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052) 업박잡박하는[1] 풀들 (200712 연중16주일 가해)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태 13,3).
경신년(1800년) 가을일을 마친 대춘은 사촌 광옥[2]과 함께 무성산[3]으로 들어갈 채비를 하였다.
대흥 대춘은 집을 떠나기 전, 뿌릴 씨앗 망태기들을 광에 졸망졸망 달아 두며 혼자 말했다.
“내년에 내가 이것들을 뿌릴 수 있을까?”
씨앗 망태기들에게 유난히 정성 들이며 어루만지는 남편에게 아내가 묻는다.
“뭔 얘길 그렇데 중얼거린대유.”
대춘은 아내를 바라보고 정색하며 말했다.
“육신을 위한 씨앗을 광에 달고, 영신을 위한 씨앗은 땅에 묻으리다.”
대춘은 방으로 들어가 주문모 신부님으로부터 받은 성물과 책들이 든 궤짝을 들고나왔다.
비가 내려도 잘 젖지 않는 땅에 미리 파둔 구덩이가 하나 있었다.
대춘은 아내와 자식에게 말했다.
“농사꾼이 씨앗을 베고는 죽을지언정 먹지 않는 까닭은 자손 대대로 먹이기 위해서요. 여기에 묻는 성물과 교회 책들도 씨앗과 같소. 먼 훗날 호미 날이나 괭이 날 끝에 걸려 나오면 그들은 이 성물과 책들을 보며 천주를 알고 공경할 것이요.”
그 무렵 여사울 광옥은 경서[4]을 앉혀놓고 일렀다.
“나는 주님의 길을 가려 한다. 너는 이제 이 집의 가장이다. 나를 대신해서 연로하신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 네 처자식을 잘 돌보아라. 내가 치명하거들랑 내포 교우들이 숨어 사는 경상도 일월산으로 가 너와 가족들을 지키거라.”
두 사람은 대흥에서 만나 밤에는 호랑이가 나타나고 낮에는 사슴이 나타난다는 차동고개를 넘어 유구 녹천리를 지났다.
유구 천 길을 따라 신풍을 지나 사곡 진밭(신영리)에서 북쪽으로 머리를 돌려 무성산에 당도하였다.
갈바람에 성겨진 무성산 마른 풀들을 헤치며 산을 올랐다.
한여름에는 사람의 발도 들여놓기 어려운 궁벽지였다.
찬바람결에 마른 풀들이 업박잡박거릴 때마다 풀 속 땅이 보였다.
사람이 지난 흔적이 희미하게 보였다.
찬바람에 메마르게 흔들리는 산기슭에 뿌리박고 사는 잡초와 잡목들이 길을 막았다.
순교의 길에서 걸려 넘어지는 것은 하찮은 것들 때문이다.
순교 준비는 시작도 안 했는데 맘속에서 분심이 일기 시작한다.
그들이 서 있는 땅은 씨앗은커녕 걸을 수 있는 길바닥도 자갈밭도 못되었다.
손도 발도 쓸 수 없은 답답하고 앞이 캄캄한 가시덤불 속이었다.
두 사람은 불을 질러 화전이나 일구어야 할 땅 위에 멈추어 섰다.
세상 어디에도 좋은 땅은 없다
지게질과 곡괭이질이나 삽질로 만들어진다.
무릎과 허리뼈가 녹아서 주저앉고 등이 굽어져야 좋은 땅이 만들어진다.
그 땅에 씨앗을 뿌려 맺은 곡식이 사발에 담겨 밥상 위에 오르면 악마디 진 손에 숟가락이 들리는 것이다.
입에 밥을 넣으려면 족히 삼대가 허리 병신이 되어야 할 불모지에 그들은 서 있었다.
사대가 백 년 동안 피 흘리고 죽어야 생명의 빵을 입에 모실 수 있는 광야만도 못한 땅 위에 그들은 서 있었던 것이다.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이육사 ‘광야’)는 사치스러운 시다.
강산이 열 번 지나도록 울고 신음하고 숨 끊어지는 소리가 들린 다음에라야 이 산기슭에서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외칠 수 있는 불모맹지에 그들은 서 있었던 것이다.
대춘은 잡초와 잡목이 서로 묶고 묶이며 할퀴는 무성성산 가시덤불 기슭에서 집에 두고 온 씨앗들과 땅에 묻은 성물과 책을 떠올랐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외쳤다.
“주여, 제 꿈에 불을 지르소서.
그리하여 이 가시덤불 속을 좋은 땅으로 삼으소서.
주리질로 부러진 뼈로 땅을 파고
곤장질로 찢긴 살로 거름 주고
참수칼로 솟는 피로 물 주어
박토 삼천리강산에
주님께서 뿌린 씨앗
싹이 돋고 꽃이 피어 많은 열매 거두소서.”
[1] 업박잡박하다 : ‘엎치락뒤치락하다’ 평안도 사투리.
[2] 대춘과 광옥 : 복자 김정득 베드로(?-1081)와 복자 김광옥 안드레아(1741?-1801). ‘대춘’은 복자 김정득 의 자(字)이다. 복자 김정득의 字인 ‘대춘’은 한자로 확인 되지 않는다. 봄을 기다리거나 맞는 ‘待春’, 장수를 뜻하는 大椿之壽를 줄인 大椿, 立春大吉 또는 春節과 관련하여 ‘大春’ 중 하나라고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