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마을의 중심에는 '삼거리 마트'라는 오래된 가게가 있었다. 그곳은 오랜 세월 동안 마을 사람들의 생필품을 책임져 온 곳으로, 가게 주인인 김 할머니는 이 마을의 살아있는 역사와도 같았다. 할머니는 나이 팔십을 넘겼지만, 여전히 가게를 지키며 손님들에게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곤 했다.
삼거리 마트에는 특별한 장부가 하나 있었다. 그 장부는 바로 '외상값'을 기록하는 장부였다. 마을 사람들은 필요할 때마다 김 할머니에게 외상을 부탁하고, 다음 월급날이나 수확이 끝난 후에 외상값을 갚았다. 할머니는 한 번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외상을 부탁하는 사람들에게 격려의 말을 건네며 "힘들 땐 서로 돕고 사는 거지"라며 웃어 보였다.
그러나 어느 날, 할머니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가게는 할머니의 손자 민우가 대신 지키게 되었다. 민우는 도시에 살다가 할머니의 부름을 받고 마을로 내려온 청년이었다. 도시에 익숙했던 민우에게 작은 마을의 생활은 낯설고, 외상 장부는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할머니, 왜 외상을 이렇게 많이 주셨어요? 이거 다 받으실 수 있는 거예요?" 민우는 장부를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할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민우야, 사람 사는 건 다 그런 거란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서로 믿고 의지하며 살아왔어. 저 장부는 단순한 외상값이 아니라, 우리 마을의 신뢰와 정을 기록한 거란다."
민우는 할머니의 말을 이해하려 노력했지만,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는 불안함이 남아 있었다. 그는 결국 마을 사람들을 하나씩 찾아가 외상값을 회수하려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민우의 말을 이해하고, 외상값을 갚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일부는 사정이 어려워 당장 갚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던 중, 민우는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집인 정 씨네를 찾아갔다. 정 씨는 몸이 불편한 아내와 어린 딸을 부양하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민우는 그들에게 외상값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정 씨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정말 갚을 수 있는 형편이 안 됩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꼭 갚겠습니다."
민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알겠습니다. 시간을 드릴 테니, 꼭 갚아주세요."
며칠 후, 김 할머니는 병원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슬픔에 잠겼고, 민우도 할머니의 빈자리를 실감하며 눈물을 흘렸다. 할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후, 민우는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낡은 일기장을 발견했다. 일기장에는 외상값 장부에 적힌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오늘 정 씨가 찾아왔다. 아내의 병원비 때문에 힘들다고 하더라. 외상값을 좀 더 주었다. 그의 성실함과 노력은 언젠가 보답받을 거라 믿는다."
민우는 일기장을 읽으며 할머니가 단순히 돈을 빌려준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지탱해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할머니의 뜻을 이어받아 외상값을 회수하는 대신, 마을 사람들을 돕기로 결심했다.
그 후, 민우는 가게에서 자주 할인 행사를 열고, 어려운 이웃에게는 무료로 물품을 나눠주기도 했다. 사람들은 민우의 변화를 보며 감동했고, 마을은 점차 활기를 되찾아갔다. 외상 장부는 사라졌지만, 그 대신 마을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김 할머니의 따뜻한 정과 신뢰가 깊이 새겨졌다.
민우는 이제야 비로소 할머니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사람 사는 건 다 그런 거란다. 서로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 마을은 그렇게 다시 하나가 되었고, 김 할머니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었다.
첫댓글 "외상 장부는 외상값이 아닌 마을 사람의 신뢰와 정을 기록한 장부이다."
의미 깊은 명언입니다.
따뜻한 소설 잘 읽었습니다.
좋은 평가 감사합니다.
착한 사람이 잘 살아야죠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