서도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욥 19:13-22 / 하나님은 내 형제들도 나를 버리게 하셨다네. 나와 친분이 있던 사람들도 내게는 낯선 사람들처럼 되어 버렸다네. 14) 내 친척들도 내게 등 돌렸지. 친구들조차 내게서 떠나버렸어.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지만 욥은 자신만이라도 하나님과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하여, 3친구들로부터 극심한 조소와 비난과 공격과 정죄를 당했지만 마지막에 가서 저들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욥 42:10). 다윗도 자기를 미워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대했습니다.
시 109:3-4 / 나를 헐뜯어 얽어매며 까닭도 없이 나를 공격해 댑니다. 4) 그들을 아껴 주어도 내게 공격을 퍼부으니 이것은 그저 기도할 뿐입니다.
욥이 고난과 인내를 통해서 얻은 귀중한 결말 중의 하나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과 기도의 대상은 될지언정 믿음의 대상은 될 수 없다는 서글픈 사실을 보다 정확하게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3. 욥은 하나님을 뵈옵고 보다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욥은 1장과 2장에서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 일어난 일을 전혀 모릅니다. 욥의 아내나 3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보좌에서 일어난 일과 고통받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욥이 알고 있었을까요? 중요한 것은 욥이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알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가 당한 고난 다르게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상황은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욥은 자신이 당하고 있던 고난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신자에게도 고난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우리 신자들이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더욱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고난은 매우 값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실재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의로운 욥이 자신에게 일어난 참을 수 없는 고통속의 딜레마와 악성루머 가운데 견디기 힘든 날들을 보내고 있을 때 드디어 하나님께서 그에게 임하셔서 고난이 왜 왔는지에 대한 실재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세상 어느 곳에서도 문제의 해결책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야만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있음을 욥은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보인 것은 결코 실재가 아니며 루머와 소문과 비실재만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서 나타나셔서 욥기 38장부터 거의 120절 이상에 걸쳐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쏟아 부으시면서 하나님의 권능과 하시는 일을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무 말을 하지 못하는 욥에게 “네가 하나님처럼 할 수 있느냐?”고 질문하십니다. 이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고, 욥은 실재를 파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합니다. “2) 주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는 줄을 나는 잘 압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모든 일을 다 이루신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3) 주께서는 말씀하셨지요. 알지도 못하면서 내 계획을 가리는 자 그 누구냐고 말입니다. 어찌 함부로 말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깨닫지도 못하고 함부로 입을 놀려 댔습니다. 주께서 나를 위하여 하시는 놀라운 일을 미처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해댔습니다. 4) 주께서 말씀하시는 동안 듣고만 있으라고 주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질문하실 때 대답해 보라고 말입니다. 5) 전에는 내가 소문으로만 주님에 대해서 들어 왔습니다만, 이제 이 두 눈으로 주님을 똑똑히 뵙고 있군요. 6) 이렇게 내가 꿇어 엎드립니다. 먼지바닥 위에 앉아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합니다.” 욥은 그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는 분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그림자만을 압니다. 우리의 짧은 지식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하시는 일을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다만 우리는 그분 앞에서 무지를 고백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우리의 바른 모습과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사건의 실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부터는 고통 가운데서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합시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 보면 “모든 일은 그것이 건강이든, 질병이든, 우연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나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통은 실재가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인내하며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왜? 왜? 왜?” 라고 원통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을 보시고 웃고 계시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자녀의 고통을 바라보며 같이 아파하시는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섭리에 따라 가장 좋은 시기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무지한 이치로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 분이 행하시는 놀라우신 일들을 눈으로 직접 보며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그분은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실재이며 또한 그분이 나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해결해 주시는 것이 바로 실재입니다. 아멘.
그러면 우리는 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까요? 욥기서의 마지막 부분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아주 중요한 내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잘 견디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깨우침을 받은 욥에게 그가 전에 소유하였던 것보다 두 배로 주셨습니다. 그것은 14,000의 양, 6,000의 약대, 2,000의 소, 1,000의 나귀입니다(욥 42:12). 그리고 욥의 많은 친구들이 다시 그에게로 돌아왔습니다. 또한 욥은 7명의 아들과 3명의 딸들을 다시 두게 되었습니다. 그 딸들은 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욥기 42:16-17을 보면 "그 후에 욥이 140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고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믿음을 지킨 욥의 행복한 결말입니다. 그러면 욥기서의 마지막에 이러한 행복한 결말을 기록하고 있는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도 믿음을 지키면 욥처럼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려는 것일까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킨다고 할지라도 때로는 욥처럼 이러한 부를 누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욥기의 결론을 통하여 보여주시려는 것은 욥처럼 아무런 이유 없이 고난이 닥쳐도 어리석게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면 하나님이 위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섭리는 성도의 유익을 위하여 일하신다는 사실을 변함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욥기서가 말하는 지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