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경윤
사학의 큰괴수로 지목되다.
▲ 손경윤은 큰 집을 한 채사서 바깥채는 술집으로 꾸며 신자가 아닌이들에게 술을 팔고, 안채에 는 신자들을 모아 놓고 교리를 가르쳤다.
1760〜1802, 세례명 제르바시오,서소문 밖에서 참수
중인 계급 출신인 손경윤(孫敬允, 제르바시오)은 안국동에서 약방을 운영하며 살았는데. 자는 백원(伯源)이고, 경원은 그의 또 다른 이름이다. 1790년 최필공의 선교로 입교한 뒤 세례를 받은 그는. 이듬해 일어난 신해박해(辛亥迫害) 때 최필공, 권일신, 정인혁, 최인길, 최인성, 현계온, 허속, 김계완, 김덕유, 최필제, 최인철, 양덕유 등 교회의 주요 인물들과 함께 형조에 갇혔다가 석방되었다.
손경윤은 그 후로도 계속 천주교를 신봉하다가. 1796년 다시 형조에 의해 체포되어 다시는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풀려 나왔다.
교리서를베껴 나누어주다
그러나 오랫동안 믿어 온 천주교를 하루아침에 버릴 수 없었던 그는, 더욱 깊이 믿으며 동생 경욱(敬郁,프로타시오), 사촌 동생 경무, 최창현, 최필공, 정광수, 김이우, 김현우, 홍익만, 이합규 등과 신앙 공동체를 형성한 뒤 매월 7일이면 주문모 신부를 모셔다가 김이우의 집에서 미사를 드렸다. 또 정광수가 벽동에 새로 공소를 지을 때는 직접 찾아가 도배도 하고, 주문모 신부를 모셔다가 미사도 드렸다.
손경윤은 회장직임을 맡아 자기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틈틈이 교리서를베껴 여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더러는 팔기도 하였다. 또한, 굉장히 큰 집을 한 채 사서 바깥채는 술집으로 꾸며 신자가 아닌 이들에게는 술을 팔고, 안채에는 신자들을 모아 놓고 교리를 가르치며 격려하였다. 언뜻 겉으로 보면 사람들이 법석대는 소란스러운 술집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아무도 교리를 가르치는 곳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렇게 열심히 활동한 신자였기 때문에 손경윤은 박해가 시작되자 곧 ‘사학의 큰 괴수'로 지목되어 밀고되고 말았다. 이에 그는 체포될 것을 염려하여 1801년 1월 초 동생 경욱과 함께 동맥에 사는 처족(妻族) 태 씨 과붓집에 숨어 10여 일을 지내다가 양근의 한 시골집으로 가서 숨어 지냈다.
그 후 서울로 올라와 1월 그믐께 수구문 밖에서 경욱과 헤어진 뒤ᅵ, 2월 15 일경에는 연서동에서 숨어 지냈으며. 3월 초에는 다시 교하, 양지, 서산, 연천 등 여러 고을을 전전하였다. 그 후 서울 아현동 최봉득의 집에 왔다가 처자가 잡혀 갔다는 말을 듣고 자수하였다.
손경윤은 포도청의 진술에서 배교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형조의 신문에서는 배교한다고 말한 것은 입으로만 그랬을 뿐, 마음으로는 배교한 것이 아니라고 진술하였다. 손경윤은 천주교를 믿은 죄와 교리서들을 베껴 여기저기 나누어 준 죄로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12월 26일(양 1802년 1월 29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1760〜1802, 세례명 제르바시오,서소문 밖에서 참수
중인 계급 출신인 손경윤(孫敬允, 제르바시오)은 안국동에서 약방을 운영하며 살았는데. 자는 백원(伯源)이고, 경원은 그의 또 다른 이름이다. 1790년 최필공의 선교로 입교한 뒤 세례를 받은 그는. 이듬해 일어난 신해박해(辛亥迫害) 때 최필공, 권일신, 정인혁, 최인길, 최인성, 현계온, 허속, 김계완, 김덕유, 최필제, 최인철, 양덕유 등 교회의 주요 인물들과 함께 형조에 갇혔다가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