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에는 서양식 건물인 양관(洋館)이 여러 채 있는데. 그 중에서도 석조전은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상징하고 황제국으로서의 위용을 잘 보여줍니다. 동양의 궁궐은 정전, 편전, 침전의 기능이 각각 구분되어 있던 것에 비해, 석조전은 이 모든 기능을 하나의 건물에 통합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조선의 궁궐 안에 웬 서양식 양관이 여럿 있을까요. 고종의 취향이었다고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나 양관 건물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나라의 재정이 어려운 정황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쉽게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동양인에게는 한없이 불편한 공간 구조이지만, 고종은 구미 열강들과의 외교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한 방편으로 양관을 부지런히 짓고 또 활용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석조전이 준공되는 해에 나라는 망했습니다. 이태왕으로 강등당한 고종은 석조전을 공들여 지어놓고서는 막상 완공 후에는 불편하다며 거주하지 않았지요. 단지 귀빈 접대 및 만찬을 행하는 정도로만 사용하였습니다. 오히려 침실로 사용한 것은 영친왕이었습니다.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 그는 간간이 조선에 올 때마다 이곳에서 지냈습니다.
경운궁(덕수궁)이 황폐해지는 과정에서 석조전도 어쩔 수 없이 그 위상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1933년에 일제는 덕수궁을 공원화하여 일반인에게 개방하면서 ‘이왕가미술관’으로 사용하였어요. 일본의 근대 미술품 전시관으로 탈바꿈하였던 것입니다.
해방 직후에는 미국과 소련 양국 대표가 이곳에서 한국의 신탁통치와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회담으로 미소공동위원회를 열었고, 정전 후에는 계속하여 국립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을 거쳐 현재 대한제국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편, 석조전 앞에는 본래 사각형의 연못을 조성하면서 거북이 조각상을 두었습니다. 하지만 1938년 석조전의 서관을 증축하면서 장수와 부귀를 상징하는 거북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의미도 없는 물개 조각상이 설치된 분수대를 만들었습니다. 조선의 옛 선조들은 물은 위에서 아래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믿었고,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분수는 조선의 정서와는 동떨어진 것이었지요.
대한제국이 영원하길 바라며 거북이 조각상을 설치한 것을 일제가 아무 상관도, 의미도 없는 물개로 대체해 그 위상을 격하시켰던 것입니다. 게다가 풍수적으로 불길하게 생각했던 물의 역류를 연상시키는 분수대 설치는 또한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조선의 운명을 마지막까지 함께 하였던 덕수궁이었기에 일제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궁궐이 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