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턱을 넘는 신앙생활을
2024년 12월 15일 / 왕하 5:1-19
※ 치매교육 과정에 나오는 내용 / 건강했던 어떤 분이 정기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말기 암이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를 들었다. 인생을 살다가 보면 갑자기 상상하지도 못한 어려움이 닥칠 때가 있다. 이럴 때 나타나는 심리적인 변화가 있다.
❶ 먼저 부정한다. ‘나는 암에 걸릴 리가 없다. 나는 건강했는데, 나는 운동도 열심히 했는데 왜 나에게 암이 …. 이것은 의사의 오진이 분명해….’ 이렇게 자기에게 나타난 상황을 부정한다.
❷ 이러한 과정이 지나면 분노하는 단계가 온다. 자신이 고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더 부정할 수 없을 때 부정 대신 분노심, 사나움 그리고 원망의 감정이 함께 나타난다. 여기에는 자신의 모든 계획이나 희망이 물거품이 된 것에 대한 분노도 나타난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라고 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화를 낸다. ‘내가 이렇게 병에 걸린 것은 속을 썩이는 남편 때문이야 …. 자식들 때문이야 …. 시어머님이 조금만 이해해 주고, 사랑을 해 주었더라면 내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 터인데 …. 나에게 돈을 물려주었으면 내가 돈 때문에 이렇게까지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을 텐데 ….’ 이런 분노의 단계는 가족과 의료진조차 감당하기 매우 힘이 든다. 왜냐하면, 분노가 수시로 폭발하기 때문이며 나중에는 하루 종일 분노 속에서 살게 된다.
❸ 분노의 단계가 지나면 타협하는 단계가 온다. 부정과 분노의 단계에서 현실을 외면하던 태도의 기간이 지나면 점차 현실을 바라보고 적응을 하기 시작하면서 타협의 단계로 들어간다. 이 타협의 단계는 보통 외부로 표현되지 않고 그냥 간과할 수도 있다. 타협의 대상은 대개가 하나님이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던 사람도 하나님과 타협한다. ‘하나님! 나를 살려주신다면 열심히 교회에 나갈게요. 앞으로는 죄 안 짓고 착한 일 할께요.’
9절에서 나아만은 마차를 타고 사마리아에서 길갈로 내려와 엘리사의 집 대문 앞까지 온 것을 이 단계라고 할 때, 여기에는 넘어서야 할 문턱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믿고 따르느냐? 아니면 자기 생각대로 하느냐?’라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만일 이 문턱을 넘지 못하면 3단계를 넘어 4단계로 진입하게 된다. 여기에서의 선택은 오직 자신들이 할 뿐이지만 신앙적인 권면은 먼저 믿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의무이다.
❹ 우울과 불안의 단계가 온다. 환자는 증상이 더 뚜렷해져 가고 몸이 현저하게 쇠약해져 회복의 소망마저 상실했을 때, 이제는 점차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결과를 무덤덤하게 받아들여 우울감에 휩쓸린다. 환자는 깊은 침체에 들어가 말도 안 하고, 자기 혼자 씨름하면서 과거의 상실, 이루지 못한 일 그리고 지금까지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슬퍼한다. 불안해하고 절망한다.
❺ 수용의 단계가 온다. 자기의 비참한 현실에 빠져 모든 소망의 줄을 다 놓는다. 마지막 다섯 번째 단계는 보통 임종 환자에게 나타나는 심리적인 단계라고 하는데, 꼭 임종 환자에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급작스럽고도 충격적인 어려움을 당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 이런 단계들을 거치면서 한 사람의 인생은 불은 꺼져간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교인들에게 있어서는 내가 어려운 상황이 있든지, 아니면 내 주변 사람이 어려운 상황에 있든지 간에 4단계와 5단계를 밟지 말자. 3단계에서 부정적인 생각과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세상적인 삶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하나님 말씀을 믿고 병 고침과 더불어 믿음을 가지고 축복된 삶을 살자.
겔 18:23 /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겔 33:11 /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 3개월이 어디입니까? / 시카고에서 태어난 워너 솔맨(Warner Sallman, 1892–1968)은 미국이 자랑하는 화가 중 한 사람이다. 결혼하고 얼마 안 된 젊은 나이에 그는 중병에 걸렸다. 의사가 말해준다. ‘당신은 림프샘 결핵을 앓고 있소. 앞으로 3개월밖에 살지 못할 것입니다.’ 그의 부인은 유명한 가수로 임신 중이었다. 아내에게도 미안하거니와 앞으로 태어날 아이를 생각할 때에도 죄스러웠다. 사랑하는 아내가 그를 위로하였다. ‘3개월밖에 못 산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3개월을 허락해주셨다고 생각하며 감사합시다. 아무도 원망하지 맙시다. 3개월이 얼마입니까? 천금 같은 그 기간을 가장 아름답게 만듭시다. 그러면서 오로지 3개월이나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아내의 말을 듣고 두 사람은 기뻐하며 감사하며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얼마 후에 그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그가 그린 그림에 유명한 것이 있는데 ‘머리되신 그리스도’(Head of Christ)라는 예수님의 초상화를 그렸다. 예수님의 모습이 담긴 그의 그림책은 1940년도에 500만 부 이상이 인쇄되었고 오늘도 많은 가정에 걸려 있다.
그렇다. 3개월이 어디인가? 하루가 어디인가? 모름지기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의 주치의인 존 헨리는 말하기를 ‘감사는 최고의 항암제이다. 감사는 최고의 해독제이다. 감사는 최고의 치료제이다.’라고 했다. 인생은 얼마나 살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가 중요하다. 솔맨처럼 3개월 밖에 못 살 것이라고 체념하지 말고 3개월이란 귀한 시간이 주어졌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남은 생애에 최선을 다하자.
●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는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도 많다.
■ 전화위복(轉禍爲福) /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박사의 이야기이다. 그는 독실한 크리스천인데 독립운동가, 교육가, 기업가로 많은 미담을 남겼다. 그중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그는 1920년대 미국에서 숙주나물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그 돈을 들고 귀국해서 1926년 이 땅의 병든 백성을 위해 유한양행이라는 제약회사를 창업했다. 그가 미국에서 큰돈을 벌게 된 계기가 있다. 대학 졸업 후 값싸고 영양가 높은 숙주나물 사업이 잘될 것으로 기대했는데, 미국인들에게 생소해서 호응을 얻지 못했다. 포기할까 고민하던 중 하루는 뉴욕 한복판에서 출근길에 숙주나물을 배달하던 트럭이 상가 건물을 들이받는 사고가 발생했다. 트럭이 뒤집히고 싣고 있던 숙주나물이 거리에 나뒹굴었다. 그 바람에 뉴욕의 교통이 마비되었고, 라디오와 신문에서 속보를 내보내고 난리가 났다. ‘이젠 망했구나’라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언론에서 숙주나물에 관심을 끌게 되었고, 고기를 많이 먹는 미국인들이 많이 먹어야 한다고 선전해 주었다. 그 후 주문이 쇄도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고 한다. 화가 복이 되는 경우이다. 인생을 살면서 이런 고난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고난을 겪어도 결론이 잘 된다면 얼마든지 고난을 환영하고 기분 좋게 극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고생만 실컷 하고 아무런 소득이 없다면 이런 고난을 생고생 혹은 헛고생이라고 하듯이 약이 오를 것이며 이어서 좌절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에게는 고난이 생고생이 아니라 전화위복의 기회라고 강조하였다. 그러기에 성도는 세상에 살면서 여러 가지 고난을 겪어도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결코 생고생을 시키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고난은 허락하시지만, 분명히 그 가운데 깊은 뜻이 있고, 예비해 두신 축복이 있다. 부디 이러한 사실을 믿고 고난 앞에 주눅이 들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문제의 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닌 각자의 결단에 의한 것이기에 문턱을 넘듯이 아주 쉬운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1. 넘어야 할 문턱이란
‘나아만에게 주어진 반드시 넘어서야 할 문턱’이라고 했는데, ‘문턱’이란 말은 문짝의 밑이 닿는 문지방의 윗부분을 말한다. 문턱은 높아서는 안 되는 것이 사람들이 출입하는 곳이기에 높으면 출입을 하기가 불편하다. 그러기에 요즈음은 문턱을 거의 없앴지만 과거 문턱이 높아도 보통 5-7cm, 대궐의 문턱이나 대감집의 문턱은 20~30cm 정도이다.
문턱은 우리 집과 다른 집, 이 방과 저 방, 밖과 안을 구별하는 경계이기도 하다. 지금은 거의 문턱이 없지만 신앙인에게 문턱은 깊은 뜻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풀무불과 같은 애굽의 노예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열가지 재앙을 내리셨다. 마지막 재앙인 장자를 죽이는 무서운 재앙이 내릴 때, 죽임을 면하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었다(출 12장).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집의 문턱을 넘어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애굽 사람일지라도 문턱을 넘으면 살거니와 이스라엘 사람이라도 아니 모세라 할지라도 문턱을 벗어나 밖으로 나가면 재앙을 당할 것이다. 예수님도 분명히 선을 그어주셨다. 병아리가 암탉의 품에 있어야 하듯이 예수님의 품으로 들어오라는 것이다.
요 15:3-7 /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2. 넘어서야 할 문턱은 높은가?
마태복음 17:14-20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보자.
마 17:14-20 / 예수님과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산 아래에 있는 군중에게 돌아오자 한 사람이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5) ‘선생님, 간질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제 아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 아이는 가끔 불 속에 뛰어들기도 하고 물속에 빠지기도 합니다. 16) 그래서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가보았지만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17) 예수께서 ‘이 완고하고 믿음이 없는 백성들아,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같이 있어야 하냐? 그 아이를 내게로 데려오너라.’ 18) 하시고 귀신을 꾸짖자 귀신이 그 아이에게서 떠나고 그 순간 아이가 나았다. 19)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물었다.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습니까?’ 20)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 믿음이 적기 때문이다. 만일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을 향하여 옮겨지라고 하여도 옮겨질 것이다. 그런 믿음만 있다면 너희가 못 할 일이 없을 것이다.’
여기서 ‘믿음이 적다(작다)’는 말을 여러 번역본 성경에서는 ‘불신앙’으로 번역된 곳이 많다.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는 저들의 불신앙 또는 믿음이 적기 때문이었다.
귀신을 쫓아낸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불신앙을 버리고,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소유하라고 하셨다. 당시 겨자씨는 팔레스타인 농부가 자기 밭에 갖다 심을 수 있는 씨앗 중에서 가장 작았다. 우리의 경우로 바꾼다면 좁쌀이다. 그러나 인간의 눈에 겨우 보일 정도의 작은 겨자씨도 땅에 심게 되면 1~3m 자란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요란한 믿음이 아니다. 예수님은 믿는 이들에게 무조건 큰 것, 많은 것, 상식을 넘는 무리한 믿음을 원하지 않으신다. 불신앙의 마음을 버리고 겸손히 하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을 원하신다.
한 걸음 나아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산을 옮길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난다고 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다. ‘산’이라는 단어이다. 왜 하필이면 예수님께서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을까? 당시 유대인들은 산을 ‘큰 장애물’, ‘곤란’, ‘전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상징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대인 학교에서는 어려운 문제를 해석하는 랍비를 향하여 ‘산을 옮기는 자’라고 불렀다.
3. 나아만이 소녀의 말을 믿고 넘어야 할 첫 번째 문턱
왕하 5:1 / 아람 왕의 군대 총사령관 나아만이 나병에 걸렸다. 그는 훌륭한 장군으로서 왕의 총애를 받아온 사람이었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를 도와주셔서 그가 아람에게 큰 승리를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나병에 걸린 나아만은 아람 나라의 유능한 의사에게 갔을 것이다. 명약이란 명약은 다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아만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좁쌀(겨자씨)같은 희망이 비쳐오기 시작했다.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잡아 온 이스라엘 소녀가 뜻밖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아내를 통해서 들었다. 그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하나님에 대한 소식, 작은 나라 이스라엘에 대한 소식,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에 대한 소식이었다.
왕하 5:3 / 한번은 그 소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우리 주인 어른께서 사마리아에 사는 예언자를 찾아가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그 어른이 문둥병을 고쳐 주실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나아만은 처음에는 아내의 말을 듣고 비웃거나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스라엘 소녀의 말을 무시할 말만은 아니었다. 그럴지라도 이웃 나라인 이스라엘로 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군대장관이기에 또는 이스라엘이 적국이기에 왕에게 가서 허락을 받아야 하는 등 절차가 복잡하였다. 자기네 나라이면 조용히 다녀올 수 있는데, 이스라엘이라면 문제는 달라지고 그 소문이 여기저기 퍼져 나갈 것이다.
나아만으로서 첫 번째 문턱을 넘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차라리 우리와 같은 평민이라면 약간의 망설임 끝에 쉽게 문턱을 넘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아만이 첫 번째 문턱을 넘을 수 있었던 것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기 때문도 있었지만, 아내의 몸종인 이스라엘에서 잡아온 소녀의 성실함과 무엇인가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의 품격이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소녀의 말에 약간의 불협화음은 있었겠지만 사랑하는 아내의 간곡한 권면이 있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가 있었을 것이다.
이때 믿고 불러야 할 찬송이 258장 ‘샘물과 같은 보혈은’이다.
❶ 샘물과 같은 보혈은 주님의 피로다 보혈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보혈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❷ 저 도적 회개하고서 보혈에 씻었네 저 도적 같은 이 몸도 죄 씻기 원하네
죄 씻기 원하네 죄 씻기 원하네 저 도적 같은 이 몸도 죄 씻기 원하네
▶ 이후 나아만이 어떻게 했는지를 열왕기하 5:4-8을 함께 읽고 넘어간다.
4. 엘리사 선지자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넘어야 할 두 번째 문턱
▶ 엘리사의 요청으로 나아만은 이스라엘의 왕을 떠나 마차를 타고 사마리아에서 길갈로 내려와 엘리사의 집 대문 앞에 멈추어 섰다(9절). 나아만은 마차를 타고 오면서 엘리사 선지자가 몸소 나와서 영접하면서 자기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를 드리고 온갖 상처를 어루만져서 나병을 고쳐 줄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리고 나병에서 고침을 받고 신이 나서 자기 집으로 돌아가 사랑하는 가족들과 만나 과거처럼 즐겁게 지낼 것을 기대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엘리사가 본인이 오라고 하고서는 자기를 만나주기는커녕 다른 사람을 내보내 천하고 불쌍한 거지처럼 취급하면서 ‘요단강으로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씻어라! 그러면 문둥병이 나아 살이 깨끗해질 것이다.’라는 말만 전하였다.
요단강은 엘리사가 기거하던 사마리아성에서 약 20mile/ 30-40km 떨어져 있다. 바로 옆에 있는 개울이 아니라 하루 길은 가야 하는 먼 거리이다.
11-12절을 보면 이에 화가 머리까지 치솟은 나아만은 당장 발길을 되돌리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그가 몸소 나와서 나를 영접하면서 자기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를 드리고 나의 온갖 상처를 어루만져서 이 문둥병을 고쳐 줄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런데 요단강에 가서 몸이나 씻으라니! 다메섹에는 이스라엘의 어느 강보다 더 좋은 강들이 있지 않느냐? 레바논 산속에서 흘러나오는 아마나 강물과 헬몬 산속에서 흘러나오는 바르발 강물은 얼마나 맑고 시원하냐! 강물에 들어가 목욕해서 나을 병이라면 내가 거기서도 충분히 목욕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나아만은 화를 내며 자기 나라로 되돌아가려고 마차 머리를 돌렸다.
▶ 나아만이 이런 경우에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성도(聖徒)라고 한다면...
만약 여기에서 화를 내지 않으면 사람도 아니다. 나아만이 화를 내는 이유는 사람을 오라고 불러놓고서는 나와 보지도 않고 사람을 보내 요단 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 하니 얼마나 화가 나겠는가? 그것도 엘리사가 있었던 곳에서 요단 강까지는 약 20마일로 32-33km(구파발역→문산역)로 결코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아무리 바쁘다해도 엘리사 선지자가 나와서 고쳐주면 될 것을 요단 강까지 가라고 하니 나아만이 짜증을 넘어 분노가 폭발한 것은 일리가 있다.
이곳까지 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엘리사 자신이 오라고 해놓고서는 나와보지도 않고 요단 강에 가서 7번 씻으라고 하니 어느 누구라도 엘리사의 말을 믿고 따르겠는가?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입장을 바꾸어놓고 생각해보자. 당신이라면 그렇게 하겠느냐?’라고 묻는다면 엘리사가 선지자가 아닌 개인적으로 어떻게 대답을 했겠는가? 이런 식으로 했는데 힘들게 요단 강까지 갔다고 했을 때 낫는다는 보장이 있겠느냐? 만일 낫지 않는다면 자신은 뭐가 되겠는냐?
그러나 나아만에게 있어 본질은 나병에서 낫느냐? 낫지 않느냐? 하는 것뿐이다. 지금 나병환자 나아만이 기분이나 비위나 이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건 비본질적이다. 기분이 나쁘다고 평생 나병으로 살다 죽겠는가? 기분이 나쁘다고 굴러들어온 복을 발로 차겠는가? 그렇게 할 수도 없거니와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 나아만에게 있어서는 지금이야말로 인생에 중요한 순간이다. 만일 나아만에게 13절 말씀이 없었다면 나병뿐만 아니라 화병으로 죽었을 것이다.
나아만이 반드시 넘어서야 할 두 번째 문턱이라고 말하는 것은 엘리사 선지자 집 앞까지 왔던 불신자였던 나아만이 넘어서야 할 문턱은 결코 높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자기의 생각을 따라 성질을 내며 돌아갈 것이 아니라 부하(종)들의 말대로 자기 생각들을 버리고 하나님의 종 엘리사가 시키는대로 순종하면 무서운 나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지 않겠는가? 가족들과도 기쁨으로 재회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하인들처럼 물을 떠다가 돌항아리에 채우면서 투덜거리지 말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면 된다(요 2:1-10). 순종하기 위해서는 적은 믿음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기를 위해 쉬임없이 기도하며, 하나님 명령이 주어지면 무조건 100% 믿고 따르는 다짐에 다짐이 필요하다.
● 나 자신과 우리 모두에게 묻고 싶은 질문 /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겠습니까? 아니면 하인들처럼 물이 너덧 말 들어가는 돌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가득히 채우시겠습니까?’ / ‘하나님의 종 엘리사가 말한대로 ‘요단강으로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씻어라! 그러면 문둥병이 나아 살이 깨끗해질 것이다.’라는 말을 믿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겠습나까? 당신의 기분대로 엘리사를 욕하며 침을 뱉고 돌아가겠습니까?
이 대목에서 우리가 반문하면서 가져야 할 것이 있다면 ‘지극히 작은 겨자씨만 한 믿음이 나에게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내 생각과 고집, 고정관념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어드리자.
■ 어느 백화점의 엘리베이터가 너무 느려서 손님들의 불평이 자자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술자를 불러 자문을 구했다. 기술자는 엘리베이터 속도를 올리는 데 적지 않은 예산이 소요될 것이고 했다. 이때 백화점에서 일하는 어떤 나이든 여인이 단돈 몇만 원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주겠노라고 나섰다. 여인이 한 일은 엘리베이터 안에 거울을 설치한 것이 전부였다. 그 뒤부터 손님들의 불만은 말끔히 사라졌다고 한다. 손님들은 거울을 보며 자신의 옷매무새에 신경을 기울이느라 엘리베이터의 속도가 느리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했다. 느리다는 불평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속도를 빠르게 한다는 것이 보통의 생각이요, 해결책이지만 엘리베이터의 기술자가 아닌 한 여인이 손님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집중시키면 된다는 새로운 생각을 해낸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 생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원인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거나 믿어도 자기가 생각하는 것에 맞으면 믿고, 틀리면 부인하는 열왕기하 5:12과 같은 나아만의 생각에 묶여 있으니 어찌 하나님께 고침을 받겠는가?
엘리사가 자기에게로 오라고 해놓고는 영접은 커녕 문전박대를 하다니.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나아만의 말대로 영접하면서 기도를 해 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 왜 이렇게 나아만을 괴롭게 만들어야 하는지? 이것도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할 수 있는지?
그러나 성경은 나아만은 자기 부하(종)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엘리사 선지자가 전해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그렇게 괴롭혔던 나병에서 고침을 받게 되었다고 했다. 그것도 100%가 아닌 그 이상으로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중년의 몸이 아닌 어린아이의 살처럼 회복되었다.
5. 걸려 넘어지게 하기 위하여 문턱을 만든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원하시는 것은 ‘빈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샘에 나가니 나를 씻어 주소서’(494장 3절)라는 것뿐이다.
나아만 한 사람이 나병에서 고침을 받았다는 사건으로 본문이 끝나는 것보다 나아만이 성도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는 것으로 결론을 맺게 되니 얼마나 좋을까? 성도는 세상 사람이 즐겨찾는 넓은 길이 아닌 하나님께서 만드신 좁은 문턱을 넘어 좁은 길을 걸어야 한다. 겉사람이 아닌 속사람이 변화되기를 위해 오는 고난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다.
■ 세찬 봄바람은 나무에게 해가 되는가? 유익한가?/ 강영은의 수필‘흔드는 바람’
겨울은 군데군데 잔설로 남아 보채지만 봄은 바람과 함께 의연히 찾아와 겨울을 몰아낸다. 언뜻 부드럽지만 세차게 휘몰아치는 3월의 찬바람을 맞으며 인생에 부는 바람을 생각해 본다. 식물학자의 말에 의하면, 겨울이 지난 후 부는 3월의 강한 바람은 나무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한다. 추운 겨울을 겨우 견뎌낸 나무에 쌀쌀한 바람이 마구 불어 가느다란 나무가지들이 흔들리면 무척 애처러워 보이지만, 강한 바람에 세차게 흔들리는 것은 나무들에게 약이 된다. 초봄의 강한 바람에 가지와 나무가 흔들려야 새잎을 내는 데 필요한 영양이 위로 잘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흔드는 바람은 겨우내 활동하지 않은 나무줄기를 흔든다. 세찬 바람에 흔들리는 운동작용은 뿌리로부터 가지와 새싹까지 영양이 원활하게 잘 올라가도록 도와준다. 그래서 바람을 많이 맞은 나무가 빨리 잘 자란다. 그런데 그뿐이 아니다. 흔드는 바람 때문에 나무는 자기의 뿌리를 더 강하고 튼튼하게 고정시킨다. 흔드는 바람이 괴롭지만 나무는 바람 때문에 성숙하게 되는 것이다.
때로 우리 인생에도 거센 바람이 분다. 그러면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처럼 우리도 흔들린다. 우리를 성숙시키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바람에 때로 가지와 몸통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아픔을 겪는다. 가지 많은 나무가 더 많은 바람을 받고 더 많이 흔들리듯이 잔가지가 많이 뻗어있는 마음은 더 많이 흔들린다. 사소한 바람에도 휘청이는 가지 많은 나무처럼 마음에 뻗어있는 수많은 가지들 - 욕심과 욕망, 시기와 질투, 교만과 이기심 – 같은 것들이 더 많은 바람을 부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처럼 정신없이 흔들리며 안 그런 줄 알았는데, 그런 모습에 안 그럴 줄 알았는데, 그렇게 되는 모습에 안 그래야겠다고 했지만 또 그런 모습에 낙망하고 좌절한다.
그러나 진짜 모습을 드러내 주는 세찬 바람은 우리에게 좋은 약이다. 추한 것들이 주님의 사랑의 매질로 고쳐지기에 …. 흔드는 바람 때문에 우리는 성장한다. 흔드는 바람 때문에 뿌리가 더 단단하게 고정되고, 흔드는 바람 때문에 몸통이 더 단단해지고, 흔드는 바람 때문에 생명의 양분을 더 뽑아 올리게 되어 결국 가지 끝마다 환한 꽃 피워낸다.
삶을 흔드는 바람을 고마워하자. 바람이 멈추기를 바라지 마라. 바람을 많이 받는다는 것은 흔드는 바람에 날려 보낼 것이 많기에, 흔드는 바람에 빨리 자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만큼 하늘의 사랑 많이 받는다는 표가 되기에, 그만큼 하늘의 관심 많이 받는다는 증거가 되기에, 그리고 그만큼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이 증명이 되기에 … 3월의 쌀쌀하고 세찬 바람이 분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보며 문득 인생에 부는 바람이 고마워진다.
6. 문턱은 걸림돌이 아닌 거룩한 삶을 살게하려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불평과 불만은 나 중심적인 판단에서 비롯된다(민 21:1-20)/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항상 잊어버리고, 어려운 상황에 부딪힐 때마다 습관적인 불평을 일삼는 등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쉽게 망각하였다. 가나안 땅을 향하는 길에 에돔 왕이 자기 영토로 이스라엘이 지나가는 것을 용납지 아니함으로 지름길을 제쳐 놓고(민 20:21) 에돔 땅을 우회하게 되어 백성의 마음이 상하게 되었다(4절). 그들에게 있어서 광야 길은 육체적으로 고역(苦役)스럽고 사람의 마음을 지치게 만드는 곳이었다. 인내심이 부족한 저들의 마음에 극한 분노가 일어나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다가 하나님을 떠나고 모세를 죽이려고 하였다(민 21:5).
한계를 넘어 하나님과 모세에게 불평을 늘어놓는 저들을 향해 지금까지 인내하셨던 하나님께서는 불뱀들을 보내어 불평하는 저들을 물어 죽게 하셨다. 이러한 불뱀의 습격으로 불에 타는듯한 무서운 고통을 당하자 저들은 자신들의 범죄를 인정하였고, 그렇게도 괴롭혔고 나중에는 돌로 치려고 했던 모세에게 여호와께 기도해달라고 간청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불쌍한 저들을 보시고 모세에게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8절)라며 처방책을 내리셨다.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고 그것을 쳐다본 자들은 모두 살았다.
나의 입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해 보자. 광야의 길은 아스팔트 길이 아니며, 몇십 년 전 서울 동네에서 볼 수 있는 흙길과도 아니다. 또한, 지금의 둘레길도 아니다. 성지순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광야의 길은 우리가 흔히 ‘인내’라고 말하는 수준의 정도가 아니라 강렬한 태양과 바람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기도였다. 그런데 흥미 있는 일은 성경을 필사하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생활이었다. 심지어 유대광야는 메마른 지역이기 때문에 양피지에 히브리어 성경을 기록한 사해 사본이 수천 년의 세월 속에서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었다. 만약 양피지에 기록한 필사본이 습기가 많은 온대지역이었다면 부패하여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광야는 참으로 힘든 길이다.
▶ 여기까지 인도하신 그리고 지금도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신데, 자기네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고난이 닥쳐올 때 습관적으로 불평과 불만, 원망의 말을 서슴치 않았던 저들. 젖과 꿀이 흐르는 최종 목적지인 가나안땅을 목전에 두고 정탐꾼을 보냈을 때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의 정탐꾼은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하며 백성들을 선동하여 모세와 아론을 돌로 쳐 죽이려 하였다(민 14:2-4).
광야와 같은 세상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라는 염려와 걱정으로 인하여 찾아오는 불편한 마음과 평안을 깨뜨린 상황에서는 만족함이란 결코 없다. 이로 인하여 찾아오는 감정은 분노, 짜증, 우울, 고독이다. 결국 감사가 없는 마음과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인내심 결여는 나에게 영적으로 큰 손해를 입히게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의 원인을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모든 상황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할 때에는 죄 사함과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임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느 정도 인내할 수 있는 사람들로,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성도다운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성도가 되기 위해 좁은 문의 문턱을 넘어 좁은 길을 걸어야 한다.
이에 대해 광야의 길을 걸어야 할 이유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신 8:2-5 /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난 40년 동안 저 광야에서 여러분을 인도해 주신 그 여정을 모두 돌아보십시오. 그 목적은 여러분의 고집을 꺾어 겸손하게 낮추어 놓는 한편, 여러분이 과연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것인지 아닌지 여러분의 마음을 시험하여 알아보시려는 데에 있었습니다. 3) 주께서 여러분의 고집을 꺾으실 때 여러분을 굶주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여러분도 몰랐고 여러분의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주께서 여러분에게 먹여 주셨습니다. 그 목적은 사람이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주께서 여러분에게 가르치시려는 데에 있었습니다. 4) 지난 40년 동안 여러분의 옷이 해진 일이 없었고 여러분의 발도 부르튼 일이 없었습니다. 5) 여러분이 이 사실에서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모가 자식을 옳게 가르치듯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가르치셨다는 사실입니다.
▶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하였다.
고전 10:9-13 / 또 주께서 얼마나 참아 주시는가를 시험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 자들은 다 뱀에 물려 죽었습니다. 10) 또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거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대하시는 일에 불만을 늘어놓아서도 안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낸 천사들에게 멸망하였습니다. 11) 그들에게 일어났던 이러한 일들은 모든 사람에게 경고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기록됨으로써 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12) 그러므로 조심하십시오. 누가 언제 같은 죄를 범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13) 여러분에게 파고드는 악한 욕망은 새로운 것도 별다른 것도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많은 사람들도 여러분보다 앞서 같은 문제에 부딪쳐 싸워 왔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유혹이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물리칠 수 없을 만큼 강한 유혹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약속해 주셨고 또 그분은 말씀하신 대로 실행하십니다. 유혹을 피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실 하나님을 믿고 여러분은 인내로써 그 유혹을 극복해야 합니다(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이제부터는 나아만처럼 넘어야 할 문턱인 불평과 불만을 과감히 넘자.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자. 나의 잘못된 생각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음을 회개하며, 돌이킬 때 성령님이 내 마음 가운데 임하셔서 하늘 평안과 새로운 힘을 주실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놋뱀을 바라본 것처럼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우리 앞에 있는 믿음의 선한 싸움에 승리하자.
결론 /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나아만(왕하 5:13-17)
13절 / 나아만의 부하들이 다가서며 말하였다. ‘만일 저 예언자가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을 하라고 요구하였더라도 장군님은 틀림없이 그대로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겨우 가서 몸을 씻으면 깨끗해질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일단은 그대로 해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나아만의 부하(종)들은 ‘넘어서야 할 문턱은 걸림돌이 아니니 넘으시라’라고 조언이 아닌 간청을 하였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분명한 사실은 엘리사 선지자나 집에 있는 소녀도 나아만이 문턱에 걸려 넘어지지 않기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14절 / 그래서 돈 많고 권세 높은 나아만은 마음을 바꾸어 겸손히 요단강으로 내려가 엘리사가 명령한 대로 그 물에 일곱 번 몸을 씻었다(잠그니). 그러자 그가 완전히 치료되어 그의 피부가 어린 아이(소년)의 살결처럼 깨끗해졌다.
몸을 잠그니 - 여기서 ‘잠그다’라는 말은 몸을 물에 완전히 적시거나(왕하 8:15), 물 속에 몸을 전부 집어넣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10절의 ‘씻다’라는 단어와는 뜻이 본질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나아만은 선지자의 명령(10절)보다 더 철저히 몸을 씻었음을 알 수 있다. 나아만의 병이 치유가 되고, 살이 어린 아이와 같이 부드럽게 된 것은 그의 철저한 순종적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였다. 병만 고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나이든 사람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과 같이 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놀라운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편 본절에 나타난 ‘일곱 번’은 나아만이 엘리사의 요구에 얼마나 철저히 순종했는가를 나타냄과 동시에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침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15절 / 그가 수행원들을 모두 거느리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로 돌아와 그 앞에 서서 말하였다. ‘이스라엘 외에는 온 세상에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내가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러니 감사해서 드리는 나(당신의 종)의 선물을 받아 주십시오!’
‘이스라엘 외에는 온 세상에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내가 이제야 알겠습니다.’라는 말은 읽는 우리로서도 매우 감격스러운데, 이 말을 듣는 하나님의 종 엘리사 선지자는 흐르는 눈물을 어찌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에 나아만도 하나님의 은혜와 무지몽매한 자기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돌보아준 엘리사 선지자에 대한 고마움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하며 함께 울었을 것이다.
나아만은 자신을 가리켜 ‘당신의 종(servant), 예언자님의 종’이라고까지 표현하며, 이방의 관례대로 은혜를 베푼 신과 선지자에게 최선의 예우를 다하여 예물을 드렸다. 그리고 받기를 거부하는 엘리사 선지자에게 사정을 하며 받아달라고 하였다.
예물인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 의복 열 벌 - 나아만이 이스라엘을 향해 떠날 때 가지고 간 선물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한 달란트는 3,000세겔에 해당되며 무게로는 약 34.27kg, 은 십 달란트는 약 342kg에 해당된다. 한편 의복 열 벌은 매우 높은 가격의 선물로서 상대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한 방법이었던 근동 지방의 풍습으로 지금도 지속적으로 내려오고 있다. 이처럼 나아만이 가지고 간 선물은 엄청난 것이었다.
16절 / 그러나 엘리사는 ‘내가 섬기는 여호와께서 확실히 살아 계심을 걸고 맹세하지만 나는 아무 것도 받지 않겠습니다.’ 하고 거절하였다. 나아만은 그의 마음을 돌이켜 놓으려고 여러 번 애를 썼으나 엘리사는 여전히 어떤 선물도 받지 않았다.
당시 이스라엘 전역에 기근이 있었던 사실을 두고 볼 때에(왕하 4:38; 7:1-20) 그리고 엘리사 자신도 매우 어려운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나아만의 예물을 거절한 것은 큰 의의(意義)가 있었다. 즉, 엘리사는 어떻게 해서든지 나아만의 마음에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참으로 섬김을 받으실 분임을 확신시켜 주려고 애썼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엘리사는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이방의 제사장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함과 동시에 모든 사람을 은혜와 자비로 치유해 주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나아만과 엘리사 선지자의 너무 감격스러운 장면에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라 이만 결론을 맺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