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쟁이 소굴에서의 첫 겨울잠은 마루틈새와 처마 밑으로 스며드는 냉기와 가끔 기름내가 뒤섞여 날카롭게 불어오는 부산항구 바닷바람과의 투쟁이다. 피난살이의 굴레를 몇 번이나 벗어나는 듯 하기는 했지만 무시로 다리를 붙들고 늘어지는 그 가난의 그림자는 어찌 우리 집 만이 가진 그늘일 수 있으랴! 영도다리 밑 양옆으로 가로지른 옹벽을 따라 한참동안 늘어선 학고방(판잣집)의 점쟁이들이나 그 옆 모퉁이 작은 배들이 매여있는 부둣가 너른 마당에서 원숭이와 뱀을 부리며 만병통치약을 파는 약장수와 별의 별 재주를 다 부리며 그 곳에 더부살이하는 차력사들의 삶 또한 우리 난쟁이 소굴의 삶과 별반 다를 게 있으랴! 어차피 부산 땅 모두가 그 피난살이의 그림자를 벗어나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전환기의 몸부림인 것을... 하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투쟁은 이 소굴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과 피사체들 사이의 심리전이다.
이름 아침부터 줄지어 기다려야하는 뒷간 어떤 때는 술 취한 어른들의 시큼한 용변냄새로 숨이 탁 막히고 눈이 시리다 못해 아려오기도 한다. 가끔 똥퍼 아저씨들이 뒷간을 퍼간 뒤 며칠 동안은 용변이 떨어질 때마다 엉덩이로 튀어 오르는 묽어진 오물에 대한 두려움 또한 만만치 않다. 그래도 일은 봐야하는 법 아무리 급한 일이라 할지라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새치기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뒷간 옆 수채 구멍에선 늘 지린내가 난다. 급한 나머지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슬그머니 소변을 보는 사람들 때문이다. 또한 그 옆 위치한 개집에서도 늘 개비린내가 진동을 한다. 개집 주인 스핏츠라는 하얀 수캉아지 사람이 나타나기라도 할 지라면 어김없이 다리로 기어올라 짝 짖기 시늉을 해댄다. 스핏츠의 그 짓거리에 크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 개들이란 으레 다 그런 물건이거늘 하듯 그저 무덤덤하다. 다만 다리로 기어오를 때마다 신경질적으로 냅다 차버리는 동작만큼은 어느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 하나같다. 그런 모습에서 ´개팔자가 상팔자´라는 게 과연 무슨 뜻일까 하는 의문을 가끔 가져보기도 하지만 답이 나올 리 만무하다. 비좁은 부뚜막에 두개 밖에 없는 연탄 아궁이 위에는 세숫물솥 밥솥 국솥 찌게냄비 등이 줄지어 놓여지고 아침이면 이 솥이 먼저다 저 냄비가 먼저다 한 바탕 소동이 벌어지는데 어쩌다 연탄 갈기를 잊어 불이 꺼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양칫물 세숫물은 물론 이부자리 밑 방바닥까지 살얼음판임은 물론이고 밥상머리에 따끈한 숭늉은커녕 찬밥이나마 있으면 다행이다. 그런 날의 아침은 스스로 대충 알아서 해결하고 각자 갈 길로 가고 나면 그만이다. 바로 이런 것들이 한 지붕 두 가족이 공통적으로 겪어야하는 겨울나기 투쟁인 것이다.
겨울 날씨가 슬슬 풀리고 빡빡머리 녀석들 제법 어른 티가 나는 새 학년 되자 골목어귀 분위기도 한층 어른스러워진 듯 예전처럼 그리 부산스럽지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형하고 순자 명학이 형 등 모두 대학생이 되었고 상고출신 병태 형은 은행원이 된 까닭도 있겠거니와 빡빡머리 녀석들 대다수가 콧수염이 슬슬 돋고 또한 뼈 빠지게 입시공부를 해야 하는 학년이 된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얼마 전 선장면허시험을 잠시 뒤로 미루고 외항선으로 멀리 떠나신 아버지의 변화가 우리 집 분위기를 한층 더 건설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크리스마스 행사 이후 순덕이와의 만남이 뜸했던 것은 추운 날씨 탓도 있겠지만 입시 철에 따른 그 동안의 분주함 때문에 그리되었으리라. 입시 철이면 집집마다 좋은 학교에 보내려고 난리들이지만 대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입학금 만들기가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공장으로 사무실로 취직된 공고 상고 출신들 취직된 것만으로도 대학에 간 것만큼 우대받는 때인지라 누가 더 좋은 직장엘 갔나 누가 더 좋은 학교엘 갔나 은근히 골목 집안들 간의 경쟁이 만만치 않다.
대학 청강생으로 갔다는 그림쟁이 명학이 형 보결입학으로 돈 많이 들었을 거라는 소문은 오랫동안 뭇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린다. 하루는 난쟁이 소굴로 놀러 온 명학이 형을 보고 오토바이 이모가 근황을 물으니 "아니고 마 대답하기도 참말로 부끄럽심니더. 학사증도 안나온다 카는데 억지로 들어갔다 아입니꺼? 예비고사 떨어지고 나니까 마 대번에 부모님들이 이리저리 쫓아 다니시디마는 마 그리 안됐십니꺼? 내사 마 안 다닐 수도 없고 차라리 은행원된 병태가 부럽심더! 우리 부모님들은 마 그 놈의 대학 간판이 뭐신지...!” 멋진 대학교 뱃지가 달린 후래쉬 맨 교복을 입고 나타난 그림쟁이 명학이 형의 솔직한 푸념이다. "아이고 이 눔아 은행은 어데 그냥 들어가는 줄로 아나? 다아 시험 봐 가꼬 가능거 아이가! 실력없으먼 몬가능기라! 그래 니는 청강생인가 뭔가 들어가는데 얼매나 들었다 카드노?” 오토바이 이모가 은근히 은행원된 아들 자랑을 하며 궁금해한다. "한 장 들어갔다 캅디더!” "아이고 한 장이먼 도대체 얼매란 말이고? 백만원?” "어데요! 천만원정도 안 되겠십니꺼?” 천만원이라는 말에 오토바이 이모 뒤로 자빠질 듯하다. "아이고 느그 집은 돈도 많타! 내사 마 약 사묵고 죽을라 캐도 약값이 없어 몬죽는다 아이가? 청강생인가 뭔가 그 놈에 대학교는 보결로 들어가는데 뭐시 그리도 비싸다 카드노?” "지도 잘 모르겠심더! 부모님덜께서 마 그리 만들어 놓은 기라서...!”
그 날 오후 은행원 된 기타쟁이 병태 형 은행 야근에 시달린 잠을 보충해야 한다며 모처럼 난쟁이 소굴 큰방에서 낮잠을 즐기는데 평소 이 집 저 집 들락거리며 백수건달로 소문난 왜가리 아줌마 남동생 아저씨가 슬그머니 들어오더니 마루에 걸터앉아 우리 새 엄마와 얘기를 시작하는데 그 줄거리가 점점 이상야릇해 지더란다. 분위기를 깰 처지도 아니고 하여 잠든 척 끝까지 들었다며 하마 누가 들을쎄라 그 얘기를 털어놓는데 우리 형제는 도저히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어 입을 다물지 못한다. "내한테는 이모지만 느그덜 한테는 새 엄마 아이가? 잘 챙기야 되는기라! 며칠 안에 심상찮은 편지가 날아올 끼구마! 그 편지를 느그 새 엄마가 받아보고 그 눔이랑 같이 날라 뿌리면 그 날로 고마 끝장아이가? 내사 마 자는 척 하고 다아 들었는기라! 그 사기꾼같은 왜가리 아줌마 남동생 아저씨 눔이 느그덜 새 엄마하고 느그 집에 가진 돈하고 몽조리 나꿔채 갈라꼬 수작을 부리는 게 분명 한기라!” 목소리는 낮추었지만 열변을 토하는 병태 형 목소리엔 자못 긴장감이 감돈다. 차라리 듣지 말았어야 할 얘기를 듣게 되었지만 한구석에는 차라리 그 말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든다. 하지만 우리는 어금니를 깨물고 이 비상 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비장한 각오를 한다. "이 사기꾼 왜가리 아줌마 남동생 아저씨 놈! 편지가 오기만 해봐라! 그라고 우리 새 엄마도 좀 이상하재? 아무리 그 나쁜 왜가리 아줌마 남동생 아저씨 놈이 꼬신다 캐도 그리 쉽게 넘어갈 수가 있능기가? 우리 아부지가 알게 되는 날에는 마 우리 집은 초상 날이다! 외국에 나가신 우리 아부지만 불쌍하싱기라!” 흥분한 내 말에 형은 한 손으로 급히 내 입을 틀어막는다. "야이 문디야!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앙카나? 쫌 조용하그라! 내 알아서 해결할 끼니까. 그 때까지 니 한 번이라도 입을 뻥긋했다가는 내한테 먼저 죽는 줄 알그라 알갔나?” 무언가 크게 결심한 듯 귓속말하는 우리 형 얼굴 이렇게 무서워 보인 적 처음이다.
금새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 토요일 오후 늦은 밤 오토바이 식당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새 엄마 얼굴엔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는 듯 싱글벙글하며 평소에 없던 생기가 자르르 흐른다. 그런 모습을 보노라면 병태 형의 말에 언뜻 의구심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병태 형 말이 정말일까?” 이후 우체부 아저씨를 기다리는 사람들 나하고 형 병태 형 그리고 새 엄마 이렇게 네 명이지만 삼대 일로 편이 갈라져 있다. 편지를 가로채려는 우리들과 그런 줄도 모르고 그저 설레이는 환상 속에서 편지를 기다리는 새 엄마 이렇게... 그날 이후부터 집에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내한테 편지 온 거 없나?”하고 물어 보시는 새 엄마 과연 병태 형 말이 사실이기는 한가보다.
며칠인지 이런 팽팽한 긴장 속으로 흘러가던 어느 날 예상대로 그 의문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형이 그 편지를 받아든 게다. 뜯어본 표시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어 내용을 먼저 확인한 우리 형은 억장이 무너진 게다. 이미 저질러진 일이고 보니 이 편지를 어찌 처리해야 할 것인지 답을 찾지 못한 형은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하다가 늦은 밤까지 골목 어귀서 눈이 빠지도록 나를 기다린다. 내가 나타나자마자 누가 볼쎄라 모퉁이 뒤로 급히 돌려세우더니 "야 큰일났다! 아부지께서 배타고 나가시며 새 엄마한테 살림살이 하라꼬 주신 돈을 빨리 챙기야 하는데 우짜먼 좋겠노?” "그기 무신 소리고?” "야 임마야! 이 편지가 바로 그 의문의 편지다! 내가 직접 받았는데 새 엄마는 아직 모르고 있다. 이 일을 우짜먼 좋겠노?” 편지를 들고 있는 형 손이 마구 떨린다. "헹님아 내가 함 읽어보먼 안되나?” "안될 끼 뭐가 있겠노? 이까지 온 판국에...!” <사랑하는 영자씨, 처음 보는 순간부터 당신에게 반했습니다. 어려운 집에 재가해서 고생하는 게 안쓰럽기만 합니다. 또한 당신의 세 자녀가 불쌍하군요. 내가 책임지고 행복하게 해 주겠습니다. 약속했던 대로 서울로 가는 표를 사 놨습니다. 모일 모시까지 부산 역전 다방으로 나오세요. 추신, 서울서 자리 잡을 동안 많이 필요할 것이니 가진 돈은 다 챙겨 오십시요.> 하는 내용이다. 병태 형이 얘기해 준 내용과 비슷하다고 느끼는 순간 갑자기 뒷통수에 번갯불이 튀는 느낌이 든다. 한 문장이 새삼스러이 눈에 뛰는 것이다. <당신의 세 자녀가 불쌍하다> 돌연 의문이 가는 이 문장이 뜻하는 게 뭘까? "헹님아 이 말이 무신 말이고?”하고 귓속말로 물으니 "내하고 니하고 새 여동생이 불쌍하다는 거 아이가?” "애고 헹님아! 이 문디 사기꾼 아저씨가 우리를 불쌍타 할 이유가 뭐꼬? 새 엄마 자슥이 이 부근이나 딴 곳에 또 있는 게 분명한 기라... 가마 있어봐라! 오 그래 맞다. 병식이...! 혹시 그 놈아가 설마...?” 내가 의문을 제기하자 형이 갑자기 손뼉을 치며 맞장구친다. "햐! 그래 맞따 맞따! 병식이 그 짜슥이 분명히 새 엄마 아들임이 분명한 기라! 같은 시기에 나타난 의문의 사람들인 기라! 가마 보먼 새 엄마랑 쫌 닮았다 아이가? 즈그 엄마를 이모라고 부르면서... 햐! 교묘한 속임수네!” "맞재 맞재? 그 짜슥이 나를 스승이라꼬 쫓아 다니드니만... 안되겠다. 헹님아! 오늘 마 우리 사생 결딴 내뿌리자!” 우리 형제는 결론을 내린다. "사생결단은 아버지가 내리는 것이 순서다! 일단 편지를 감춰둔 다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그러면서 돌아가는 눈치를 두고보자!"
어찌 된 일인지 그 날 이후 왜가리 아줌마 남동생 아저씨 놈은 우리 동네에 단 한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편지에 대한 수상한 눈치를 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예상치 않게 바람을 맞은 충격으로 인해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새 엄마 역시 어느 시점부터는 편지를 기다리지도 않는 눈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새 엄마의 배가 그 전보다 점점 불러오는 것은 우리 집이 점점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음을 확실히 예고하는 것이다. 점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