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동안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바쁘게 정원 일을 하다 돌아와서 그동안 밀린 숙제하듯이 게시판을 둘러보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화요일부터 시작하는 남편의 31번째 개인전 으로 하릴없이 마음이 바빠집니다, 그동안 써 두었던 글들 속에서 한 편 골라 올려봅니다.
행복하다 연습하기
언제쯤이면 이 더위가 물러날까,
지난 해 보다 비 오는 날이 많아서 가끔은 더위를 잊은 듯했지만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세계 곳곳에서는 이상기후로 인해 몸살을 앓던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여태껏 겪어 보지 못했던 폭염과 한반도 중심을 세로로 가르며 지나갈 것이라는 강력한 태풍 소식에 행안부와 지자체에서 보내는 ‘안전 안내 문자’가 수도 없이 날아들던 여름도 이제 끝자락을 보이는 듯하다. 새벽 잠깐의 요란한 빗소리에 설핏 들었던 잠이 달아났다. 열어둔 창으로 이제 선선한 바람 한 자락도 불어 든다. 계절은 어김없이 제 자리로 돌아오고 언젠가부터 잦아드는 매미 소리를 대신하여 창틈으로 귀뚜리 소리도 들려온 듯하다. 모처럼 잠이 깬 새벽, 채 어둠이 가시지 않은 문밖을 나섰다. 참으로 오랜만의 새벽 산책이었다. 도시 아파트 단지 속이라 달리 갈 곳이 마땅치 않지만 마침 집 가까이 나지막한 야산이 있어 그쪽으로 천천히 발길을 잡았다. 야트막한 산길이었지만 지난 밤 잠깐의 비에도 길이 미끄러운 곳이 있어 다시 발길을 돌려 인근 아파트 사잇길로 접어들었다. 근처에 중고등학교도 있어 새벽같이 등교하는 학생들의 모습도 보인다. 도로에는 벌써 바쁘게 자동차들이 달려 나가고 자신의 설 자리를 찾아 새벽부터 열심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불현듯 낯선 지금의 나를 발견한다.
30여년도 전이었나, 새벽 첫차를 타고 출근하기 위해 여명이 트기도 전에 집을 나서던 그 발걸음과 한가득 들이마시던 새벽공기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냄새였다. 내가 대학을 선택하고 교사의 길에 발을 들이던 시절은 딱히 사명감을 가지고 찾아가던 시절이 아니라 집안 형편과 더불어 사회적인 여건에 따라 대부분 선택 되어지던 길이었다. 약간의 소명 의식을 배우고 교육철학을 공부하며 초임 교사로서의 낯설음 속에서 주어진 역할대로 하루하루 충실하던 날들을 통해 나름의 교육철학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새벽공기를 마시며 세 시간이 넘게 출퇴근 시간으로 보내면서도 할 수 있음에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나 자신 스스로 교사가 천직이라는 생각은 해 본 일이 없었던 것 같았지만 주위에서는 그래도 성실하다라는 말을 들어가며 교직에 임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의 학교라는 곳은 성적 향상을 목적으로 어떤 훈육도 받아들이고 이해를 요구하기도 하고 생활지도를 이유로 학교의 목소리를 높이던 시절이었다, 선생님은 갑이고 학생과 학부모는 을이던 시절이었다. 관리자는 갑이고 평교사는 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직 내에서 주어진 역할에 충실해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지금의 사회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던 일들도 가끔은 일어나고 그저 내 탓이려니 감내하고 지내던 시절도 있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차츰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사회적 환경과 경제적 여건이 좋아지고 정보화 시대가 되면서 모든 것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갑과 을의 관계가 무너지고 예의와 존중이 깨어지는 모습을 마주하게 되었다. 세상의 속도는 빨라지고 학교의 역할도 달라져야 했다. 그러나 학교라는 담벼락 안의 변화 속도는 담장 밖 세상의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점점 복잡해지고 거대해지는 현상 속에서 각자의 발걸음이 달라 서로 불협화음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사회 곳곳에서 기어이 불행한 소식들이 연일 들려온다. 학부모의 폭언과 협박에 견디질 못하고 세상을 등지는 교사들의 소식에 남의 일 같지 않게 가슴이 아려온다. 예의와 존중이 무엇인지 배우고 실천해야 할 어린 학생들에게 인격적으로 수모를 겪고난 후 그 어려운 임용고시를 통해 꿈을 이루고자 선택했던 교직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젊은 교사들의 그 무너지는 심정이 어떠할까.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단지 복잡다단하고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일상속에서 그 첫 실마리를 잡아채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조직 단위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던 활동들이 이제는 개인의 영역이 되었다. 교실이 붕괴되고 분해되며 각자의 목표와 수행도 달라지고 그에 따라 학교의 역할도 달라져야 했다. 이제 학교는 지식의 전달자가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고 지켜내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무한 경쟁의 시대 속에서 같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끝없는 우주로 확장되어가는 세계관 속에서 인간만이 지켜낼 수 있는 최고의 존엄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가르쳐야 한다. 복잡다단하게 얽히고설킨 이 사회의 혼돈에서는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길 것이 아니라 나부터 솔선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새싹이 돋아나 튼실한 나무가 될 수 있도록 토양부터 건강해져야 하는 것이다. 지금 세계적으로 위상이 높아져 가고 있는 k-pop 산업의 중심에 있는 어느 대표가 한 말이 문득 떠오른다. 최고의 선두그룹이며 최상의 전성기에 있는 그들이 행복하지 않다면 더 이상 이 일을 진행할 가치는 없다고 했다. 당장이라도 해체할 수도 있으며 모두가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어야 계속하겠다고 했다. 결국 그들은 행복의 가치를 다시 찾아내었고 그들만의 음악 속에서 각자의 행복을 찾아내고 있었다. 거기에 따르는 일정과 고된 연습들은 그저 행복하기 위한 통과의례가 될 뿐이었다. 나는 듣고 보는 청자에 속할 뿐이지만 각종 매체에서 공개되는 그들의 모든 일상에서 참으로 모두가 행복해하는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소소하고 작은 것에서부터 행복을 찾자고 소확행이 한때는 키워드가 된 적이 있었다. 참으로 반가운 외침이었는데 과연 실천이 잘 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나부터 작은 것에서 오는 행복감을 느끼는 것에 너무 둔해진 것을 깨닫는다. 그냥 일상이려니 하고 지나쳐 버리기 일쑤이다. 의도적으로라도 느끼도록 노력해 봐야겠다. 습관처럼 익숙해지도록 잠든 뇌를 깨울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잊은 것 같은 몸동작도 때가 되면 저절로 할 수 있는 것처럼 행복하다는 마음도 익숙해질 때까지.
첫댓글 명숙선생님 많이 바쁘시군요. 저의 컴퓨터에는 hwpx는 생성이 되지 않습니다. 화면에 바로 글을 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미안합니다.
행복 찾는 방법을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행복은 객관적이기보다 주관적인 것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학교가 무너진다는 것은 어쩌면 미래가 무너진다는 안타까운 일이지요. 반드시 학교는 자리를 찾아서 바로 서기를 바래보며 각자의 행복도 잘 찾아서 모두가 행복하기를 염원해 봅니다. 생각하는 글 잘 읽었습니다.