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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소蘇 주교 시복 추진
제1차 심포지엄
브뤼기에르 소蘇 주교의 생애와 조선 선교 배경
2023. 12. 2 토요일. 서울대교구청 3층 대회의실 14~18시
제1차 심포지엄 일정
개회사 구요비 주교(시복시성위원회 위원장)
제1주제
브뤼기에르 주교의 생애 : 탄생에서 선교사 임명까지
허보록 Philippe BLOT 신부(파리외방전교회 부지부장)
제2주제
시암 대목구 선교사 브뤼기에르 신부와 조선 선교지
조현범(한국학중앙연구원)
제3주제
조선대목구 설립 전후의 중국 교회 상황
최병욱(강원대학교)
제4주제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을 둘러싼 논란 검토
조선교회 구성원들의 입장과 반응을 중심으로
방상근(교회사연구자)
제5주제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선교 여정과 선종, 유해 이장
차기진(양업교회사연구소)
종합 토론
좌장 조한건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장, 역사와고문서전문가위원회 위원장)
토론 이석원(수원교회사연구소)
박광용(가톨릭대학교)
장정란(아시아천주교사연구회)
폐회사 박선용 신부(시복시성위원회 부위원장)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초대 조선교구장
시복시성 기도문
모든 성인들의 덕행으로 찬미와 영광 받으시는 주님!
주님께서는 성교회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증거하기 위하여
생명을 바친 성인성녀들을 공경하여 그 표양을 본받게
하셨나이다.
조선 선교를 자청한 뒤 온갖 고난과 질병을 극복하면서
오로지 조선에 들어가 선교하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온 삶을 봉헌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공로에 의지하여 청하오니
저희들이 거룩한 순교정신을 본받아
신망애 향주삼덕에 뿌리를 박고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도록 도와주소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공로로 저희를 이 세상에서 보호하시며
저희의 마음속 지향을 들어 허락하심으로써
(잠깐 침묵 중에 기도의 지향을 아뢴다.)
당신 권능을 드러내시고 저희가 희망하는 대로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가 복자와 성인들 대열에 들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 순교자들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님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한국의 순교자들이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2008. 7. 1.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 인준
2023. 3. 23.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 수정 승인
제4주제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을 둘러싼 논란 검토
- 조선교회 구성원들의 입장과 반응을 중심으로 -
방상근(교회사연구자)
1. 머리말
2. 조선교회의 상황
3. 여항덕(유방제) 신부의 입장
4. 조선 교우들의 반응
5. 맺음말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을 둘러싼 논란 검토
―조선교회 구성원들의 입장과 반응을 중심으로―
1. 머리말
1831년 9월 9일 조선대목구가 설정되고, 초대 대목구장으로 브뤼기에르(B. Bruguière, 蘇, 1792~1835) 주교가 임명되었다. 당시 브뤼기에르 주교는 시암 대목구의 부주교로서 페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832년 7월 25일 파리에서 보낸 편지를 받고 자신이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으로 가기 위해 8월 4일 페낭을 출발했고, 10월 18일 마카오에 도착했다.
1832년 12월 19일 무렵, 마카오를 떠난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3년 3월 1일에 복건대목구의 복안현(福安縣) 정두촌(頂頭村)에 상륙했고, 이후 7개월 이상 온갖 고초를 겪은 후 10월 10일 산서대목구장이 거주하던 산서의 태원부(太原府) 기현(祁縣) 구급촌(九汲村)에 도착했다. 그리고 거의 1년이 지난 1834년 9월 22일에 산서를 떠나 10월 8일 북경에서 가까운 서만자(西灣子)로 갔고, 그곳에서 또 1년을 머물면서 조선 입국을 준비했다.1)
브뤼기에르 주교가 산서에 머물던 1834년 1월 여항덕(余恒德, 1795~1854, 즉 유방제)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였다. 여 신부는 나폴리의 성가정 신학교 출신으로 1830년 12월 5일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1821년 신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조선 선교를 자원했는데, 서품 직후인 1831년 1월 27일에 나폴리를 떠나 마카오, 섬서를 거쳐 1832년 12월 25일 북경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듬해 초 조선 신자들을 만나 입국을 위한 준비를 한 다음, 1834년 1월 3일에 조선 땅을 밟게 되었다.2)
여항덕 신부는 포교성에서 파견한 선교사로, 그의 역할은 브뤼기에르 주교에 앞서 조선에 들어가 주교가 입국할 수 있는 길을 준비하고, 장애가 되는 것을 제거하며, 어려움을 해결하는 일이었다.3) 그리고 조선 신자들은 1811년 이래 교황께 선교사를 보내 달라는 청원을 했기 때문에, 주교 입장에서는 이들이 자신의 입국을 당연히 반길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조선 입국을 위해 주교 앞에 놓인 과제는 조선 국경까지 무사히 가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여항덕 신부와 조선 교우들은 주교의 기대와는 달리 주교의 입국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심지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는 제안까지 했다. 물론 1835년 1월 왕 요셉과 신자들의 담판 끝에 주교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당연시되었던 주교의 입국을 둘러싸고 예기치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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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현범, 「조선대목구의 설정과 선교사의 입국」, 『한국천주교회사』 2,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256~280쪽 참조.
2) 전수홍, 「조선인들의 서신과 여항덕 신부」, 『신앙과 삶』 3, 부산가톨릭대학 출판부, 1999, 133~136쪽 참조.
3)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81쪽. 1831년 7월 4일 포교성에서 페디치니(Pedicini) 추기경이 주재하는회의에서 결정된 사항 중 “브뤼기에르 주교의 청원을 허락한다. 그러나 주교가 조선 입국을 실행하는 것은 중국인 신학생이 조 선으로 들어가서 주교의 입국이 더 수월하도록 일을 준비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조현범, 「조선대목구의 설정과 선교사의 입국」, 240쪽).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여 신부가 이러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2008], 81쪽 ; 정양모 신부·윤종국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가톨릭출판사, 2007,
3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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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이 야기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은 왜 벌어졌을까?
여항덕 신부와 신자들은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 ‘서양인의 모습이 조선인과 달라 발각될 위험이 크고, 발각되면 큰 박해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 주교의 입국은 득(得)보다 실(失)이 많다는것, 당시 조선은 박해 속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서양배의 출현으로 서양인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 서양인 주교의 입국은 조선교회와 신자들을 위험에 빠트린다는 것’을 반대 이유로 제시했다.
즉 “조선교회를 위해서”라는 것이 명분이었다.
특히 여항덕 신부는 1834년 11월 남경 주교와 포교성4)에 보낸 서한에서, “조선인들의 영혼을 돌보는 일은 유럽인이나 중국 사제도 도와줄 수 없고, 오직 조선인만이 가능하다.”5)는 견해를 피력했다.
여항덕 신부의 입장은 조선인 사제에게 조선교회의 사목을 맡긴다는 방침으로, 이에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을 반대’하는 동시에 ‘방인 사제 양성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신자들도 여항덕 신부의 뜻에 동조하여, 여 신부와 같은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6)
그런데 조선 교우들은 1811년 이후 지속적으로 북경 주교, 심지어 교황에게까지 편지를 보내 성직자의 파견을 요청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서한들에는 서양 선교사를 보내지 말라는 내용이 없었다. 그리고 1830년대 초반이 주교가 입국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박해 상황이었는지도 의문이다. 그렇다면 여항덕 신부와 신자들이 내세운 반대 이유는 타당한 것일까? 이에 대한 검토는, 주교의 입국을 둘러싼 논란의 배경을 밝히는 작업임에도, 지금까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이에 필자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에 여항덕 신부와 조선 신자들이 보여준 반응들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고, 이를 통해 이들이 주교의 입국을 반대한 이유와 그 이유의 타당성에 대해 검토해 보도 록 하겠다.
2. 조선교회의 상황 : 성직자 영입 활동과 박해
앞서 언급했듯이, 신자들이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을 반대한 이유는 “주교의 외모와 당시 조선교회가 처해 있던 박해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주교의 입국이 결정되기 이전, 조선교회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본격적인 서술에 앞서, 시대적인 배경으로서 19세기 전반기의 교회 상황에 대해 먼저 살펴 보도록 하겠다.
신유박해를 주도했던 정순왕후가 1803년 12월 28일(양력 1804년 2월 9일) 수렴청정(垂簾聽政)을 거두면서 순조가 직접 통치를 하게 되었고, 1805년 1월 12일(양력 2월 11일) 정순왕후가 사망하면서 박해의 여파는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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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수홍은 이 편지의 수신인을 남경 주교라고 추정했지만, 내용상 포교성에 보낸 서한이라고 한다(이석원, 「1830년대 중국인 사제 여항덕 신부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 사제들과의 갈등」, 『중국근현대사연구』 96, 중국근현대사학회, 2022, 143쪽 각주 41 참조).
5)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2008), 351쪽 ; 전수홍, 「劉方濟 신부의 조선 선교와 그 문제점」, 『역사와 사회―架磹 宋基寅 神父 華甲紀念論叢』, 현암사, 1997, 82쪽.
6) 여항덕 신부의 조선 선교에 대해서는, 전수홍, 「劉方濟 신부의 조선 선교와 그 문제점」 ; 전수홍, 「조선인들의 서신과 여항덕 신부」 ; 오근,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임명으로 인한 다양한 상황들」, 가톨릭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13 ; 이석원, 「1830년대 중국인 사제 여항덕 신부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 사제들과의 갈등」 참조. 방인 사제 양성과 관련해서, 윤민구는 조선 신자들이 먼저 적극적으로 고려했고, 여항덕 신부가 이에 동의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윤민구, 「조선 천주교 신자들의 서양 선교사 영입 운동과 파리외방전교회의 조선 진출」, 『성 도리 신부와 손골』, 한국순교자연구회, 2007, 50~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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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변화하자 신자들 중에는 흩어진 교우들을 모으고, 성직자를 영입하여 교회를 재건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러면서 점차 신앙 공동체들이 생겨났고, 비신자들의 입교도 다시 시작되어 신유박해로 생긴 공백이 메워지게 되었다.
교회의 재건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자, 신자들은 북경에서 성직자를 영입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1811년에 이여진을 북경으로 파견했다. 이여진은 교황 비오 7세에게 보내는 1811년 10월 24일자 (음력) 서한과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1811년 11월 3일 자(음력) 서한을 북경에 전달했다. 서한에는 조선교회의 상황을 알리고 성직자의 파견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여진은 1812년 혹은 1813년 말에도 북경에 파견되었다.
성직자 영입을 위한 신자들의 노력은, 1816년 정하상(丁夏祥)에 의해 재개되었다. 정하상의 북경 왕래는 이후에도 7~8차례 계속되었다. 특히 역관 출신인 유진길(劉進吉)이 1823년에 입교하여 성직자 영입 작업에 합류하면서 신자들의 활동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리고 1825년(혹은 1824년) 말7) 에 다시 한번 성직자의 파견을 요청하는 서한을 교황 레오 12세에게 발송했다.
지속적으로 추진되던 성직자 영입 운동은 1831년 말에 결실을 볼 기회가 있었다. 조선의 신자들은 1830년 3월(음력)에 중국으로부터 섬서·산서대목구의 살베티(J. Salvetti) 주교(이탈리아 프란치스코회 소속) 를 통해 성직자를 파견할 것이니, 선교사를 맞이할 방법을 강구하라는 취지의 서한을 받았다.8)
유진길은 1830년 10월(음력)에 답신을 작성하여 중국으로 보냈다. 유진길은 선교사가 북경에서 조선으로 오는 길과 방법을 자세히 설명했고, 1831년 11월(음력)에는 국경에서 선교사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이 계획도 실현되지 못하면서, 선교사의 조선 입국은 조선대목구의 설정 이후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신자들은 1811년(교황에게 보낸 서한), 1825년, 1830년 서한에서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였다.9) 먼저 1811년 서한에서는 배를 타고 해로로 오는 방법을 제시했다. 구체적으로는 중국 산동에서 서해안으로 상륙하여 서울로 가는 방법과 마카오에서 남해안을 거쳐 서울로 가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두 가지 방법 중에는 서해안을 통해 들어오는 것을 추천했다. 왜냐하면 서해안에서 서울로 가는 길이 훨씬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데 배를 보낼 때, 한문에 능통하고 우리나라의 법령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 함께 오도록 했으
며, 아울러 교황과 여러 나라의 군주가 조선 왕에게 선물과 정중한 편지를 보내 조선에서도 성교회가 용인되도록 설명해 달라는 취지였다. 그러나 큰 배를 보낼 수 없다면, 최후의 수단으로 마카오에서 배를 타고 남해안에 있는 무인도를 찾아 그곳을 연락 거점으로 하는 방안도 제시하였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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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에는 1824년에 보냈다는 전언을 소개하고 있으며,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1825년경 유진길이 작성한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 서한은 1826년 11월 29일에 마카오에서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그렇다면 이 서한은 1825년에 작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한다.
8) 이 서한의 출처에 대해서는 최석우 지음, 조현범·서정화 옮김, 『조선에서의 첫 대목구 설정과 가톨릭교의 기원』, 한국교회사연구소, 2012, 135쪽 참조. 그런데 이 서한의 수취인이 북경에 있는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인지, 교황청과 관련된 인물인지는 알 수없다. 다만 산서대목구의 주교를 통해 선교사를 파견하려 한 사실로 보아, 마카오의 포교성 대표부 움피에레스 신부가 수취인이 아닐까 생각된다.
9) 오근도 1811~1825년 서한에 나타난 입국 방법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오근,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임명으로 인한다양한 상황들」, 60~65쪽 참조).
10) 윤민구 역주,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가톨릭출판사, 2000, 204~208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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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1825년의 서한에서도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유럽 배가 와야 한다는 뜻을 전하고있다. 즉 마카오에서 출발하여 인천, 부평, 안산, 교화, 통진, 남양, 김포 등 서울 가까이에 있는 지역 근처의 섬 사이에 닻을 내린 다음, 임금에게 의학 서적, 의약품, 귀중하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물건 등 ‘공경의 선’을 전한 후 천주교의 봉행을 허락한다는 왕의 교서가 내릴 때까지 10년이든 100년 이든 머문다는 뜻을 전달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11)
그러면서 당시 조선의 정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노론 당파는 100년이 넘도록 권력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당파는 최근 서로 나뉘어 벽파(Pipai)와 시파(Hapai)로 불리기를 좋아합니다. 왕족이든 양반 혈통이든 지금 권력을 행사하는 이들은 이 시파 출신입니다.
이미 이들은 백성을 두려워하면서도 종교에는 호의적입니다. 온 나라 백성이 한목소리로 이 당파에 호의를 보입니다. 이들 가운데에는, 예전의 중국 서적들에 지쳐 다른 민족들의 뛰어난 학문들을 추구하며 주로 천문도와 도구들을 높이 평가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재능이 뛰어난 이는 누구든지 [조선] 왕국에 잘 받아들여지리라는 것을 확실히 압니다.”12)
이 서한 작성에 관여한 유진길은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의 오빠였던 김유근(金逌根)과 친분이 있는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위의 인용문에서 시파로서 종교에 호의적이고, 다른 민족들의 학문을 추구했던 사람은 김유근을 말하는 것 같다. 1825년 당시 김유근은 사헌부 대사헌, 홍문관 제학 등의 관직을 맡고 있었다.
정치 상황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유럽 배가 도착하면 처음에는 놀라겠지만, 그 들의 힘과 인성에 경탄하여 의심하지 않고 친절하고 기쁘게 맞아들일 것이라고 낙관했던 것이다.13)
그런데 1830년에는 1811년·1825년과는 달리 해로가 아닌 육로로 입국하는 방법, 즉 1794년 주문모 신부가 입국했던, “북경 → 봉황성 → 책문 → 압록강 → 의주 → 서울” 경로를 소개하며, 새로 입국하는 성직자를 이 길로 인도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1811년 서한에서 육로 대신 해로를 제안한 것은, ‘1801년의 박해로 조선의 출입국 통제가 100배나 엄격해졌고, 북경의 박해로 북경교회와도 연락하지 못한다.’는 것이 이유였다.14) 그리고 1825년의 경우는 ‘북경 주교가 사제들만 보낸다면 사제들은 관헌들의 감시와 백성들의 의심을 벗어나기 어려워 신앙 전파의 희망은 사라지고 말 것이니, 유럽 배의 도착이야말로 자유로이 신앙을 선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15)
결국 1811년에는 박해로 육로가 통제된 상황, 1825년에는 확실한 신앙의 자유를 갈망하는 바람에서, 유럽 배를 통한 선교사의 해로(海路) 입국 방안을 제시했다고 하겠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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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최석우 지음, 조현범·서정화 옮김, 『조선에서의 첫 대목구 설정과 가톨릭교의 기원』, 208~211쪽 참조.
12) 최석우 지음, 조현범·서정화 옮김, 『조선에서의 첫 대목구 설정과 가톨릭교의 기원』, 205쪽.
13) 최석우 지음, 조현범·서정화 옮김, 『조선에서의 첫 대목구 설정과 가톨릭교의 기원』, 206쪽.
14) 윤민구 역주,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4쪽.
15) 최석우 지음, 조현범·서정화 옮김, 『조선에서의 첫 대목구 설정과 가톨릭교의 기원』, 206~207쪽.
16) 사절을 통한 방안은 이미 1796년에 주문모 신부가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낸 사목 보고서에서 제안된 내용이다. 즉 주문모 신부는 ‘조선에 천주교를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포르투갈 여왕이 사신 한 사람을 수학과 의학을 잘 아는 선교사들과 함께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과 우호 조약을 맺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었다(윤민구 역주,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모음집』, 149쪽). 이후 ‘대박청래(大舶請來)’가 조선 선교의 중요한 키(key)라는 생각은 조선 신자들 사이에 어느 정도 공유되고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801년 이전 대박청래와 관련된 내용은, 차기진,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성직자 영입과 洋舶請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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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830년 서한에서는 해로가 아니라 다시 육로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아마도 산서대목구의 주선으로 선교사가 파견된다는 점에서 해로가 아니라 육로를 제시했던 것 같고, 또 이 시기가 되면 1811년 서한에서 염려했던 국경의 경비 상황이 어느 정도 완화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조선의 신자들은 1811년 이후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었고, 이를 위해 해로와 육로 양 방면의 입국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입국하는 선교사의 생김새에 대해 언급한 적은 없었다. 물론 잠입(潛入)이 아니라 사절(使節) 방식을 제안했기 때문에 그랬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1811년 서한에서 무인도를 마카오와의 연락 거점으로 삼는 방안을 제시한 것은, 사절 방식이 아니더라도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고 하겠다.
19세기 전반기 조선교회가 처해 있던 박해 상황도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을 반대하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주지하듯 1811년 이후 교회의 재건과 성직자 영입 활동이 전개되고 있었지만,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비록 1801년과 같은 정부 주도의 대규모 박해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지방에서는 여전히 신자들이 체포되고 있었다.
이 시기 대표적인 박해가 1815년의 을해박해와 1827년의 정해박해이다. 을해박해는 1815년에 경상도의 청송(노래산)·진보(머루산)·영양(곧은장과 우련밭)과 강원도의 울진 신자들이 체포되어 순교한 사건이다. 그러나 이 박해는 공식적인 박해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지수(혹은 전지순)라는 한 배교자의 탐욕이 계기가 되어 발생하였고, 지역적으로도 경상도에 한정된 국지적인 박해였다.
을해박해로부터 12년이 지난 1827년에는 전남 곡성군 덕실 마을에서 정해박해가 시작되었다. 교우 사이의 사소한 다툼에서 시작된 정해박해는 2월부터 5월(음력)까지 3개월 정도 진행되었고, 전라도·경상도·충청도·서울에서 신자들이 체포되기는 했지만, 중앙 정부는 이 박해에 관여하지 않았다.17)
이처럼 19세기 전반기의 조선교회는 여전히 박해의 위험 속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러나 1801년처럼 중앙 정부가 박해를 주도하지 않았고, 체포된 신자의 처형도 을해박해 체포자는 1년, 정해박해 체포자는 12년이 걸릴 정도로 신중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따라서 비록 체포되는 신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주교가 입국하기 직전인 1830년대 초반을 급박한 박해 상황이라고 간주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것은 신자들도 인식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겠다.
3. 여항덕(유방제) 신부의 입장1832년 10월 21일 마카오의 움피에레스(R. Umpierres) 신부로부터 자신과 관련된 칙서를 받은 브뤼기에르 주교는 마카오를 떠나기 전인 11월 23일에 왕 요셉을 먼저 북경으로 보냈다. 남경 주교와 여항덕(유방제) 신부, 그리고 음력 12월에 북경에 오는 조선 신자들에게 편지를 전하기 위해서였다.18)
여항덕 신부는 1831년 1월 27일 나폴리를 떠나 7월 31일에 마카오에 도착했고, 8월 26일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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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한 연구」, 『교회사연구』 13, 한국교회사연구소, 1998 참조.
17) 달레 신부는 정해박해의 특징 중의 하나로, “중앙 정부가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 즉 관장들과 포교, 포졸들의 탐욕, 백성들의 원한, 개인적인 밀고 등을 박해의 원인으로 지목하였다(샤를르 달레 원저, 안응렬·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中,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183~184쪽).
18)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79쪽. 왕 요셉은 1833년 2월 17일(음력 12월 28일)에 북경에 도착했다(같은 책,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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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동에 상륙한 후 고향인 섬서성 일대를 거쳐 1년 4개월 만인 1832년 12월 25일에 북경에 도착했다. 북경에 머물던 여 신부는 1833년 2월에 왕 요셉으로부터 주교의 서한을 받았고, 북경에 온 조선인 1명을 만나 조선 입국을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런 다음 1833년 4월 10일에 북경을 떠나 만주로 향했고, 그해 말 국경에서 기다리던 신자들과 함께 1834년 1월 조선에 입국하게 되었다.19)
그런데 조선에 입국한 여항덕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을 돕기는커녕 도리어 주교의
입국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즉 여 신부가 주교에게 보낸 1834년 11월 18일 자 편지에 ‘교우들이 박해의 고통을 당하고 있고, 또 계속해서 여러 척의 서양 배가 출몰하면서 조선 전역에 두려움이 커가고 있다.
유럽 배의 출현은 교우들 때문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으니, 서양인인 주교가 입국하는 것은 조선 교우들을 죽음으로 몰아가 조선 선교지를 파멸시킬 위험이 있다.’고 했고, 또 ‘육로로의 입국은 국경에서 외모와 언어 때문에 발각될 것이 분명하고, 해로는 모든 배가 감시 대상이기 때문에 상륙하기 어려우니, 주교와 왕 요셉은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현명하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
다.20)
여기서 박해의 고통은 1827년 이후의 박해 상황을, 서양 배의 출몰은 1832년에 홍주 고대도(古代島)에서 한 달 동안 머물다 떠난 영국 상선 로드 애머스트(Lord Amherst)호 사건을 말하는 듯하다.21) 여항덕 신부의 주장에 대해, 브뤼기에르 주교는 순수한 목적을 지녔다고 평가하지 않았다. 주교는 여항덕 신부가 자신을 장상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제안을 한 것으로 생각했다. 실제 여신부는 조선으로 입국하기 전인 1833년 11월에 주교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름·서열·사람 구분 없이 주교와 왕 요셉 2명을 수신인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1834년 11월 18일 자 서한에도 수신자를 “巴牧王兄”이라고 하였다.22) 이에 대해 브뤼기에르 주교는 “격식들을 생략하고 예절들을 망각한 것, 어떤 경칭이나 재치권자 칭호도 쓰지 않은 것, 조선 선교지나 자기의 성직 수행의 결과에 대해 아무런 보고가 없는 것”에 대해 불쾌감을 나타냈다.23)
샤스탕(J. Chastan) 신부가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도, ‘북경에서는 갑사 주교님이 아니라, 남경 주교님만이 조선에 대한 재치권을 갖고 있으며, 갑사 주교님이 조선으로 들어갈 때까지는, 남경 주교님만이 그곳으로 파견될 선교사들을 승인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항덕 신부도 그렇게 알고 있다.’고 하였다.24)
한편 여항덕 신부가 남경 주교에게 보낸 1834년 11월 18일 자 서한에는, ‘잦은 박해, 엄중한 정치적 속박, 다른 여러 가지 억압 때문에 조선 선교지가 실로 비참하고 곤란한 처지에 있다고 한 뒤,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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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전수홍, 「조선인들의 서신과 여항덕 신부」, 135~136쪽.
20)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2008), 359~363쪽.
21) 로드 애머스트호에 대해서는, 오현기, 「귀츨라프 선교사와 로드 애머스트호(Lord Amherst)」, 『대학과 선교』 23, 한국대학선교 학회, 2012 참조.
22)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2008), 231쪽 ; 정양모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368쪽.
23)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2008), 357쪽. 1835년 8월 7일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서한에서도, 여항덕 신부가 재치권이나 격식을 차린 호칭 없이 사람을 구분하지도 않은 채 편지를 보낸 것을 언급하고 있다(정양모 신부·윤종국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324~325쪽).
24)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2008), 259쪽. 샤스탕 신부는 교황 베네딕토 14세(1675~1758)의 “교구 시노드 규정(traité dusynode diocésain)”을 근거로 조선의 재치권이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있음을 증명하기도 했다. 샤스탕 신부가 제시한 시노드 규정은 1763년에 발간된 De synodo dioecesana libri tredeci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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럽이나 중국 사제는 이들의 영혼을 절대로 도와줄 수 없고 오직 방인 사제만이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내년 겨울에 2명의 신학생을 중국으로 보낼 계획을 전하며 도움을 요청’한 내용이 있다.25) 이것으로 보아 여항덕 신부가 주교의 입국을 반대한 것은 자신의 사목 경험에서 나온 ‘조선교회의 구제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교회의 구제책’에 대한 생각도 주교와 여 신부는 달랐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1834년 9월 20일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서한을 보면, ‘조선 교우들이 박해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 때문에 유럽인보다 중국인 사제를 선호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신자 수, 무지, 활기 없는 마음, 어디에나 만연해 있는 미신, 본토인 성직자 양성의 시급한 필요성 등을 감안하면, 적어도 처음에는 유럽인 주교 한명과 몇몇 선교사들이 필요’함을 강조했다.26)
즉 비록 박해의 위험성이 있기는 하지만, 조선교회의 형편상 조선교회를 위해서는 경험이 많고 성숙한 선교사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주교와 여항덕 신부는 각자 자신의 방식이 조선교회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장상과의
생각이 다를 때, 재치권자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일반적인데 여항덕 신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말처럼 브뤼기에르 주교가 아니라 남경 주교를 장상으로 생각한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여항덕 신부는 1833년 2월 왕 요셉을 통해 조선대목구 설정과 대목구장 임명 소식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브뤼기에르 주교를 인정하지 않고, 남경 주교를 자신의 장상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27)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여항덕 신부는 1821년에 나폴리에 있는성가정 신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신학교 교장은 갈라톨라
(Galatola) 신부였는데, 그가 1830년 12월 30일 중국의 산서·섬서대목구 주교에게 보낸 서신에는, ‘① 여항덕 신부가 신학교에 도착한 첫해부터 조선 선교를 원했다는 것, ② 그에 대해 포교성 추기경에게 서신으로 소개했고, 서기관 몬시뇰에게도 알렸는데, 그들은 모든 것을 승인했고, 중국뿐 아니라 조선에 대해서도 선교 사도직 신임장을 그에게 보내려고 했으나 교황좌가 공석이라 실행하지 못했다 는 것, ③ 서기관 몬시뇰이 여 신부에게 일시적으로 조선을 담당하고 있는 북경교구의 실질 행정관으로부터 필요한 모든 직무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려왔다.’28)는 등의 내용이 있다.
여항덕 신부는 1830년 12월 5일에 사제품을 받고 1831년 1월 27일 나폴리를 출발했는데, 1830년 11월 30일에 선종한 교황 비오 8세의 후임으로 그레고리오 16세가 선출된 것은 1831년 2월 2일이었다. 따라서 여항덕 신부는 갈라톨라 신부의 말대로 교황좌가 공석일 때 서품과 임지 배정을 받은것이다. 그러므로 나폴리를 떠날 때 여항덕 신부의 신분은, ‘일시적으로 북경교구의 실질 행정관(남경주교)에게 직무를 부여받는 포교성 파견 조선 선교사’라고 할 수 있다.
조선대목구가 공식적으로 설정된 것이 1831년 9월 9일이고, 여항덕 신부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833년 2월이었다.29) 그렇다면 이제 그의 신분은 조선대목구장의 지휘를 받는 조선대목구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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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2008), 351~353쪽.
26) 정양모 신부·윤종국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282·258쪽.
27) 여항덕 신부는 북경을 떠나기 전인 1833년 3월 28일 마카오의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 페레이라 주교의 지원 사실을 밝혔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에게는 보고 서한을 보내지 않았다(조현범, 「조선대목구의 설정과 선교사의 입국」, 267쪽 참조).
3월 28일은 왕 요셉을 만난 이후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도 여항덕 신부가 브뤼기에르 주교를 자신의 장상으로 인정하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28) 전수홍, 「조선인들의 서신과 여항덕 신부」, 134~135쪽 재인용.
29) 여항덕 신부는 북경에 도착할 때까지도 조선대목구의 설정과 브뤼기에르 주교의 대목구장 임명 소식, 자신이 브뤼기에르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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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가 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여 신부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아마도 포교성으로부터 어떠한 공식 지침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소속과 역할에 관해 혼란을 느꼈던 것 같다.30) 이에 조선대목구의 설립 소식을 듣고도 ‘일들이 새롭게 정리되는 것을 껄끄럽게 지켜보았고 불만을 표시했다.’31)고 생각한다.
교회법에 대한 해석도 여 신부의 이러한 행동에 영향을 미친 듯하다. 앞서 샤스탕 신부가 언급했
듯이, 여항덕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기 전까지는 조선에 대한 재치권이 북경교구를 관할하던 남경 주교에게 있다.’고 보았다. 이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여 신부를 ‘교회법 박사 같다 (Comme docteur en droit canon)’며 비꼬기도 했다.32)
조선의 재치권에 대해서는 남경 주교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남경 주교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에 들어갈 때까지는 조선에 대한 재치권이 자신에게 있고, 선교사들을 인정하는 것도 자신에게 속하는 것이라고 드러내 놓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남경 주교는 모방(P. Maubant) 신부와 샤스탕 신부에게 ‘조선 교우들이 맞아들일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약속했고, 이에 모방 신부는 남경 주교가 국적에 상관없이 사제들을 조선으로 들여보내는 데 많은 열성을 보이고 있다고 확신하기도 했다.33)
남경 주교가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무엇일까?34) 혹 1831년 7월 4일에 개최된 포교성 회의의 “북경교구에서 독립된 대목구를 조선에 설정하는 것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으로 들어갈 수 있을 때에 허락한다.”는 조항35)이 근거가 되었을까?36) 그러나 이 결정 사항은 9월 9일에 공포된 조선대목구 설정 칙서로 무효화되었다.
즉 칙서에는 ‘이 칙서의 결정에 반대되는 어떤 법령도 무효’라는 조항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칙서의 공포로 조선대목구 설정의 교회법적 유효성은 이미 확정된 것이며, 대목구장의 부임 여부가 대목구 신설의 유효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었다.37) 내용적으로도 7월 4일 회의에서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에 입국한 이후에 조선대목구를 설정한다고 되어 있는데, 9월 9일 자 칙서는 주교가 입국하기 전에 대목구의 설정을 공포한 것이므로, 7월 4일의 결정 사항은 구속력을 잃었다고 하겠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마카오에서 관련 칙서를 받았고, 그 내용을 남경 주교에게 알렸기 때문에 법상으로 조선의 재치권은 자신에게 있다고 이해했다.38) 그 때문에 남경 주교의 행동이 교회법에 부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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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입국을 준비하는 임무를 맡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듯하며, 중국 내륙을 여행하는 동안, 1831년 8월 28일, 9월 7일, 1832년 1월 2일 등 세 차례에 걸쳐 마카오의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보고서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자신은 포교성 소속의 조선 선교사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조현범, 「조선대목구의 설정과 선교사의 입국」, 265쪽).
30) 조현범, 「조선대목구의 설정과 선교사의 입국」, 266쪽.
31)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2008), 141쪽.
32)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2008), 359쪽.
33)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2008), 327쪽.
34) 샤스탕 신부에 따르면, 북경교구의 총대리인 카스트로(Castro) 신부는 조선 선교지의 재치권이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있다고 확신했다고 한다(『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2008], 259쪽).
35) 조현범, 「조선대목구의 설정과 선교사의 입국」, 240~241쪽.
36) 윤민구, 「조선 천주교 신자들의 서양 선교사 영입 운동과 파리외방전교회의 조선 진출」, 50쪽.
37) 조현범, 「브뤼기에르 주교와 모방 신부의 관계에 대한 고찰」, 『교회사연구』 47, 한국교회사연구소, 2015, 39쪽.
38) 조현범, 「브뤼기에르 주교와 모방 신부의 관계에 대한 고찰」, 38~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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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포교성 장관에게 이 문제를 문의까지 하였다.39)
여항덕 신부가 나폴리와 마카오를 떠난 시점을 고려할 때, 여 신부는 7월 4일의 결정 사항을 알지못한 채 북경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조선의 재치권과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에 대해 남경 주교와 입장을 같이했다. 아마도 자신은 ‘남경 주교로부터 직무를 받는 포교성 소속의 선교사’ 라는 생각과 당시 북경교구의 분위기와 남경 주교의 태도가 여 신부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된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서한과 여행기에서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남경 주교로서 북경교구를 책임지던 피레스 페레이라(Pires Pereira, 1769~1838) 주교는 1833년 2월 이후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에 소극적으로 대응했고, 북경교구의 다른 구성원들도 마찬가지였다.
1834년 6월 5일 브뤼기에르 주교가 마카오의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보낸 서한을 보면, “저는 남경 주교에게서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이 성직자는 늙고 소극적이며,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의 하인들과 그의 정신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북경교구의 다른 교우들도 그가 우리를 돕는 것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모든 사실을 두 눈으로 목격한 증인들을 통해서 들어 알고 있습니다.”40)라는 내용이 있다. 즉 남경 주교를 보좌하는 북경 신자들도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에 부정적이었다는 것이다.41)
이와 관련해서 주목되는 사례가 있다. 1835년 1월 19일 왕 요셉과 유진길 등이 회담할 때, 어떤
사람이 회의 장소로 들어와 대화를 막으며, “갑사 주교는 절대로 조선에 들어갈 수 없소. 그는 유럽인이란 말이오.”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이 사람은 왕 요셉에 의해 내보내졌는데, 그가 바로 남경 주교의 주위에 있던 북경 교우가 아닌가 생각된다.
여항덕 신부는 1832년 12월 말에 북경에 도착한 후 1833년 4월 10일 만주로 떠날 때까지 4개월
동안 북경에 머물렀다. 포교성에서 파견했지만 일시적으로 남경 주교에게 직무를 부여받던 그로서는, 북경에 있는 동안 남경 주교나 주변의 중국 교우들과 조선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조선의 재치권에 대한 해석과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에 반대하는 북경의 분위기에 동조하게 된 듯하다. 여기에 ‘프랑스인은 지나치게 엄격하다.’42)는 개인적인 생각과 10개월 정도 조선에서 사목한 경험이 어우러지면서, 주교의 입국이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고 하겠다.43)
그러나 1835년 1월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이 결정되면서, 남경 주교와 여항덕 신부의 태도도 바뀌게 되었다. 남경 주교는 샤스탕 신부에게 “자기에게는 조선에 대한 재치권이 없다.”고 말했으며,44) 여항덕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를 자신의 장상으로 인정하고 주교에게 사목 보고서(1835년 11월 29일 자)를 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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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정양모 신부·윤종국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285쪽.
40) 정양모 신부·윤종국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253쪽.
41) 남경 주교는 한자를 전혀 몰랐고, 하인들이 해주는 통역으로 만족해 왔다고 한다(『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2008], 217쪽). 이러한 사실도 남경 주교에게 미치는 주위 사람들의 영향이 컸음을 짐작하게 한다.
42) 정양모 신부·윤종국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308쪽.
43) 여항덕 신부가 주교의 영입을 방해하거나 주저한 이유로, ‘포교성 소속으로 아직 대면도 못 한 타 선교회의 주교를 장상으로 모시기보다는 지역적으로도 안정되어 있고 자신의 후견인으로서의 역할도 했기 때문에 남경 주교에게 더 큰 관심을 보였을 것이고, 또 조선교회의 유일한 성직자로서 봉사하며 누리던 자신의 선교 활동이 프랑스 선교사들이 들어옴으로써 모든 선교권이 그들에게로 넘어가고 자신은 그들의 보조자로서의 역할밖에 못 할 것이라는 기우’ 등을 들기도 한다(전수홍, 「劉方濟 신부의 조선 선교와 그 문제점」, 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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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보고서에는 교우들을 통해 보내준 돈의 사용처, 주교를 조선에 맞아 드리기 위한 준비 사항, 입국 시의 여러 주의사항이 쓰여 있었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10월 20일 마가자(馬架子)에서 선종하면서 주교에게 전달되지는 못하였다.45)
4. 조선 교우들의 반응
1833년 2월 북경에 도착한 왕 요셉은 조선 신자들에게도 브뤼기에르 주교의 편지를 전했다. 이 편 지는 1832년 윤9월 26일(양력 11월 18일)에 작성되었는데, ① 교우들이 서한을 통해 청한 유럽인 주교와 중국인 신부를 교황께서 파견했다는 것, ② 내가 가고 있으니, 빨리 나를 맞이하러 오기 바란다는것, ③ 조선에 도착하면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 삶을 바치겠다는 것과 조선인들을 사제로 만들겠다는 등의 내용이 쓰여 있었다.46) 이 서한의 첫 문장은 “여러분의 소원이 이미 이루어졌습니다.”인데, 이것으로 보아 주교는 조선 신자들이 자신의 파견을 매우 기뻐할 것으로 생각했다.
북경 주교관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편지를 받은 조선 교우는, 예기치 못한 소식을 듣고 깜짝 놀
랐고, 개인적으로는 주교의 입국을 돕고 싶지만, 동포들의 의견을 들어보기 전에는 혼자 아무런 약속도 할 수 없다고 답하였다.47)
1833년 봄 조선에 도착한 신자는 교우들에게 자신이 받은 주교의 서한을 전했고, 이에 대한 답서로 유진길이 1833년 10월 25일(양력 12월 6일)에 편지를 작성했다. 그리고 이 편지는 1834년 8월 29일에 주교에게 전달되었다.48)
유진길의 편지를 소지한 신자들은 1833년 말에 사신을 따라 왔으나, 북경까지 오지 않고 국경에서 기다리던 여항덕 신부를 맞이해 돌아갔다. 이에 이들을 만나 주교의 입국에 대해 의논하려고 북경에 머물던 왕 요셉은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주교에게 전달된 편지가 발신자와 발신 날짜는 같지만 수록된 내용이 다른 2통이라는 것이다.49) 즉 첫 번째 편지(짧은 서한)에는 ‘① 지난봄에 주교의 편지를 받았다는 것, ② 교황 성하의 지극한 덕과 이곳에 부임하고자 하시는 주교님의 뜻에 감사드린다는 것, ③ 국경을 넘는 방법에 대해, 주문모 신부가 왔던 일이 있으니, 상황을 살피고 그 방법과 절차를 상의하신 다음 시행하면 따르겠다.’는 내용이 들어있다.50)
그러나 두 번째 편지(긴 서한)에는 첫 번째 서한의 ①·②번 내용은 있지만, ③번 대신 Ⓐ 주문모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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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정양모 신부·윤종국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319·326쪽.
45) 전수홍, 「조선인들의 서신과 여항덕 신부」, 137~138쪽.
46) 정양모 신부·윤종국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185~186쪽 ; 정양모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가톨릭
출판사, 2007, 355쪽.
47)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2008), 141~143쪽.
48)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2008), 241쪽.
49) 두 편지를 같은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즉 짧은 서한은 조선에서 작성한 것이고, 긴 서한은 유진길이 북경에서 주교를 만나지 못하면서 조선 입국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작성한 서한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두 서한은 같은 것이라고 한다(오근,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임명으로 인한 다양한 상황들」, 76쪽). 그러나 이때 신자들은 북경까지 가지 않았고, 또 두 서한에서 제시하는 입국 방법은 달랐다. 그리고 두 서한이 같은 것이라면, 굳이 2통을 모두 주교에게 전달할 필요가 있었을까는 의문이다. 앞으로 이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50) 정양모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359~3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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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가 조선에 오실 때, 서양 선교사를 간절히 청했지만, 북경에서는 서양인은 외모와 물색이 달라 중국 신부를 보냈다는 것,51) Ⓑ 그러나 지금의 정세는 그때보다 더 나빠져서, 무사히 입국해도 성교를 드날리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것, Ⓒ 그러니 광동이나 마카오에서 상선을 이용해서 입국하되, 교황의 친서, 푸짐한 선물과 진상품으로 교화를 청하는 방법을 쓸 것을 제안하였다.52)
즉 1811년과 1825년 서한의 입국 방식을 다시 제안하고 있다.
주교는 두 번째 편지 내용이 조선 교우들의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거절에서 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완곡한 어법을 썼지만’, ‘조선 왕이 주교를 공개적으로 입국하도록 허락하지 않는 한 영접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53)
그러면서 ‘쫓겨났다’, ‘교우들이 약속도, 선교사와 주교를 얻기위해 교황께 간절히 청원했던 것마저도 저버렸다.’는 표현을 쓸 정도로 실망감을 드러냈다.54)
그러나 조선 입국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에 1834년 9월 20일 파리의 랑글루아(C. Langlois)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 ‘이해 안 되는 그들의 결정을 취소하도록 총력을 기울이겠지만, 만약 우리의 시도가 수포로 돌아간다면 억지로 밀어붙일 수밖에 없고, 이것은 최후의 순간에나 실행에 옮겨야 할 절망적인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55)
즉 계속 신자들이 주교의 입국을 거부한다면 특단의 조치를 취해서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조선 선교라는 사명을 수행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왕 요셉이 북경에서 다시 조선 신자들을 만난 것은 1835년 1월 19일(음력 12월 21일)이었다.
당시 동지사행을 따라온 신자는 유진길, 조신철, 김 프란치스코였다. 이들은 남이관 등의 명의로 쓰인 1834년 음력 11월 자 편지를 지니고 왔다. 편지 내용은 1833년 10월 25일 자 서한처럼 주교의 생김새를 거론했고, 아울러 얼마 전에 영국 사람들이 해안에 나타난 것을 계기로 서양인에 대한 논란이 야기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은 박해와 살육을 만들어 낼 위험이 있다면서, 주교가 오는 것을 청하지도 막지도 못하겠다는 내용이었다.56)
비록 입국 여부를 주교의 판단에 맡기기는 했지만, 당시 조선 교회의 상황을 고려할 때, 주교의 입국은 적절하지 않다는 입장이었다.
신자들의 반응을 예상했던 주교는 왕 요셉을 1835년 1월 9일(음력 12월 11일)에 북경으로 파견하면서 조선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한을 썼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주교를 받아들이기를 원하는지 아닌지를 솔직히 밝히십시오. 애매하거나 조건이 붙은 모든 대답이나 좀 더 숙고할 시간을 달라는 청은 모두 회피하고 부정적인 대답으로 간주할 것이고, 당장 교황님께 편지를 써서 교황 성하께서 여러분에게 보냈으며, 또한 여러분이 직접 청하기도 한 주교를 여러분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고 보고하겠습니다.”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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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주문모 신부에 앞서 조선에 파견된 신부는 중국인 레메디오스 신부였다. 그런데 원래는 이탈리아인으로 프란치스코회 소속인 크레센시아노(Crescenziano, 1754~1791) 신부가 파견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구베아 주교는 중국인 신부를 선택했는데, 구베아주교가 레메디오스 신부를 선정한 이유 중의 하나가 얼굴과 외모였다. 한편 구베아 주교의 결정에 대해, 구베아 주교가 자신의 조국에 충성하기 위해 포르투갈 영향권에 있는 마카오 교구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결정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윤민구, 「조선신자들의 대박청래운동에 대한 해외의 인식」, 『교회사연구』 13, 한국교회사연구소, 1998, 191~193쪽).
52) 정양모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363~365쪽.
53)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2008), 243·245쪽.
54) 정양모 신부·윤종국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280~281쪽.
55) 정양모 신부·윤종국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275~276쪽.
56)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2008), 337~345쪽 ; 정양모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373~375쪽.
57)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2008), 3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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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 ‘음력 11월에 조선 국경으로 가겠다는 뜻을 피력했고, 아울러 주교가 관할 선교지로 들어가는 것을 말이나, 충고, 혹은 그 밖의 다른 옳지 못한 방법 등 적극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방해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 사실만으로도 파문을 무릅쓰는 것이라고 엄포를 놓는 교황의 교령을 인용’했다.58)
아마 이것이 주교가 언급한 ‘최후의 절망적인 해결책’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1월 19일 주교의 편지를 읽은 교우들은 몹시 놀랐고 충격을 받았다. 이에 ‘주교님을 받아들일 의
향이 있는지’를 묻는 왕 요셉의 질문에 ‘예’라고 대답했고,59) 2일 후인 1월 21일(음력 12월 23일)60)에 주교에게 편지를 써서, 음력 11월에 주교를 영접하고, 내년에 왕 요셉을 입국시키겠다는 약속을 하였다.61)
그런 다음 왕 요셉은 주교가 지시한 대로 이들을 남경 주교에게 데리고 가서 ‘브뤼기에르 주교
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사실’을 공식적으로 밝히도록 했다. 이것은 남경 주교를 주저하게 만드는 모든 변명과 핑곗거리를 제거하고자 했던 것이다. 남경 주교는 교우들의 뜻을 확인한 후, 자신의 편지와 조선 교우들이 가져와 자신에게 준 3통의 편지를 왕 요셉을 통해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전달했다.62)
왕 요셉은 이러한 편지들을 가지고 1월 26일 북경에서 서만자로 와 주교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주교는 1월 29일에 다시 왕 요셉을 북경으로 보내 조선 교우들을 만나도록 했다. 왕 요셉은 2월 7 일(음력 1월 10일)에 신자들을 만나 주교의 편지를 전달했고, 유진길·조신철·김 프란치스코는 2월 16일 (음력 1월 19일)63)에 주교의 지시대로, ‘주교와 서양 선교사’들을 받아들이겠다고 명시적으로 약속하는 서한을 주교와 교황에게 썼다.
이렇게 해서 1833년부터 야기된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을 둘러싼 논란이 일단락되었다. 이 제 남은 문제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안전하게 조선에 입국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주교는 끝내 자신의 선교지에 들어가지 못한 채 1835년 10월 20일 마가자에서 병사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에 대해 신자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모든 신자가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1835년 1월 19일 왕 요셉과 교우들 간의 회담에서, ‘주교의 존재는 지도급 신자 6명64)만이 알고 있는데, 그중 학자, 군인(가롤로), 가난한 농부, 동정녀 등 4명은 주교의 입국을 강하게 지지하고, 두 명은 반대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신자들의 답변이 있었다.65)
이 대답에 따르면 신자들의 입장은 주교를 받아들이겠다는 의견이 오히려 주류였다. 그러나 신자들이 주교에게 보낸 1833년 10월 서한(유진길)과 1834년 11월 서한(남이관)에는 반대 의견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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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2008), 365쪽.
59)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2008), 333쪽.
60)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에는 작성 날짜가 1월 20일과 음력 12월 23일로 나온다. 그리고 한문 서한에도 1834년 12월 23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음력 12월 23일은 양력으로 1835년 1월 21일이므로 1월 20일은 오기라고 하겠다(『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2008], 365·371쪽 ; 정양모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382쪽 참조).
61) 정양모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383~384쪽.
62)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2008), 373~377쪽.
63)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에는 작성 날짜가 2월 15일(음력 1월 18일)로 나온다. 그러나 한문 서한에는 1835년 음력 1월 9일(양력 2월 16일)에 작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2008], 391~399쪽 ; 정양모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388·392쪽 참조).
64) 1833년 10월 당시에는 4~5명 정도가 주교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정양모 신부·윤종국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 집』, 282쪽).
65)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2008), 3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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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현상은 왜 일어난 것일까?
주교의 입국에 대한 조선 신자들의 반응이 처음으로 나온 것은 1832년이었다. 1832년 7월 브뤼기에르 주교가 페낭에 있을 때, 남경 주교의 편지를 받았는데 거기에는 ‘조선 사람들에게 선교사가 그들 나라에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려주자, 기뻐하며 눈물을 흘렸지만, 유럽인을 입국시키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그 일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결코 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었다.66)
이것으로 보아 1831년 당시 조선 교우들은 서양 선교사의 입국에 대해 ‘소극적 수용’ 입장이었다고하겠다. 그러다가 1833년 10월 25일 자 서한에서 ‘완곡한 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런데 당시 주교의 존재를 알고 있는 6명 중 4명이 주교의 입국을 찬성하고 있었으므로, 거부보다는 받아들이자는 쪽이 주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신자들은 왜 완곡하지만 거부하는 의사를 주교에게 전달했을까? 아마도 거부 의사를 가진 사람이 소수지만, 좀 더 영향력 있는 인사였기 때문에 그의 의견을 따랐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1833년 북경에서 왕 요셉을 만난 신자가, 여항덕 신부의 입국 소식과 북경교회의 반대 분위기를 전하면서, 소수였던 반대 의견이 주류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즉 여 신부의 입국이 기정사실화된 상황에서 굳이 위험 요소가 있는 서양인 주교의 입국이 필요하겠냐는 생각을 한 듯하다.67) 아무튼 소수지만 주류가 된 반대 의견은 1834년 1월 여항덕 신 부가 입국한 이후에는 여 신부의 반대 의견이 더해지면서 더욱 공고화되었고, 그 결과 1834년 11월 남이관 명의의 서한을 통해 다시 한번 주교에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결국 서양인 주교의 입국에 대해 조선 신자들은 ‘수용과 거부 입장’이 공존하다가 ‘반대’ 입장이
주류가 되었는데, 이러한 변화에는 북경교회와 여항덕 신부의 영향이 컸다고 하겠다. 즉 신자들은 북경교회를 본당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여항덕 신부의 파견도 남경 주교의 덕분으로 여기고 있었다.68)
따라서 주교의 입국에 대한 신자들의 생각은 나름의 정세 판단과 함께 북경교회의 영향, 그리고 여기에 여항덕 신부의 입장이 더해지면서 더욱 확고해졌다고 하겠다.
한편 신자들이 주교의 입국을 어렵게 여긴 이유 중에는 주교의 생김새 외에 당시 조선교회가 처해 있던 위급한 박해 상황도 있었다. 특히 1832년에 있었던 영국 상선의 출현으로 서양인에 대한 경계심이 더욱 커진 만큼, 박해의 위험도 커졌다는 것이다.
1801년에 내려진 박해령이 유효하고, 1815년과 1827년의 박해를 고려할 때 타당한 염려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833년 3월 28일 여항덕 신부가 포교성에 보낸 서한에는, ‘1833년 초 북경에서 만난 조선인 신자에게 조선교회의 상황을 묻자, 박해 상황은 아주 가라앉아 평온을 누리고 있다.’고 대답한 내용이 있다.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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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2008), 39~41쪽.
67) 1834년 9월 20일 브뤼기에르 주교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서한에 따르면, 교우들은 1833년 10월 25일 자 서한에서 주교에게 사절(使節) 형식의 입국을 제안하면서, “다른 일에 대해서는 파치피코 신부님의 조언대로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고 한다(정양모신부·윤종국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281쪽). 그런데 한문본에는 이러한 내용이 없다. 따라서 이 부분은 주교가자신의 느낌을 말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브뤼기에르 주교도 ‘1833년 10월 당시 신자들이 여항덕 신부의 입국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입국에 소극적이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아울러 1834년 9월 20일 랑글루아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도 “조선 사람들은 중국인 사제들을 원하지 유럽인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같은 책, 275쪽). 조선 신자들의 반대 의견에 대해, ‘조선 교회의 지도자들은 신자들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1833년 10월 25일 자 편지를 썼다’는 견해도 있다(윤민구, 「조선 천주교 신자들의 서양 선교사 영입 운동과 파리외방전교회의 조선 진출」, 48쪽).
68) 남이관 등이 남경 주교에게 보낸 1834년 말 서한에 “저희를 전담하실 목자(여항덕 신부)를 한 분 모시게 되었습니다.···저희는 도움을 간청하였고, 이렇듯 갑자기 크나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저희는 만족하고 있습니다. 저희의 염원은 채워졌으며, 저희에게 이 큰 은혜를 마련해 주신 분은 바로 주교님이십니다.”라는 내용이 있다(『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2008], 345~3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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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835년 1월 19일 왕 요셉이 유진길 등에게 “요즈음 교우들에 대한 정부의 태도는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는데, 이에 대한 대답도 “정부의 태도는 전보다 더 나아진 것 같습니다.”였다.70)
그뿐만 아니라 1834년 11월(음력) 교우들이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 소개된 당시의 개략적인 정세를 보면, ‘조선 내에는 천주교에 대한 악소문을 날조하고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천주교를 바꿀 수 없는 정도(正道)로 생각하고 흠모하며 부러워하는 자도 많다. 그런데 나쁜 소문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1/3에 지나지 않고 권력을 잡고 있지도 못하며, 공평하고 바른 논의를 하는 사람들은 태반으로 현재 벼슬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71)
이러한 정세는 1833년 10월 25일 자 서한에서도 볼 수 있다. 교우들은 이 서한에서 “몇몇 간악한 무리를 제외한다면 권력을 잡고 벼슬길에 올라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서양인의 학술과 재능이 보통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반드시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이 이 나라 중론의 반이 넘습니다.”라고 하였다.72) 그리고 1825년 교황께 보낸 서한에도 ‘종교에 호의적인 시파가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하였다.
1825년, 1833년, 1834년 서한과 1835년 신자들의 말을 통해 볼 때, 1830년대 초반의 정치 상황
은 박해의 위험성이 있기는 하지만, 정부 주도의 대규모 박해가 일어날 상황은 아니라고 하겠다. 오히려 교우들은 정부의 태도가 전보다 나아졌고, 또 서양인에 대해 우호적인 정치 세력이 반대자보다 월등히 많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심지어 여항덕 신부도 마카오의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보내는 1834년 11월 18일 자 서한에서 “이제 관리들은 신자들에게 해를 주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했다.73)
그런데 주교의 입국을 반대하는 교우나 여항덕 신부는 바로 1/3의 비판적인 여론을 걱정하며 주교의 입국을 반대했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정치 세력의 동향을 고려할 때, 1830년대 초반의 정세는 주교가 들어오지 못할 상황은 아니었으며, 이것은 주교의 입국을 찬성하는 지도급 신자들이 더 많았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아울러 신자들과 여항덕 신부가 제기했던 1832년 영국 상선 로드 애머스트호 사건도, 조선에서는 단지 통상 문제로 받아들이고 대응했지, 종교 문제와 연계시키지는 않았다. 즉 1832년 7월 21일(음력) 공충감사 홍희근의 장계에 대한 비변사의 반응은, “행상(行商)”하는 배로 교역을 시도하다 계획대로 되지 않자 물러간 것으로 여겼고, 중국 예부(禮部)에 보내려고 작성한 자문(咨文)에도 ‘우호를 맺어 교역하기를 바라는 상선(商船)’이라고 규정하였다.74) 물론 홍희근의 장계 내용에는 영국의 풍속이 대대로 야소교(耶蘇之學)를 신봉해 왔다거나 그들이 바치고자 했던 예물 목록에 ‘본국(本國)의 도리서(道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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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전수홍, 「조선인들의 서신과 여항덕 신부」, 135~136쪽.
70)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2008), 335쪽. 순조는 동지사가 출발한 이후인 1834년 11월 13일(음력)에 사망했으므로, 여기서 정부의 태도란 순조의 사망 이전 상황을 말한다. 그리고 1834년 음력 11월 서한에 나오는 ‘개략적인 정세’도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71) 정양모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374~375쪽 ;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2008), 343쪽 참조.
72) 정양모.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365쪽.
73) 전수홍, 「劉方濟 신부의 조선 선교와 그 문제점」, 85쪽. “가을에 한양에 박해가 시작되어 산으로 피신했다가 겨울에 내려왔다.”는 내용으로 보아, 일시적인 박해의 위험은 계속 있었다고 하겠다(같은 논문, 88쪽).
74) 『순조실록』, 순조 34년 7월 21일조(조선왕조실록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 오현기, 「귀츨라프 선교사와 로드 애머스트호(Lord Amherst)」, 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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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 26종’이 있었다는 등 종교와 관련된 사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배가 떠난 이후 정부가 취한 조치를 볼 때, 종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75)
그리고 모방 신부가 1837년 11월 26일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서한을 보면, 김유근(金逌根)으로 추 정되는 사람을 언급하며, “그는 영국인들의 종교서적들을 몇 년 전에 얻었는데 옛날이야기들로 치부하였습니다.”라는 내용이 있다.76) 아마 1832년에 로드 애머스트호가 두고 간 종교 서적을 읽은 듯 하며,77) 그 내용을 옛날이야기로 치부했다는 것은 애머스트호 사건을 종교와 연계시키지 않았던 조정의 분위기를 잘 말해준다.
아울러 믿기는 어렵지만, 김유근의 친구 중에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을 돕기 위해 추천장을 써주었다는 내용도 있는데, 이 역시 당시 교회를 둘러싼 조선 사회 분위기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비록 애머스트호 사건 때문에 심리적으로 잠재적인 위협을 느낄 수는 있겠지만, 이 사건이 실제 천주교 박해로 이어질 상황은 아니었다고 하겠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의 입국을 반대하는 신자들의 염려에 대해 ‘지나치게 조심하느라, 박해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 때문에 유럽인보다 중국인 사제를 선호하는 것’이라고 판단했고,78) 여항덕 신부에 대해서는 ‘프랑스인을 장상으로 모실 생각이 전혀 없는 듯하다면서, 좋은 성직자이기는 하겠지만 지나치게 소심하다.’고 평가했다.79)
즉 프랑스인을 장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입장이 그의 소심한 성격과 결합되면서, 주교의 입국을 막았다는 것이다.
여항덕 신부가 소심하다는 평가는 여 신부를 만났던 앵베르(L. Imbert, 范世亨) 주교의 평가와도 일치한다. 앵베르 주교는 여 신부가 유럽인 사제를 받아들이는 데 소극적이었던 것은 ‘중국인의 겁 많고 결단성 없는 성격’ 탓으로 보았다. 주교는 자신이 사목했던 사천대목구의 예를 들면서 유럽인 신부가 없는 상황에서 중국인 신부가 혼자서 결단을 내리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추정했다.80)
성격 탓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목 경험이 거의 없는 여항덕 신부가 조선 선교지의 박해 상황을
처음 경험한 후 ‘서양인 주교 입국 반대’, ‘방인 사제 양성’이라는 조선교회 구제책을 제시했고, 신자들은 성직자가 이미 입국해 있는 상황과 북경교회의 분위기를 고려하는 가운데 여 신부의 방침에 동조하면서, 주교의 입국을 반대하게 되었다고 하겠다.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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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이 배에는 귀츨라프 목사가 타고 있었고, 그는 해안의 주민들과 접촉하며 종교 서적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오현기, 「귀츨라프 선교사와 로드 애머스트호[Lord Amherst]」, 163~165쪽).
76)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고(A-MEP), Vol. 1260, ff. 119~122.
77) 당시 홍주 목사는 영국인들이 준 작은 책자 세 권과 예물 도록(都錄) 세 벌을 영문(營門), 수영(水營), 병영(兵營)에 나누어 바쳤고, 충청 감사는 자신이 받은 책자와 도록을 비변사로 보냈다고 한다(김경선, 「英吉利國漂船記」, 『燕轅直指』 1권, 1832년 11월 25일조, 한국고전번역원 고전종합DB). 김유근은 이때 비변사에 보고된 책자를 본 것으로 추정된다.
78) 정양모 신부·윤종국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282쪽.
79) 정양모 신부·윤종국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308쪽.
80) 이석원, 「1830년대 중국인 사제 여항덕 신부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 사제들과의 갈등」, 153~154쪽.
81)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의 입국에 소극적인 조선 교우들의 태도가 여항덕 신부의 암시의 결과라고 확신했고, 1835년 1월 조선 입국이 결정된 상황에서도 여 신부가 조선인들의 열정을 삭이지나 않을까 염려하고 있었다(『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2008],
349쪽 ; 정양모 신부·윤종국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3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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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맺음말
이상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을 둘러싼 조선교회 구성원들의 입장에 대해 정리해 보았다.
1832년 7월 페낭에서 조선으로 출발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남경 주교, 여항덕 신부, 조선 교우들이 모두 주교의 입국을 반대하는 예상치 못한 일을 겪게 되었다.
남경 주교는 명시적으로 표명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에 대한 재치권 문제가 반대 이유였다. 브뤼기에르 주교에 따르면 남경 주교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선교지의 평화를 어지럽히고 혹시 그의 자리를 위협하고 해를 끼칠지도 모른다고 오해했다.’고 한다.82)
여항덕 신부와 조선 교우들은 서양인 주교의 생김새와 당시 조선교회가 처해 있던 박해 상황을 반대 이유로 내세웠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주교를 받아들일 수 없는 절대적인 이유는 되지 못했다.
아마도 여기에는 남경 주교를 비롯한 북경교회의 반대 분위기가 여항덕 신부와 조선 신자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여항덕 신부의 입장이 재차 교우들에게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하겠다. 물론 조선 신자 들이 반대 입장에 동조한 것은 성직자의 입국이 보장된 상태에서 되도록 위험 요소를 배제하려는 자체의 판단도 작용했다고 하겠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의 입국을 둘러싼 논란에 실망했지만, 자신의 선교 임무가 하느님께로부터 나왔고, 교황께서 직접 파견하셨다는 것을 확신하는 까닭에 오직 하느님만 믿는다며 좌절하지 않았다.83) 그리고 현 단계에서는 자신과 서양 선교사들이 입국하는 것이 조선교회와 신자들을 위해 필요한 일임을 확신하고,84) 조선 교우들의 설득(강요?)에 성공하면서 주교의 입국과 관련된 논란이 일단락 되었다.
이 글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서한과 여행기를 토대로 작성되었다. 그 때문에 남경 주교인 페레이라 주교와 여항덕 신부의 입장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측면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남경 주교와 여항덕 신부가 남긴 기록 중 알려진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생긴 한계라고 하겠다. 앞으로 페레이라 주교와 여 신부의 자료가 좀 더 발견되어 이러한 한계가 극복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조선 신자들의 반응과 입장이 북경교회와 여항덕 신부의 결정에 수동적으로 끌려간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조선 신자들은 여항덕 신부의 반대 이유가 타당하고 또 조선에는 이미 성직자가 입국해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주교의 입국으로 굳이 새로운 위험을 만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조선 신자들의 입장과 반응은 수동과 능동의 관점에서 볼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수동적으로 보이지만, 능동성이 충분히 담겨 있는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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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정양모 신부·윤종국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327·322쪽.
83) 정양모 신부·윤종국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341쪽.
84) 정양모 신부·윤종국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2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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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 자료
김경선, 「英吉利國漂船記」, 『燕轅直指』 1권, 한국고전번역원 고전종합DB.
윤민구 역주,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가톨릭출판사, 2000.
정양모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가톨릭출판사, 2007.
정양모 신부·윤종국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가톨릭출판사, 2007.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순조실록』(조선왕조실록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2. 논저
김기협, 「劉方濟 신부 선교 활동의 배경―적응주의의 시각에서」, 『교회사연구』 10, 한국교회사연구소,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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